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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공감] 형제가 전하는 현의 노래

첼로 박귀순·비올라 연주자 병선 씨 / 13세 차이…"서로에게 많은 것 배워" / 부안서 문화예술교육 재능기부 활동

▲ 박병선 씨와 그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교육을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첼로연주자 박귀순씨, 비올라 연주자 박병선씨. 형제지간임에도 불구하고 성격, 외모, 취향까지, 닮은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두 사람. 그런 그들이 문화적 경험이 적은 지역의 아이들을 만나고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소외된 청소년들을 만나기 위해 동행하고 있다. 형제이기에 앞서 문화예술교육분야의 동료이자 동반자인 박귀순·병선 형제를 만났다.

▲ 형 박귀순씨

△보이지 않는 무게중심, 첼로와 닮은 형= “우연일지 필연일지 몰라도 음악가들은 꼭 자기 같은 악기를 연주하게 되요.”

 

첼로를 전공한 박귀순 음악예술단체 이음 대표(54)는 그의 말처럼 첼로를 닮았다. 바이올린처럼 튀지는 않지만 멋진 합주가 되도록 뒤에서 잔잔한 중저음을 힘 있게 깔아주는 첼로처럼, 보이지 않는 무게중심을 가지고 있어 그가 있는 곳은 안정적이고 편안하다.

 

전주시립교향악단의 첼로연주자로 활동했던 박 대표는 열정 하나만으로 29세의 다소 늦은 나이에 오스트리아 유학길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지만 음악의 나라 오스트리아에서는 연주활동과 배움에 있어 많은 걸림돌이 되는 나이였단다. 약 30년간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박 대표에게 서양 사람의 삶의 태도와 소통 방식, 그 중에서도 특히 교육방식은 너무나 낯설고 새로운, 그래서 넘기 힘든 벽이었다.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나고 자란 저로서는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자체가 어색했어요. 음악가로서 많이 훈련이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음악은 결코 훈련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30세가 넘어서야 깨달은 거죠.”

 

음악의 기능을 중요시했던 한국교육과는 달리, 감정과 영감의 자유로운 표현으로 음악을 마주해야 한다는 깨달음이자 한계였다.

▲ 동생 박병선씨

△무심한 듯 자기존재감을 드러내는 비올라 같은 동생= “비올라는 바이올린이나 첼로보다는 자기 색이 없는 악기죠. 하지만 화음을 풍성하게 해줘요.”

 

무심한 듯 하지만 잔잔하고 한결같은 박병선 씨(41)는 비올라를 닮았다.

 

2남3녀 중 막내인 박병선 씨는 맏형인 박귀순 대표와는 열 세살 차이다. 박귀순 대표가 전주시립교향악단의 단원으로 활동할 시기에 막내 박병선 씨는 고작 초등학생이었으니 그에게 큰형은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연주가인 맏형 덕분에 첼로, 바이올린 등 고가의 악기를 쉽게 만지고 놀았던 그는 16세에 형이 있는 오스트리아행 비행기에 오른다. 영어권도 아닌 독일어를 쓰고 있는 나라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익혀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불행하게도 음악은 결코 즐거움이 되어 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가 새로운 음악을 찾도록 안내해준 스승 헬프리드 피스터 씨를 만나게 된다. 잘하는 연주보다 개개인의 장점을 발견해주고 지지했던 피스터 씨는 슬럼프에 빠진 박병선 씨에게 예술가를 넘어 인생의 조언자로 큰 힘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지속됐다. 부안과 전주에서 개최하는 마스터클래스와 음악캠프에 해마다 스승이 방문하고 있다.

 

△문화예술교육으로 소외된 이웃을 만나다= 박귀순 대표는 2011년 부안 ‘꿈의 오케스트라’ 기획과 참여로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청소년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하면서 소년원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보육원과 같이 위탁시설에서 소외된 아이들과 제가 가진 재능을 함께 하고 싶다는 소망이 어렸을 때부터 늘 있었다”며 악기 8대를 기증하면서까지 소년원에서 음악교육을 진행했다.

▲ 박병선 씨의 스승인 헬프리드 피스터 씨가 함께 진행하는 음악수업.

“아이들에게는 좋은 기회였지만 관리차원에서는 이동할 때마다 직원이 따라다니기 때문에 소년원에서는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을 거예요. 저 역시도 그런 환경에서는 제대로 된 교육을 진행하기가 힘들었죠. 그러다 소년원 출소 청소년의 쉼터인 천사의집을 알았고 이러저러한 악기를 매개로 매주 토요일마다 이곳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소통이 부족하고 표현이 어색한 아이들이라 자기감정을 다소 거칠게 보여주지만 알고 보면 마음이 그렇지는 않아요.”

 

동생 박병선 씨는 오스트리아 유학을 마치고 2006년 한국에 돌아와 찾은 곳이 부안이었다. 친구의 제안으로 부안 줄포초등학교와 남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만나게 해준 것이 문화예술교육의 첫 경험이었다.

 

“많은 시골아이들이 학원, 특히나 예체능 학원은 더더욱 다닐 수 없는 환경이고 게다가 방과 후 프로그램까지 많이 활성화되지 않아서 학교 끝나고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학교 관사에 머물면서 아이들과 함께 악기로 놀았습니다.”

 

△서로에게 배우다= “동생한테 배울 점이 많아요. 특히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은 따라갈 수 없는 태도를 가지고 있죠. 큰 장점이에요. 저는 대학까지 한국에서 마쳐 경직된 많이 적응된 사람이라면 청소년기를 오스트리아에서 보낸 동생은 아이들을 바라보고 교육하는 관점이 저와는 완전히 다르죠.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박병선 씨가 형이 보기엔 너무 관대한 것 같아 잔소리도 많이 한다는 박귀순 대표.

 

박병선 씨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가 아닌 같은 인격체로서 눈높이를 맞추는 게 교육의 시작이다”고 말한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음악과 춤을 응용해 아동음악교육 분야에서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는 칼 워프의 영향을 받아 음악교육학을 전공했다. 한국에 돌아와보니 클래식 음악이 너무 권위적, 보수적이어서 일반 대중과는 거리가 먼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고 어린이들이 체감하는 클래식은 더욱 그랬다. 이런 풍토가 그의 ‘눈높이 교육’에 대한 신념을 강하게 했다.

 

그럼에도 박병선 씨는 형이 없었더라면 오타쿠 기질이 있는 자신이 이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형은 정말 엄격하게 악기를 가르쳐줬어요. 어렸을 때는 많이 힘들었지만 형이 없었더라면 아마 제가 음악을 만날 수도, 아이들을 만날 수도 없었겠죠.”

 

박귀순·병선 형제에게 음악이라는 재능이 신이 내려준 우연이었다면, 지역의 소외된 아이들을 만나고, 문화예술교육으로 재능을 공유하며, 전북이라는 지역에서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기까지의 인연은 필연이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 연(然)이 두 형제의 우애처럼 끈끈하게 지속돼 첼로같은 든든함으로, 비올라같은 어울림으로 지역에서 함께하는 음악인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 임진아 전북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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