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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지 않는 엄마에게 야자하지 않는 아들이 차려주는 행복한 밥상. 책 표지 상단에 적혀 있는 문장을 읽으며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요리하지 않는 엄마? 야자하지 않는 아들? 아들이 차려주는 밥상?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책을 뒤집어 뒤표지를 살펴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저녁밥을 하기 시작했다. 요리를 못해서 남편이 해 주는 밥을 먹다가, 이제는 고딩 아들이 해주는 밥을 먹는 엄마는 매일 얼마나 맛있게 먹어줄지 고민이다. 작가의 글에는 아들이 만드는 요리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탐색을 마치고 본격적인 독서에 들어갔다. 아들이 야자를 하지 않게 된 사연이 23쪽에 나와 있었다. 5월의 어느 수요일, 제규는 정규수업 종례가 끝나자 선생님을 뒤따라갔다. 보충수업에 빠져야겠다고, 그 돈으로 신선한 재료를 사서 저녁밥을 해야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6월부터 일찍 가라고 허락해주었다. 복도에서 담판을 짓는 스승과 제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담백하고도 우아했다. 스승은 보충수업 안 하고 어떻게 대학에 갈 거냐는 충고를 잊었고, 제자는 다음 날 아침 6시에 버섯 리조토를 만들어 스승에게 가져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걱정이 된 엄마는 아들에게 박찬일 셰프의 칼럼을 읽게 했다. 요리사의 평균 급여는 바닥이고, 노동시간은 불법 체류하는 외국인 노동자보다 길고, 신분 보장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아들은 그래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모자의 담판도 흥미로웠다. 엄마는 아들을 요리학원에 보내고 직접 장을 볼 수 있도록 지시했다. 아들은 그때그때 필요한 채소와 해산물을 조금씩 샀다. 미래의 요리사는 다른 아이들이 야자하는 시간에 요리학원에 가고, 저녁을 짓고, 음식 만화책을 읽고, 영화에 나온 요리를 따라하고, 동생의 간식을 만들어주고, 친구들을 데려다가 밥을 해 먹였다. 소년은 요리 레시피를 공책에 기록했다. 영어로 옮기기도 했다. 아픈 엄마를 위해 아들이 끓여주는 죽이라는 부제가 붙은 죽의 레시피를 살펴보았다. 쌀을 불리고, 불린 쌀을 빻고, 당근을 다지고, 물을 조절하며 끓이고 소금으로 간을 한다. 레시피는 평범했지만 레시피를 한 줄로 요약한 문장은 예사롭지 않았다. 오래 끓일수록 맛있고, 단순할수록 맛있다. 음식과 삶의 공통점을 소년은 알고 있는 듯했다. 책을 읽는 동안, 처음에 가졌던 오해가 풀렸다. 요리는 엄마의 일이 아니라 가족 중에서 더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 야자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 진정한 자립은 타인을 위해 요리할 때 시작된다는 것. 알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일들을 내공 깊은 작가의 가족은 대수롭지 않은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입시 공부라는 궤도를 벗어나 홀로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 소년이지만, 무언가가 되어가는 그를 응원하는 가족이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렇게 썼다. 제규는 자기 생활을 맘에 들어 한다. 지금은 집에서 밥을 하고 있지만,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생기면 그만둘 수도 있다. 엄마가 학교 공부 안 하는 아들 이야기를 기록하는 이유도 안다. 직접 겪으면서 자기 길을 가는 고등학생에게는 멋짐이 있는 거니까. 소년의 레시피를 덮으며 저녁 메뉴를 골랐다. 꿈이 여물어가는 날엔 단단한 꼬막무침. 씻는 과정이 요리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꼬막으로 가족을 위해 따뜻한 밥 한 끼 지어야겠다. * 황보윤 소설가는 2006년 동서커피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고 2009년 대전일보와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됐다. 창작집으로 <로키의 거짓말>과 <모니카, 모니카>가 있다.
곧 5월이다. 역사의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서정시를 쓸 수 없다는 말을 떠올려본다. 핍박 받는 사람들과 가난한 생명을 위해 제 여분을 나눠줄 수 있는 삶의 지혜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열강의 전쟁과 약소국의 내란은 자신과는 먼 일이라는 시대적 양심의 부재 혹은 시대의식의 결핍의 시대를 우린 살고 있다. 서두가 길었는데 2020년에 반체제적 저항시를 읽는다는 것은 자칫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라며 다소 짓궂은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사실 백학기 시전집 <가슴에 남아있는 미처 하지 못한 말>에서 시인이 시적 소재로 삼은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부담스러운 것들이다. 계엄령 거리, 총과 대포, 삼팔선, 전쟁, 혁명. 특히 장시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는 이광웅, 김영춘, 정인섭 등 이미 잊힌 해직교사나 참교육을 외친 시인들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공감이 가는 이유는 무얼까. 지배세력의 탄압 같은 정치적인 문제 말고도 인간성의 문제, 즉 파탄나버린 시대의 불행한 죽음 앞에서 떳떳할 수 없는 시인의 자괴감을 시에 반영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의 시적 화자는 법원에서 손 묶인 채 웃고 있는 이광웅 형을 떠올리며 너무 높아 서글픈 하늘을 보고 봄 산에 들면 미치고 싶다고 말한다. 그 구절이 암시한 자괴감은 일차적으로 독재정권의 탄압과 허위성에 대한 반감에 연유했으리라. 쓰라린 회한과 그 자괴감은 시대적 모순과 암울한 현실과 우리 삶의 도덕적 허위를 폭로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거나 이미 끝장 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자신을 위선자로 규정한다. 여기서 위선자는 쿠데타 세력에 의해 역사의 희생자가 된 분들에 대한 죄스러움, 타락한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한 부끄러운 삶을 반성하는 타락자를 상징한다. 그대의 작은 키가/때로 작게만 보이지 않는다 () 조선 새야 새야/눈 퍼붓는 날/밤 이슥토록 내 귓가에 와서/울어라 () 바람 불면/바람 부는 그곳까지 나 또한 불어가서/아프다 () 너는 어디에 숨어서/청계의 봄을 기다리고 있느냐/어린 시인아 () 너무 높아 서글픈 하늘/만경길 새벽술 마시며 걷다/동트다 () 수유리에서 불어오는/바람/내 빈 가슴을 텅텅 울리고 -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中 오늘날, 시리아 내전의 희생자를 기억하거나 세계적인 문제에 절실한 공감을 느끼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 서글픈 하늘은 우리의 어두운 내면세계이다. 특히 비인간적인 정치와 자본의 권력이 줄기차게 대물려 이어지는 이 시대엔 더욱 그렇다. 