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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지령 20000호…'정론직필 100년' 향해 뛰겠습니다

명실공히 전북 유일의 언론기관으로서 공기(公器)의 역할을 다할 것을 강호에 선언하는 바이다. 본지는 앞으로 민중의 대변자로서, 강력한 여론 창달기관으로서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만민에게 함양하는 데 매진할 것을 맹세한다.1950년 10월 15일, 타블로이드판 2개면으로 제1호를 낸 전북일보는 당시 한국전쟁의 전황(戰況)을 상세히 전하면서 사회적 공기로서 언론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약속으로 1면 창간사의 말미를 맺었다. 사실 전북 최초의 신문이자 전북일보의 뿌리는 19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녹록지 않았던 시대상황에서 통폐합을 거쳐 전북언론의 도도한 물줄기를 만들어낸 것은 이 때부터다.한국전쟁의 포연 속에서 지령 제1호를 발행한 전북일보가 4일자로 꼭 2만번째 신문을 냈다.질곡의 현대사와 부대끼며 지역민과 애환을 함께한 전북일보는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 1997년 IMF 외환위기 등 역사의 격랑 속에서 호남지역 대표 언론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와 1989년 완주 모래재 버스사고, 1993년 서해훼리호 참사 현장에서 도민과 함께 눈물 흘렸고, 2003년 부안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유치 논란 등 지역사회 갈등의 현장도 생생하게 담아냈다. 특히 지역의 오랜 숙제가 된 새만금사업을 비롯, 전북혁신도시호남선 및 전라선 KTX 건설 등 굵직한 현안에 대해서는 미래지향적인 의제 설정으로 지역발전의 방향을 제시해왔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아서는 장기 기획을 통해 갑오년 혁명의 역사를 들춰내 재정립했고, 호남평야의 젖줄이자 근대농업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만경강동진강의 물줄기를 탐사해 하천개발의 역사와 문화주민 삶을 망라한 대기록을 남기기도 했다.이와 함께 전북역전마라톤대회와 직장대항 테니스대회, 신춘문예, 전북보훈대상, 전북무궁화대상, NIE논술대회 등의 행사를 통해 지역문화 창달 및 사회공헌 활동에 앞장섰다.전북일보의 지령 2만호 발행은 전북지역 첫 사례이며, 전국적으로도 내로라하는 일간지 및 지방 대표 신문만이 최근 써낸 기록이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급속한 도시화산업화, 그리고 정보화의 물결 속에서 전북의 위상을 함께 고민하고 지역발전을 염원한 도민의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이제 전북일보는 창간 66년, 쉼없는 정진으로 2만번째 신문을 낸 저력과 그 속에 녹아든 지역민의 힘을 토대로 정론직필(正論直筆) 100년을 향해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아울러 전북일보와 꾸준히 소통해 온 애독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창간 이념을 되새겨 도민을 대변하는 정론지로서의 변함없는 역할을 약속드린다.

