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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한국영화 전문가… 외화 프로그래밍 주도

임 안 자  영화평론가는

 

1942년 진안 용담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부와 명예를 두루 갖춘 집안이었으나 할아버지 대부터 몰락하기 시작해 가난 속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형제 자매라고 해야 스무 살 위인 오빠와 둘 뿐이었던 그는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고등학교조차 제대로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형편 때문에 꿈을 접었다. 언어에 관심이 많아 중고등 학교 때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고 그 덕분에 영어실력이 빼어났다. 문학 대신 간호사가 되는 길을 택해 들어간 전주 예수간호학교의 선교사들이 영어 잘하는 그를 눈여겨보고 미국유학을 추진했지만, 계획이 틀어져 결국 선배의 도움으로 유학을 떠났다.

 

시카고에 있는 병원의 교환간호사였는데 그곳에서 3년 동안 일을 했다. 그의 목표는 한 가지. 돈을 벌어 한국에 돌아가 문학을 공부하는 것이었지만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스위스 바젤에 가있던 친구가 그를 불러 1969년 스위스로 갔다. 바젤의 시립병원에서 일하면서도 학업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병원에 취직한지 7개월 만에 바젤에서 그리 멀지 않은 프리부룩 대학 신문학과에 들어갔다. 나이 서른한 살에 대학생이 된 그는 문학 대신 영화를 택했다. 학기동안 공부하고 방학이 되면 다시 바젤의 병원으로 돌아가 일해 학비를 벌었다. 1학년 1학기 방학 때 병원에 실습 나온 스위스인 의과대학생을 만났다.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75년에 결혼했다. 반공주의 나라에서 태어난 그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정치적 이념문제였다. 국가와 개인,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고민하고 갈등했지만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불러낸 것은 1989년 로카르노영화제다. '달마가 동쪽으로 떠난 까닭은'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한 배용균 감독 인터뷰를 계기로 그는 유럽권의 한국영화전문가가 됐다.

 

90년대 초반부터 '한국영화의 새로운 물결' 회고전을 비롯해 유럽영화제의 한국영화 프로그래밍 대부분에 참여했다. '칸 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8년동안 부산영화제 고문으로 활동했고 2002년 '아시아독립영화포럼' 심사위원으로 전주영화제와 첫 인연을 가진 이후, 2004년에는 전주영화제 부집행위원장에 선임돼 2008년까지 해외영화 프로그래밍을 주도했다.

 

2008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전주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그가 열정을 모두 쏟아 준비했던 '중앙아시아 특별전'은 연일 매진 사례를 기록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지금은 영화제나 영화와 관련된 공식적인 업무를 다 정리하고 가끔씩 글쓰기하면서 여행을 즐기고 있지만, 아직도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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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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