이 작품집을 정독하면서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진정 회복해야 할 시대적 양심 혹은 남의 나라 일이라고 지나쳤던 일들이 통렬한 자기 문제로 언젠가는 닥쳐올 것임을 절감하게 된다. * 이길상 시인은 2001년 전북일보와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으며, 시와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나는 너무 많이 떠돌았다. 오래전 내 안을, 집 밖을 나가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린 듯 멈추질 못해 서러웠다. 밖에는 뭔가 더 나은 삶이, 무지개를 타고 넘어갈 황금빛 찬란한 날개가 있는 줄 알았다는 김형미 그림소설 <불청객>(푸른사상)에 나오는 첫 문단이다. 첫 장부터 마치 작가의 삶에 대한 방황과 자기반성을 통한 자기 검증의 번민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물론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고통이 어디 작가뿐이겠는가. 그러나 첫 문장부터 작가의 고뇌에 찬 숨결이 온몸으로 전해져온다. 살아내는 것에 대한 성찰은 모두를 따라다니는 숙제처럼 여겨진다. 이런 힘겨움을 위로라도 하듯이, 김형미 시인이 지난 겨울 그림 소설이라는 색다른 양식으로 책을 선보였다. 삶에 대한 싸움과 번민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너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면서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그래서 불청객을 통해 서로가 위안이 되고 서로의 삶을 채워가자며 서슴없이 손을 내민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방황과 번민 속에서 시간을 채워나간다. 청소년 시절부터 시작된 자기 검증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된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더욱더 확장된 자기 검증을 향한 고민과 번민이 찾아온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길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특히나 모든 것이 불명확한 젊은 날의 경우는 더 자신과의 사투가 많으리라.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결국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하는 염원의 간절한 표현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또 다른나를 향한 외침이 있다. 이는 현재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이 있는 나를 찾고자 하는 욕망이 표출된 것이다. 작품 속 인물은 자신만의 동그란 굴레 속에서 외친다. 나는 그의 모든 존재를 거부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전 존재를 깨부수고 싶었다. 그리고 간절히 그로부터 이 막막한 혼란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라고. 불청객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나에 대한 욕망과 아직 결정되지 않은 또 다른 나를 찾고자 하는, 끝없는 나 찾기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보여주는 그림소설이다. 삶에 대해 가슴앓이를 하는 화자는 바로 우리 모두이기도 하다. 햇살 좋은 사월이다. 봄 햇빛 속에서 불청객과 함께 새로운 나를 발견해 보기를 권한다.
소설을 읽는 순간, 마치 겪고 있는 일인 양 영화처럼 그려지는 때가 있다. 작가의 단편소설 <흐르는 북>을 펼친 순간이 그랬다. 일당을 주고 불러온 요리 전문의 파출부와 함께 오렌지빛 고무장갑을 낀 채 잰걸음으로 주방 안을 헤엄쳐 다니던 며느리는, 현관 앞에서 구두를 찾고 있는 민 노인 쪽을 향해 빠르지도 처지지도 않게 말했다. 비스듬히 몸만 돌렸을 뿐, 한눈팔다간 썰고 있는 전복의 두께가 들쭉날쭉하게 될까봐, 시선을 도마 위에 못질해두고 입만 달싹거린 셈이었다.(흐르는 북 中) 첫 문단이 시작되고 독자는 자연스레 민 노인의 오감을 공유할 수밖에 없게 된다. 감각과 더불어 그가 느끼는 감정마저 동화돼 소설에 몰입하고 만다. 첫 문단과 앞뒤로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독자는 곧장 민 노인과 함께 서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익숙한 긴장을 공유하는 것이다. 작가는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집필활동을 이어왔다. 그중 <최일남 단편집>(지식을만드는지식2018)은 단절의 극복을 고민한 작가의 소설을 모아 엮은 것이다. 소설집의 세 번째 단편 흐르는 북은 그런 작가의 고민을 정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서 민 노인은 아들 내외와 살얼음판을 걷는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한 세대를 건넌 손자 성규와 북에 대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민 노인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 때문에 부자가 첨예한 갈등을 유지하지만, 손자 성규는 민 노인에게 대학 동아리에서 진행하는 탈춤 무대에 함께 서자고 제안한다. 북을 치느라 온 가족을 내팽개친 아버지를 미워하는 아들은 결국 이 문제로 폭발한다. 삼대에 걸친 복잡한 갈등 관계가 이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민 노인과 손자의 공연도 마음 편히 볼 수 없게 된다. 그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공연 전에 마신 술기운도 가세하여, 탈바가지들의 손끝과 발목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의 북소리는 턱 턱 꽂혔다. 그새 입에서는 얼씨구! 소리도 적시에 흘러나왔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가락과 소리와 그것을 전체적으로 휩싸는 달착지근한 장단에 자신을 내맡기고만 있었다.(흐르는 북 中) 북이 턱 턱 꽂히는 소리와 함께 절정에 치닫는 소설은 독자에게도 자꾸만 마른 침만 삼키게 한다. 흥겨운 무대의 진행과는 별개로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민 노인과 아들의 갈등을 여전히 아들과 손자가 반복하는 동시에 한 세대를 건넌 화합이 진행된다. 그밖에 함께 담긴 소설들 역시 단절의 극복을 담고 있다.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서울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농촌에 대한 허영 가득한 향수를 담은 서울 사람들, 언어를 통해 남한과 북한이 갈등하고 대화하는 이야기를 담은 꿈길과 말길, 기자의 시선에서 시장을 중심으로 다섯 가지의 이야기가 서술되는 타령 다섯 마당까지 작가가 갈등에 대해 던지고자 하는 시선과 말을 꼼꼼히 소설로 그려내고 있다. 갈등이 없이 진행되는 사회나 삶은 없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나와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는 세상 속에서 단번에 해결되는 문제만 만나는 것도 아니다. 삶 안에서 해결하고 싶은, 해결해야 하는 과제와 마주친 사람이라면 최일남의 소설을 권한다. 당신이 이겨내야 할 갈등의 어느 순간에 중요한 시선을 제시할지도 모를 일이다. *최아현 소설가는 2018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분에 당선돼 등단했다. 공저로 <천년의 허기> 등이 있다.
