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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만경강유역의 마한 소국

전북지역의 마한 소국은 함열함라 일대의 감해국(感奚國), 고창의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김제의 벽비리국(闢卑離國) 등에 대한 의견이 모아지고 있을 뿐, 대부분 연구자 개별 의견만이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문헌자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적인 자료를 근간으로 마한 소국의 공간적 범위를 추론할 수밖에 없다. 이 역시 문자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한 구체적으로 마한 소국명칭을 대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만경강유역에서는 익산시, 완주군, 전주시, 김제시 등을 4개 지역별로 마한 분구묘나 주거 유적의 빈도수가 높게 나타나기 마한 소국의 중심으로 비정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편의상 현재의 행정구역 중심이지만 인접된 지역에서는 중첩되고 있다. 먼저 익산시(Ⅰ-1소국)의 주요유적은 모현동과 영등동 일원에 분포되어 있는 분구묘와 주거유적을 들 수 있다. 모현동 묵동유적의 분구묘는 수평 확장과정 및 출토유물을 보았을 때 5세기 중 후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금강유역의 백제 석축묘에서 출토되는 고배와 직구호 등 동일한 유물이 부장되어 동시대에 축조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금강유역과 달리 마한의 전통적 묘제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완주(Ⅰ-2소국)지역 중심 마한 소국의 주요 유적은 완주 상운리와 수계리 분구묘, 그리고 익산 사덕의 주거유적으로 들 수 있다. 완주 상운리 유적은 완만한 구릉 일원에 위치하며, 전기단계부터 후기단계의 분구묘가 분포하고 있어 그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 가-1지구의 1호분의 매장주체인 토광에는 점토곽을 시설한 후 목관을 시설한 것으로 규모나 축조방법에서 볼 때 최고 유력자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부장유물인 환두대도, 금동이식, 철정, 철부, 철촉 등의 다양한 철기유물과 옥류, 토기 등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완주 상운리 분구묘는 군집양상과 규모, 출토유물 등에서 마한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던 고도의 철기제작 기술을 소유하고 있었던 유력 집단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벽비리국(闢卑離國)으로 비정되는 김제일대(Ⅰ-3)에서 주목되는 유적은 농경수리유적인 벽골제를 들 수 있다. 벽골제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330년에 시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기는 백제가 김제지역을 영역화하기 이전에 해당한다. 발굴결과 부엽공법과 토낭을 쌓아 제방을 축조하고 있는데, 토낭을 이용한 수법은 마한 분구묘를 성토하는 수법과 같아 벽골제 축조 주체는 마한 세력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전주지역의 소국(Ⅰ-4)은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으로 비정되고 있는데, 주요유적으로는 축조 중심연대가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전 분구묘와 6세기 초에 해당하는 장동 분구묘를 들 수 있다. 그리고 6세기 중엽이후의 주구를 갖춘 석실분이 축조된 안심유적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만경강유역에서 백제 영역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마한 분구묘가 축조되었던 이유는 마한의 성립지로서 강력한 마한문화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지역이 마한의 본향이라는 자긍심은 백제 무왕의 익산천도와 견훤의 후백제 건국으로 이어지고 근대에 이르기 까지 면면히 지속되고 있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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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0 17:41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전북지역의 마한 소국 2

