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하구에 자리 잡고 있는 항구도시가 군산이다. 〈여지도서〉의 ‘풍속’조에 “바닷가 모퉁이 후미진 고을이지만, 인심은 착하고 꾸밈이 없다.”라고 실린 군산시 성산면의 금강을 굽어보고 있는 산이 오성산(五城山)이다.
오성산은 성산면 성덕리와 나포면 서포리 경계에 있는 높이 266미터의 산이다. 조선조 때 봉수대가 있었던 곳으로 동쪽으로는 불지산 봉수와 서쪽으로 옥구 화산 봉수에 응하였다. 이 오성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치러 왔다가 안개가 자욱하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를 못 하였다. 이때 안개 속에서 다섯 노인이 나타나자 길을 몰라 당황했던 소정방이 그들에게 길을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너희들이 우리나라를 징벌하러 왔는데 어찌 우리들이 길을 가르쳐 주겠느냐” 하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화가 난 소정방은 그 자리에서 노인들의 목을 쳐서 죽였다. 그뒤 백제를 함락한 소정방은 그 노인들을 성인이라고 칭송한 뒤 제사를 지내주었고 그때부터 이 산이 오성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오성산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지금까지도 다섯 노인의 무덤인 오성묘(五聖墓)가 남아 있다’고 실려 있다.
오성산 자락 금강변에 서시포(西施浦)에서 어느 때부턴가 서포리로 이름이 바뀐 마을이 있다. 서포리는 그 당시만 해도 배를 정박하는 곳으로서 강경·황산과 함께 강가의 이름난 마을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옛날에 서시(西施·월나라 여자로 매우 아름다웠다고 하여 미인의 대명사가 됨)가 이곳에서 출생하였으므로 그대로 지명으로 삼았다는 말이 전해지지만 〈한국지명총람〉에는 서쪽 갯가가 되므로 서포라 지었다고 전한다.
군산시 나포면 십자 들녁을 지나서 거슬러 오른 금강 변에 공주산이라는 산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공주산(公州山) 현의 북쪽 13리에 있는데, 전하는 말에 “공주로부터 떨어져 왔기 때문에 이름한다.”했다. 아름다운 공주산은 옛날에 공주의 태를 묻었기 때문에 공주산이라고도 하고 공주에서 떠내려 왔기 때문에 공주산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산의 형세로 보아서 공주의 태를 묻었다는 설이 더욱 더 타당할 듯싶다.
이 산 중턱에 나포리 사람들이 대를 이어 모셔오는 당집이 있다. 고군산열도를 뺀 내륙지방에서는 이곳에서만 영산당제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영산당제는 해마다 정월대보름날 저녁에 지내게 되며 영산당에 밥, 떡, 돼지머리, 과일 등 온갖 제물을 차려놓고 고기잡이와 농사가 잘되며 마을에 아무 탈이 없기를 빌었다. 이 제사에 드는 돈은 제사를 지내기 며칠 전부터 마을의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걸궁굿을 쳐준 뒤 쌀과 돈을 거두어 마련했다.
“그 산 밑이 곧 진포(鎭浦)인데, 민가들이 즐비하고 배 부리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다.”고 기록되어 있는 진포는 군산의 옛 이름이다. 이곳 진포에서 왜구와 고려 수군 사이에 큰 싸움이 있었다. 1380년 8월 왜구의 배 500채가 침략하자 최무선을 비롯한 세 장수가 최무선이 설계하고 감독하여 만든 80여 채의 병선과 새로 만든 무기인 화통과 화포를 싣고 진포에 도착하였다. 새로운 병기를 만든 최무선도 그 효과가 의심스러웠는데, 적선에 다가가 일제히 화포를 쏘자 쌀을 싣기 위해 밧줄로 묶여 있던 일인의 배는 한꺼번에 불타고 왜적 대부분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지금은 군산시에 딸린 하나의 면인 임피 서편에 있는 옥구읍은 만경강의 끝자락인 서해와 인접하였으며, 백제 때의 이름이 마서량현(馬西良縣)이다. 옥구읍 상평리 동문 밖의 옥구향교에는 자천대(自天臺)가 있다. 자천대는 최치원이 일찍이 당나라에서 학문을 닦고 돌아왔을 때 세상이 몹시 혼란하고 민심이 흉흉하자 홀로 바다를 바라보며 독서로 시름을 달랬다는 곳이다. 건평이 30평쯤 되는 이 건물은 원래는 지금의 군산 비행장 자리에 있었는데 식민지 시대 말기에 옥구군 유생들이 옥구읍 상평리 향교 옆으로 옮겼다. 옮기기 전의 자천대를 이곳 사람들은 원자천대라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원자천대의 최치원이 앉았던 바위 위에는 최치원의 무릎 자국과 멱을 감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중환이 〈택리지〉에 기록한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자천대라는 작은 산기슭이 바닷가로 쑥 들나왔고, 그 위에 돌로 된 두 개의 돌 농(籠)이 있었다. 신라 때의 최고운(崔孤雲)이 이 고을의 원이 되어 와서 농 속에다 비밀문서를 보관하였다는데, 농이란 것이 마치 큰 돌과 같았다. 