덕질, 팬픽, 굿즈, 최애 이 단어 중 단 하나라도 뜻을 말할 수 있는 어른이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인싸다. 인싸가 뭐냐고? 인싸는 인사이더(insider)의 줄임말로 인기 있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다. 반대말 아싸는 아웃사이더(outsider)의 줄임말로 인기 없는 사람을 뜻한다. 자고 일어나면 하루에도 수십 개의 신조어가 양산되고 있는 형국에 그 뜻을 미루어 짐작하기는 미분적분 풀기보다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러니 짐짓 모른 척 등을 돌리면 그만이다. 괜히 아는 척 끼어들었다가 아이들에게 꼰대 소리 들으며 망신당하기 딱 좋으니 말이다. 위 신조어들은 전은희 작가의 장편동화 <열세 살의 콘서트>(책읽는곰2018)에 소위 아이돌 덕후라 불리는 등장인물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자신의 최애 아이돌 그룹 콘서트를 위해 똘똘 뭉쳤다. 콘서트장에 가기까지 각자 나름의 사정이 있었지만, 아이돌 오빠들을 보기 위한 마음은 건국 이래 한마음 한뜻이다. 콘서트장에서 직접 만든 굿즈를 판매하며 또래 문화에 귀속되기 위한 덕질은 가히 눈물겹다. 사실 주인공 민지가 콘서트에 가게 된 표면적인 목적은 친구 둘을 화해시키는 것이지만, 그 근본은 엄마 남자친구와의 만남을 피하기 위함이다. 언제나 나만 좋아할 줄 알았던 엄마가 나 외에 다른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민지는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민지는 우연히 스킵 하트 멤버 해성을 도우며 관계의 진정성을 깨닫게 된다. 절대 내어주지 않을 것 같던 엄마의 옆자리에 살그머니 빈칸을 만드는 유연성을 보이는 걸 보면 말이다. 대상이 누구든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참으로 소중하다. 그렇다고 그 감정에 생채기가 생기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우리 모두 좋아하는 누군가로부터 생채기를 얻었고, 그 자리에 딱지가 생기고 아물기를 반복하며 어른이 되었다. 아이들이라고 좋아하는 마음을 모르지 않을 테니 결국 그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조금씩 단단한 어른으로 성장하리라. 오래전 내가 알던 아이는 동방신기 사생 팬이었다. <열세 살의 콘서트>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시조쯤 되는 아이였다고나 할까? 그 앨 만나려면 기획사 앞이나 동방신기 숙소 앞으로 찾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은 그 아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좋아하는 누군가를 위해 열정을 불태웠던 시절이 분명 그 아이의 성장에 자양분 역할을 했으리라. 그래서 관계에 좀 더 유연해진 어른으로 성장했을 거라고 자부한다. <열세 살의 콘서트>는 서툴지만 온 마음을 다해 상대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바치는 신나는 콘서트 같은 책이 분명하다. 문득 그 옛날 내가 그토록 최애했던 공일오비의 H에게가 듣고 싶어지는 시간이다. /김근혜 동화작가 * 김근혜 동화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선물로 등단했다. 현재 아이들을 대상으로 독서논술 지도를 하며 글을 쓰고 있다.
아동문학가 장은영은 아이의 눈을 가졌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법이나 규칙과 같은 틀을 배우지 않은 눈이다. 놀이를 반복해서 해도 질리지 않는 호기심 어린 눈. 그 눈으로 반복하면서 미처 눈여겨보지 못한 것을 찾는다. 그리고 부분 속에서 부분을 발견한다. 또한 산을 말하기 위해 산-완산칠봉-제비꽃으로 큰 주제를 세부적으로 축소시켜 나가는 것과 제비꽃-완산칠봉-산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확장해 나가는 방법을 동시에 선택한다. 그 과정을 통해 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의 책을 읽는 이들을 틀 밖의 무궁무진한 세계로 안내한다. 장은영 작가의 <설왕국의 네 아이>는 그렇게 탄생했다. 입안의 혀를 하나의 왕국으로, 쓰고 달고 시고 짠 맛의 세계를 네 부족으로 설정할 수 있는 힘은 감히 아이의 눈이 아니면 쉽게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틀 안에서 벗어나 과감히 틀 밖을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힘이야말로 작가 장은영만의 매력인 셈이다. <설왕국의 네 아이>는 설왕국을 구하기 위해 네 부족을 대표하는 아이들이 뭉쳐 풍요를 베풀어주는 침별아기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각 부족의 신물을 전달하러 가는 과정에서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이겨내며 서로 돕고 이해하게 되는 네 아이들의 여정. 부족은 제각각이지만설왕국이라는 하나의 공동체적 운명임을 독자도 함께 깨닫게 되는 것 또한 장은영 작가가 만들어놓은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여 저절로 네 아이들의 흥미진진한 모험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읽는 이도 같이 힘을 보태 함께 문제를 극복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야기 밖에서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안에서 주인공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배우고 나오게 된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읽는 게 아니라 작가가 만들어놓은 가상현실 속에 들어가 살다나오게 만드는 글이라니! 그것은 작가가 산을 오르면서도 제비꽃을 보지 못하는 다른 어른과 다른 눈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산에 애써 배를 대고 눕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제비꽃을 보는 순수한 마음 때문일 수도 있다. 하여 장은영 작가의 글을 대하면 진짜 산 속에 있다는 착각이 드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그 속에는 이미 해봤다라는, 안다라고 하는 오만이 없다. 그리하여 또 나는 나로서 존재하지만 작가가 보고 있는 제비꽃 속에, 설왕국이나 설왕국의 네 아이 속에 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세상 모든 아이는 천재로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1년이면 1천 개의 낱말을 알아듣고, 3년이면 스스로 문법을 깨우친다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년이 되면서 기성화 된 일과 성과에 매몰돼 자기도 모르게 둔재(鈍才)가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작가는 아이처럼 아직도 머리 윗부분이 열려 숨을 쉬는 것 같다. 우주의 기운을 들이쉬고 내뿜으면서 고정된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숫자로 정확하게 측정된 것만이 가치의 척도인 어른들의 관습에 의한 충고에서 벗어나 있다. 가시적인 결과에 고무돼 스스로 내린 정의로 나만의 사고에 갇혀 습관처럼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아닌, 천을 자르고 찢고 마구잡이로 붙여놔도 멋진 옷이 될 수 있음을 아는 눈을 지닌 것이다. 때문에 이해와 신뢰가 함께 따르는 것도 작가 장은영만이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작가에게는 신발이나 스웨터, 혹은 귓바퀴나 손가락 마디 속과 같은 곳에 장은영이라고 하는 자신 외에 아이가 한 명 더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눈썹과 눈썹 사이에 양 팔을 벌린 채 그 아이가 서서 세상을 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아이의 눈과 어른 장은영의 눈이 합해져 기발한 발상의 세계가 탄생한 것일지도. * 김형미 시인은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2003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산 밖의 산으로 가는 길>, <오동꽃 피기 전>, <사랑할 게 딱 하나만 있어라>, 그림에세이 <누에>, <모악산> 등이 있다. 불꽃문학상, 서울문학상, 한국문학예술상, 목정청년예술상을 수상했다.