  • 기획
  • 김종표
  • 2016.04.04 23:02

전북일보 지령 20000호,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글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여러분의 관심과 애정으로 우리 전북일보가 매우 뜻깊은 날을 맞았습니다. 바로 오늘 지령(紙齡) 2만호를 발행하게 된 것입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신문을 발행하더라도 무려 55년이 걸리는 세월입니다. 또 1년 52주를 기준으로 주5일 신문을 발행해도 2만호에 도달하려면 무려 77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합니다. 전북일보에게는 66년이 걸렸습니다.전북일보는 1950년 10월 15일, 625전쟁의 포연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방이후 극심한 혼란기를 맞아 여러 언론이 난립하며 경쟁하다가 625 전쟁 상황에서 전북 유일의 언론기관인 전북일보로 발전적 통합을 이룬 것입니다.당시의 창간사에는 전북일보의 기치아래 도내 유일의 언론기관으로서 공기의 역할을 다할 것을 강호에 선언하는 바이다.본지는 앞으로 민중의 대변지로서 여론의 강력한 창달기관으로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고매한 건국이념을 만민에게 함양하는 높은 교도기관으로서 부하된 사명을 완수하는데 일로 매진하는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고 적고 있습니다.전란 속에 탄생한 전북일보는 국가발전과 주민통합이라는 사회적 공기로서의 역할에 더욱 막중한 책임을 느꼈습니다.물자가 부족해 현재 신문의 절반 크기인 타블로이드판으로 시작했지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황과 공비 토벌 등의 소식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함으로써 도민들이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이해하며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될 즈음에는 윤전기와 활판인쇄기 등의 시설을 새로 갖추고 종전의 타블로이드판을 현재의 배대판(倍大版)으로 바꾸면서 도민들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독자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한때 아픔도 있었습니다. 1973년 정부의 1도 1사 원칙에 따라 전북일보와 전북매일, 호남일보가 통합되면서 전북일보 대신에 전북신문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9명의 기자가 강제해직되기도 했습니다.다행히도 1983년 2월 서정상 박사가 사장에 취임한 뒤 그해 6월 1일에는 전북일보라는 제호를 되찾을 수 있었으며, 80년대 말에는 강제해직됐던 일부 기자들이 현업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이처럼 전북일보는 질곡과 부침의 역사 속에서도 정론을 신념으로, 봉사를 사명으로, 도민을 주인으로를 사시(社是)로 지난 66년 동안 도민의 눈과 귀가 되고 손과 발을 자처하면서 전북의 발전과 전북도민의 행복을 위해 충실히 노력해왔습니다.지령 1호부터 2만호까지 전북일보에 실린 기사 하나 하나에는 전북인의 삶과 애환이 가감없이 담겨 있으며, 이는 곧 전북의 현대사를 구성하는 사초가 되고 있습니다. 전북일보 임직원들은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동시에 미래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함께 느낍니다.전북일보는 앞으로도 건강하고 책임있는 언론으로서 도민만을 바라보면서 지령 3만호, 5만호, 10만호 시대를 향해 힘차게 나가겠습니다. 지역의 자존심을 지키고 지역발전을 견인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과 관심으로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 기획
  • 전북일보
  • 2016.04.04 23:02

전북일보 첫 직선 편집국장 김남곤 前 사장 "진실과 균형이 언론의 생명…다시 새 역사 써나가라"