산기슭에 버려져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열어보지 못하였고, 혹 이를 끌어 움직이면 바다로부터 바람과 비가 갑자기 왔다. 마을 백성은 이 농을 이롭게 여겨서, 날씨가 가물 때 수백 명이 모여 큰 밧줄로 끌어서 움직이면 바다에서 비가 갑자기 와서 밭고랑을 흡족하게 적시었다. 그런데 사객(使客 임금의 명을 전달하거나 시행하는 사람)이 옥구현에 올 때마다 번번이 가서 구경하게 되기 때문에 고을에 폐가 될까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이를 심각하게 여겼다. 그런 까닭에 예전에는 이곳에 정자도 있었으나, 100년 전에 정자를 허물고 돌 농도 땅에 묻어 자취를 없애 버려서 지금은 가서 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탁류〉의 작가 채만식
이 군산에서 태어난 소설가가 채만식(蔡萬植)이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하나의 독립된 현이었던 임피에서 태어난 그는 ‘태평천하’ ‘레드메이드 인생’ 등 수많은 작품 속에 풍자와 해학 그리고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했는데, 그는 나라 안에서 이름이 가장 아름다운 강 금강을 〈탁류〉라는 소설의 서두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금강…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등께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가지고는 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번 비행기라도 타고 강줄기를 따라가면서 내려다보면 또한 그럼 직할 것이다. 저 준험한 소백산맥이 제주도를 건너보고 뜀을 뛸 듯이, 전라도의 뒷덜미를 급하게 달리다가 우뚝…또 한 번 우뚝…높이 솟구친 갈재와 지리산, 두 산의 산협 물을 받아 가지고 장수로 진안으로 무주로 이렇게 역류하는 게 금강의 남쪽 줄기다.
그놈이 영동 근처에서 다시 추풍령과 속리산의 물까지 받으면서 서북으로 좌향을 돌려 충청 좌우도의 접경을 흘러간다.…부여를 한바퀴 휘 돌려다가는 남으로 꺽여 단숨에 놀뫼(논산) 강경에까지 들이닫는다.
여기까지가 백마강이라고, 이를테면 금강의 색동이다. 여자로 치면 흐린 세태에 찌들지 않은 처녀 적이라고 하겠다.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웅진)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 흥망의 꿈 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함창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 옳게 금강이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 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시가지)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그렇다. 채만식은 소설〈탁류〉에서 금강을 ‘눈물의 강’이라고 명명하고서 그 당시의 군산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급하게 경사진 강 언덕비탈에 게 딱지 같은 초가집이며 다닥다닥 주어 박혀 언덕이거니 짐작이나 할 뿐이다. 이러한 몇 곳이 군산의 인구 칠만 명 가운데 육만 명쯤 되는 조선 사람의 거의 대부분이 어깨를 비비면서 옴닥옴닥 모여 사는 곳이다.
대체 이 조그만 군산바닥이 이러한 바이면 조선 전체는 어떠한 것인고, 이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에 승재는 기가 딱 질렸다.”
1899년 5월 2일 부산·원산·제물포·경흥·목포·진남포에 이어 조선에서 일곱 번째로 개항한 항구 군산은 외국인에게 개방되기 전까지만 해도 옥구군에 딸린 조그마한 포구였다. 백제 때의 군산은 마서량(馬西良)이었고 고려 공민왕 때인 1356년에는 금강 하구에 포구를 설치하여 개성으로 가는 배들을 머무르게 하면서 진포(鎭浦)라고 불렀다. 1397년에는 군산진이 되었다. “군산진, 관아의 북쪽 30 리에 있다. 첨사. 무관. 종 3품이다. 군관 10명이다. 지인 6명이다. 사령 7명이다.”라고 영조 때 편찬 된 〈여지도서〉에 실려 있는 군산은 1910년 10월에 군산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의 문신 박경(朴經)이 “땅이 궁하니 3면은 좁고, 하수가 머니 양쪽 변에 편평하다”고 노래한 군산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이곳이 호남평야를 배경으로 한 쌀의 집산지임을 알게 되면서 쌀의 수출항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나라에서는 백성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가고 관리는 관리대로 농간을 부려 제 배를 채우기에 바빴다. 그래서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떠돌아 다녔기 때문에 전북·충남·경기의 곡창 평야지대에는 버려진 옥토가 부지기수였다.”
