50년 한우물… 우리나라 인체조각의 최고봉 평가 중졸 학력, 성실·끈기로 극복… 국전 초대작가 올라 고향 부안에 국내 최초 금구원조각미술공원 세워
 
    독학으로 석조(石彫)를 익히고 오직 실력으로 학벌과 차별의 장벽을 뛰어 넘은 조각가 김오성씨(68). 그의 천부적 재질을 눈여겨 본 중학교 교감 선생의 권유와 함께 건네 준 몇 권의 미술 책을 스스로 독파하면서 그의 조각 인생은 시작됐다. 그저 단순한 돌덩이들이 그의 손을 거치면 마치 살아 숨쉬는 듯한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난다. 그렇게 50여년을 돌에 생명력을 불어 넣으면서 우리나라 인체 조각의 최고 경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의 가슴에는 아직도 다 분출하지 못한 화산이 용솟음치고 있다. 중졸 학력의 한계를 성실과 실력으로 극복하고 당당히 국전 초대작가에 올랐지만 미술계의 아웃사이더로서 질곡어린 삶에 대한 한(恨)이 아직도 응어리져 있다. 예술계의 냉대와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필생의 예술혼을 불태울 때를 기다리는 김오성 조각가를 그가 고향 부안에 국내 최초로 세운 금구원 야외조각미술관에서 만났다.
 
    -대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대규모 조각공원을 시골 동네에서 접하니 느낌이 새롭습니다.
"이 시골까지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사람마다 조각공원을 보고 많이 놀랍니다. 시골에 이런 곳이 있다니 하면서 감탄하죠. 또 천문대도 같이 있고 해서 학생들도 많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금구원이 우리나라 조각공원의 효시라고 들었는데 조각공원은 언제부터 조성했는가요.
"선친께서 농민교육운동을 하셨는데 이곳을 원래 농민학교로 조성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건강이 안 좋아지시고 돈도 없고 그래서 농장으로 관리하셨는데 제가 군 입대 전에 만든 작품 4점으로 비롯해서 틈틈이 제작한 작품을 하나 둘씩 가져다 놓다보니 어느새 조각공원이 되었습니다. 목포 유달산 조각공원이 국내 1호라고 요란을 떨었는데 1986년 여성동아 12월호에 금구원 조각공원이 국내 최초 조각공원이라고 6페이지에 걸쳐서 특집기사가 실렸었죠. 1987년과 1992년 대한뉴스에도 금구원 조각공원이 보도되었고요."
-지금은 금구원 야외조각미술관으로 등록돼 있던데 언제 사립 미술관으로 등록했고 작품은 얼마나 됩니까.
"1980년대 말께 문공부 도서관박물관과 관계자가 미술관 등록을 자꾸 권유했었는데 그땐 그냥 흘려 들었지요. 그러나 2003년에 미술관(제277호)으로 정식 등록됐습니다. 현재 작품은 야외공원 90여점과 실내 전시관 40여점 등 모두 130여점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달빛의 숲' (여체 조각상)은 좌대를 뺀 작품 길이만 6m50cm로 아마 국내 조각품 가운데 가장 큰 작품일 것입니다."
-특별히 아끼시는 작품이 있다면….
"모든 작품이 다 똑같습니다. 자식들이 똑같듯이…. 좀 제게 특별하다면 대한민국미술대전 첫 특선작인 '변산반도'가 있고, 그리고 1986년 첫 개인전을 가졌을 때 국내외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분수령' 등을 꼽을 수 있죠."
-독학으로 조각을 공부하셨다고 들었는데 천부적으로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나셨네요.