전라북도에 자리잡고 있었던 마한 소국은 현재의 지명과 문헌상의 소국명을 음운학적 비교를 통해 위치를 비정해 왔다. 그러나 2~3 지역을 제외하고는 연구자들의 견해차가 워낙 심할 뿐 아니라 중심지역을 특정하기에도 애매한 현실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적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소국명을 특정할 수는 없을지라도 소국 중심지에 대한 접근은 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전라북도 마한 소국의 중심지를 추정하기 위하여 마한 분구묘나 집자리가 밀집된 공간적 범위를 설정한 결과, 대단위로는 금강과 만경강유역권역에 6개 소군집Ⅰ군과 동진강강유역권에서 3개 소군집 Ⅱ군, 그리고 고창지역을 중심으로 3개 소군집의 Ⅲ군으로 구분해서 추출할 수 있다. 이들 대단위 군집 Ⅰ, Ⅱ, Ⅲ군의 문화적 양상은 백제의 지방통치를 비롯한 정치적인 역학 관계 속에서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마한 정치 문화적 전통의 강약에 따라 때로는 백제 영역화 이후까지도 마한문화의 전통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양상도 보인다. Ⅰ군은 금강 정맥을 중심으로 다시 금강과 만경강유역으로 세분되는데, 금강유역에 해당하는 소국 중심은 함라함열황등지역(Ⅰ-1소국:감해국)과 군산지역(Ⅰ-2소국:비리국)으로 나뉜다. Ⅰ-1소국에서 대표적인 유적은 나지막한 5기의 분구묘가 나란히 배치된 황등 율촌리 유적으로서 익산지역에서 최초로 발견된 저분구묘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 1호분은 분구만이 축조되었고 매장부가 시설되지 않아 선분구 후매장이라는 분구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특히 5호분에서는 영산강유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대형옹관이 발견됨으로서 3세기 대에 마한의 영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영산강유역 대형 분구묘의 조형이 전북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Ⅰ-2소국의 대표적인 군산의 축동유적과 미룡동 유적을 들 수 있다. 축동유적은 분구묘 10기와 토광묘와 옹관묘 등이 조사되었는데, 능선의 정상부에 대형 분구묘 1,2호분이 자리잡고 그 하단으로 열을 지어 규모가 좀 작은 분구묘가 배치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2,3호분에서 출토된 원통형 토기는 함평 중랑유적, 나주 장동유적 등 영산강유역에서 이른 단계의 것들과 통하고 있다. 이를 통해 비리국으로 비정되는 Ⅰ-2소국은 서해를 통한 전남일원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던 마한 정치체로서 친연성을 읽을 수 있다. 금강하구유역에 위치하고 있는 Ⅰ-1-2소국의 중심연대는 3~4세기에 해당하고 있는데, 이 지역은 백제가 한성기부터 대외관문으로서 주목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웅진과 사비기에 들어서 금강하구는 대외관문 역할을 하는 중요한 요충지로서 백제는 이 지역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금강하구유역은 호남의 어느 곳보다 일찍부터 백제 석축묘가 축조되고 있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며, 이 지역에서 마한 분구묘는 4세기 이후 크게 발전하기 못하고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백제의 영역화 과정에서 이 지역의 마한 소국은 일찍이 백제에 편입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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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7 16:39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전북지역의 마한 소국 1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에는 마한과 관련하여 54개 소국의 국명과 아울러 대국은 만여가, 소국은 수천가로서 총 십여만호나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까지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마한의 공간적 범위가 경기, 충청, 전라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마한의 소국들도 이 지역 내에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각 지역에는 마한 성립과 관련되는 조기단계의 토광묘에서부터 마한의 발전기에 확산되는 분구묘계통의 분묘들이 광범위하게 연속적으로 축조되어 왔다. 또한 마한의 정치문화 중심지였던 지역의 경우에는 백제에 편입된 이후에도 마한 분구묘의 전통이 기층문화로서 지속적으로 축조되어 왔다. 그러나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는 마한 소국이 실제로 어느 지역에 위치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각각의 견해가 매우 달라 소국의 구체적인 실상에 대한 접근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마한의 소국에 대한 위치는 주로 지명의 음운학적인 유사성에 따라 비정되었거나, 역사서에 기록된 국명들이 북에서 남으로 위치한 순서에 의해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추정되어 왔다. 이에 따르면 전라북도에는 20여개의 마한 소국이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명을 음운학적인 방법만으로는 위치를 확증하기 어렵고, 견해 차이도 심해 마한 소국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가 일치된 전라북도의 마한 소국을 보면, 고창의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을 비롯해서 익산 함열의 감해국(感奚國)과 김제의 벽비리국(闢卑離國)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다수의 의견이 일치하는 곳은 부안의 지반국(支半國)과 정읍 고부의 구소국(狗素國)을 들 수 있다. 이외에 군산 회미의 만로국(萬盧國)과 익산의 건마국(乾馬國), 그리고 정읍의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과 전주의 불사분사국(不斯?邪國) 등도 2명 정도의 일치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나머지 11곳의 마한 소국위치 비정은 학자들 마다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어 문헌자료 분석의 한계를 실감하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고고학적인 자료인 분묘와 생활유적을 활용하여 밀집도에 따라 소국의 위치를 비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각 군집된 유적군 가운데 마한관련 유적이 백제 영영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축조되고 있는 곳이 확인되는데, 그만큼 마한문화의 전통이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는 백제 영역화 이전부터 강력한 세력을 가진 마한의 정치 사회적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삼국지』에 보이는 만여가(萬餘家)인 대국으로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대국은 주변 천여가(千餘家)로 구성된 소국 연맹체의 수장국으로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마한유적의 분포 밀집도를 바탕으로 분류해보면, 지도에서 보듯이 3개의 군집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Ⅰ군은 금강과 만경강유역을 중심으로 6개의 작은 군집들이 분포하고 있고, Ⅱ군은 동진강과 고창 흥덕을 경계로 하는 공간적 범위에 3개의 소군이 해당하며, Ⅲ군은 고창지역에 3개의 소군집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각각의 Ⅰ.Ⅱ. Ⅲ군은 마한의 성립이나 성장과정과 백제와 상호관계 설정에 따라서 그 특징을 달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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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3 16:46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 목지국은 삼한의 맹주국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한전에는 마한 54개국 각각의 국명을 기록하고 있고, 큰 나라는 만여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로서 총 10만여호로 구성되어 있다는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마한 사회를 국(國)연맹체 사회로 파악하여 그 맹주국으로서 익산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건마국과, 그 이후의 목지국에 이어서 서울과 한강하류를 지역기반으로 하는 백제국 중심의 마한연맹체로 설명하기도 한다. 특히 마한의 중심세력으로서 삼한 소국들을 정치적으로 이끌어 왔던 목지국에 대한 연맹체 맹주국 관련 내용은 「삼국지」 한전에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은 목지국과 같음)을 다스린다라 쓰여 있다. 그리고 변진(弁辰)전에는 24개국 명칭을 소개하고 그 중에서 12국은 진왕에 신속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이 왕을 삼아 대대로 세습했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왕이 되지 못하였다라 되어 있다. 한편 「후한서」 한전에서는 삼한은 모두 옛날에는 진국이었다 그리고 마한이 가장 강대하며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왕으로 군림하는데, 모든 국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 사람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두 사서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진왕은 마한 54개국과 변진 12개국을 통치하는 총왕(總王) 성격의 왕이었으며, 도읍은 목지국으로 정리될 수 있다. 목지국의 구체적 실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진왕의 실체에 대한 접근 못지않게 주요한 관심은 목지국의 위치 비정에 대한 연구라 할 수 있다. 우선 준왕의 남천지를 마한과 한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목지국의 위치를 일치해서 보는 견해가 많다. 또는 준왕의 남천지와 마한의 중심세력의 위치를 달리 보거나 시대에 따른 중심권 이동을 고려해서 목지국의 위치를 비정하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고고학적인 자료를 참고해서 목지국 위치로 지목되는 지역은 한강 중류지역의 서남쪽 철기문화 관련 분포지역, 중서부 이남의 직산이 포함되는 아산만 일대, 익산을 포함하는 금강유역, 영산강유역의 나주지역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들 지역들은 문헌사학계에서도 세부적으로 차이는 나지만 포괄적으로 위의 세 지역을 마한의 중심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삼국지」와 「후한서」에 준왕의 후손은 멸망하였으나 지금도 한인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라거나, 준왕 절멸이후 마한 사람들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는 기사가 주목된다. 두 사서의 기록에서는 공통적으로 준왕 이후의 마한은 이전과의 연속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인 자료로 보면 마한의 준왕계 절멸이후 새롭게 등장하는 마한의 왕은 마한 성립기의 토광묘 집단과는 계승적 관계가 없는 아산만 일대의 보령 관창리와 같은 주구묘 축조집단의 부활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마한 전역에서 주구묘계통의 분묘가 확산되었다는 점에서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아산만 일대를 목지국으로 비정할 수 있으며, 마한의 중심세력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배경에는 충청, 전라지역 토착민들이 가졌던 강력한 한(韓)의 문화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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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06 17:02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문화, 일본 고대국가 성립의 기초가 되다

일본의 방형주구묘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효고현 히가시무코(兵庫縣 東武庫) 2호분의 주구 내에서 한국 청동기시대 중기의 송국리형 토기가 출토되었고, 목관의 나이테 연대측정에 의하면 기원전 445년임이 밝혀졌다. 이 유적은 한반도 서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점토대토기와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에 의한 마한의 성립과 관련된 새로운 정치변혁과정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전래된 주구묘는 야요이 후기에 들어서면 지역적인 특징을 가지고 발전되어 가는데, 일본 고대문화의 중심지역인 긴끼(近畿)지방에서는 마한 주구묘의 변화와 동일한 패턴으로 축조된 분구묘가 출현한다. 분구묘라는 용어는 원래 일본 고고학에서 흙을 쌓아 분구를 갖춘 야요이 분구묘와 고분시대의 전방후원분을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된 명칭이다. 한국 학계에서는 분구묘라는 용어를 그대로 수용해 사용하는 것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지만, 먼저 분구를 조성한 후 분구를 되파서 매장부를 지상에 두는 축조방법의 묘제라는 것에 대한 인식은 같이하고 있다. 마한 주구묘는 정치와 사회발전에 따라서 점차 그 규모가 대형화되면서 영암 만수리나 함평 예덕리 만가촌 분구묘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분구묘로 변화된다. 그리고 점차 대형화가 이루어진 하나의 분구 내에 다장(多葬)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농경위주의 생업경제에서 비롯된 혈연중심의 사회현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의 경우에도 긴끼지방의 오사카 우류도오(大阪 瓜生堂)유적과 카미(加美)유적에서는 장방형 분구에 다장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마한 분구묘와 속성을 같이하고 있다. 오사카 瓜生堂 분구묘 마한 지역과 일본 긴끼지방의 주구묘는 4세기 전반까지 유사한 형태의 분구묘로 변화 발전한 형태로 축조된다. 백제가 마한지역을 영역화하는 영향 속에서도 마한 분구묘는 백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영산강유역이나 마한 전통이 강한 지역에서는 6세기 전반까지도 지속적으로 축조되고 있다. 한편 일본 긴끼(近畿)지역에서는 4세기 전반기에 들어서 다장 형태의 야요이 분구묘는 1인장인 전방후원분으로 변화되는데, 이는 권력자의 등장을 의미하며 긴끼 중심의 정치세력이 야마토(大和)정권의 중심에 자리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마한문화는 한반도 서해안 일대의 기층문화로서 백제 영역화 이후에도 지역적 전통에 따라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고, 일본은 마한문화에 뿌리를 둔 전방후원분체제에 들어서면서 일본 전형의 고대국가로 발전해 가는데 이를 계기로 마한 분구묘와는 차별화가 이루어진다.