지령 20000호 그대에게시우쇠를 시뻘겋게달구는 대장간의풀무 되거라그 풀무가 되어시우쇠가 펄펄펄끓을 때 까지바람이란 바람이 살고 있는지구의 끝바람까지몰고 오너라처마 낮은 집도 들르고솟을대문 집도 들러서울고 웃으며밥 나눠먹고사는 이야기 들어라무엇인가그대 때문이었다고비웃음 받는허수아비 같은초상 되어서는 안 된다무엇인가그대 때문이었다고손뼉 치며 환호하는눈부신 발광체가 되거라1988년이니 28년 전이다. 그해 전북일보에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처음으로 노조가 주관한 직선제 편집국장이 임명됐다. 회사 경영진이 결정하면 하루아침에도 보직이 바뀌던 환경에서 직선제 편집국장의 등장은 그만큼 낯선 문화였다. 그러나 노사의 갈등 국면이 화합으로 모아진 지점에서 직선제 편집국장은 편집권 독립을 상징하는 전북일보의 새로운 시작이었다.전북일보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던 첫 직선제 편집국장은 취임하던 그날, 기자들 앞에서 이야기 했다.나는 이제 저 하늘의 별을 따려고 한다. 여러분이 나에게 준 과제다. 여러분은 내가 그 별을 딸 수 있도록 장대를 높이 높이 올려주어야 한다. 등루거제(登樓去梯), 다락에 오르도록 권하고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안 된다.별과 장대. 언론의 엄중한 역할을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감성적 언어로 안겨준 사람. 김남곤 전 전북일보 사장(79)이야기다.전북일보 지령 2만호. 그 역사 위에는 언론탄압의 엄혹한 시절을 지켜낸 대쪽 같은 선배나 인생의 등불이 되어준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선배들이 있다. 존경의 대상인 그들 선배 언론인들의 궤적을 돌아보며 많은 후배들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인터뷰는 어려웠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삼고초려 끝에 간신히 얻어낸 인터뷰는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어느 상황에서건 반전은 있는 법인 모양이다.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그는 특유의 글씨체로 너울너울 쓰인 작은 메모지 몇 장을 건넸다. 지령 20000호 그대에게 제목의 시였다. 여러해 전 그랬던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전북일보가 지령 2만호를 맞았습니다. 사장님께도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지령 2만호가 주는 무게감이 크죠. 전북일보가 태동 했을 때를 생각해봤습니다. 1950년, 전란의 위기와 혼란 속에서 전북일보를 창간했던 뚜렷한 목표가 있었겠지요. 오늘까지 전북일보가 걸어온 길 또한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인데 위기를 맞을 때마다 지혜를 발휘하고 마음을 모아 극복해온 시간이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상투적이긴 하지만 지령 2만호의 전북일보에 한 말씀 주시죠.2만호라는 지령에 대한 벅찬 감회에 그치지 말고 20001호를 주목하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이제부터는 더 역동적인 의지를 갖고 구성원들이 전북일보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깊이 고민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열어가야 합니다. 2만호라는 역사에 담겨 있는 가치와 의미를 살리는 일이겠지요.-신문 창간의 뜻을 이어가라는 말씀이군요.1950년 전란 속에서 우리 선배들은 백지 한 장 위에 전북일보라는 제호를 올려놓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 뜻이 굴절되거나 중단되지 않고 무구한 역사를 끌고 여기까지 온 것은 구성원들이 의지를 갖고 그때그때 시대를 충실하게 살았던 덕분이지 않겠어요.-전북일보 지령의 의미를 되짚어보면 사장님 말씀처럼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는 책임으로 두려워지기도 합니다.그런 책임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자긍심도 가져야 해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전반에 걸쳐서 하나하나 빠짐없이 그날그날을 기록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어떤 역사가가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겠어요. 전북일보의 지령은 역사의 보고입니다.-말씀 들으면서 역사의 보고인 전북일보 지령만으로 자신감을 갖는 일이 괜찮은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자긍심이 있어야 책임감도 있는 것이거든요. 자긍심에서 그냥 끝나면 안 되죠. 그렇다면 직무유기예요.(웃음)-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소질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왜 작가가 아닌 기자를 택하셨습니까.처음부터 기자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에요. 직업을 갖는다는 것이 꼭 자기 뜻이나 계획만으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계기가 있었어요. 고모부가 전북일보 공무국에 근무했거든요. 고모 집에 놀러 가면 게라지라고 부르는 활자 인쇄지가 많았어요. 