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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허수아비 가족

최기춘

 

허수아비를 보면 어린 시절이 생각나 저절로 웃음이 난다. 어린 시절에는 엿장수들이 빈병이나 녹슨 쇠붙이, 헌 고무신은 물론 삼베 걸레도 엿과 바꿔 주었다. 그래서 들판에 삼베옷을 입고 서있는 허수아비들이 가끔 수난을 당했다.

 

개구쟁이들이 허수아비의 옷을 벗겨 엿과 바꿔 먹어 허수아비들은 알몸으로 모자만 눌러쓰고 밭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허수아비들은 날씨가 덥거나 비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가 쳐도 주인의 허락 없이는 논밭을 떠나지 않았다. 허수아비들은 농민들의 말을 잘 따르고 고락을 함께한 동반자였다. 농민들이 너도 나도 일자리를 찾아 도회지로 떠나자 허수아비들도 덩달아 농촌을 떠났다.

 

내 생(生)의 들판에도 크고 작은 참새 떼가 많았다. 이럴 때 내 잠자는 영혼을 다시 한 번 일깨운 허수아비. 훠이 훠이, 참새를 쫓는 묵언의 함성이 환청으로 들린다. 그 음성을 기둥삼아 내 정신의 들판이 황금빛 생명의 물결로 출렁일 수 있기를 빌어본다. 나는 가을바람에 소매 자락 펄럭이는 허수아비와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쌀독에 거미줄 치던 가난한 세월에도 해마다 기대가 부푸는 계절은 가을이다. 가을이면 마을에서는 날 새들로부터 곡식을 지킨다. 한줌도 안 되는 곡식을 놓고 사람과 짐승이 피비린 쟁탈전을 벌이는데 흉년드는 해일수록 목숨 걸고 달려드는 참새 떼들을 말려내는 재간이 없었다.

 

농촌을 떠난 허수아비들은 차림새가 달라졌다. 모자도 허름한 밀짚모자가 아니고 입은 옷도 떨어진 삼베옷이 아니다. 모자나 옷 모두 메이커도 다르고 색상이나 모양도 각양각색으로 패션이 다양해졌다. 개중에는 유명메이커를 입기도 한다. 또 도회지의 축제장이나 공원, 도로 주변의 화단에 여럿이 서있다. 그 모양도 양팔을 벌리고 서있는 게 아니고 갖가지 포즈를 취하고 있어 보기엔 화려하다. 하지만 늦은 밤 공원의 가로등불 밑에 서있는 허수아비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고향을 떠난 실향민처럼 보여 측은하다. 젊은이들과 함께 허수아비도 떠나버린 농촌은 힘없고 경제력도 넉넉지 못한 노인들만 남아 적막하고 쓸쓸했다.

 

농촌을 떠나 도회지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안락한 노후 생활을 위해 하나 둘 귀농을 하더니 요즘은 젊은 청년들 중에서도 귀농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도회지 에서 귀농하는 사람들을 따라 허수아비도 귀농을 하고 있다. 귀농한 허수아비는 들판의 논에서 참새들과 벗하던 옛날과 달리 주로 산골짜기 과수원이나 밭에서 멧돼지나 고라니 너구리같은 크고 사나운 짐승들을 지킨다. 고향의 산골짜기에서 만난 허수아비는 혼자가 아니다. 허수어미와 함께 있다. 허수어미는 옷도 멋있게 입었다. 빨간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등산모자도 썼다. 지팡이도 들고 서있어 멋있고 힘차게 보인다. 허수아비 혼자일 때보다 마음이 든든하다. 사나운 짐승들도 부부가 함께 지키고 있으니 함부로 농작물을 해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다만 허수아들과 허수딸이 없는 게 조금 아쉽다. 허수아비에게는 허수어미가 옆에 있으니 머지않아 허수와 허순이도 탄생할 것으로 기대된다.

 

농촌에 새바람이 이는 것 같다. 나이가 많은 귀농인도 반갑지만 젊은이들의 귀농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 소식을 듣는 기분이다. 농촌에 노인들만 남아있어 대를 이을 사람들이 없었는데 젊은이들이 귀농하여 농촌이 다시 활력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농촌에서 젊은 아낙네들의 웃음소리와 갓난아기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것 같은 희망이 보인다. 젊은 귀농인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정부와 지방 자치단체에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책을 마련하면 좋겠다. 해마다 가을, 농촌의 황금벌판에서 농민들과 돌아온 허수아비 가족이 함께 어울려 농자천하지대본이란 깃발을 내걸고 풍년가를 부르며 한 판 축제를 벌이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최기춘 수필가는 대한문학작가회 부회장과 전북문협이사, 전북수필부회장. 행촌수필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수필집 <머슴들에게 영혼을>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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