  • 문화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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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2 16:58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마한문화는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

한반도 서해안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 주구묘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백제문화와 뚜렷이 구분되는 마한문화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고고학적인 자료이다. 90년대 중반 한국에서 처음 주구묘가 발견되었을 당시 그 연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주구 내에서 출토되었던 유물 가운데에서 토기 제작할 때 단단하게 하기위해 두드린 무늬가 찍힌 타날문토기에 대한 연대를 기원후 3세기로 설정하는 것이 학계의 보편적 견해였기 때문에 주구묘의 연대 역시 3세기를 상한으로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보령 관창리유적의 보고서에서는 주구 내에서 출토되는 토기를 분석한 결과, 청동기시대 중기의 송국리문화와 후기에 해당하는 점토대토기문화 집단과 관련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들 주구묘의 축조연대를 기원전 3~2세기로 설정했지만, 학계 다수의 연대관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일본 야요이 시대의 보편적 묘제인 주구묘는 축조수법이나 그 형태에 있어서 한국에서 발견된 주구묘와 유사한데, 그 출현연대를 야요이 전기 곧 기원전 3세기에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주구묘의 기원은 북부 구주에서 벼농사의 기원과 같은 것으로 긴끼(近畿)지역에 전파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농경에서 논의 구획에서 비롯된 묘제로서 각지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한편 진시황의 지시로 불노초를 구하러 바다를 건너온 서복(徐福) 전설과 관련지어 중국 진(秦)묘제인 위구묘(圍溝墓)의 영향을 받아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한국 주구묘의 상한연대를 기원후 3세기로 설정하게 되면 일본 야요이시대의 주구묘와 연대차는 물론, 그 원류에 대한 논쟁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보령 관창리유적 발견이후 익산 영등동, 서천 당정리 등 서해안 일대에서 급증하는 주구묘 자료는 일본의 주구묘 원류에 대해 재고해야 된다는 의견이 먼저 일본에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관창리 주구묘의 연대를 한국 청동시대 중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며, 특히 긴끼지방의 효고현 히가시무코(兵庫縣 東武庫)에서 출토된 송국리형 토기가 일본 주구묘 기원의 한반도설의 적극적인 증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한반도에서 긴끼지방으로 이주해온 도래인에 의해 직접 전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한국 주구묘의 연대를 청동기시대 중기까지 소급할 수 자료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일본 고고학자들의 주구묘에 대한 연구는 매우 각별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을 상징하는 고유의 고대묘제인 전방후원분의 원조가 바로 이 주구묘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일본 학계의 정설이다. 곧 일본 고대사회의 변화추이에 따라 주구묘는 분구묘로 발전되고, 분구묘는 다시 전방후원분으로 변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며, 이에 대한 연구자들의 긍지 또한 매우 강했음도 알 수 있다. 보령 관창리 유적을 직접 발굴 조사한 고려대학교 이홍종 교수의 전언에 의하면 이 유적 조사이후 일본 방형주구묘의 저명한 연구자 한명이 주구묘에 관한 연구에서 절필을 선언할 정도로 마한 주구묘의 발견은 일본 학계에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6.15 18:22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하)익산 황등제

황등제에 대한 문헌기록을 보면 상시연(上矢淵), 황등제(黃登堤), 료곶제(蓼串堤)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먼저 1454년에 편찬된『조선왕조실록』과 1530년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등 조선전기에 편찬된 사서에는 황등제가 상시연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1670년에 완성된『반계수록』과 1760년에 편찬된 『성호사설』 및 『성호선생전집』 그리고 1770년에 편찬된 『문헌비고』와 『증보문헌비고』에 모두 황등제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1798년 복태진의 상소가 기록된『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권 50 정조22년 11월 30일의 기록에도 유형원의 말을 인용하면서 황등제로 기록하고 있어 조선후기 어느 시기에 황등제로 명칭이 변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1756년에 편찬된『여지도서』에는 료곶제로 기록되어 있는데 같은 1756년에 편찬된 『금마지』 山川조에는 상시연으로 기록되었고, 제언조에는 료곶제로 기록하고 있다. 1861-1866년에 편찬된『대동지지』에도 상시연으로 기록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09년 임익수리조합을 설립, 증축하여 요교호로 불렸으며, 1935년 완주 경천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저수지의 기능을 상실하고 농경지로 변화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기저부는 흑회색의 점토(뻘)층이다. 제방의 축조는 뻘층 위에 니질점토와 회백색점토인 불투성 점토를 이용하여 교차쌓기를 하였고 토괴형태로 성토(Ⅰ층) 하였다. Ⅰ층은 조사과정에서 부엽층이 확인되었으며, 부엽이 확인되는 곳에서는 지반에 타격을 주어 다진 흔적이 일부 확인되고 있다. 제방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3차에 걸친 공정으로 축조되었으며, 이는 동일한 축조기법과 동일한 재료 등으로 보아 동시기에 제방의 안정된 축조를 위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방의 하단부 약 3m 깊이에서는 지름 10cm 내외의 긴 목재가 제방과 직교하고 약 3~4m 간격을 두고 확인되고 있어 제방축조과정에 방향과 작업구간 확인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엽층과 목재, 제방 하단부 토양은 샘플링하여 연대측정 자료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시굴조사와 발굴조사 과정에 샘플링한 자료에 대해서는 절대연대 확인을 위해 3개소의 기관에 AMS 분석(C14탄소연대측정)을 의뢰하였다. 그 결과 3개 기관 모두 목재와 부엽층의 경우 BC 5세기 ~ 3세기의 결과가 나왔으며, 대부분 BC 4세기경으로 추정하였다. 기저부 아래 기반층으로 추정되는 토양에 대한 분석결과는 BC 40세기~11세기로 확인되었다. 황등제의 축조될 당시에 중국은 전국시대에서 진한시대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며, 한국에서는 익산지역을 중심으로 마한이 성립되는 시기이다. 그런데 익산을 중심으로 진한대의 화폐나 청동거울 등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두 지역 간의 교류를 살필 수 있다. 또한 당시 1.3km에 달하는 제방을 축조하기위해서는 최첨단의 토목기술이 필수적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마한이 성립될 당시의 수준 높은 기술력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력을 높여 마한 성립의 경제적 기반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고 추정된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6.08 18:34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상) 익산 황등제, 벽골제보다 600~700년 앞서 축조