한말의 문장가 황현이 지은 〈매천야록〉에 실린 글과 같이 일본인들은 황무지를 힘들이지 않고 차지했다. 그 뒤 일본의 고리대금업자들은 우리 농민들에게 고리채를 놓아 헐값으로 사들이거나 강제로 빼앗았다.
●쌀의 집산지 군산
농민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북간도로 줄을 이어 떠났고, 그때 아리랑 곡조에 실려 불려졌던 노래는 이러했다.
“밭 잃고 집 잃은 동무들아
어데로 가야만 좋을까 보냐.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아버지 어머니 어서오소
북간도 벌판이 좋다 드냐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간다.
땅을 잃고 살길을 잃은 채 고향을 등진 그 당시 군산의 상황이 시조시인인 가람 이병기(李秉岐)선생이 지은 ‘사비성을 찾는 길에서’라는 기행문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그때 보던 군산은 벌써 꿈과 같아 잘 기억할 수 없으나 지금 보는 군산과는 판연히 다른 줄 안다. 그때는 저렇게 일본식 가옥이나 서양식 건축물이 많지 못하고 저렇게 시가도 번창하고 정리되지 못하고 조선인 부락도 저렇게 되지는 아니하였다. 과연 금석(今昔)의 감이 없지 못하다. 더구나 군산은 조선 미곡의 도회로서 해마다 수백만 석이 모여들었다가 그것이 모두 일본으로 건너가고 조선인들은 집도 없이 한편으로 몰려 움을 묻고 산다는 말을 들음에랴.
이 현상이 군산만이랴. 그 빈민들은 장사도 못 하고, 품도 못 팔고, 거지로 아니 나가면 됫박이나 들고 다니며 미곡시장에서 볏섬이나 추스를 적에 몇 알씩 떨어지는 알맹이를 주워다 먹고 연명을 한다.”
이곳 임피현을 두고 고려 때의 문장가인 이규보도 시한 편을 남겼다.
“고현은 의연하게 물가에 닿아있고, 앞에 달리는 붉은 깃발 수풀을 떨치고 돌아가네. 오고 갈 제 오직 꾀꼬리만이 아는 것인데, 쇠하고 병든 몸이 어찌 나는 듯한 말을 견딜 건가. 객사에는 버들 늘어진 새길 닦았고, 인가는 꽃 비치는 싸립문 반쯤 닫았네. 참군이 야위어 보기도 민방한데, 사녀들은 무슨 일로 모여 둘러싸나.”
이곳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일제 때 완주에서 옮겨 온 두 점의 석조 유물과 30여점의 불교유물이 남아 있다.
군산 개정의 발산리에 큰 농장을 가지고 있었던 시마따니라는 일본인이 자기 정원의 치장물로 조성하기 위해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봉림사터에서 석등(보물 234호)과 오층석탑(보물 276호)을 옮겨간 것은 1940년대였다. 몇 년 후 해방이 되고 농장주인 시마따니가 일본으로 건너간 농장 터에 발산초등학교가 들어섰지만 어디서 가져왔는지 출처도 분명하지 않은 30여 점의 석물들에 둘러싸인 봉림사터 유물들은 돌아가지를 못했다.
봉림사터 유물들의 수난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70년대 말까지 봉림사터 가까운 곳 삼기초등학교에 있던 삼존불상을 비롯 여러 점의 불교 유물들을 그 당시 전북대 박물관장이던 분이 밤중에 트럭으로 싣고 가서 박물관 앞에 옮겨 놓고 만 것이다.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일제 때 세워진 건물들이 많이 있다. 군산 세관, 구 한국은행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관광객들을 맞고 있으며, 그 중에 한 곳이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다. 1913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승려 우치다(內田)에 의해 ‘금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동국사는 한국의 전통사찰과는 다른 일본식 사찰이다.
주요 건물은 대웅전, 요사채, 종각 등이 있는데, 대웅전은 요사채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고, 팔작지붕 홑처마 형식의 일본 에도(江戶) 시대의 건축양식을 띠고 있다. 건물 외벽에는 창문을 많이 달았고, 우리나라의 처마와 달리 처마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특징을 하고 있는 동국사 대웅전은 2003년에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다.
만물이 오고 만물이 가는 존재의 수레바퀴 속에서 군산은 또 얼마나 많은 변화를 거듭하면서 거듭날 수 있을까?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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