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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깎는 일이 세상을 바꿀까

가장 보잘 것 없는 일이 가장 심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 김신철 독립서점 북스포즈 공동대표

서점 카운터에 앉아있으면 책 보다 그 책을 읽는 사람이 더욱 궁금하다. 그들이 사 간 책을 통해서 이 사람은 이런 취향과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잠깐 상상을 하는 재미랄까. 가끔 너무 궁금하면 이 작가를 좋아하는지 물어보기도 하는데, 이번 손님은 톨스토이부터 임경선까지 다양한 종류의 책을 여러 권 샀다. 이런 경우는 상상을 포기하고 매출에만 만족해야 한다.

손님은 자리에 돌아가 친구들과 함께 구매한 책을 읽었다(역시, 여러 사람의 취향이 섞여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그들은 어떤 책 한 권에 매료되었다. 심지어 한 명이 책의 내용을 읊어주고 일행들이 감탄사를 외치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나의 청력은 21세기 ‘공산당 선언’ 같은 현장에 집중되었다. 그들의 외침을 지면을 통해 밝힌다.

“연필을 깎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연필과 연필 깎기. 그리고 충분한 상상력이다.”

그렇다. 그들은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 깎기의 정석> 이라는 책을 장장 3시간 동안 입으로 읊고 갔다. 문제는 나도 어느새 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한낱 연필을 깎는 일 때문에 톨스토이가 외면받은 상황에 분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에는 거대하고, 심오한 주제를 다루기보다 일상적이고 긍정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이 유행이다. ‘소소한 일상에서 확실한 행복을 찾는다’는 ‘소확행’ 열풍 때문이다. 지난해 내내 베스트셀러 리스트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던 <언어의 온도> 도 바뀌어버린 독자들의 취향을 콕 짚은 책이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의 ‘연필 깎기의 정석’을 소확행 열풍으로 나온 책들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 이 위대한 책은 ‘연필을 깎는다’는 너무도 평범한 일을 아득한 경지에 올려놓는다. 연필과 연필 깎기의 종류는 기본이고 문필가와 예술가, 목수 등 직업별로 다른 모양의 연필 깎기 기술을 알려주는데 경외감마저 들 정도다. 심지어 ‘샤프는 순 엉터리다’라고 정파성까지 보여준다. 감탄스럽다.

이것은 순전히 ‘연필을 깎는 일’ 자체에 몰두하고 행복해하는 작가의 태도 때문이다. 만약 연필과 연필 깎기에 대한 역사를 총망라해서 작성한 책이었다면 이 정도의 감동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연필 깎는 과정에서 중간중간 나오는 유머는 장인으로서 여유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책은 아주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소확행’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감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책의 추천사를 빌어 말하자면 그는 ‘가장 보잘것없는 일이 때로는 가장 심오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그에게 자신의 연필을 부탁하기 위해 35달러를 지불한다. 그리고 만족한 경험을 공유한다. 개인의 행복을 부르는 행위가 정체성이 되면 장인이 되고, 영감을 주고받는 공동체가 된다. 함께 진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장이 멈춰버린 시대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의 사사로운 행위가 더욱 건설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 들어 물질적인 소비 행위를 소확행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때에 소확행의 의미와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책이 아닐까?

적어도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나와 손님은 그런 뜨거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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