물은 인간 생명을 유지하는 원천이기도 하지만, 고대 농경사회에서 현대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존을 위한 생산 활동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질이다. 자연계에서 인간에게 주는 물은 때로는 넘쳐나 커다란 수해를 입히기도 하지만, 이를 잘 이용하면 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에, 중국 전설시대 왕조의 군왕들은 물 관리를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음은 잘 알려져 있다. 선사시대 이래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농경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물 관리가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었을 것인데, 청동기시대의 원시 수리시설에서 역사시대의 발달된 관계수리시설들이 여러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전라북도는 지형상으로 평야지대가 발달되어 있고, 강수량도 풍수하여 농경생활을 영위하기에 매우 적절한 지역이다. 따라서 타 지역에 비해 농경을 위한 수리시설유적들이 많은 편이며, 대표적으로 삼국시대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의 제언(堤堰)편에 보면 호남지역 3대 제언이라 함은 익산 황등제, 김제 벽골제, 고부 눌제를 일컫고, 이들 3대 제언을 호남과 호서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 가운데 황등제의 제방은 익산시 신용동 도치산에서 황등면의 황등산과 연결되며, 그 길이는 1.3km에 달한다. 현재는 23번 국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도로개량 이전의 원래의 도로구간이 일부분 남아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최근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는 옛 도로 부지에 남아 있던 추정 황등제 제방 부지에 대한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를 중심으로 한 397㎡의 면적에 대해서 이루어졌다. 제방의 하단 기저부의 폭은 약 22m이며, 잔존높이는 4.9m로 확인되었다. 제방은 물이 침투하기 어려운 점토인 흙덩이를 교차 쌓기 하였다. 그리고 흙덩이 사이사이에 풀과 나뭇잎을 깔았는데 이러한 축조공법은 김제 벽골제 제방에서도 확인된다. 황등제의 초축 시기는 문헌상으로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조선 전기 기록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수습된 목재와 풀 등 자연유물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대측정을 한 결과 기원전 4~3세기경으로 측정되었다. 지금까지 서기 330년에 초축으로 알려진 김제 벽골제가 한반도 최고의 수리 제방으로 알려져 왔었는데, 익산 황등제의 제방이 벽골제의 제방보다 무려 600~700여년이나 더 오래전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연대측정결과에 대한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국내외의 전문적인 기관 3곳에 의뢰한 결과, 위와 같은 동일한 연대가 추출되어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로서 익산 황등제를 상정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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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01 18:42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하) 보물로 지정된 봉덕리 금동신발

금동신발은 뒷부분이 포개어진 상태로 노출되었고, 우측 신발 내부에서 직물과 함께 뼈가 확인됨으로서 착장한 상태로 부장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신발의 길이는 32㎝, 너비 10.7㎝, 최대 높이 11.9㎝로 계측되지만, 양측의 신발이 약간의 차이가 있다. 먼저 제작수법을 보면 금동제 판을 목깃, 좌우 측판, 바닥으로 나누어 결구하고 있다. 양 측판 상부 안쪽으로 높이 2cm의 목깃 판을 세우고 그 둘레에 9개의 리벳을 박아 고청하였다. 신발의 앞부분 곧 콧등에 해당하는 곳에는 4개의 리벳으로 양 측판을 겹쳐 결합하고 있으며, 뒷축 부분에도 역시 양 측판을 겹쳐 3개의 리벳을 상하로 고정하고 있다. 그리고 양 측판의 하단은 둥글게 접어 그 안에 바닥판을 넣어 받칠 수 있도록 한 후 양측에 각각 4개씩 작은 리벳으로 고정하고 있다. 이 금동신발의 가장 큰 특징은 목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투조로 구획하고 수많은 상서스러운 동물을 화려하게 배치하고 있는 점이다. 양 측판을 보면 상중하 3단으로 문양대를 구획했는데, 상하에는 풀 혹은 구름으로 추정되는 문양을 반복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3단 가운데 중간의 문양대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중앙 부분에 귀갑문 곧 육각형으로 구분하고 상하에 반육각형의 문양대를 형성하여 3단으로 구분된다. 상하 반육각형의 내부에는 새(오리)를 비롯한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귀갑문 내에는 용과 봉황, 인면조와 쌍조문 등이 입체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뒷축 부분에는 양 측판을 결합하여 형성된 3중의 원형 구획 안에 화염문을 투조로 장식하고 있다. 한편 바닥에는 앞에서 뒤쪽으로 4개+5개+5개+4개의 원형 구획을 한 후 각각 6엽의 꽃무늬로 장식하고 중앙에 징(스파이크)를 18개 부착하였다. 원형 구획의 중앙 부분에는 힘찬 용무늬로 장식하고 뒷꿈치 부분에는 역사상을, 앞부분에는 귀면상을 배치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양 측판의 상단과 같은 문양을 투조로 장식하고 있다. 금동신발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그리고 일본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유물로서 각각의 특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봉덕리 금동신발은 가장 예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양의 내용에서도 상서스럽고 신비적인 문양을 입체감 있게 표현한 점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백제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금동신발의 성격에 대해서는 주로 백제 중앙에서 사여를 통한 지방통치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현지에서 제작했을 가능성에 대한 견해도 있다. 다만 이러한 금동신발을 착장하고 매장된 피장자의 신분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최고지배자였을 것임은 쉽게 짐작된다. 고창 봉덕리 고분의 구조나 금동신발을 비롯한 출토유물에서 백제시대까지 마한 모로비리국 전통을 이어받았던 지역 수장의 세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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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5.25 18:08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상) 보물로 지정된 봉덕리 금동신발

사적 제531호 고창 봉덕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이 30일간의 공고기간을 거쳐 4월 21일 보물 제 2124호로 지정되었다. 완주 갈동유적의 세형동검 거푸집에 뒤이어 봉덕리 마한분구묘 유적에 출토된 금동신발이 보물로 지정됨에 따라 전북지역의 마한 문화의 위상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금번 금동신발의 보물지정과 관련하여 필자는 2009년도 봉덕리 고분군 발굴 당시의 책임자로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그것은 지방자치단체의 열악한 재정을 무릅쓰고 지역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단체장의 강력한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발굴이었기에 지면을 빌어 당시 군수님과 담당자들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사실 봉덕리 1호분의 몇 개월에 걸친 발굴조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까지도 매장주체부로 축조된 석실들이 대부분 도굴된 상태여서 출토유물 역시 대부분이 토기 파편뿐이었다. 그나마 수습된 중국제 청자의 작은 파편에서 조사단은 학술적 위안을 삼아야 했을 지경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발굴조사가 마무리될 무렵에 분구의 동남 모서리 근처에서 도굴의 피해를 당하지 않은 석실 1기가 발견되었다. 조사결과 이 석실은 수혈식으로 이미 확인되었던 횡혈식과는 다른 구조의 석실이었는데, 만일 이보다 규모가 월등한 횡혈식 석실이 도굴의 피해를 당하지 안했다면 얼마나 화려한 부장유물이 우리와 마주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안타까움을 넘어 고대사 복원의 진정한 사료를 무참히 짓밟아 버린 도굴의 만행에 분노마저 느끼게 했다. 마침내 석실 내부의 조사 일정을 정하고, 석실의 뚜껑돌을 들어올리기 전에 작은 틈새로 카메라로 촬영하여 내부를 살펴보니 부장된 유물들이 완전한 상태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피장자 발치쪽에서 한 켤레의 금동신발이 시야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순간 우리 조사단에서 수습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문화재청에 긴급 지원 요청하여 3일에 걸친 작업 끝에 국내에서 가장 완전한 형태의 금동신발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은제머리장식, 소호장식유공호 및 그릇받침, 장식대도, 청동제 탁잔, 화살통, 중국제 청자, 각종 토기류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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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27 18:00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중국·일본의 주구묘

