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6-05-21 19:17 (목)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청춘예찬

[청춘예찬] 심는 자와 베는 자의 거리

유설 공간리허설 대표

여름이 서서히 깊어져 가는 무렵, 길을 걷다 문득 꽃향기가 파고들 때가 있다. 봄이 찬란하다면 여름은 아름다움이 만개하는 계절이다. 여름 장미가 담벼락을 에워싼 거리를 지나다 보면 하루하루 옷차림이 가벼워진다. 기온이 30도를 웃돌며 본격적인 뜨거움 속으로 향하는 요즘, 이 아름다운 계절을 맞이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올해 또 어떤 재난이 찾아올지 덜컥 걱정이 앞선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내리쬐는 폭염, 새벽 내내 식지 않는 열대야, 무섭게 쏟아지는 장마와 순식간에 사방을 적시는 스콜성 폭우까지. 얼마만큼 더 더워질 수 있을지, 또 장마는 얼마나 더 길어질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매해 재난은 새로운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내가 자주 걷던 집 앞 길가와 산책길 천변은 점점 더 허허벌판이 되어간다. 2023년 3월부터 전주시는 앞장서서 수천 그루에 달하는 나무들을 무분별하게 벌목해 왔다. 나무가 베어나간 그 자리에서 나는 자연의 빈자리를 피부로 느낀다. 나무가 만들어 주던 그늘도 없이 머리 위로 곧장 내리꽂히는 태양의 뜨거운 맛을 본다. 땡볕 위를 걷다 보면 금세 지치고 늘어진다. 이제 여름의 전주천은 더 이상 마음 편히 거닐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사라진 것은 시민들의 그늘뿐만이 아니다. 초록빛 잎사귀를 흔들며 위로를 건네던 버드나무, 그 품에 깃들어 살던 전주천의 상징적인 생명체들도 한순간에 터전을 잃었다. 지난 수십 년간 시민과 지자체가 땀 흘려 가꾸어 쉬리와 수달이 돌아오게 만들었던 생태하천의 역사가 단 몇 줄의 행정 명령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연둣빛 새순으로 봄을 알리고, 한여름에는 쉼터를 내어주던 그 싱그러운 풍경이 이제는 기억 속에만 남은 신기루가 되었다. 기후변화로 폭염과 열대야가 일상이 된 여름, 타 도시들은 바람길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도시의 열섬현상을 막으려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전주시의 생태 관념과 기후 시계는 거꾸로 흐르고 있다. 재해 예방과 하천 정비라는 해묵은 명목 아래, 수십 년간 천변을 지켜온 버드나무들이 단 며칠 만에 밑동만 남긴 채 잘려 나갔다. 최소한의 솎아베기만 하겠다던 시민사회와의 상생 약속은 기습적인 모두베기 앞에 무력하게 깨어졌고, 하천 환경에 미치는 기초적인 조사나 정교한 데이터 분석조차 없이 성급하게 중장비가 밀려들었다.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재난 앞에서도 당장 내리쬐는 볕을 막아줄 나무 한 그루의 소중함을 모르는 행정은, 과연 누구를 위한 정비인가.

나무들이 서 있던 그 쓸쓸한 빈자리를 바라보며,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비단 그늘만은 아님을 깨닫는다. 자연과 인간이 다정하게 공존하던 전주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우리는 통째로 빼앗겼다. 다가올 여름을 온전히 날 자신이 없다. 누군가는 지구를 살리겠다고 나무 한 그루를 정성껏 심고, 누군가는 행정 편의를 위해 수십 년의 시간을 단 몇 초 만에 베어낸다. 심는 자와 베는 자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왜 이토록 다른 방향으로 가는가.

생명을 품어 안는 자들이 미래의 가능성을 길러낸다. 잘려 나간 나무의 빈자리는 시리도록 뜨겁지만, 그늘을 빼앗긴 우리가 서로의 그늘이 되어줄 때, 전주의 여름은 다시 다정하게 만개할 것이다. 잘려 나간 전주시의 나무들을 기억하며, 다시 뜨거운 여름으로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