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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선물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이 지난달 31일 영면했다. 향년 82세. 온 생애를 우리 음악에 바쳤던 선생의 별세 소식에 슬픔이 크다.

 

선생을 인터뷰로 두 번 만났다. 한번은 선생이 가장 왕성한 연주 활동을 하고 있던 90년대 후반이고, 또 한 번은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두 번의 인터뷰 모두 창작음악이 주제였다. 선생은 창작음악으로 우리 음악사를 새롭게 썼지만 그 때문에 누구보다도 깊은 고통의 창작 과정을 거쳐야 했다.

 

작곡을 할 때면 늘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던 선생은 전통적인 틀을 부수어 내는 고단한 과정을 거치고도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두려워했다. 선생은 그렇다고 전통에만 머무르기는 더 싫었다. 그래서 찾아낸 해결책이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이를테면 조선 후기 음악을 넘어 신라시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1974년에 발표한 ‘침향무’가 바로 그 과정에서 나온 작품이었다. 침향무는 새로운 가야금 주법을 만들어냈다. 장구 반주도 양쪽 가죽 말고도 나무통을 치거나 채를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연주하기도 하는 새로운 기법이 동원됐다.

 

선생에게 창작은 가야금을 연주하는 그 모든 것의 이유이고 목표였다. 선생은 전통과 창작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과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 이 두 가지는 항상 긴장관계인데 그 긴장 속에서 창작품이 태어난다. 그런데 전통에만 너무 치중하다 보면 고루해지고, 전통에서 너무 벗어나려고 하면 허무해진다. 그러나 전통과 새로운 것, 그 사이에서의 갈등과 딜레마에서 창작이 나온다. 그것을 해내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예술성이다.”

 

중학교 3학년이던 1951년 부산 피난 중에 가야금을 시작한 선생은 김철옥 선생을 거쳐 국립국악원 김영윤 선생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가야금을 공부했다. 김윤덕 심상건 김영제 등 당대 최고 명인들에게 궁중음악 정악과 민속음악 산조를 두루 사사했다. 영화사 대표, 출판사 대표 등을 지내기도 했으나 1974년 이화여대 국악과 교수로 임용되면서 그의 삶은 온전히 가야금에 놓였다.

 

1974년 창작곡 ‘침향무’로 세계가 인정하는 음악가가 됐으며, 1975년 발표한 ‘미궁’은 이 곡을 들으면 죽는다는 헛소문이 돌 정도로 이슈가 됐다.

 

초기 연주집을 제외한 5개의 창작 앨범을 발표했고 동시에 현재 연주되는 유명한 가야금 산조 10여 곡 중 최대 규모인 ‘정남희제 황병기류 가야금 산조’를 완성했다.

 

선생의 치열했던 창작 정신 덕분에 가야금은 온전히 우리 시대 우리의 음악이 됐다. 깊이 감사해야할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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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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