주구묘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모두 발견되고 있는 분묘이지만, 그 출현 시기나 명칭, 그리고 각각 구조특징을 달리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주구묘, 중국은 위구묘(圍溝墓), 일본의 경우는 방형주구묘라 불리는데, 기본적으로 무덤 주위에 도랑을 파서 돌린 축조 방법은 동일하다. 중국의 위구묘는 1959년에 산시(山西) 허우마치아오춘(侯馬橋村)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는데, 1969년 이 유적에서 군집을 이루고 있음이 또 다시 확인되었다. 이후 섬서성과 산서성, 안휘성, 절강성 등 넓은 지역에서 많은 수의 위구묘가 발견되었고, 그 시기는 춘추말기 진(秦)에서 당나라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위구묘는 춘추중기부터 진나라까지 릉원제도의 발전과 특성에 따라 발전되어 왔는데, 주구를 한 단위의 릉원으로 여기고 국군(國君)이 중심인 릉원의 출현을 반영한 것으로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알려져 있는 춘추 전국시대 진공(秦公)이나 진왕의 릉원에는 대부분 주구가 돌려져 있다. 1964년 일본 동경 하찌오(八王子)시 우쯔끼(宇津木)에서 처음으로 4기의 주구묘가 발견되었을 당시에는 일본의 학자들도 이 유적의 성격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명칭을 환구상특수유구(環溝狀特殊遺構)로 명명할 정도였다. 그 후 주구의 내부에서 작은 구슬과 토기편이 발견되고, 낮은 분구가 축조된 양상을 고려하여 분묘임을 인식하고 방형주구묘라는 명칭을 부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에서 주구묘는 평면 형태에 따라 방형주구묘와 원형주구묘로 구분하며, 야요이시대를 대표하는 분묘로서 일본 전역에서 8000기 이상 조사되었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주구묘는 기나이(畿內)지방을 중심으로 야요이 전기에 축조되기 시작하여 전역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3세기후반 이후 방형주구묘는 전방후원분으로 변화하면서 그 규모가 커지고 고분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한국에서 주구묘가 발견되기 이전에는 일본의 주구묘는 중국의 위구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것은 중국 진나라 때에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자손들이 그들의 전통에 따라 축조한 것으로 보았다. 그 근거로서는 일본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주구묘가 후쿠오까(福岡)의 히가시오다(東小田)의 미네(峰)유적으로 유적 근처에는 진나라에서 불노장생초를 구하러 바다 건너왔다는 서복(徐福)의 전설이 있는데, 이때에 서복과 같이 건너온 사람들의 후손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최근 연구결과 마한지역에서 발견된 주구묘의 상한은 청동기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송국리문화 단계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견해들이 발표되고 있다. 따라서 일본 주구묘의 기원은 중국이 아니라 마한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일본 야요이시대의 새로운 문화는 마한지역에서 건너간 집단에 의해 주도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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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20 17:55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주구묘의 성격

한국에서 주구묘의 발견은 마한의 분묘문화를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었고, 나아가 백제문화와 뚜렷이 구별되는 마한문화의 정체성 확립에 기준이 되는 매우 중요한 고고학 자료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주구묘의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토기들은 마한 토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주구묘가 분포하는 공간적 범위는 마한의 정치 문화의 영역과 일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구묘의 축조 방법을 보면, 우선 주구(도랑)를 굴착하여 그 흙으로 낮은 분구를 쌓아 무덤의 외형을 만든 다음, 분구의 중앙에 토광을 되파서 매장부를 만들고 시신을 안치한 후 다시 흙으로 성토가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무덤에서처럼 시신을 지하에 안치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안치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주구에서 옹관이 안치된 예가 있고, 분구의 대상부에서도 옹관이 안치된 예가 있어 다장도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곧 직계 혈연관계에 의한 가족장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주구묘는 마한 성립기의 토광묘와는 전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어 두 묘제는 계승적 관계 속에서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없다. 곧 토광묘와 주구묘는 분묘 축조 전통이 전혀 다른 집단에 의해 축조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토광묘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철기문화와 점토대토기문화를 가지고 내려온 집단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 자료로는 『삼국지』와 『후한서』에 기록된 고조선 준왕의 남천 기사라 할 수 있다. 『후한서』 위서 동이전 한조에 조선왕 준(準)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절멸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라 하여 고조선 준왕계와 마한계는 계통이 다름을 적시하고 있다. 한반도 서해안 일대에는 마한 성립 이전에 청동기 문화의 중기에 해당하는 소위 송국리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주요 특징으로는 원형 집자리와 계란 모양의 송국리형 토기를 들 수 있다. 그런데 보령 관창리, 서천 당정리, 익산 영등동 등을 비롯한 주구묘 유적에서는 송국리 문화의 유적들과 중복되어 발견되었다. 특히 주구 내에서 송국리 토기편들이 확인되고 있어 송국리 문화 단계에 주구묘가 특정지역에서 축조되고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특히 목관 나이테 분석에 의해 기원전 445년으로 밝혀져 일본에서 야요이시대의 가장 이른 시기의 주구묘인 효고현(兵庫縣)의 히가시무코(東武庫) 2호분에서 출토된 한반도계 송국리형 토기는 일본 주구묘의 기원이 한반도에 있으며, 한반도 주구묘의 축조연대도 송국리 문화단계까지 소급될 수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한반도 서해안 일대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던 청동기시대 중기의 송국리 문화단계에 이미 주구묘가 축조되고 있었고, 그것은 한(韓)문화의 뿌리라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마한 성립기 중심세력인 고조선계 준왕의 절멸이후 새로이 등장하는 마한의 중심세력은 한의 기층세력으로 새롭게 부활한 주구묘 축조집단으로 볼 수 있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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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13 18:02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주구묘(周溝墓)의 발견

