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관심 낮았던 시기 전북 채식문화 이끌어…"손님은 냉정한 평가자" / 손대지 않는 메뉴 퇴출…획일적 맛 조미료 거부 / 전통음식 세계화 관심
‘먹거리 포비아(불안증)’가 확산되고 있다. 구제역·조류독감(AI)이 일상적인 전염병이 된데다가 최근에는‘햄버거병’과‘살충제 계란’,‘E형간염 돼지고기’문제까지 불거지면서다. 먹거리에 대한 불신과 불안감은 자연스럽게 채식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채식 동호회가 속속 생겨나고, 여러 형태의 채식축제도 매년 열기를 더해가고 있다. 한국채식연합은 국내 채식주의자 규모를 100만~150만명 규모로 추산하고 있다. 완전 채식주의자인 비건뿐 아니라 오보·락토 등 여러 형태의 채식주의자를 포함해서다.
채식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채식 전문 식당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우리의 외식문화가 육식 중심이어서 채식만으로 식단을 꾸리고 있는 식당은 지금도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도내의 경우 채식 전문으로 자리를 잡은 식당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 중 전주 도심의 영화의거리에 있는‘무심’과 금산사 가는 길목의 해성고 근처에 있는‘풀꽃세상’이 전북지역의 채식문화를 이끌었다. 채식 전문점들이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한 것과 달리 이들 두 음식점은 각각 2001년도에 개업한 후 나름의 단골들을 확보하면서 입지를 다졌다. 좀 더 대중적인 이미지로 ‘풀꽃세상’을 이끌고 있는 주인 허인교씨(57)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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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째 채식 전문 뷔페식당으로
채식에 관한 일반의 관심이 높지 않던 시절에 일찌감치 채식 전문 뷔페식당을 연 것이 먼저 궁금했다. 허씨는 자신의 건강 때문이었다고 했다. 90년대 중반까지 환경 관련 업체를 운영하던 중 혈압으로 쓰러진 것이 계기였다. 술담배를 끊고, 채식으로 건강관리를 하던 중 기왕이면 생업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음식점을 차리게 됐단다. 현재의 음식점 바로 옆에서 ‘채식건강부페’라는 상호로 출발했다.
음식점 운영 경험이 없고, 조리 자격증 하나 없었던 그가 어떻게 대형 채식뷔페식당을 꾸릴 수 있었을까. 채식 관련 단체에서 활동한 것이 힘이 됐다. 그는 한국채식연합회 공동 대표도 지냈다. 연합회를 통해 요리사들을 영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 두부 만들기 정도만 하고, 주차관리 등 허드렛일을 맡아보았던 허씨는 하나둘씩 요리를 배웠다. 지금은 이 식당에서 나오는 주요 음식들이 거의 그의 손을 거치고 있다. 벌써 음식점 경력 18년째이니 그럴 만도 하다.
채식에 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그는 음식을 인생과 같다고 보았다. 사람이 성장하는 것처럼 음식관도 진화한다는 거다. 1단계는 배를 채우는 데 관심을 두고, 맞을 찾는 게 2단계며, 그 다음에 미적 아름다움을 찾는다. 마지막 단계가 건강과 평화로운 음식을 추구하는 데, 그것이 채식이라는 것이다.
12~13년간 동물성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비건(vegan) 채식을 했으나 그 스스로 극단적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운영하는 식당의 식단 역시 세미 베지테리언(semi vegeterian)으로 꾸렸다. 채식이 중심이지만, 생선(고등어)과 닭고기가 식당 구석에 따로 분류돼 놓여 있다. 단골이었던 스님들 중에서 일부 거부감도 드러냈지만,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았다. 채식의 범주를 어디까지나 개인의 신념 문제라고 본단다.
△냉정한 맛 감별사는 고객
점심을 중심으로 저녁 식사까지 하루 평균 400명 남짓의 손님들이 찾을 만큼 전주의 대표적 채식 뷔페점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전주 도심에서 벗어나 접근성이 떨어질 수 있는 단점을 오히려 슬로우 푸드 측면에서 장점으로 활용했다. 중인리 가는 2차선 도로 주변에는 풀꽃세상과 같이 민물장어, 생태탕, 코다리, 보리밥, 추어탕, 국수, 중식 등의 메뉴로 단골들을 확보한 맛집들이 적지 않다. 조금이나마 한적한 곳에서 여유를 즐기려는 이용자들이 고객이다. 풀꽃세상이 자리한 곳은 본래 논이었다. 그곳에 건물을 만들고, 꽃과 나무를 심었다. 10여년에 걸쳐 주인 허인교씨가 1600평의 나대지를 울창한 숲의 정원으로 손수 가꾼 것이란다.