앞에는 기사가 인쇄되어 있지만 뒤는 백지여서 종이가 귀한 시절에 쓰임이 좋았죠. 덕분에 기사도 읽게 되었는데 재미있었어요. 고등학교 시절엔 제가 쓴 시나 콩트가 실리기도 했습니다.-당시에도 신문사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직장 아니었을까요.1965년 12월 삼남일보에 입사했는데, 73년 통합이 되고서도 형편은 어려웠어요. 박봉이었으니까요. 그때는 점심을 먹으러 몇 명 동료들과 나가면 밀가루 빵 두 개 먹고 물 한잔 마시는 것이 전부였어요. 어쩌다 먹게 되는 콩나물국밥이나 설렁탕은 특식이었죠.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었어요. 가난으로 고통 받았던 시절이니 배고픔이 곧 삶이었죠.-기자생활은 어떻셨습니까.교정부에서 시작해 편집부 지방부를 거쳐 문화부에서 일했죠. 문화부에서는 도교육청을 출입했는데, 교육 기사를 많이 썼어요. 문화부는 출입처가 없는 부서여서 발로 찾아다니지 않으면 기사를 쓸 수 없었죠. 덕분에 고생스럽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과 교유하고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일할 수 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행운이었습니다.-어떤 마음으로 기사를 쓰셨습니까.기사는 진실과 균형이 생명이라고 생각했어요. 올바른 방향이나 비평도 그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하니까요. 그런 정신을 지키려고 노력했어요.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담는 것이어야 하는가를 늘 고민했지요.-특종 경쟁이 그 시절에는 더 치열했을 것 같은데요. 속보성으로도 그렇고.물론이죠. 지금은 인터넷 시대가 되어 속보성에 대한 민감함이 좀 덜한 것 같더군요. 당시에도 전북지역에 몇 개 신문사가 있었는데, 아침에 상대방 신문에 어떤 기사가 났느냐가 최대 관심이었어요. 특종 낙종의 후유증이 컸죠.-기억에 남는 기사도 많을 것 같습니다.교육분야를 담당하고 있을때 고교 평준화가 시작되었어요. 일류니 삼류니 고등학교 등급이 확연했던 환경에서 평준화는 엄청난 사건이었죠. 그때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집중 취재했어요. 학교시리즈였는데, 큰 반향이 있었죠. 격려와 항의를 동시에 받았던 기사인데, 대부분의 학교가 자극을 받았죠.-문화 쪽에서는 가람 이병기 생가 이야기를 지금도 하시는 분들이 있던데요.기자 생활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기사예요. 가람가가 무너지고 있다는 기사였는데, 아마 72년일 겁니다. 가람이란 거목의 생가가 썩어 무너지고 있던 상황이었거든요. 기사가 나가자 성금이 들어오고 관심이 커지면서 복원되었죠.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던 가족들의 삶이 조명되면서 도움도 줄 수 있었어요.-기자라는 직업은 곤궁한 삶이지만 내가 쓴 기사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가치 있는 직업이지 않습니까.물론이지요. 그런 정신적 보상이 없으면 기자 정신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편집국장 시절 일인데, 당시 김용태 국회 예결위원장이 전라도 예산투쟁에 대해 뜨거운 꼴을 봐야 한다고 막말을 했어요. 처음에는 1단 가십처리로 처리하자 했는데 이것은 아니다 싶어서 1면 톱으로 바꾸었죠. 전라도 하대발언으로 엄청난 이슈가 되었어요. 곤욕도 치렀지만 끝내 밀고 나갔죠. 언론은 권력과 대칭관계에 있기 때문에 분명한 비판의식이 있어야 해요. 옳은 것을 견인해야 한다는 정신이 있어야 하죠.-편집국장의 판단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물론이죠. 편집국장(리더)이 어떤 식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손바닥 위냐 아래냐가 결정되니까요. 어려운 상황에서 내 선택이 필요할 때면 누가 훈수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선택은 편집국장 몫이죠.-편집권 독립의 마지막 보루니까요.언젠가 축구 국가대표 골키퍼였던 김병지 선수가 내 뒤에는 볼이 없다는 신념으로 뛴다고 하더군요. 기자들도 그런 골키퍼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의 정의를 지키고 불의에 맞서는. 그러려면 전북일보 앞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해요. 어떤 걸림돌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기자로서 소명의식이 중요할 것 같은데, 현실을 보면 정신만을 강조하기에는 너무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어느 시대에서건 언론 환경은 늘 열악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직업을 택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상황을 따라가지 말고 스스로 혁신해야 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혁신의 요체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늘 새롭게 다져야해요. 