1995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보령 관창리에서 대규모 집단으로 확인된 주구묘 (무덤 주위에 도랑을 파서 돌린 분묘)는 한국 고고학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주구묘의 연구결과 마한 성립기 이후 발전기에 마한고지에서 폭넓게 조성되었던 마한의 대표적인 묘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일본에서는 이러한 주구묘가 관동에서 구주지역까지 분포되어 있어서 야요이시대(B.C 3세기A.D 3세기)의 독자적이며 보편적인 묘제로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관창리 유적이 발견된 이후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도 야요이 문화의 원류는 한반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현장에서 가끔 우스갯소리로 유적의 발견도 유행을 쫓는다라는 얘기를 나누곤 하는데, 새로운 유적이 발견되면 동일한 성격의 유적이 잇달아 발견되기 때문에 나온 얘기이다. 그것은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주구묘도 예외는 아니어서 익산 영등동과 서천 당정리에서 주구묘가 잇달아 발견되었고, 1999년 서해안고속도로 건설구간에서 다수의 주구묘 유적이 조사되면서 마한의 대표적인 묘제임이 확인되었다. 보령 관창리 유적은 고려대학교 매장문화연구소 주관으로 발굴면적 11만1000㎡에 대한 조사결과, 주구묘 99기와 송국리형 주거지 100여기가 확인되었다. 주구묘의 매장주체부는 거의 모두 삭평되어 결실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성격을 알 수 없었지만, 평면형태나 주구의 개방부에 따라 7개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주구 내에서 발견된 토기 가운데 두형토기나 점토대토기를 참고하면 B.C 32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익산 영등동 유적은 청동기시대 전기의 방형 주거지 4기, 중기의 송국리형 주거지 19기와 더불어 주구묘는 4기가 확인되었다. 이 유적은 택지개발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조사 이전에 주변지역은 이미 개발이 이루어져 유적의 일부분이 훼손되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특히 영등동 1호 주구묘에서는 토광묘가 매장부로서 확인된 최초의 예가 되는데, 내부에서 철부와 철도자편이 발견되었다. 서천 당정리 유적은 송국리형 주거지 16기와 23기의 주구묘가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서도 관창리나 영등동 주구묘와 같이 주구 내에 청동기시대 주거지 출토 토기들이 혼입된 양상을 보인다. 또한 분포양상에 있어 주구묘는 몇 기씩 인접하여 군집을 이루고 있는 점이 보이는데, 이는 혈연집단의 친연성에 따른 축조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1990년대 중반 한국에서도 주구묘들이 잇달아 발견되는 큰 이유는 그 이전에는 고분 발굴조사에서 주로 매장주체부를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유적 주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넓은 범위를 정밀하게 조사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자료가 증가함에 따라 1996년에 호남고고학회 주관으로 「호남지역의 고분의 분구」라는 학술대회를, 그 해 역사학대회 고고학 분과의 주제로 「주구묘의 제문제」를 선정하여 주구묘 연구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게 되었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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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06 18:09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 성립기의 대외교류

마한은 기원전 32세기경에 익산을 중심으로 만경강유역에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되었음이 문헌과 고고학적인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무렵 중국 중원지방에서는 진나라가 패권을 잡았던 전국시대가 끝나고 오늘날 중화민족 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한나라가 유방에 의해 서안지역 일대에 건국되었다. 그런데 한강 이남의 대표적인 정치체인 마한이 성립, 성장하는 시기에 중국 중원의 한나라와 교류의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어 두 중심 지역 간의 교류를 살필 수 있게 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진한조에 보면, 진한은 마한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 진나라의 고역을 피하여 한(韓)국으로 왔는데, 마한이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다르다 ....(후략) 라고 적고 있다. 또한 한조에는 후한(後漢)의 환제영제 말기에는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한(漢)의 군현이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아 군현의 백성들이 한(韓)으로 유입되었다라 적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중국 전국시대부터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이민들이 마한 지역으로 이주해 왔으며, 간접적으로는 교류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고고학적인 유물에서도 교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975년, 전주에서 김제로 넘어가는 도로변 완주군 상림리(현 전주시 완산구 상림동)에서 묘목을 캐다가 26자루의 중국식 동검이 발견되었다. 이 동검은 비파형이나 세형동검과 달리 칼날이 직선적이며, 칼날과 함께 일체형으로 주조된 손잡이의 중간에는 마디모양의 돌기가 있는 점이 특징이다. 검의 길이는 45cm47cm로 다양하기 때문에 동일한 용범(거푸집)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특히 사용흔이 없기 때문에 아직 유통 이전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최근 자연과학적 분석결과에 따르면, 대부분 한반도산 원료를 사용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중국에서 건너온 장인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87년에는 익산 평장리에서 농로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세형동검 2점, 동모, 동과, 동경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토광묘로 추정되는 유구는 이미 완전하게 파괴된 상태였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주변을 정리한 결과, 구름무늬 바탕에 풀잎과 이무기로 장식한 청동거울 곧 「雲地四葉四?銅鏡」이 작은 파편으로 수습되었다. 이 동경은 복원 결과, 직경 13.4cm 정도이며 전한(前漢)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최근 익산 신흥정수장의 북서쪽에 형성된 장자산의 서쪽과 남쪽 능선 일원의 지표조사 과정에서 진나라 시황제 때부터 전한시대(기원전 118년)까지 주조된 동전인 반량전(半兩錢) 2점이 발견되었다. 동전의 전체적인 형태는 원형의 외격에 살짝 둥근 테두리가 형성되어 있으며, 방형의 내곽이 뚫려있다. 부식이 심한 편이이어서 半자의 일부는 부식으로 훼손되었으나 兩자는 비교적 명확하게 확인된다. 반량전의 외곽 직경은 각각 2.35cm, 2.45㎝, 내곽 폭은 각각 0.8cm, 0.85㎝로서 거의 같은 크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중국이나 일본제 유물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자료를 통해 마한은 성립 이후 성장과정에서 활발하게 대외교류 활동을 해 왔음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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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30 19:43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보물을 품은 완주 갈동유적

2003년 필자는 마한과 일본 야요이 분구묘에 대한 비교연구를 위해 일본 리쯔메이칸(立命館) 대학에 머물고 있었다. 그 해 여름 일본 언론을 통해 완주 갈동에서 출토된 세형동검의 거푸집에 대한 주요기사를 접하면서 흥분했던 기억이 새롭다. 세형동검은 한국식 동검이라 불리는 한반도 후기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서, 중국 동북지방과 일본 구주지역에서도 폭넓게 발견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형동검의 생산을 직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거푸집이 정확한 유구에서 발견되었으니 국내외의 많은 연구자들에게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완주 갈동유적은 전주시 관내 국도대체 우회도로 개설구간에서 발견된 것으로 2003년 1차 조사에서 토광묘 4기와 제의유적 1기, 2007년 2차 조사에서 토광묘 7기와 제의유적 3기가 확인되었다. 이들 유적에서는 세형동검과 청동거울을 비롯한 청동유물, 철기류, 그리고 점토대토기와 흑도장경호 등이 출토됨에 따라 전주완주지역에서 마한 성립기 유적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려준 계기가 되었다. 거푸집은 갈동 1호 토광묘의 남쪽 단벽에서 세워져 노출되었고, 길이 3233.1cm, 폭 3.2cm이며 활석계 석재로 제작되었다. 이 거푸집은 동검과 동과를 제작하는데 사용한 것으로 2매를 한 쌍으로 하는 합범(合范)인데, 한 점은 한쪽 면에만 동검의 거푸집을 새겼고, 다른 한 점은 동검과 동과의 형태를 각각 양면에 새겼다. 그것은 동과를 만들었던 거푸집의 1매가 파손된 후 나머지 1매를 재사용하여 세형동검의 거푸집으로 재사용한 결과를 볼 수 있다. 갈동유적 조사 이전에 국내에서 확인된 청동제품 생산을 위한 거푸집은 평양 장천리, 용인 초부리, 전남 영암 등인데, 모두 신고품이거나 출토지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결여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갈동 출토 거푸집은 출토 지점과 출토 정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례라는 점에서 자료의 진실성은 다른 거푸집들과 비교하기 어렵다. 또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당시 사회의 청동기 주조기술을 보여주는 데도 탁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아가 부장양상 뿐만 아니라 당시 청동기를 제작했던 장인의 위계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같은 중요성이 인정되어 2019년 6월 보물 제 2033호로 지정되었다. 이 유적은 도로부지에 대한 조사만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적 범위는 이보다 훨씬 너른 범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일부는 경작지로 혹은 나대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각별한 보호대책도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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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23 18:15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의 본향 만경강유역

