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중순 어느 날 찬옥이 새벽잠을 자다가 신령스러운 꿈을 꾸었다. 신불의 계시가 있다고 믿어지는 영몽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금빛 찬란한 용이 나타나 자기 등에 타라고 해서 그대로 했더니 찬옥을 등에 태우고 훨훨 날아다니는 꿈이었다.
찬옥은 시조모와 시모의 소원으로 그렇게 신령이 현몽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틀이 지나 시조모가 소망한 대로 불공을 드리기 위해 길을 나섰다. 토요일 오후였다.
불공드리러 가는 절에 가려면 금구를 거쳐야했다. 모처럼 탄 버스의 차창 밖 나뭇잎들이 바람결에 팔락이며 푸르러 가는 계절의 변조를 보면서 찬옥의 울적한 마음이 한결 싱그러워졌다. 버스가 한참 달려 교사시절 정승철과 함께 방문했던 순덕이 집이 있는 마을을 지나쳤다. 불현듯이 교사시절이 머리 가득히 떠올라 눈앞을 스쳤다. 정승철은 건강하게 지내는지, 테라다 교장 뒷 소식은 있는지, 순덕이는 학교에 계속 다니고 있는지, 담임했던 1학년 아이들은…생각할수록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특히 정승철이 보고 싶었다. 2년 전 학교를 그만둔 후 결혼하기 전에 전주우체국 앞거리에서 우연히 한번 만나기는 했으나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진 적이 있었다.
찬옥은 승철을 만나보기 위해 금구에서 내렸다. 토요일 오후교정에서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몇 몇 아이들이 놀고 있을 뿐 한적했다. 한 아이가 정승철 선생이 아까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일러주었다.
찬옥은 정승철의 자취집을 찾아갔다. 승철에게 가지고 있었던 꺼지지 않은 연모의 정이 되살아나 찬옥의 발길을 불공드리러 가는 길에서 승철의 자취집으로 돌리게 한 것이다. 마침 승철이 집에 있었다. 승철은 깜짝 놀라며 반겼다. 마치 옛날 연인을 다시 만난 듯, 절친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듯 승철은 스스럼이 없었다. 정감이 넘치게 말했다. 서로 속을 알고, 서로 신뢰하고, 함께 고민했던 사이가 상당기간 공백을 거쳐 더욱 친밀해진 것일까. 부드럽고 화창한 바람과 햇볕 속에 새잎과 새 꽃이 피어나는 학교 앞산 소나무 숲을 둘이서 거닐었다. 소나무 향을 듬뿍 마셨다. 폐부와 전신이 청신해지는 기분이었다.
승철은 멀리 멀리 걷고 싶었다. 승철은 자기가 지어 찬옥에게 주려했던 시 ‘꽃신’이 떠올랐다.
‘별들이 오가는 저 하늘 길을 / 둘이서 멀리 멀리 걸어갑니다.’
꽃신을 가슴에 안고 싶었던 꿈이 이루어 진 듯 승철은 고무되고 환희에 벅차 있었다. 찬옥은, 테라다 교장이 전보된 학교에서 1년 있다가 역시 학무당국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교직을 떠나 군산 어느 일본인 무역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이야기, 오노다는 승진해 다른 학교로 갔고 순덕이는 지금 6학년 재학 중이라는 소식 등을 들었다.
승철은 2~3년 전과 비교해 지금 일제의 탄압과 협박이 더욱 노골적으로 거세어지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소위 ‘황국신민’이니 ‘내선일체’니 슬로건을 내걸고 관헌을 동원,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있어 견디기 어렵다고 호소했다.
“개명 시한이 오는 8월까집니다. 3개월 안에 개명하지 않으면 학교를 떠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찬옥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딱했다.
침묵이 흘렀다. 찬옥이 화제를 돌려 다소 엉뚱하지만 그 용꿈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기쁜 소식을 들은 듯 승철이 바로 말을 받았다.
