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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의 미소

▲ 이희근

1월 하순 어느 수요일 오전이었다. 친구와 단둘이 모악산에 오르면서 달성사 정문에 이르렀을 때, 친구는 계곡에 있는 병꽃나무 위에 하얀 실처럼 다닥다닥 붙어 너슬너슬하게 보이는 것을 가리키며 무슨 꽃이냐고 물었다.

 

그것은 꽃이 아니라 아직 떨어지지 않고 나무에 붙어 있는, 작년 가을에 익은 사위질빵 열매였다. 그러나 나는 매주 수요일마다 이 코스로 등반을 하면서 자주 보아온 나무의 이름을 오늘에야 묻는 이유가 궁금했다.

 

며칠 전에 친구는 부인과 함께 전주천변에 산책을 나갔다. 둔치의 개나리나무 위에 하얗게 걸쳐 있는 것을 본 부인은 친구에게 무슨 꽃이냐고 물었다.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친구는 부인으로부터 그것도 모른다는 핀잔을 들었다. 그런데 오늘 그것을 발견했다.

 

정년퇴임하기 전에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동부인모임이 있었다. 퇴임 후, 오전에는 건강을 위해 등산을 하고, 오후에는 고스톱도 치면서 시간을 보내자는 많은 회원들의 의견에 따라,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고 있었다. 명칭도 수요산악회로 바꾸고, 매주 수요일 10시에 중인리 버스종점에서 만나 모악산 등반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회원이 20여 명이나 되어서 산에 오르거나, 식사를 하거나, 또 고스톱을 칠 때마다 시끌벅적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상황이 변했다. 회원 중에는 유명을 달리한 사람도 있었고, 상처(喪妻)를 한 사람도 있었다. 그 외에도 건강상의 이유나 개인 사정으로 불참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갔다. 그러다가 10여 년이 지나자 오전에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고작 두서너 명밖에 안 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점심 식사에는 여남은 친구들이 모였다.

 

산에 오르는 방법도 달라졌다. 힘을 자랑하며 떠들썩하니 앞장서서 산에 오르내리는 데만 신경을 썼던 지난날과는 달리, 서두르지 않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조용하고 여유작작하게 담소를 즐기며 걷고 있었다. 유유자적이란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았다. 자연히 10여 년 훨씬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이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친구는 사위질빵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다면서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있는, 번식력이 좋은 외래식물이냐고 물었다. 이름이 외래어처럼 낯설게 들린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위가 짊어지는 지게의 질빵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순 우리말이다. 미나리아재빗과에 속하는 낙엽 덩굴식물로 양지바른 길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우리 토종식물이다.

 

다른 덩굴식물과는 달리 사위질빵은 기어오르는 나무의 줄기뿐만 아니라 나무 전체를 차지해버리는 습성이 있다. 꽃이 피면 나무 전체가 사위질빵의 꽃으로 덮인다. 사위질빵을 규모가 큰 교목(喬木)으로 착각하는 이유다.

 

친구는 사위질빵이란 이름도 확실히 알았지만, 자기 부인에게 자랑스럽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회심(會心)의 미소였다.

 

△수필가 이희근 씨는 지난 2009년 계간 〈문학사랑〉 수필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수필집〈산에 올라가 봐야〉, 〈사랑의 유통기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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