전북의 서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만경강유역은 마한의 본향이라 일컬을 만큼 마한의 성립과 성장에 관련된 유적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다. 북쪽으로는 익산 미륵산, 남쪽으로는 김제 모악산을 경계로 하고, 동쪽으로는 노령산맥이 막아주고 있어서 분지와 같은 지형이지만, 서쪽으로는 지평선이 보일만큼 널따란 평야가 펼쳐져 있다. 평야로 형성된 분지와 같은 지형의 중앙으로 만경강이 흐르면서 풍부한 수량을 확보할 수 있기에 농경을 영위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천혜의 지역이다. 만경강의 북쪽 익산지역은 일찍이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마한의 고도로 인식되어 오면서도 금강유역의 백제문화권역에 포함되어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가 증가함에 따라 익산지역의 대부분 유적들은 금강이 아니라 만경강 수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강유역과는 다른 문화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만경강문화권역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만경강 남쪽의 전주완주김제 지역에서 마한관련 유적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된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특히 전주 혁신도시 건설과정에서 완주 갈동유적이 발견된 이후 마한 성립을 뒷받침하는 토광묘 유적들이 130여기 이상 봇물 터지듯 잇달아 확인되었다. 완주 갈동유적은 2003년과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전주 혁신도시를 관통하는 서부우회도로 개설과정에서 17기의 토광묘가 확인되었다. 이후 갈동과 인접한 덕동유적에서는 5기의 토광묘에서 조문경과 세문경, 동과 등이 출토되었고, 원장동유적에서는 5기의 토광묘 가운데 1호분에서 세형동검 5점과 세문경 2점, 그리고 동부와 검파두식 등이 확인되어 이 지역 단일 유구 가운데 가장 많은 청동유물이 출토되어 주목되고 있다. 2011년 국내 최대 규모의 밀집도를 보이는 신풍유적에서는 81기의 토광묘가 확인되었고 각각의 분묘에서 점토대토기, 흑도장경호, 세형동검, 동경, 철기류가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혁신도시의 유적들보다 위계가 낮은 것으로 추정되는 소규모의 토광묘들이 중인동에서 9기, 중화산동에서 15기가 확인되었다. 한편 군집을 이루고 축조된 토광묘 유적과 동일한 공간 내에서 발견되고 있는 구상유구에서는 원형점토대토기와 제의와 관련되는 두형토기가 파쇄되어 공반되고 있다. 두형토기가 토광묘에서는 부장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장송의례와 다른 형태의 제의 의례가 구상유구를 중심으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후대의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마한사회의 제의의례를 유추할 수 있다. 구상유구에서 보이는 제의 행위는 변화 발전되어 왔을 것인데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과 같은 존재는 농경사회에서 파종기와 수확기에 귀신에 제사를 주관하는 자와는 격이 매우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곧 천군은 당시 사회통합의 리더로서 마한 사회의 정치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만경강유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새롭게 전개된 토광묘라는 묘제와 제의관련 유구를 통해 볼 때, 이 지역은 B.C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마한의 성립지로서 가히 마한의 본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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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16 18:29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성립 전야(前夜)의 고고학 증거

인류가 남긴 인위적인 구조물이나 도구들은 당시 문화와 사회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들이다. 그 가운데 무덤유적은 전통성과 지속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종족 집단의 출자나 성격을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곧 새로운 묘제가 갑자기 출현하는 것은 집단의 이동을 의미하거나 강력한 문화적 영향을 가정할 수 있지만, 대부분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만경강 유역의 익산과 전주완주지역에서 점토대토기와 흑도장경호, 세형동검과 동경, 그리고 철기가 부장된 토광묘가 집단을 이루고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토광묘는 청동기시대의 묘제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철기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새로이 축조된 묘제로 이해되고 있다. 이 묘제는 중국의 동북지방이나 한반도 서북지방에서 이주해온 집단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마한 성립의 주체세력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이다. 마한 성립의 주체인 토광묘 집단은 만경강 유역에 갑자기 안착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마중물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들의 흔적들이 속속 들어나고 있다. 이러한 선행적 집단에 의해 축조된 묘제는 토광묘를 기본 속성으로 하지만 내부에 목관을 안치하고 이를 돌로서 둘러싼 소위 적석목관묘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부장된 유물에서 보면 점토대토기나 세형동검을 비롯해서 토광묘의 출토유물과 성격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출자가 동일한 집단임을 알 수 있다. 적석목관묘는 한반도 서해안 일대의 경기 충청 전라지역에서 산발적으로 발견되고 있는데, 만경강유역의 토광묘처럼 군집을 이루지 않고 대부분 1기?2기 정도 분포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이 분묘에서는 세형동검이 다수 부장되고, 특히 기원전 4세기경에 해당하는 나팔형동기, 방패형동기, 검파형동기와 더불어 팔주령, 동경, 간두령 등 의기와 관련된 유물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곧 적석목관묘의 피장자는 종교적 제의를 주관하는 오늘날 사제와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적석목관묘의 분포 의미는 만경강유역에 토광묘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선행적으로 들어온 집단으로서 청동기를 비롯한 문물을 분배해 주고, 제의를 주관함으로서 세력화와 집단화를 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통성이 강한 지석묘와 송국리 묘제 영역에서는 강한 배타성이 작용했을 것으로 세력화를 꾀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적석목관묘를 축조한 피장자는 풍부한 제의적인 청동기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장으로서의 자리매김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만 기층 송국리문화나 지석묘 사회와는 차별되는 제의 주관자로서 이후 토광묘 축조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올 수 있는 정보나 기회를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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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9 19:44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역사문화권정비법'에 「전북의 마한」 당연히 포함돼야