오은숙 작가, 작은 것들의 신 작가는 쉽게 외면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저주받은 운명이다. 작가라면 늘 아픈 눈을 뜬 채로 있어야 한다. 날마다 창문 유리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있어야 하고, 날마다 추악한 모습들의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낡아빠진 것들을 새롭게 이야기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사랑과 탐욕, 정치와 지배, 권력과 권력의 결여, 이런 것들에 대해 되풀이하여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며칠 전,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9월이여 오라>에 실렸다는 이 문구 때문이었다. 작가는 아픈 눈을 뜬 채 있어야 한다는 작가의 주장에 경외를 표하며 <작은 것들의 신>을 펼쳤다. 책은 쌍둥이 남매인 에스타와 라헬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가슴 아픈 가족사를 담고 있다. 이야기는 성인이 된 라헬이 에스타를 찾아 고향 아예메넴으로 돌아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치밀한 구성으로 엮어 놓은 가족사는 소피몰이라는 어린 양의 희생과 함께 아무와 벨루타가 상징적 의미에서 (문이당97p.)<빗자루로 자기네들의 발자국을 쓸어 지우면서 뒷걸음질로 기어가곤 했던> 불가촉천민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어진다. 낯선 이름과 많은 인물로 초반에는 읽었던 부분을 되짚기도 했지만 감각적인 문장과 구체적인 심리묘사에 압도되어 읽었다. 그러니 읽다가 인물 파악에 어려움을 느끼는 독자라도 끝까지 읽기를 바란다. 그러면 아무가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는 엄마를 보고 쌍둥이에게 (70p.)<마마치가 우는 이유는 파파치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었다.>라고 말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막내 코차마가 (63p.)<아무를 괘씸하게 여겼>으며 왜 그랬는지도. 하나같이 개성강한 인물들은 자신을 (32p.)<라헬의 타락은 예의바르고 독자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 그 아이는 어떻게 해야 여자다워지는지를 통 모른다는 것이었다.>는 식으로 드러낸다. 인도, 아예메넴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인간이 어떻게 해야 인간다워지는지 통 모른다는 식으로. 각자가 할 수 있는 예의바르고 독자적인 형태로. 예의라는 것이 제도나 관습 안에서 폭력이 될 수 있도록. 늙은 공산당원인 필라이 동지가 (29.)<절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절대로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 세상을 헤쳐나갔다.>와 같이 살아남으려고. 그것은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우리의 지난 세대를 보는 듯하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사랑을 한다. (414p.)<헤어질 때마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작은 약속밖에 받아내지 않았다. 내일?내일.>하면서 살아있는 기쁨을 누린다. 작가는 말한다. 이 책은 장소나 관습에 관한 것이 아니라 들과 땅과 공간에 관한 것이며, 어떤 특정한 사회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본성에 관한 것이라고. 그 말에 공감하며 의견 하나를 보탠다. <작은 것들의 신>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할 때 부딪힐 수밖에 없는 벽들에 관한. 작가는 부정하였지만 평소 우리를 둘러싼 관습이나 제도에 고민이 많았던 사람도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 오은숙 작가는 202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납탄의 무게가 당선돼 소설가로 등단했다. 현재 요양 병원 근무하고 있으며 서울을 오가며 창작 수업을 들었다. 앞으로도 일하며 글쓰는 단순한 삶이 이어질 것이다.
엉뚱하고 기발한 아이들의 이야기에 기대어 동시를 써 내려가는 일은 즐겁다. 어디론가 빠르게 기어가는 개미떼를 지켜보고, 문방구 앞에 모여서 오락기를 돌리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재활용 쓰레기장을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어보기도 한다. 식탁위에 놓인 찬밥에 핀 곰팡이 꽃과, 실외기에 둥지를 튼 비둘기를 들여다보며, 꽃망울을 터뜨린 산수유 꽃향기를 맡아보기도 한다. 봄의 기운 같은 노래이기도 하고, 때론 어긋난 리듬처럼 달아나기도 하는 동시,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며 동시 곁으로 가는 일은 행복하다. 글을 쓰는 일은 대상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것이라는 그녀, 영광과 전주를 오가며 함께하는 글동무, 진현정 시인의 첫 동시집 <심심한 시간을 꿀꺽>을 펼쳐보았다. 생기발랄한 그녀가 톡톡 풀어 쓴 동시집에서 주변의 평범한 일상을 만날 수 있었다. 흔한 주변의 사물이 그녀의 눈매 따라 미끄러지듯 파고든다. 마음의 구석구석을 울리는 힘이 느껴지고, 덩달아 즐거워진다. 소나무 꽃이 노란캡슐을 터뜨려 봄을 밀고 가는 애벌레에게 기운을 전해주는 <꽃가루약>, 풀르풀르 떨리는 진달래 꽃잎처럼 그 애를 향한 마음의 떨림을 이야기 한 <바람불면>, 가을 숲속 오르막길에서 쏟아지는 도토리를 <도토리 숲 해설사>로 노래하고, 아무도 모르게 집을 지키는 <작전명 1호>를 들을 수 있다. <천왕성 알사탕>을 굴려보고, 또-옥 쪼-옥 따먹는 <포도씨의 꿀꺽인생>을 만날 수 있다. 밤새 편의점에서 일한 누나와 대리 운전하는 아빠, 엄마 없이 혼자 있는 아이의 시간을 다정하게 끌어다 놓았다. <엄마 없는 날>에는 출장 간 엄마가 끓여 놓고 간 곰탕이 나온다. 큰 찜통에 끓여놓고 며칠을 먹었던 곰탕, 뽁뽀글 다글다글 소리를 내며 찜통 속을 드나들던 수증기거인과 뼈다귀 거인이 보인다. 입말의 리듬을 느낄 수 있는 시다. 그녀는 아이들의 마음결을 잘 어루만지는 것 같다. 함께 오도독 깨물며 삼키는 관계를 통해 마음 한 자락이 단단하게 세워질 것 같으니 말이다. 꿀꺽이라는 부사가 전해주는 진현정의 동시집 한 그릇을 천천히 들이켜본다. 시간도, 바람도 꼭꼭 씹어서 넘기고 싶은, 힘이 나는 맛깔스런 동시집이다. 뭉근한 호흡으로 오랫동안 글의 뼈대를 세우고, 발상과 감각이 신선한 그녀의 동시가 이 봄에 더욱 싱그럽고 환해지기를 바래본다. * 김헌수 시인은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삼례터미널로 등단했다. 우석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전북작가회의 회원, 동시창작 모임 동시랑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변종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어떤 해결책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오는 공포감이 사람들을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 같다. 1923년,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도시가 파괴되자 일본인들의 불안과 원망이 정부로 향했다. 일본 정부는 민심을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다른 표적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본 본토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이 그 대상이 되었다. 처참하게 자경단에게 죽어간 조선인들을 다시 현대에 되살려낸 동화가 있다. 박지숙 작가의 괴물들의 거리(풀빛, 2019년)가 그것이다. 한 달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6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살해당했다. 