“음식과 마찬가지로 주변이 평화로워야 합니다. 조경전문가들이 너무 밀식했다지만, 시각보다 손님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식사 후 자연으로 나와 여유롭게 사색과 대화를 이어갈 공간을 갖춘 것이 음식 이외 이 집이 갖고 있는 자랑이다.
지역에서 3년 이상 버티는 곳이 없을 정도로 채식뷔페 식당의 운영이 어려운 것은 신선도가 생명인 야채류 관리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북프랜차이즈협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던 허씨는 전주 고사동에 분점을 낸 적이 있으나 적자 끝에 곧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관리 문제 때문이었다.
“음식의 맛은 식재료의 특성을 잘 살리는 데서 나옵니다. 발효해야 할 때 발효하고, 오래 끓여야 할 것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구워야 할 것을 볶는다든지, 익혀야 할 것을 굽게 되면 제 맛을 낼 수 없습니다.”
허씨는 외국인들도 엄지를 든다고 하는, 현재 음식점에서 가장 사랑받는 통밀빵을 예로 들었다. 이 빵을 내놓기까지 5차례에 걸쳐 24시간 반복적으로 발효를 시키는데, 손쉽게 할 수 있는 유혹을 떨쳐야 했다. 한 때 제빵사를 뒀으나 그런 유혹을 떨치지 못하더란다. ‘시간이 걸린 노력만큼 편안한 결과가 나온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손님은 냉정한 평가자입니다. 내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손님이 손을 대지 않으면 잘못된 것으로 여깁니다. 현재 우리 식당에 나오는 음식들은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메뉴들입니다.”
△음식 다양성 망치는 조미료는 ‘노’
허씨의 살림집은 식당 2층에 있다. 거실 서가에는 음식 관련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샐러드, 소스, 두부, 된장, 파스타, 커피와 샌드위치, 녹즙, 디저트 등 음식 전문 서점을 방불케 했다. 식당을 차린 후 늦은 나이에 대체의학 석사학위를 받기도 한 그는 음식 관련 책과 함께 현장의 벤치마킹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서울의 특급 호텔을 비롯해 전국의 호텔들을 다니며 음식의 흐름을 읽는다. 자만하지 않기 위한 목적도 있단다.
허씨는 음식점들이 조미료를 쓰는 걸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미료의 유해성 여부를 떠나 맛의 획일화를 가져오는 게 조미료다. 화학조미료를 벗어나야 비로소 식재료에서 나오는 맛을 느낄 수 있으며, 음식점마다 다양한 색깔의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허씨는 전통음식의 세계화에 관심이 많다. 전통음식을 고루하게 여기며 이에 기반을 두지 않는 세계화는 허구다. 전주시가 한식의 세계화를 목적으로 미슐랭가이드의 별을 따기 위한 노력은 자칫 ‘프랑스화 된 한식’으로 잘못 흐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뉴욕에서 별 2개의 미슐랭 평가를 받은 한식당 2곳을 가봤더니 불고기·육개장의 양이 너무 적더란다. 미슐랭의 평가에 맞추다보니 한식의 푸짐함이 사라졌다. 미슐랭 평가에서 국가별·지역별 음식의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으면서다. 반면 수구적인 자세도 문제로 보았다. 진한 맛의 전통 고추장이 과연 세계적으로 통할 수 있을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허씨는 한식으로서 채식의 깊은 맛을 내고 싶은 게 향후 꿈이란다. 허씨의 ‘풀꽃세상’은 거창하게 채식주의를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지역의 채식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직간접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 슬로시티를 지향하는 전주에 이런 식당 하나 없다면 낯이 안 설 것이다. 채식이 만능이 될 수 없지만, 식문화의 트렌드와 생명·환경의 중요성 측면에서도 ‘풀꽃세상’의 더 큰 역할을 기대해본다.
△음식 가격 1만 2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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