금년 6월 10일부터 시행 예정으로, 2020년 6월 9일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 (약칭: 역사문화권정비법)이 제정되었다. 제1장 총칙에 보면, 이 법은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문화권과 그 문화권별 문화유산을 연구조사하고 발굴복원하여 그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알리고 지역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법 제2조(정의)에서는 마한역사문화권을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남 일대 마한 시대의 유적유물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으로 한정하고 있을 뿐, 전북지역의 마한 성립과 발전에 관련된 유적들을 제외하고 있어 많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먼저 우려되는 점은 영산강유역 중심의 전남지역의 마한 연구만으로는 제대로 된 마한사를 복원할 수 없는 절름발이 연구에 머무르게 될 것이란 점이다. 또한 자칫 소지역주의에 치중된 나머지 편향되고 왜곡된 연구 경향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문화권정비법의 마한역사문화권역에서 전북지역 마한의 역사와 문화가 제외된 것은 전북의 정치권이나 행정, 그리고 학계마저도 한걸음 뒤처져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단 반성부터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전북지역이 마한의 성립지로서 가지는 위상에 걸맞지 않게 마한 연구에서 주체가 되지 못하고 피동자의 입장이 된 듯하다. 또한 전북지역이 마한역사문화권에서 제외된 것은 경제개발시대에 전북이 소외되어 왔던 맥락에서 드는 우려는 단순한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다. 전북지역은 한강 이남에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최초로 성립된 정치체인 마한의 본향으로서 진변한을 아우르는 삼한의 맹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과정들을 증명하는 실체적 고고학 자료들이 전북지역에서 속속 밝혀지고 있다. 특히 <삼국사기> 「열전」 견훤조에 우리나라는 삼국의 시초로 마한이 먼저 일어난 뒤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그런 까닭으로 진한 변한은 우리나라를 뒤따라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백제는 금마산(익산)에서 개국하여 600여년이나 내려왔는데(..중략..)완산에 도읍을 세우고 의자왕의 숙원을 풀어 주고자 함이다이라 하여 마한과 백제를 일체화 시킨 마한역사문화의 계승의식을 읽을 수 있다. 곧 익산 일원에 역사적으로 면면히 흐르는 전통적 마한 의식을 바탕으로 전북의 마한역사문화권역은 당연히 역사문화권정비법에 포함되어야 하는 당위성이 강조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보면, 문헌자료의 절대 부족으로 6700여년간의 마한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데 많은 장애가 있어 우리 고대사의 중요한 시기인 삼국 정립기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지역에 치우친 마한역사문화권역 설정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 또한 한국 고대사회의 역사문화연구가 정치적 선입견이나 힘의 논리에 좌우되는 점에 경계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최근 전라북도는 <역사문화권특별법> 관련 세미나를 거쳐 정리된 전북지역의 마한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문화재청과의 협의를 통하여 마한역사문화권에 전북지역을 포함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역사문화권정비법 제정을 지켜보면서 한 연구자로서의 바램은 숟가락 하나 덤으로 올려놓아 몫을 찾는 것보다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전북지역의 마한을 밝혀내는 노력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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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2 18:21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의 고도 익산

익산지역은 마한과 백제의 정치문화 중심지로서 우리나라 고대사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헌자료의 빈곤에서 비롯된 연구 부족으로 그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해 왔지만, 최근 고고학 자료의 증가와 그에 대한 연구결과 익산지역이 새롭게 주목되고 있다. 3세기 중엽의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는 연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의 공격을 받은 고조선 「준왕」이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 건너 한지(韓地)에 와서 한왕이 되었는데, 그 후 절멸되었다라 기록되었다. 이후 5세기 중엽의 『후한서』에서는 『삼국지』의 내용을 동일하게 이어받고 있지만, 한(韓)을 마한으로 바꾸어 기술하고 있다. 이후 우리나라 사서인 『삼국유사』를 거쳐 『제왕운기』와 『고려사』에서는 구체적으로 금마를 마한의 개국지로 지목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익산지역은 오래전부터 마한의 고도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익산지역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많은 청동유물들이 신고나 수습되면서 청동기문화의 중심지로 주목되었고, 이러한 고고학 자료를 마한과 관련짓고자 하는 접근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 자료들이 대부분 신고유물들이어서 그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익산 신동리유적에서 청동유물과 철기, 삼각형점토대토기가 출토되면서 마한 고도 익산에 대한 정보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 만경강을 중심으로 북쪽의 익산지역과 남쪽의 전주, 완주, 김제지역에서 집단 토광묘가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이들 토광묘에서 점토대토기와 흑도장경호로 대표되는 토기류, 세형동검과 청동거울을 비롯한 청동유물과 더불어 철제 도끼와 낫이 확인됨에 따라 새로운 물질문화인 철기의 유입은 마한 성립의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문헌자료를 통해 보면 마한 성립의 핵심지역은 금마일원으로 상정할 수 있지만, 최근 고고학적 성과에 따라 좀 더 공간적 범위를 확대하여 만경강유역을 마한태동문화권으로 설정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하다. 왜냐하면 최근 입법화가 추진되고 있는 역사문화권 특별법에서 전북의 마한문화권역이 추가됨에 따라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준비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 이후의 문헌기록이나 전승되어 내려온 각종 설화나 민속놀이에서 보면 백제보다는 오히려 마한과 관련된 내용들이 풍부하게 남아 있는데, 곧 익산지역에는 마한 전통의 문화가 그만큼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익산을 비롯한 만경강유역에서는 백제 영역화 이후에도 백제의 묘제를 채용하는 것이 아니라 5세기 후엽까지 마한전통의 분구묘를 지속적으로 축조하고 있는 점에서 강력한 마한문화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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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23 18:12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의 제사

최완규 원광대학교 교수,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 농경을 생업경제의 근본으로 삼았던 고대사회에서는 농경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비, 바람, 햇볕 등 자연현상에 대한 외경심이 매우 강했음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또한 씨앗을 뿌리거나 추수의 결과에 대해서도 인간의 의지보다는 하늘의 뜻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믿어왔을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농경을 주제하는 천신에 대한 제사의식으로 나타나 하나의 신앙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해마다 5월 씨앗을 뿌리고 나면 귀신에 제사를 지내고, 떼를 지어 모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며 노래와 춤으로 즐겼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장단을 맞추는데 흡사 중국의 탁무와 같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 또 다시 이렇게 한다라 기록되어 있다. 농경과 관련된 의례 중, 고구려에서는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국중대회가 있었는데 동맹(東盟)이라 하였고, 동예에서도 10월에 밤낮으로 술마시고 노래하며 즐기는 무천(舞天)과 부여의 영고(迎鼓) 등이다. 이를 통해서 보면, 봄철 씨앗을 뿌린 후 지내는 제사보다 10월에 수확과 더불어 행해지는 제사가 국가적으로 행해지는 대규모의 의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곧 5월 파종 뒤 행해지는 제사는 소규모 집단인 읍락별로, 10월의 수확제는 국읍의 천군에 의해 진행되는 국가적 제사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기사로는 귀신을 섬기는데 국읍에는 각 한사람을 세워서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이라 한다. 또한 각 나라에는 별읍이 있는데 이를 소도라 하며, 그곳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긴다. 그 지역으로 도망 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않아서 도둑질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다. 민속학적 연구에 의하면 소도는 제의가 행해지는 신성지역, 또는 읍락의 원시 경계표시라고도 한다. 한편 마한의 성립과 관련 새로운 물질문화인 철기문화는 기존의 청동기문화와 충돌이 불가피했을 것인데, 소도는 이러한 충돌을 완충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최근에는 큰 나무를 세웠다(立大木)는 위의 기록과 관련있는 고고학적 자료들이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초기철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청동방울, 청동거울, 간두령 등은 입대목의 존재를 기원전 3〜2세기까지 소급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곧 입대목은 마한의 성립과 함께 생겨난 제의형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4세기 이후의 마한 분구묘나 집자리에서도 큰 나무를 세웠던 기둥자리가 발견되고 있어 삶과 죽음의 공간에서 이 의례가 지속적으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입대목은 하늘과 인간, 그리고 땅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로서 농경을 천하의 근본으로 여기며 살아왔던 마한인의 세계관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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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16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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