강과 강변에 조선인들의 시신이 쌓이고 강물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자경단 무리가 한꺼번에 그 아저씨에게 몰려가 몽둥이가 부러질 때까지 매질을 했다. 그 다음에는 무자비한 주먹질과 발길질이 이어졌다. 아저씨의 몸은 곧 피투성이가 되었고 눈이 부어올라서 뜨지도 못했다. 아저씨는 몸을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더는 버티지 못했다. 주인공 원이도 엄마, 아버지와 헤어져 혼자 도망치다가 조선인들을 끌고 가는 자경단을 본다. 그리고 횃불 아래로 드러나는 살인자의 얼굴을 보며 놀란다. 밧줄로 조선인을 묶은 사람은 채소 가게 주인 야마구치 아저씨였다. 죽창을 든 저 아저씨는 우동 가게 주인이고 저기 대검을 장난감처럼 휘두르는 아저씨는 생선 가게 주인이다. 평범한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조선인을 죽이는데 앞장선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소개하기에는 아픈 역사다. 저항조차 할 수 없었던 조선인들의 처참한 죽음과 공포가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기 때문에 더 기억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역사는 역사로써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역사는 바로 우리의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역사를 기억하고 되살려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다 아물어가도 다시 후벼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이 잊지 않아야 할 치욕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 몸이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괴물들의 거리 동화책은 우리 무의식 깊은 곳의 상처를 다시 후벼내고 있다. * 장은영 동화작가는 200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통일 동화 공모전에서 수상했다. <으랏차차 조선실록수호대로> 전북아동문학상과 불꽃문학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마음을 배달하는 아이>, <내멋대로 부대찌개(공저)>, <책 깎는 소년>, <으랏차차 조선실록수호대>, <설왕국의 네 아이>가 있다. <책 깎는 소년>은 2018년 전주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요즘에는 지역의 역사를 소재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엉뚱한 상상으로 출발해보자. 여기 시집 한 권과 최고급 호텔 식사권 두 장이 놓여 있다. 당신은 하나를 선택할 자격이 있다. 시집인가 식사권인가? 현실적인 사람이라면 식사권에 눈을 반짝거리기 쉽다. 같은 조건이라면 나도 두말없이 식사권을 집어들 것이다. 사는 일이 지독한 현실인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현실의 첨단에 서 있다. 이것이 내가 식사권을 선택한 소박하지만 바람직한 이유이다. 망설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시집 속에 비밀처럼 숨어 있는 찬란한 세계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오래 잊고 있던 꿈과 기억 그리고 고결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식사권보다는 그것을 쥔 내 손이 초라해 보이는 건 당연하다. 식사권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나는 오랫동안 목말랐고 허기졌으며 쾌적하고 따뜻한 곳을 간절하게 바랐다. 그럼에도 손에 들지 못한 시집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나는 시인을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 것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다. 시집을 읽는 일은 시인과 다정하게 대화하는 일이다. 시인의 삶이 곧 시이기 때문이다. 정동철 시인의 시집 <나타났다>를 읽으면서 줄곧 시인과 마주 앉아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의 시집은 가난한 씨앗을 묻고 살아온/지금은 빈 까치집, 아무도 살지 않는 집(집)이었다. 내려앉는 어깨를 가까스로/옛 기억을 기둥삼아 버텨낸 집(허물어져가며)에서 그는 조금씩 키가 컸고 담배를 피웠고/콧수염이 자랐고 군대를 갔다 왔다/불안한 어른이 되었다(허공 위에 뜬 집). 그가 그 시절을 두고 참 기가 막히게 팔푼이 같은 현실이었지(하전사 김진철)라고 하는 것을 두고 나는 당신도 슬픔을 씹어본 적이 있는가(발가락을 씹어봤는가)라는 날카로운 힐난으로 들었다. 그대/부끄러운 두 눈/푸른 가시로 찔러라(탱자꽃)는 시구 때문이었다. 이 얼마나 스스로에게 아픈 삶인가. 그렇기 때문에 정동철 시집 <나타났다>는 슬픔의 독법으로 읽어야 한다. 슬픔의 독법이란 현실적인 삶에 비추어 시를 지극하게 읽는 일이다. 그가 사람을 사랑하는 일/쓸쓸한 일이라는 것(재회)이라고 한 것이나 쓸쓸함은 늘 쓸쓸함 안에 머물고(원형 탈모증)라고 진술한 것은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슬프다. 이쯤 되면 그의 시집은 최고급 호텔의 식사권으로는 허기를 달랠 수 없는 영혼의 집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영혼이 희끄무레한 세상 끝까지/혼자 걸어가 보았습니다(곡우)라고 고백할 때, 마침내 시집이야말로 시인의 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정동철 시인은 그렇게 세상 끝에 영혼의 집 한 채를 묵묵히 세워 올리고 있다. * 문신 시인은 2004년 전북일보와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와 문학평론이 각각 당선되어 다방면에서 글쓰기를 해오고 있다. 그동안 시집 <물가죽 북>, <곁을 주는 일>과 문학연구서 <현대시의 창작 방법과 교육>을 냈으며, 지금은 <문예연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나무오리예요. 동시 솟대는 한 줄 담백함으로 시작한다. 하늘을 날거나, 헤엄칠 수 없지만 날개를 활짝 편 오리를 보면 힘찬 비행을 연상케 한다. 모양, 높이가 제 각기인 나무오리의 하늘 향한 기원전부가 어쩌면 첫 연에 담겨 있을지 모른다. 박예분 시인의 동시는 희망적이고, 따뜻한 격려의 말이 가득하다. 괜찮아 잘했어 참 잘했어 응원하며 다시 시작할 힘을 준다. 이어서 못생긴 사과를 대신해 시인이 들려주는 얘기는 뭉클하기까지 하다. 얼마 전 과수원을 하는 이웃이 주면서도 미안하게 준 흠집 난 배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해님, 바람, 비와 씨름한 상처가 보였다. 작은 감동에도 빨강머리 앤이 다이애나와 손을 맞잡듯, 시인을 만나면 꼭 하고 싶어진다. 아롱이다롱이 서로 다른 덩이 중에 빵 덩이가 되겠다는 화자의 한 마디에 빵 터졌다가 마침표는 흐뭇한 미소로 찍었다. 가톨릭 기도문 중 아침기도 끝은 오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평화로 이끌어 주소서. 한다. 저녁기도 처음은 오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를 살피고 버릇이 된 죄를 깨닫게 하소서.한다. 문득 그의 동시에서 기도문 같은 깊이를 느꼈다. 동시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이라면 제목자체는 의미심장하기 짝이 없다. 화자의 고백은 순수하고 맑다. 사과하고, 갚기도 하더니 미련처럼 할 일이 많다는 동심에 풋 웃음이 난다. 그 또래의 심각함을 고스란히 표현했다. 볼이라고 비비고 싶게 사랑스럽다. 예전에 어쩌나 보려고 조카를 골려줬던 생각이 문득 났다. 고모 사탕 하나만 줘. 양손에 쥔 사탕을 하나만 달라고 하니 선뜻 주지는 못하고 무슨 잘못이나 한 냥 빨개진 얼굴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못 이겨 뺏기다시피 하나를 주고는 조용히 엄마 품에 안겨 소리 없이 울었다. 다시 손에 쥐어주니 금방 눈물을 멈추는 순수함에 눈이 멀 뻔 한 기억이 난다. <햇덩이 달덩이 빵 한 덩이>는 타임머신처럼 그때를 회상하게 만들었다. 일곱 색깔 무지개 같은 색을 지닌 아이들 속에 푹 빠졌다. 