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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말

▲ 임주아 우석대 대학원 재학

‘졸업을 했으면 취업을 하라’는 말은 일을 했으면 성과를 내라는 책 제목처럼 무심한 칼날 같았다. 그만큼 일상적이고 또 잔인했다. 직장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면 어느 직장에서나 평생 마찬가지라는 말을 믿었다. 그 말엔 연륜이 묻어나왔고 믿음직한 경험이 깔려 있었다. 그만큼 사실적이고 무시무시했다. 버텨야 한다. 참아야 한다. 열심히 해야 한다. 열정이 있어야 한다. 노력해야 한다. 그런 말들을 차곡차곡 모아 두 손에 꼭 쥐고 달렸다. 어른들의 말을 따라가면 조금도 위험할 것이 없었다. 험한 길이어도 아직 젊으니 괜찮았다. 뒤돌아볼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묻지 마라. 따지지 마라. 속 보이지 마라. 들을 때마다 발목에 채워두었다.

 

호통만 치는 무서운 세상

 

누군가 그 말을 의심할 때는 비슷한 다른 말을 꺼내 손목에 채워주었다. 묻고 싶고 따지고 싶고 다 털어버리고 싶은 그런 날에도 어쩐지 희망을 바라보고 의지를 확인하고 괜찮다고 다독였다. 감정을 숨기지 못한 날에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고 자책했다. 그래도 가만히 버티고 있으면 괜찮아질 것을 알았다. 내일이 있고 또 다음이 있으니까.

 

이 세계의 오늘은 자주 바뀌었다. 구천에 떠돌던 말들은 더 강력하고 날카로운 이름을 달고 아프게 날아다녔다. 3포세대란 말은 9포세대로 진화하고, 헬조선의 진흙수저들이 땅을 치고 있었다. 누군가는 가까운 과거가 그리워질 거라 말하고, 누군가는 앞으로 더 나빠질 이곳에서 지옥이란 말조차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자고 한다. 이제 망국(亡國)이라고 말이다.

 

그 와중에 대통령 어른은 화를 내며 책상을 내리치고 있었다. 왜 우리더러 책상 밑에 들어가 이상한 법이 가리키는 대로 조마조마 살라는 건지 모른다. 또 다른 어른들이 수십 년 동안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일군 길인데도 모른다. 모르는 것은 많다. 최저임금 월급으로는 집도 방도 결혼도 아기도 가질 수 없는데 현실적인 대안도 없이 어떻게 가정을 꾸리고 살라는 건지 모른다. 계약직을 늘려봤자 불안의 길이만 더 길어질 뿐인데 왜 자꾸 개혁이란 이름을 붙이는 건지 모른다. 정말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이 여기인지 어디인지 모른다. 왜 자꾸 어떤 나라랑 비교하는지 모른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른다. 말은 듣지 않고 사정은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호통만 치는 어른이 얼마나 무서운지, 우스운지 모른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 못한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있다.

 

그런데 이제 그 말을 조금 비틀어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래서 말이지만 어른들의 말은 대통령의 ‘공포정치’의 궤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낡고 닳고 힘센 말이 점점 빛을 잃어가는 시대, 요즘 국회단상에 선 어른들의 말이 새삼 빛난다. 장장 몇 시간 동안 부려놓은 말에선 파도가 굽이치고 행간에선 칼바람이 분다. 어느 역사교과서보다 더 생생한 역사를 듣고, 어느 나라보다 자랑스러운 민주주의 발자취를 느낀다. 말은 격랑 속이지만 나아갈 방향은 더 뚜렷하게 보인다.

 

마음 울리는국회 '필리버스터'

 

현실엔 고개 숙이지만 말 한마디에 다시 고개를 들고 눈을 뜨게 된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국회방송을 켜 두고 그들을 응원하고 있다. 모처럼 어른들의 말이 피부에 와 닿기 힘든 까닭이고 이처럼 마음을 울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임주아씨는 우석대를 졸업했고, 201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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