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바지’는 솜을 두어 지은 두툼한 바지를 가르킨다. 옛날에 시골 사람들이 방한용으로 흔히 입던 옷인데, 솜이 들어가 두루뭉술하고 헐렁하다 보니 입었을 때 맵시가 나지 않고 둔해 보였다. 비유적 표현으로 핫바지는 ‘아무나 쉽게 다룰 수 있는 만만한 사람’ 쯤으로 해석된다.
핫바지의 대명사는 바로 ‘충청도 핫바지’. 3김시대를 주도하던 김종필씨(JP)가 맨 처음 ‘충청도 핫바지론’을 들고 나왔다. 1995년 치러진 제1회 지방선거를 앞둔 때였다. 민자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충청도민들의 표심을 자극하기 위해 이 화두를 던졌다. “타 지역 사람들이 우리 충청도 사람들을 ‘핫바지’라고 부릅니다.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군소리 없이 입 다물고 있는 만만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충청도가 정말 핫바지입니까?” JP의 이 한마디가 충청도인들의 자존심을 크게 자극했다. 가뜩이나 제대로 사람대접 받지 못한다며 부아가 잔뜩 나 있던 충청도인들을 자극했음은 물론이다. 결과적으로 자민련이 충청권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가히 정치 9단인 JP가 핵심을 파고드는 화두를 던져 노련하게 외곽을 때린 대표적 사례다.
사실 호남 안에서도 전북 도민들이 느끼는 독특한 소외감이 투영될 때가 있다. 흔히 ‘호남’이라고 하나로 묶여서 불리지만, 정작 굵직한 인프라 투자 등은 광주·전남 위주로 돌아가고 전북은 뒷전으로 밀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왕왕 “우리가 광주·전남의 들러리냐, 전북이 핫바지냐” 하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이번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정가에서 ‘전북 핫바지론’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은 왜일까. 더불어민주당 전북도지사 경선과정에서 불거진 심각한 공정성 시비와 이로 인한 도민들의 집단적 소외감·배신감 때문이라는게 중론이다. 일련의 선거 과정에서 보여준 공당의 모습이 유권자들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는 것 아니냐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는 거다. 일부 도민들 사이에서 “중앙당이 어차피 결론을 정해놓고 판을 짜는 것 아니냐”는 강한 의구심이 생겨나게 됐고, 중앙당이나 후보들이 유권자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당심(黨心) 잡기’나 ‘줄대기정치’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은 폭발직전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표를 주니까 절차적 공정성은 팽개치는 게 바로 전북을 핫바지로 취급하는 증거”라며 울분을 토하고 있다. 중앙정부로부터 대형 국책사업을 뺏기는 등 결정적 시기마다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전북 정치권의 무력함이, 이번 민주당 경선의 난맥상과 겹치면서 재확인됐다. 이는 결국 전북만 늘 찬밥 신세에 핫바지 처지라는 자조 섞인 비판으로 이어지게 됐다. 전북 도민들이 받은 집단적 자존심의 상처가 곪아 터지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다.
위병기 이사· 전략기획실장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