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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⑫ 물을 다스려 안은, 벽골제와 황등제 - 우리 고장에 남아있는 치수의 흔적, 소중한 문화유산

▲ 김제 벽골제. 전북일보 자료 사진

최악의 가뭄이다. 살다 살다 이런 가뭄은 처음이라고들 한다. 바짝 말라붙은 하천바닥에 배를 드러내고 죽어버린 물고기 떼의 모습과 거북이 등 모양으로 쩍쩍 갈라진 땅에 말라만 가는 곡식들이 마음을 더 애달게 한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인류는 물가 근처에서 생활해 왔다. 문명의 시초가 늘 강에서였던 것이나 인류가 물을 생명수로 여기며 물의 재난이나 물 부족에 대비해왔던 것은 그와 같은 까닭이다. 더욱이 치수(治水)는 전통 농경사회에서 식량 생산에 영향이 지대한 것으로, 특히 우리나라 농경문화의 중심이 되었던 전북도 일대에서는 물을 잘 다루고 활용하는 것이 생존 그 자체였다. 이중 예로부터 고을마다 물을 넉넉하게 사용하기 위해 하천이나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담아 놓은 저수지와 둑은 지난 과거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치수법 중 하나였다.

 

김제시의 ‘벽골제(碧骨堤)’는 가장 유명한 저수지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벽골의 이름은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벼의 고을이라는 뜻으로 마한시대에는 ‘벽비리국(辟卑離國)’으로 백제시대에는 ‘벽골군(碧骨郡)’으로 김제를 불렀다. ‘벼 고을의 둑’이 ‘벽골(碧骨)’ 표기된 것은 이두 표기(우리말 고유의 문법 형태를 보충하고자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적는 문법)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330년(백제 비류왕 27년)에 처음 둑을 쌓았다고 전해지는데, 고대임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저수지 축조를 한 것을 보면 당시 선조들의 토목기술이 대단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둑을 쌓는데 동원된 사람들의 짚신에 묻은 흙을 턴 것이 쌓여 산을 이루어 신털미산 혹은 초혜산(草鞋山)으로 이름 붙여진 지명을 보면 오랜 시간에 걸쳐 큰 규모의 공사가 회자되었던 것 같다. 이후 790년(원성왕 6년)에 증축되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수축과 재축을 거쳐 온 기록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중 1415년 (조선 태종 15년)에 중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벽골제 중수비는 벽골제 제방과 함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중수비는 애초 신털미산 정상에 건립되어 있었지만, 단지가 조성되면서 현재의 장소인 벽골제 단지 내로 이전되었다. 세월에 흔적으로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우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통해 전문을 알아볼 수 있다.

‘군의 남쪽 15리쯤 큰 둑이 있는데, 그 이름은 벽골(碧骨)이다. 이는 옛사람이 김제(金堤)의 옛 이름을 들어서 이름을 붙인 것인데, 군도 역시 이 둑을 쌓게 됨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둑의 길이는 6만 843자이고, 둑 안의 둘레는 7만 7406보이다.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다섯 도랑이 물을 대는 땅은 모두가 비옥하였는데, 이 둑은 신라와 백제로부터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와서 옛날 모습으로 보수하였고, 인종(仁宗) 21년 계해년에 와서 증수(增修)하였는데, 끝내 폐기하게 되니 아는 이들이 이를 한탄하였다. (후략)’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 김제군, 벽골제 내용 원문 발췌)

오늘날 그나마 모습을 남기고 있는 제방 일부는 평지에 일직선 거리로 약 3㎞가량 펼쳐져 있는데 아쉽게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원형이 크게 훼손돼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니며 지역 정체성을 갖게 해 준 귀한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수 있는 의미가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림에는 이수와 치수가 근간이 되어 왔다. 농경사회가 나라의 근간이 되었던 까닭에 곧 물을 다스리는 것이 사람의 목숨을 다스리고 윤택한 삶을 좌지우지하는 길이 되어 왔던 것이다.

 

한때 우리는 국가가 ‘물 부족 국가’로 분류된 것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여 물에 대한 철학을 되새기기도 했지만, 작금에 물에 대한 인식은 4대강 등 몇 가지 이슈에 한정돼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보다 편리하고 발달된 기술로 다스리고 있을 뿐 물은 여전히 우리가 주의 깊게 다스려야 할 대상이며 오늘날에는 생태와 지역 문화 등 신경 써야 할 것이 더욱 많은 귀한 대상임을 되새겨야 한다.

 

그렇기에 옛 선조들이 해왔던 물을 대하는 귀함과 두려움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벽골제와 우리 고장에 남아있는 치수의 흔적과 옛 물길을 다시 복기하듯 살펴보며 선조의 지혜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물의 흔적도 귀한 자산이다.

 

익산에는 백제시대부터 있었다는 호수와도 같은 큰 저수지, 요교호(腰橋湖)라고도 불리는 황등제(黃登堤)의 흔적이 아직까지 황등면의 지명에 남아 그 존재를 말해주고 있다. 뱃길마을, 섬말, 샛터, 도선마을 등 백제 무왕의 설화와 함께 원형을 발굴해서 이어갈 우리의 역사이다.

▲ 《동여도》(19세기 철종)에 표시된 황등제.

《대동여지도》와 《동여도》에도 황등제의 표기가 분명히 있고, 유형원의 《반계수록》에는 “부안(扶安)의 눌제(訥堤), 임피(臨陂)의 벽골제(碧骨堤), 만경(萬頃)의 황등제(黃登堤)는 소위 호남 지방의 3대 제언이다. 처음에 그 제언을 쌓을 때는 온 나라의 힘을 다 들여서 완성시켰는데 중간에 훼손되자 내버려 두었다.

 

지금 불과 몇 고을의 힘만 동원하여 예전처럼 수선해 놓으면 노령(蘆嶺) 이북은 영원히 흉년이 없을 것이며 호남 지방의 연해 고을이 중국의 소주(蘇州)나 항주(杭州)처럼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동국문헌비고》 등에도 황등제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있지만, 아직은 백제 유적지 들판에 담겨 있는 원형의 모습이 상상으로만 남아있다. 사라진 지역의 귀한 자산인 황등제의 원형이 올곧이 복원되기를 바란다.

 

심한 가뭄이 든 지금은, 선조들이 우리 지역에 남긴 물을 다스리며 귀히 여겼던 그 마음도 담아 기우제라도 함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비가 충분히 내려 목마른 대지를 적시고 생명수를 흐르게 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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