"글쎄요. 어려서 외갓집에 놀려갔다가 하얀 회벽에 그림낙서를 했데요. 그런데 외할머니께서 보시고 그림을 너무 잘 그렸다고 제가 컸을 때까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땐 전북도와 교육청 등 각종 사생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었고…. 그러다 변산중학교 2학년 때 방학숙제로 얼굴 흙조형물을 제출했는데 당시 김형수 교감선생님이 그걸 보시고는 제게 조각가가 되라고 권유했죠. 얼마 뒤 마령중 교장으로 승진하셨는데 미술관련 책들을 보내주셔서 이를 탐독하면서 조소와 목조각 화강석 조각 등에 몰두하게 됐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제가 국전 특선 때도 장문의 격려편지를 보내주셨는데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사님이시죠."
-서울로 올라가서 본격적인 조각 작품활동을 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가게 됐습니까.
"농민교육운동을 하시던 선친께서 1963년에 금탑산업훈장을 받으신데 이어 다음해 3·1문화상 근로장을 받았어요. 그 때 수상자들 기념촬영 사진속에 예술상을 받은 김경승 조각가도 함께 있었죠. 그래서 김 선생님 주소로 미술학도의 꿈을 써서 보냈더니 올라오라고 승낙했습니다.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가 공부도하고 작업도 했죠."
 
    -국전 입선과 특선은 언제 했습니까.
"군 제대후에 다시 김 선생님 작업실에서 일하면서 틈나는 대로 내 작품 작업을 했었습니다. 그러다 1972년 국전에 처음 출품했는데 입선했죠. 그 다음해에도 입선했고 1974년 23회 국전에 남자 좌상인 변산반도를 출품했는데 그 때 특선을 했습니다. 당시에 대학도 안 나온 사람이 특선을 했다하니까 수상자 선정을 놓고 논란이 많았다고 나중에서야 얘기를 들었습니다."
-국전 특선 입상 때도 논란이 있었지만 국전 초대작가로 선정됐을 때는 미술계에 논란이 적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
"1983년 늦가을이었죠. 누가 초인종을 눌러 문을 열어 주었더니 훤칠한 키에 신사 한분이 들어오더니 '김 선생, 축하합니다. 이번에 초대작가가 되었습니다' 하는거예요. 처음엔 믿기지 않았는데 그 분이 이화여대 미술대 백문기 교수로 초대작가 심사위원이라는 사실을 알고서야 실감이 났죠. 그 순간 온 세상이 내 것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대학은 커녕 고등학교도 못가 보고, 더구나 서울대와 홍익대 양대 학맥이 미술계를 쥐락펴락하던 시절에 제가 초대작가가 됐으니…. 그러니 대한민국 미술계가 발칵 뒤집혔죠. 소위 식자층에선 말도 많았고요. 무학자가 초대작가가 됐다고…."
-초대작가가 되는데 백 교수님 역할이 컸었군요.
"백 교수님은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입니다. 나중에서야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가 귀띔을 해줘서 알게 됐는데 심사위원들이 작품을 평가하면서 추천을 하는데 저를 추천하는 위원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자 백 교수님이 벌떡 일어나 '이 사람이 빠지면 미술계가 편파적이다고 욕먹는다'면서 5~6분 동안 웅변조로 강력 추천하자 나머지 5명의 위원이 동의해줬다고 들었습니다."
-초대작가가 된 뒤 가진 첫 개인전이 큰 성공을 거뒀다고 들었는데….
"사실 첫 개인전은 미 8군에 있을 때 목조 개인전을 가진 것이 처음이고요, 1986년 가을 서울 인사동에 있는 백악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미술계 뿐만 아니라 경제계 정치계 인사와 고향 분들이 많이 참석해서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그 때 한국은행 총재님이 오셨다가 제 작품 '분수령'을 구입해서 한은 본점에 설치하자 미술계가 또 발칵 뒤집혔죠. 그러면서 신문과 방송 잡지 등 매스컴에서 저와 제 작품에 대한 보도가 잇따랐습니다. 요즘말로 떴죠. 전시작품의 80% 정도가 팔렸는데 당시에 꽤 많은 수입도 들어왔습니다."
-분수령이 매스컴을 타면서 작품 주문이 쇄도했다면서요.
