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지 두 달이 지났다. 어머니는 입맛이 통 없다며 식사를 거의 못하고 기운이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안사람이 어머니를 부축하고 바깥 공기를 쐬기 위해서 아파트단지 어린이놀이터에 갔을 때였다.
한대희는 어머니 방에 들어가서 이부자리를 개려고 하다가 요 밑에 놓여있는 한 통의 빛바랜 편지를 발견했다. 정승철 교장이 어머니 희수를 축하하는 편지였다.
처음에 희수 축하 인사말로 시작된 편지는 어머니와 함께 보냈던 젊은 시절이 결코 인위적인 것이 아닌, 오묘한 인연의 끈으로 엮어진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일제시대를 꿋꿋하게 버텨온 힘의 원천도 어머니에게서 느낀 첫사랑에 있었다고 술회했다.
열여덟 살 때 피렌체 거리에서 만난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전주에서 만난 우리는 영원한 사랑의 열매를 거두었다고 자랑스러워 하기도 했다.
어머니 말대로 교장선생은 글재주가 있었다. 노래도 잘 부르고 풍금연주도 수준급이었다. 다재다능했다. 대희는 교장선생에 대한 존경심이 새로워졌다.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 지어졌다.
최 여사! 최 여사는 영혼불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학은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고 철학은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실증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의 육신이 죽으면 사람의 정신적인 기능을 담당했던 영혼도 사라진다고 봐야겠지요. 철학 쪽에서는 저 그리스의 플라톤 이래 영혼불멸이라고 가정하고 있지만 논리적으로 흡족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관해서 종교 편에 서 있습니다. 영혼불멸이라고. 육체는 한 줌의 재로 땅에 묻히더라도 영혼은 영원히 하늘에 살아있다고.
설사 과학이 사실적으로는 맞다 하더라도 현생 삶의 가치와 행복, 죽은 다음의 축복을 기도하고 추구하는 종교에서는 당연히 영혼불멸이라고 믿어야겠지요. 그런 신앙 속에서 우리들의 삶이 한결 순화될 수 있고 숭고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 여사! 저는 우리들의 사랑을 불멸의 것으로 승화시키려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저승으로 간 다음에도 그렇게 하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가 여생을 고결하고 품위 있게 살아가고, 저 세상에 가서도 천상의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사랑은 상상을 초월하는 크고 근원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랑을 저에게 주신 최 여사에게 다시 감사드리며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995년 3월 11일
· 정승철 올림
한대희는 감격해 눈물이 글썽해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소원하셨던 대로 전주에서 가까운 데에 수목장으로 모셨다. 한대희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1주에 한 번씩은 어머니를 찾아 문안을 드렸다.
크롬과 비소 화합물로 방부 처리한 오동나무로 만든 상자에 교장선생님의 편지를 담아 어머니의 유골함 옆에 나란히 묻었다. 두 분의 사랑이 영원히 불멸하기를 기원하면서.
해가 바뀌었다. 시끄러운 정국을 수습하기 위한 개각이 임박했다고 언론이 연일 보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대희는 아들 정욱이 장관 후보로 내정됐다는 TV뉴스를 들었다. 뛸 듯이 기뻤다.
어머니 묘소를 찾아 이 기쁜 소식을 알려드렸다.
“어머니, 어머니 손자가 장관 후보로 내정됐답니다.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마음 놓으세요. 이제 저 혼자만이 아는 이야기, 제가 그 비밀을 영원히 지킬 것을 굳게 약속드립니다.”
한대희는 어머니와 두 분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마음이 그렇게 가볍고 즐거울 수 없었다.·〈 끝 〉 - 장성원
※작자 후기: 톨스토이는 그의 친구이며 저명한 법률가인 코니로부터 들은 이 야기에서 힌트를 얻어 명작 ‘부활’을 썼다.
이 단편은, 아일랜드를 함께 여행하면서 내 친구 정평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소재로 쓴 소품임을 밝힌다. 정평에게 감사하면서도 미안하다. 졸작 밖에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5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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