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가는 대로만 써서는 안 된다는 것. 수필 쓰기의 이중성 내지는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그거야 어쨌든 짧지 않은 세월을 두고 삶의 애환을 웬만큼은 축적해야 비로소 수필스러운 성찰이 가능한 건 아닐지. 예심을 거친 열네 분 응모자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성찰의 깊이가 상대적으로 옅어 아직 덜 여물었거나 붓끝의 농담이 들쭉날쭉인 글을 하나씩 내려놓다 보니 <산골 변사> , <점선, 여백을 품다> , <희생에 대한 회상> , <달항아리> 네 편이 남았다. 달항아리> 희생에> 점선,> 산골>
시골 마을로 계절을 바꿔가며 무시로 찾아오는 ‘트럭장수’들의 ‘찰진 목소리’를 해학적으로 풀어낸 <산골 변사> 는 에피소드의 전개 과정이 좀 어수선하긴 했어도 읽는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점선, 여백을 품다> 는 붓끝이 정갈해서 선뜻 내려놓기가 아까웠다. 그런데 수사적 성찰이 전체 분위기를 이끌고 있어서일까. 독서의 속도감이 떨어지는 문제점까지는 덮고 갈 수 없었다. <희생에 대한 회상> 은 읽을거리가 풍부하다는 게 장점이었다. 어미 우렁이와 어머니의 삶을 희생 모티브로 연계시킨 구성도 크게 나무랄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정돈되지 않은 문체였다. 거친 붓끝을 정갈하게 다듬어 썼더라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는 조언을 사족으로 덧붙인다. 희생에> 점선,> 산골>
<달항아리> 를 끝까지 손에 붙든 까닭은 앞선 세 편의 글이 갖고 있는 단점이 두드러지지 않아서였다. 안정감 있고 세련된 문체가 읽는 맛을 더해준 까닭도 있었다. 글의 문패로 내건 ‘달항아리’의 둥글지만 비대칭인 이미지를 ‘가슴이 사라진 자리’에 채움으로써 ‘사라진 가슴’ 때문에 겪어야 했던 아픔을 따뜻하고 담담하게 어루만질 줄 아는 구성력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다. 달항아리>
최종심에 올랐으면 그다음은 ‘운수소관’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 속뜻이야 글을 쓰는 이들에게는 불문가지일 터. 명실상부(名實相符)라는 말이 있는데, 명(名)은 어떨지 몰라도 실(實)에 있어서만은 네 분 응모자 모두 훌륭한 수필가에 상부(相符)하고도 남는다. /송준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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