“정말로 상서로운 꿈입니다. 경사가 있을 모양입니다.” 좋은 일이 생길 징조라고 해몽을 하는 승철의 얼굴빛이 다시 밝아졌다.
산등성이를 따라 완만하게 올라가는 소나무 숲길이 끝나면 해발 488미터의 구성산 산봉우리가 보이고 거기서부터는 잡목 숲이다. 잡목 숲길은 계곡으로 내려가도록 연결돼 있다. 소나무 숲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지만 잡목 숲길은 한 사람이 오갈 수 있는 오솔길이다.
두 사람은 계곡까지 내려가기로 했다. 승철이 앞장섰다. 비탈이 심한 데서는 승철이 손을 내밀었고 찬옥이 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러나 길의 마지막에 이르러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찬옥을 승철이 껴안으려 했지만 찬옥은 몸을 돌렸다. 언짢아하거나 수줍어 하지는 않았다.
신록의 나뭇가지들이 투영된 계곡물은 머리가 차가와지도록 맑았다. 순백색 담홍색 회색 화강암 조약돌들이 물속에서 구슬처럼 광택을 내고 있었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수량이 많아진 계곡물은 하얀 포말을 뿌리며 콸콸 흘러내렸다. 호반새들이 ‘삐요오, 삐요오’ 울어 계곡의 깊은 정적을 깨곤 했다.
승철이 먼저 바지를 걷어붙이고 개울에 발을 담갔다. 가재를 잡기 시작했다. 찬옥이 바로 뒤따랐다. 돌을 뒤칠 때마다 크고 작은 가재들이 뒷걸음질 치면서 재빨리 달아나는 것을 보고 찬옥은 신기해했다. 이들 앙증스런 생명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찬옥은 새삼 삼라만상에 대한 경외심을 가졌다.
승철이 물장난을 걸었다. 가재 잡이에 열중하고 있는 찬옥의 얼굴에 한 움큼 물을 뿌렸다. 찬옥의 연꽃 빛 얼굴에 떨어진 물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보석보다 더 아름다웠다.
반격에 나선 찬옥은 승철이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승철의 위아래 옷들이 반쯤 젖도록 물을 뿌려댔다. 승철을 쫓아다니는 찬옥의 하얀 장딴지가 투명한 물속에서 더욱 희게 보였다. 승철은 어린애처럼 웃으며 도망 다녔다. 승철의 물에 젖은 모습을 보고 찬옥은 파안대소했다.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듯, 순수한 첫사랑을 느낀 처녀시절로 돌아간 듯 행복해 보였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구성산 서쪽 등성이를 넘어갔다. 계곡에는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개울가에 나란히 앉아 현제명 선생을 모셨던 음악회를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찬옥이 나직이 ‘그 집 앞’을 불렀다. 다음에는 승철이 이어받아 번갈아 노래 부르기를 몇 차례 했다. 어떤 가곡은 합창했다. 노래가 끝나자 계곡물소리만 들릴 뿐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그때 갑자기 뒤쪽 덤불숲에서 노루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나 찬옥 옆을 바짝 스치면서 개울을 건너 뛰어 저쪽 숲속으로 사라졌다.
찬옥은 소스라치게 놀라 자기도 모르게 승철의 가슴 안으로 몸을 파묻었다. 몸을 다시 빼려고 했을 때 승철의 팔이 찬옥의 몸을 꼼짝 못하게 껴안았다. 승철의 입술이 뜨겁게 찬옥의 입술을 엄습했다. 눕혀있는 찬옥의 얼굴 위로 이목구비가 굵고 뚜렷한 승철의 얼굴이 숨 막히게 다가서 찬옥의 시야를 가렸다. 찬옥은 눈을 감았다. 찬옥은 심신을 승철에게 맡겼다.
하늘에 샛별이 떠 반짝였다. 〈계속…〉
장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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