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풍경 여전히 생생 여동생 다시 보고 싶어" / 도내 1001명 재회 기대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사랑하는 가족과의 재회를 꿈꾸는 이산가족들의 실낱같은 희망도 커지고 있다.
최근 만난 맹일호 할아버지(82)도 그랬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할아버지는, 흥남시 운용인민학교 3학년이던 1947년 12월 아버지와 형, 누나와 함께 북을 떠나 남으로 왔다. 어머니와 여동생 등은 북에 남았다. 당시만 해도 남과 북이 왕래하고 있어 바로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며 8남매, 10명이던 가족들은 기약 없이 헤어졌다. 가족과 멀어진 시간이 이토록 길어질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손에 꼭 쥔 채 “나는 잘 살았어… 나는 후회 없이 살았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내 “고향에 있는 가족들은 어떤 수모를 겪고 살았을지 상상할 수도 없다”고 힘없이 말했다.
어릴 적 살았던 마을 풍경을 회상하는 할아버지 목소리에는 다시 힘이 붙었다. 고향 마을인 구룡리에는 화학 공장이 즐비했고, 2층짜리 아파트도 줄지어 있었다.
“못 살고 그런 곳이 아니었어. 큰형님이 흥남에서 화학 공장에 취직도 했었고, 우리 가족은 잘 살았었지. 부끄럽지만 잘 살았어.”
할아버지는 북에 있는 고향 집 주소를 잊지 않고 되뇌였다. ‘함경남도 정평군 장원면 동계리 264번지.’ 그곳에 아직도 가족이 살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북을 떠나오기 전 어머니와 동생이 마지막까지 살았던 주소다.
대화 내내 밝았던 맹 할아버지의 얼굴은 여동생 이야기가 나오자 급격히 어두워졌다. “여동생 생각이 많이나. 우리 금옥이가 살아있으면 이제 여든인데…. 한 번이라도 다시 볼 수 있을까. 명절 때면 북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술이 더 늘어난다”는 할아버지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눈물이 가득 맺혔다.
그동안 맹 할아버지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이 있을 때마다 신청했지만,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가족의 생사확인도 어려웠다. 할아버지는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바람 한 가지를 조심스레 꺼내 놓았다.
“이산가족 상봉이 어렵다는 것 알고 있어. 그런데 국가적인 차원에서 전화 한 통, 편지 한 통이라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어. 이제 모두 살 날이 많지 않아. 제발 그렇게 되면 좋겠어.”
지난 1985년 9월 남북이 고향방문단을 교환하며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 이래 지금까지 모두 21차례 상봉에서 남북 4185가족, 1만9928명이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만 5만8000여 명이 가족과의 상봉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들 대다수가 80대 이상이다. 지난해에만 이산가족 3795명이 숨졌다. 전북에도 이산가족 1001명이 있다. 이산가족 상봉은 2015년 10월 금강산에서 이뤄진 것이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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