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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乙)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을'이 원하는 것은 차별없이 당당하게 권리를 인정받는 것

▲ 곽현문 전북대 일어일문학과 재학
요즘 방송가와 극장가에서는 그야말로 ‘을’이 대세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억눌려 있던 ‘을’들의 이야기가 스크린을 타고 담담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중 한 코미디 프로그램의 코너 ‘갑과 을’은 이른바 갑의 횡포에 묵묵히 당하기만 하던 을이 상황을 역전시켜 복수를 한다는 설정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시청자들은 이를 통해 ‘갑질’에 유린당하는 을의 현실에 함께 분노하고, 이와 동시에 복수를 하는 을의 모습에서 통쾌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 같은 을의 반란은 방송이기에 가능 한 것일 뿐 현실 사회에서는 꿈과 같은 이야기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미생’에서는 이러한 을의 모습이 보다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갑들의 전쟁터에 뛰어들어 고군분투 하는 인턴과 계약직 사원, 상사의 눈치를 보며 고된 나날을 보내는 직장인, 남성 중심의 사내 문화에서 차별당하는 여성들의 고뇌 등 실제 우리들이 사회생활을 하며 겪는 일들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들은 소속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모를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지난 13일 개봉한 영화 ‘카트’에서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을의 비애가 좀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2007년 이랜드 홈에버 사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카트’는 부당해고를 당한 대형마트 비정규직 계산원들이 회사의 일방적인 해고와 탄압에 맞서 벌이는 512일간의 장기 점거 농성을 그림으로서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인 비정규직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영화 속 마트 여성 계산원들은 ‘고객은 왕, 우리는 을’이라는 교육을 받으며 잘못한 것이 없더라도 고객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는 모욕을 당한다. 이들은 회사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철저히 이용당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며, 이를 위해 기계의 부품처럼 언제나 바뀔 수 있는 운명에 처해있다. 그들의 정당한 권리 요구에도 회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돌아오는 것은 오히려 폭압적인 탄압뿐이다.

 

그렇다면 실제 우리 사회 어떠할까. 아마도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봉제 노동자로 일하던 청년 전태일은 나이 어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부당한 처우 개선을 위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불길 속에서 산화한다.

 

그리고 44년이 지난 2014년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계보다 못한 투명인간의 취급을 당하고 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고, 주민들의 비인격적인 대우를 이기지 못한 아파트 경비원이 급기야 분신하여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불평등하고 부당한 상황에서도 더 큰 피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하며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해야 할 정부 당국에서는 비정규직 고용기간을 연장하여 도리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어쩌면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을로 살아가기란 지옥에서 사는 것 보다 고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땅의 을들이 원하는 것은 갑이 되려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나 차별 없이 당당하게 권리를 인정받는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고 함께 공감해 주는 것이다. 갑과 을의 관계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 이것이야 말로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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