결핍에 좌절하지 않고 꿈꾸게 한다. 나는 있지만 없는 이에게 호의 베풀 줄 아는 아이들이 그의 동시에는 가득 하다. 이 동시를 읽는 이들이 흐뭇하고 사랑스러워지는 건 당연하다. 시인의 이름을 소재로 한 친구야 네 이름은 동시가 있다. 2연 4행에 예분은 꽃가루란다의 어미는 이름을 지어준 증조할머니가 손녀를 다독이는 손길을 느끼게 만든다. 한때 수줍었던 내 이름에 대한 부끄러움이 치유되는 반전이 있다. 걸림돌과 디딤돌은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함으로써 진한 형제애를 보여주는 놀라운 연결에 탄성이 나온다. 이준관 시인은 해설에 어린이들이 이런 시를 읽고 시와 친구가 되어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게 자랐으면하는 바람에 절로 마음을 같이 한다. 발상이나 표현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눈높이를 맞춰 다정함을 주는 동시임에 틀림이 없다. 가끔 어수선한 집안을 정리하다 내 아이들이 유치원, 초등학교 때 쓴 글이나 그림을 볼 때가 있다. 물끄러미 보다 쓰다듬고 다시 고이 보관한다. 그때 품었을 잃어버린 희망을 다시 건져 품는다. 이 동시집을 읽는 모든 이들은 물론 첫 동시집이 된 박예분 시인까지도 희망을 건져 올리는 동시집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 김영주 작가는 우석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했으며,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마키코 언니를 출품해 등단했다. 2018년 동양일보 동화부문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전북작가회의 회원, 동시창작 모임 동시랑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벌써 중년이었던가? 내가 문신 시인을 처음 만난 건 그가 스물 몇이던 무렵이었다. 가끔 만나고 술을 마시고 시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우리는 중년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슬프고도 가슴 아픈 일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깊어진다는 의미이므로 마냥 애석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남자의 중년이란 힘든 시기이다. 그의 시 3부를 관통하는 중년이라는 키워드에는 이 세대를 묵묵히 건너야 하는 고뇌의 흔적이 곳곳에 엿보인다. 세상은 중년 남자에게 가혹하다. 어쩌면 그의 고백처럼 중년이라는 말이 참으로 캄캄하다는 생각(<중년 무렵>)이 수시로 들기도 한다. 세상이 중년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무엇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중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대 중간에 낀 어정쩡한 일이자 어색함의 연속이다. 어느 날은 불현 듯 회의와 불안감에 빠지기도 한다. 이 시기를 견디면 분명히 지금보다 좀 더 빛나고 눈부신 시간이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데 막상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과거의 추억과 우울한 노년이다. 사실 중년은 예고 없이 무기력증이 찾아오기도 하고 심한 무력감에 빠지기도 하는 시기이다. 갱년기는 여자만 겪는 게 아니다. 내 설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데 사방을 둘러봐도 내가 의지할 곳은 도무지 없다. 가쁜 숨(<우연한 중년>을 몰아쉬며 열심히 달려왔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서 있는 곳은 막다른 비탈길이다. 가끔 친구나 지인과 만나서 푸념을 섞기도 하고 술잔을 기울여보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겁고 허탈하다. 지금의 내 모습은 젊은 시절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미래는 아니다. 일상에 지쳐 하루하루 화석이 되어가는(<중년 무렵>)위기의 중년처럼 지금 우리도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이 시집 제목인 <곁을 주는 일>처럼 살 부비고 싶어지는 일(<곁을 주는 일>)이며 허전한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이다. 그것은 찬바람 몰아치는 한겨울, 흐드러진 꽃을 달고 오는 봄을 기다리는 일과 닮아 있다. 이 시집 덕분에 나는 이 시기를 견디고 나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주듯이 그동안 무심했던 나에게도 곁을 남겨 주는 일이므로. * 장창영 시인은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와 문학이론서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을 펴냈다. 그동안 다녀온 여행기를 여행잡지 <뚜르드 몽드>에 연재하고 있다.
사투리가 있어야 책장은 쉬 넘어간다. 정확한 뜻은 알지 못해도 큰 줄거리를 따라 짐작으로 헤아리며 지나치면 그만이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그 뜻을 알게 되거나 모르는 사이 입에 먼저 익어 뜬금없이 뱉어지는 때도 있다. 최명희의 소설 <혼불> 속 콩심이도 그랬다. 효원이 대실의 친정에서 매안으로 데리고 온 콩심이가 남도 사투리로 워찌 고렇코롬 생겼다요? 했을 때 안서방네는 손질하던 빨래 홑이불에 물을 뿜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고렇코롬? 그거이 무신 말이여? 긍게, 그렇게, 그 말이냐? 느그 동네는 그 말을 그렇게 허냐? 문학도 사투리를 통해 독자와 더 다정해진다. 인물들이 토해내는 투박한 말은 그들의 교양 없음이나 무지를 나타낸다기보다 언어의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그 단어로 써야 하는 어떤 것을 정확히 찾아 쓰는 통쾌함과 바로 이거야! 하고 무릎을 치게 하는 짜릿함, 소설 속 인물들이 책 밖으로 걸어 나올듯한 생생함과 능청스러움 모두 사투리에서 시작된다. 최명희는 전라도 땅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독특한 흡인력을 가진 문체의 힘도 전라도 산천, 전라도 가락, 전라도 말이 베풀어준 음덕이라고 표현했다. 작가의 뛰어난 묘사와 화려한 문장은 우리 고유의 언어에 담겨 더 빛나는 것이다. 전주 출신인 소설가 최일남의 글에도 고향 말의 울림이 있다. 되나캐나, 콜딱콜딱, 쪼속쪼속, 어세두세, 으시딱딱 같은 그의 언어에서 전주가 보이고, 전주의 가락이 들린다. 그것은 판소리와도 닮아서 야유와 풍자, 해학을 적절하게 표현한다. 2009년 초연 이후 흥행 신기록을 세우고 있는 연극 <친정엄마와 2박 3일>은 정읍 사투리가 징허게 많이도 나온다. 고혜정 작가가 고향인 정읍을 배경으로 썼기 때문이다. 배우들을 통해 듣는 사투리는 가슴을 저릿하게 한다. 멀리 떨어져 사는 딸의 냄새라도 간직하기 위해 딸이 입던 옷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 두는 친정엄마와 엄마의 짙은 사랑을 늦게 깨달은 딸의 마지막 2박 3일의 이별 이야기는 요란하지도 넘치지도 않은 정읍의 말로 더 절절하다. 지난해 전라북도는 사투리 11,640개를 엮은 <전라북도 방언사전>을 발간했다. 전북도청 홈페이지 전북소개에서 전자책을 내려받을 수 있다. 십 년은 걸려야 할 일을 23년 만에 서둘러 마무리한 탓에 그 경이로운 수고에도 아쉬움이 많다. 연구자와 행정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차분하게 도민의 의견을 묻고 더 서둘러 수정하면 될 일이다. 이 땅 고유의 감성과 육성이 들리는 <전라북도 방언사전>이 있어 전라북도는 세월이 지날수록 깊은 맛을 내는 고장이 될 것이다. ※ 최명희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는 최기우 극작가는 지난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했으며, 연극창극뮤지컬창작판소리 등 무대극에 집중하고 있다. 희곡집 <상봉>과 창극집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인문서 <꽃심 전주>와 <전주, 느리게 걷기>, <전북의 재발견> 등을 냈다.
