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카락의 나는 아이디어가 새로웠고 자신감도 매우 넘쳤다
검은 머리가 많이 자랐다. 분명 개강 전에 카키색으로 염색을 하고 학교에 다니고 싶다며 8월에 탈색을 한 번 하고, 2주 정도 뒤에 탈색을 한 번 더 할 계획이었지만 어째서인지 8월의 권화담은 너무 바빠 미용실 사장님의 출산 휴가가 끝난 지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탈색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화장실 수납장의 셀프 염색약이 울고 있다며 나를 놀렸다. 이제는 예전에 찍었던 사진들에 있는 검은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모습이 어색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자란 만큼 생각보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개강을 하고 익숙하지 않은 수업과 생활패턴을 고치느라 아직도 허덕이고 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으며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 새로운 일이라고 하면, 내가 이제까지 해온 활동들과 그 활동들을 거치며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활동을 준비하는 데에 8월 한 달을 거의 그 활동에 매진했다. 발성부터 기획까지 많은 교육도 받았다. 9월부터 그 활동을 시작하고 있고, 나름 준비를 많이 했지만 역시나 처음은 처음인지라 이 곳 저 곳이 삐걱거렸다.
주황색 머리카락의 권화담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많은 고민이 들었다. 아마 검은 머리카락의 권화담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어서 이 활동을 준비했던 것 같은데 막상 기획을 시작하니 이제까지 내가 한 활동은 보잘 것 없어 보였고 내 감정은 열등감을 어떻게든 해소해보고자 부정적인 감정으로 꽁꽁 싸진 모습이었다. 이것 저것 열심히 했고, 자신감에 차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던 것 같지만, 주황색 머리카락의 권화담은 이게 정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걸까,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듣게 하는 것이 과연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대중적이지 않은 것들에 관심을 가졌고, 여전히 활동 중이고, 앞으로도 활동을 할 것이긴 하지만 ‘과연’이라는 의심을 걷어낼 수가 없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검은 머리카락의 권화담은 대단했다. 어떻게든 체력을 붙잡아두고 일을 끝냈고, 아이디어는 새로웠고, 가장 중요한 자신감도 넘쳤다. 내가 이 활동을 왜 하는지, 그러니까 무엇 때문에 이 활동을 사랑하는 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많은 교육을 받고 여러 사람과 피드백을 하며 좋은 말로 신중해졌지만, 좋지 않은 말로는 겁이 많아졌다. 아마 검은 머리카락의 권화담이 지금의 나를 보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느냐고 물어볼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에 몸이 안 좋아져 지치기도 했고,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내가 준비해야할 것이 검은 머리카락의 권화담이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많았다. 아니, 많이.
무언가에 꽂히면 앞뒤 돌아보지 않고 달려들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의심이 많은 나는 가끔 과거의 검은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내가 그리워지곤 했다. 그 때의 나는 자신이 있었고 ‘무엇을’, ‘어떻게’, ‘왜’ 이 세가지를 대답하는 데에 겁 먹지 않는 검은 머리 짐승이었다. 탈색을 계속 미룬 덕에 검은 머리가 조금씩 자라고 있다. 염색을 해야 하기엔 머리 색이 아직 밝지 않으니 다시 탈색을 해야해서 그 때의 나로 완벽하게 되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다시 검은 머리 짐승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이다. 어른들 말에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그래도 어쨌든 검은 머리 짐승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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