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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정호, 풍경을 읽다] 5.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

새 이주단지 임실 운암면 쌍암리 주민 대부분 수몰민…논·밭 일구며 '망향가'

▲ 지난 2012년 새로 조성된 운암면 소재지. 운암초·중학교와 영어체험센터, 우체국 등 공공시설과 주거단지가 들어서 있다.

임실군 운암면 소재지인 쌍암리 상운암마을. 마을에 들어서면 반듯한 초·중학교와 영어체험학습센터, 면사무소, 우체국, 파출소 등 공공기관이 중심에 모여 있고, 이들 시설 양쪽으로 새로 지은 주택들이 늘어서있다. 말끔하게 조성된 전원마을 분위기. 마을에서 서북쪽으로 500여 미터를 올라가니 쓰러져가는 건물에 빨간색으로 번호가 매겨있다. 남아있는 건물은 10여 채가 되지 않는다. 불과 3년여 전까지 운암면 소재지 였던 곳이다. 1960년대부터 옥정호 수몰지역 주민 100여세대가 모여 50여 년 동안 터전을 일궈왔던 곳이다.

 

△ 댐 운영수위 5m 조정

▲ 옛 운암면소재지 풍경

철거 막바지 작업이 한창인 옛 운암면소재지는 섬진강댐 재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수몰지역이 됐다. 1965년 섬진강댐 준공 후 이주대책의 문제점으로 댐 만수위선 내에 수몰민이 거주하면서 댐을 계획대로 운영하지 못했다. 따라서 섬진강댐 저수지역내 거주민을 이주시킨 후 댐 운영수위를 5m 높여 애초 설계됐던 상시만수위 196.5m와 계획홍수위 197.7m를 확보하겠다는 것이 재개발사업의 내용이다. 한국수자원공사는 이 사업을 ‘섬진강댐 정상화사업’이라고 설명한다.

 

재개발사업으로 임실군 운암면과 신평면 신덕면 강진면, 그리고 정읍시 산내면 등 옥정호 주변 208세대가 다시 수몰민이 됐다. 수몰민이 가장 많은 지역은 옛 운암면소재지로 100여 세대에 이른다. 운암면소재지는 지난 2008년 10월부터 500여 미터 떨어진 곳으로 옮기는 이주단지 조성사업이 진행됐다. 약 13만㎡ 부지에 국비 100억원 등을 투입해 학교와 보건진료소 파출소 우체국 등과 주택을 조성했다.

 

△ 농사 지으며 고향 지켜

▲ 철거 마무리단계인 옛 운암면소재지. 박형민 기자

이주민들은 새 이주단지로 옮기면서 주택을 포함한 지장물과 영농보상 등을 포함해 가구당 평균 4500만원을 받았다. 주민들이 거주했던 지역은 물이 들어오지 않는 댐 저수구역이었는데, 임시로 자리를 잡았다가 아예 정착했던 것이다. 거주지 토지와 주변 농지는 모두 국가소유였다. 따라서 보상 대상이 아니었다. 섬진강댐 건설부터 시작된 수몰민의 이주대책과 피해보상은 처음부터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계속 문제를 낳게 된 것이다.

 

당시 수몰민들은 부안 계화도간척지와 경기도 반월 폐염전부지 이주정착증을 받았지만 이주지 조성이 늦어지자 이주증을 헐값에 팔고 고향 주변에 둥지를 틀고, 농지를 개간했다.

 

운암면 주민 김경운씨는 “고향에 다시 정착한 주민들은 경작지를 일궜는데, 큰 땅이 없다보니 농사도 소규모에 한정됐고, 따라서 대부분 가난이 대물림되는 형편이었다”고 말했다. 운암면 거주민의 80%는 65세 이상으로, 대부분 수몰민이다.

 

1989년 운암교가 놓이면서 운암면 마암리와 운종리가 연결되고, 풍광이 빼어난 옥정호 수변도로가 조성되면서 하운암지역에는 관광객을 위한 음식점과 찻집 등 상업시설이 생겼다.

 

박현기 운암면장은 “지난 8월 옥정호가 상수원보호구역에서 부분해제 돼 주민들이 개발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 고향지킴이 김교만 옹 "먹고 살일 막막 고향 떠날 수 없어 물 맑고 인심 좋은 곳 아직도 생생"

1919년 임실군 운암면 입석리에서 태어난 김교만 옹. 섬진강댐이 완공됐던 1965년 계화도 이주증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계화도는 논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김옹도 대부분의 수몰민처럼 쌀 2~3가마니에 이주증을 넘겼다. 그리고 물에 잠기지 않는 골짜기를 일궈 논과 밭을 만들었다. “이웃들이 산으로 올라갔지. 집을 짓고 밭도 만들고. 길도 없어서 배로 다니고…. 그렇게들 살았지.”

 

6남 2녀를 둔 김 옹은 “먹고 살일이 막막해” 고향을 떠날 수 없었다. 그렇게 백수(白壽)를 채우고 있다.

 

특히 그는 섬진강댐 수몰민 피해자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추가 보상을 받아낸 주역이다. “댐 건설당시 3곳의 은행에서 감정을 해 보상했는데, 기준도 모호해 보상금액도 적었고, 또한 이주대책도 실패했지. 그래서 제대로 된 보상을 요구했고, 추가보상을 받아냈어.” 김옹은 운암제 건설때는 일제치하에서 대지주들이 농지를 소유해 지역 주민들에 대한 보상은 드물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 김교만옹이 펴낸 ‘망백일기’

운암면의원, 수몰민 피해대책 위원장,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등 고향지킴이로 활동해온 그는 자신의 삶과 운암면의 역사를 기록해왔는데, 지난 2000년 전북대 20세기 민중생활사연구소에서 이 기록을 모아 〈망백일기〉로 묶었다.

 

지금도 옥정호에 잠긴 옛 마을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는 호수 아래 마을을 “산 높고 물 맑고 오곡이 풍성하고 인심 좋은 곳이었다”고 전했다.

은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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