왼발을 딛고 오른발을 뗀다. 응달과 양달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다. 돌아와 보면 조금씩 무너지고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두 팔이 따라온다. 김행숙은 미적 쾌감은 엔트로피와 네그엔트로피의 최적의 관계에서 발생한다.라고 말했다. 혼돈과 질서가 번갈아 놓인 징검다리같이 미학적 균형을 이룬 김유석 시인의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를 생각한다. 호박넝쿨이 둑방 밑에 버려진 토관에 푸른 힘줄을 옭아 넣고 있다(부드러운 힘 중). 강했지만 버려진 존재에게 보내는 연두의 입술로 세상의 볼은 푸르다. 시인은 한 번뿐인 생이 여러 번 다녀가듯 혼곤한 날(처서 중)에게 다시 푸른 젖꼭지를 물릴 것이다. 한여름 문간 앞에 그늘을 내어놓고/ 잠시 들렀다 가는 것들의 기척(공空 중)에 몸을 기울인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잠시는 찰나에 불과하지만, 기척은 온 생애다. 공과 색이 사는 느릅나무 어린 그늘을 분양받고 싶다. 오르면서 세우는 그만큼의 벼랑을 끼고/ 휘청거리는 순간순간이 황홀해서/ 그림자조차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와 버린 수수깡의 내려오는 길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다(마디 중). 이 대목에 이르면 의지를 낮게 부리는 버드나무와 높이 오르는 미루나무를 비교하는 일이 무색해진다. 나는 곡선으로 나아가고/ 제 몸을 쥐어트는 가학적인 문양을 둘렀고/ 그리고, 나의 피는 차갑다(뱀의 문장紋章을 쓰는 가계家系 중). 이 시를 보며 직선과 무문, 따스한 피, 그리고 해독을 떠올린다. 울음은 감정이 아니라 생의 지극한 울림이다. 밖으로부터 삼투되는 것이 아닌 그것들은 내 안 어딘가에 갇혀 있다가 생의 어디쯤 스스로 풀리며, 내 안에서 공명한다. 그러므로 붉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의 몸은 텅 비어있다. 울음이 울림이 되는 이유다. 시를 읽고 나면 공명이 가득 들어차 장구통이 된 기분이다. 뿔이 난 후에야 송아지는 자신이 소임을 알게 되지만, 감때사나운 부사리의 뿔을 각목으로 내려치면 이내 직수굿해진다(개뿔 중). 그 울음은 언제쯤 풀밭에 풀려 길들여지지 않은 정체성으로 살아갈지. 사막 건너 또 다른 사막이 놓여 있기 때문에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행자 중) 낙타의 혹에서 언제 푸른 달이 풀려나와 사막의 속눈썹을 비추어줄지. 천식 앓는 노인의 기침소리가 철사줄에 발목 하나를 두고 간(세 발 고라니 중) 고라니의 배고픔을 울린다. 마당가에 떨어져 등을 비비적거리는 매미를 위해 나무그늘은 울음이 묻어 있는(미필적 감정 2 중) 공명통을 떤다. 보이지 않는 울음이 더 먹먹하다. 시인은 울음이 잘 번지도록 등을 웅크리지 않는다. 오래 가두어 놓은 시인의 울음은 여물을 먹는 소의 혀처럼 붉다. 씨에게 물릴 사과의 통통 불은 몸이고, 비긋이 열린 마당을 적시는 생혈 같은 눈시울처럼 보리밥나무 열매 속으로(유월 중) 스며드는 붉음이다. 울음을 벗고 붉음을 입는 것들은 제 몸을 휘게 하는 무거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무거움이 예사롭지 않다. 무게를 좀 더 얹히려고/ 이슬을 맞히고 오줌발 먹이는/ 고물장수의 비루한 생이 들어 있을지 모를(가벼움을 팔아먹다 중) 책들은 가벼워 우리를 훅 휘게 한다.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생각 들 때/ 방향을 바꾸는 줄도 모르고(개구리가 뛰는 방향을 바꿀 때 중) 뛰어내리는 붉은 눈물이 있다. 걷다가 선다. 느낀다. 다시 걷는다. 한 길을 너무 오래 걷다 보면 마치 그 자리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온다. 그때에 가슴에 고이는 것이 나의 시라고 시인이 말한 적이 있다. 수염이 깔끄러워서, 물풍선 같은 달은 어떻게 보리밭을 건넜을까(이슬방울 주렴珠簾 중) 궁금해하며 들길을 걷는다. 걷기 위하여 혹은 서기 위하여 많은 날들은 꽃의 고요를 개미처럼 핥도록 내버려 둘 일이다. 하얀 건물 위에 슬픔이 좌우로 펄럭인다. 강물 옆 둑을 따라 타들어가는 금지된 불 냄새가 난다. 시인이 사는 곳이다. 싸락눈 몇 됫박 들판에 안쳐 한 시절 보내다가, 한 곳 정들지 못하고 떠(이력 중)돌 것이다. * 이영종 시인은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노숙이 당선되었고, 15회 박재삼문학제 신인문학상 백일장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본가에서 분가한 우리 가족은 부엌 하나에 방이 달랑 두 칸인 집으로 이사를 갔다. 두 칸 중 한 칸은 누우면 머리와 발이 벽에 닿을 정도로 작은 쪽방이었는데 짐 풀기 무섭게 언니가 차지했다. 침 발라 놓았냐며 따져 물었지만 내 편을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같이 밥을 먹고 놀다가도 언니는 시간이 되면 자기 방이라 불리는 곳으로 쏙 들어갔다.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언니만의 방. 지금도 그 방으로 들어가는 언니를 떠올리면 가슴에서 찌르르 귀뚜라미가 운다. 이순미 작가의 <왁자지껄 바나나 패밀리>(살림어린이). 이 동화 속 주인공도 혼자만의 방은 꿈도 꿀 수 없다. 집이 비좁은 탓도 있지만 가장 강력한 이유는 무려 9명이라는 가족 구성원 때문이다. 이 가족의 일상은 상상을 뛰어 넘는다. 세숫대야보다 큰 냄비에 끓인 된장국은 몇 번 떴다 하면 바닥을 드러내고 수북이 쌓였던 반찬은 젓가락질 대전이 끝난 뒤면 공룡 혓바닥이 핥고 지난 간 듯 깨끗하다. 다행히 누구하나 투정부리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약용은 7명 형제 중 가운데 끼인 넷째다. 낀 아이답게 약용은 있는 듯 없는 듯 순하고 성실하다. 약용은 단 한 번도 식구가 많은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친구 동하가 요즘 세상에 식구 많은 건 이상한 거다라는 말하기 전까지. 그 후로 약용은 식구가 많은 게 부끄러웠다. 그래서일까? 약용은 가족 얘기만 나오면 움츠러든다. 그러던 중 누나 핸드폰을 부수었다는 오해를 받고 약용은 혼자만의 방을 만들어 자유를 만끽한다. 과연 약용의 자유는 오래 유지 될 수 있을까? 가족을 부끄러워하면 꼬리표가 되지만 자랑스러워하면 이름표가 된다. 가족을 부끄러워하는 약용에게 영어 선생님의 충고는 가히 머리에 쏙 들어찬다. 가족의 형태는 참으로 다양해서 정석도 없고 해답도 없다. 그러나 한창 민감할 나이의 아이들에게 어떤 가족을 두었냐는 삶의 중요한 척도일 수 있다.