"분수령과 똑같이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쏟아져 한국은행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을 6점 제작했습니다. 일본 석재공업협회보에도 소개되자 일본 기업인이 주문해서 일본으로도 한 점이 건너 갔습니다."
-조각공원을 둘러보니까 주로 여체를 많이 조각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처음에는 변산반도를 비롯해서 남자상만 조각했더니 왜 남자만 조각하느냐고 묻데요. 아무래도 여체가 미적 요소가 많아 조각으로 다양한 표현하는데 용이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광화문에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상 등 많은 동상 제작에도 참여하셨는데 이승만 대통령 석상 제작 때는 해프닝도 있었다지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상은 주로 얼굴작업을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상은 제가 거의 모든 작업을 했는데 초대작가에 선정된 것을 시기해서 다른 사람이 코 부문을 손댔다가 엉뚱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어요. 프란체스카 여사 등 가족들이 와 보기로 했는데 큰 일이 났죠. 제가 다시 서너시간 만에 제 모습으로 만들어놓자마자 유족들이 도착해서 보고 '너무 똑같다'면서 아주 흡족해했습니다."
-철원 비무장 지대와 일본 지바현에 조각공원 건립을 추진한 적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분수령 작품을 구입해 간 일본 기업인이 자신의 고향에 조각공원을 세우자고 제안하면서 착수금으로 상당액을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흔쾌히 응했고 그 때 받은 돈으로 지금 살고 있는 집과 작업장을 지었죠. 그런데 일본의 버블 경제가 꺼지면서 경기침체로 이어져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철원 조각공원 조성은 재력가이자 옹기민속박물관을 세운 정모 원장이 제안해서 집 한 채값 받기로하고 응했는데 정 원장이 일본 문화세미나에 참석했다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습니다."
-올 가을에 여섯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으시죠.
"10월에 하려고 준비중입니다. 특별히 20년에 걸쳐서 완성한 '달과 여인'작품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지금은 석조분야에 입지전적 인물로 알려졌지만 중학교만 나와서 학벌과 학맥으로 얽혀진 미술계에서 이름을 올리기가 쉽지 않았을텐데요.
"오직 성실과 끈기, 그리고 실력으로 버텨왔죠. 아틀리에서 거의 무보수로 일하다보니 생활비는 고사하고 집 식구 병원비조차도 댈 수 없어서 돌공장에서 막노동도 해보고…. 돌공장에서도 자기들 일감 떨어진다고 따돌리고…. 하지만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한 길만 걸어오니 주위에서 실력을 인정해주더군요. 운보 김기창 선생님이나 하반영 선생님도 초등학교도 제대로 안 나오셨잖아요. 한 달 전쯤 군산에 계신 하 선생님을 찾아뵈었더니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시더군요."
-집 살 돈으로 망원경을 사고 사설 천문대까지 세웠는데 좀 엉뚱하지 않았나요.
"어렸을 때부터 별과 천문에 대해 막연한 동경이 있었어요. 그래서 작업중에 짬을 내서 천문동호회 활동도 했죠. 집 장만 하려고 상당한 돈을 모았는데 안식구를 설득해서 미국 아스트로 피식스(Astro-Physics)사의 178㎜ 스타파이어 굴절망원경과 삼겹렌즈 206 EDF 스타파이어 굴절망원경을 구입했습니다. 당시엔 최고 성능 망원경으로 서울에서 집 한채 살만한 돈이 들었죠. 그래서 이 곳에 국내 개인 천문대로는 처음으로 금구원천문대를 세웠죠."
-학생들에게 천문대를 무료 개방한 공로로 과학상도 받으셨다던데….
"1995년에 김용신 과학상을 받았는데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보급했던 안철수 원장과 함께 장려상을 수상했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현재 국내 최대작인 7.5m짜리 작품을 작업하고 있습니다만 경제적 여건이 안돼 하고 싶은데로 다 할 수 없어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지금은 조각도구도 발달하고 전기로 쉽게 작업하니까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동안에 못다한 것들을 한 번에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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