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동화 속 에이미 선생님, 약용이 아빠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기죽어서는 안 된다고 실패와 성장을 지켜봐주는 가족이 있어서 너는 행복한 아이라고 자분자분 말을 걸어보자. 가족을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떳떳하게 말할 이름표가 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처럼 오늘 우리 가족의 이름표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둘이 사는 해님 달님 가족, 두 가족이 합쳐진 비빔밥 가족, 식구가 많은 왁자지껄 바나나 패밀리 가족. 이름표를 붙이며 가족과 눈을 맞춰 보자.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낯부끄러운 말이 방언처럼 터져 나와 소스라치게 놀랄지도 모른다. * 김근혜 동화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선물로 등단했다. 현재 아이들을 대상으로 독서논술 지도를 하며 글을 쓰고 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싸우며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가.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자, 그 방법을 얻고자 하는 자에게 이광재 장편소설 《나라 없는 나라》를 추천한다. 수확을 얻으려는 자 논을 갈 듯이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고자 저들은 묵은 세계에 날을 박아 숨을 끊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1894년 5월 11일 황토현 전승일로부터 125년이 지난 2019년에 이르러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지정되었다. 2020년은 동학농민혁명 126년이 되는 해이고,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이 된다. 고부민란으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의 동학농민군은 뒤에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었고, 그 맥락은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역사적 사료가 되는 개인의 시간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 다시 겸허해지는 시간의 경계를 건넌다. 제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나라 없는 나라》는 현란할 만큼 매력적이다. 제목뿐만 아니라 인물의 힘과 문체가 그것이다. 첫째로, 시대의 상징을 관통하는 힘을 이해하는 것이 소설의 출발이다, 또한 가장 설득력 있게 독자에게 다가서는 것이 제목이다. 이광재 작가는 전봉준의 목소리를 빌어 우리의 세상은 이 세상 너머에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삶이란 저 너머에 있을 어떤 것이고 유토피아 또는 꿈같은 것을 향해가는 것이라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탈하는 장면에서, 싸움을 멈추라는 어명을 두고 병사 하나가 일어나 들고 있던 소총을 바닥에 내리쳐 두 쪽을 냈다. 이것은 나라가 아니다! 나라는 없다! (《나라 없는 나라》195쪽) 둘째로, 이광재 작가는 인물의 중심에 전봉준을 두고, 동학농민과 함께 현실적으로 연대했던 대원군이 어떻게 됐나를 세웠다. 변화하는 백성 상으로는 을개로서 대변하게 하고, 당시 조선 젊은 지식인이 어떤 생각을 하며 정치사에서 어떤 역할을 차지했는지를 다뤘다. 세상의 중심을 향해 육박하는 큰 힘이 백성임을 깨닫고 두려움을 느끼는 대원군을 향해 전봉준은 반도 없고 상도 없이 두루 공평한 세상은 모두가 주인인 까닭에 망하지 않을 것이며, 모두에게 소중하여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할 것이니 이것이 강병한 나라 아니옵니까?라며 거리낌이 없다. 전봉준과 대원군, 대접주와 두령들, 을개와 갑례, 이철래와 호정, 장팔이와 손네. 단지 이름만 나오는 것까지 포함해서 육십여 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한다. 세대가 다른 사랑법도 애절하다. 인물의 형상화를 통해 소설 역시 우리 삶의 터이며 작가의 부단한 노력으로 직립이 가능해지는 세계라는 가능성을 배운다. 글쓰기의 실제가 시대와 삶의 모법 답안은 아니라 해도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담기 때문에 《나라 없는 나라》가 주는 열망은 뫼비우스 띠가 되어 독자에게 돌아온다. 독서의 시작과 끝이 독자인 것처럼. 셋째로, 작가의 문체다. 일상적이지 않은 의고체의 낯섦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잠시 책을 덮게 했지만, 바로 책장을 열고 각각의 문장을 더듬게 했다. 이광재 작가는 서술어조차 긴장을 놓지 않는, 작가적 책임감을 가졌다는 걸 알 수 있다. 단편에서 느낄 수 있는 문장의 맛을 장편에 표현해냈다. 또 그는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나라 없는 나라》 이후 전혀 다른 문체인 《수요일에 하자》로 승부를 걸었다. 이광재 작가의 다른 글도 추천한다. 우리는 어둠을 원하지 않는다. 평화롭고 따뜻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서울로 압송되어 함거에 실렸던 전봉준의 사진 한 장, 그 눈빛의 날카로움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주권이 우리에게 있음을 꿈꾸기 때문이다. 농묵 같던 어둠이 묽어지자 창호지도 날카로운 빛을 잃었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을 기억한다. * 201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으로 등단한 정숙인 소설가는 역사를 마주보는 소설 쓰기에 관심을 갖고 있다.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백팩과 빛의 증거와 채록집 <아무도 오지 않을 곳이라는, 개복동에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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