2만호 동력이 무엇이겠습니까. 언론 환경, 특히 지역 언론의 상황은 어렵지요. 그래서 구성원이 한마음으로 뭉쳐야 합니다. 그런 힘이 없으면 2만호 역사를 우뚝 세울 수 없게 됩니다.-지령 2만호를 들여다보면 전북일보만이 할 수 있었던 일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전북일보가 쌓아온 역사겠지요.시대 시대마다 있었죠. 연륜이나 역사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때그때의 일들이 모아져서 우뚝 서있게 되는 거죠.-그럼에도 현실을 되돌아보면 지방지의 환경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자본과 물량면에서 거대한 중앙지들이 있고, 지역에서는 또 같은 상황에 놓인 지역신문사들이 있고.지방지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역할을 명확하게 설정해야 해요. 경제적으로는 그런 어려움이 있죠. 그러나 지역신문으로서 지켜야 할 역할을 제대로 지켜간다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그런 점에서 보면 지역신문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신뢰가 중요한데 여전히 탄탄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거든요.그것이 전북일보가 풀어야할 과제예요. 독자와의 소통과 신뢰가 생명 아니겠어요. 전북일보라는 깃발을 꽂는다고 할 때 무엇을 위해 어디에 둘 것인가. 주민들의 아픈 곳, 고통스러운 곳과 열망하는 것이 어디이고 무엇인가를 찾아내야지요. 그 중심에 깃발을 꽂고 휘날리게 하는 것이 전북일보의 사명입니다. 단순한 전달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북에는 많은 신문사가 난립하고 있죠. 그래서 전북일보의 역할이 더 중요합니다.두 시간 인터뷰 동안 단호하지 않지만 부드러움으로 상대방을 더 깊이 감화시키는 특유한 화법은 힘이 되어 대화를 이끌어갔다.40여년 기자를 천직으로 삼아온 원로 선배는 인터뷰 내내 기자정신을 지키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라고 강조했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자존감 없이 자기정신을 표류시키고 있다고 경고했다.생각나는 풍경이 있다. 그가 전북일보 전무로 취임하면서 직원들에게 준 취임사다.전북일보라는 깃발을 높이 세우고 마음껏 흔들어라. 내가 그 깃발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이 되겠다.전북일보 지령 2만호 앞에 새바람이 분다. 전북일보의 깃발이 더 힘차게 나부낄 차례다.● [김남곤 사장은] 지역문화 저널리즘 산증인시인 등단 수많은 창작활동김남곤 사장은 1965년 12월 삼남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살이었다. 1973년에는 전북지역의 3개 신문사가 통폐합하면서 새롭게 출범한 전북일보로 자리를 옮겨 1995년 정년퇴임때까지 편집국 기자와 부국장, 편집국장, 제작국장, 업무국장, 수석논설위원을 거쳤다. 퇴임 후에는 전북문인협회 회장과 전북예총 회장으로 8년동안 외유(?)하다 2000년 12월 전북일보 전무로 취임해 사장을 거쳐 2013년 은퇴했다.문화 교육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그는 전북문화의 음과 양을 조명하는 다양한 기획기사로 지역문화를 저널리즘의 중심에 들여놓았다. 그와 교유했던 예술인들은 오늘의 전북문화가 풍요로운 맥을 정립할 수 있었던데 에는 60년대와 70년대 문화부기자로 활동했던 그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던 1979년 〈시와의식〉으로 등단했다. 첫 시집 〈헛짚어 살다가〉를 펴낸 이후 〈푸새 한 마당〉 〈새벽길 떠날 때〉 〈녹두꽃 한 채반〉 〈사람은 사람이다〉 등의 시집과 산문집 〈비단도 찢고 바수면 걸레가 된다〉, 칼럼집 〈귀리만한 사람은 귀리〉 등을 냈다.은퇴 후에는 언론계 동료와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올해는 연초부터 쓰기 시작한 동시를 모아 동시집을 펴낼 계획이다. 지금도 전북일보 사옥 앞을 지날때면 안에서 일하고 있을 후배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랑스러워하고 마음의 격려를 보낸다는 그를 많은 후배들은 가장 존경하는 대선배로 꼽는다.

  • 기획
  • 김은정
  • 2016.04.04 23:02

[전북일보가 걸어온 길] 앞서 걷고 함께 뛴, 66년 늘 사람이 먼저였습니다

전북일보(全北日報)는 1950년 10월 15일 지령 1호를 발행하며 창간해 66년만에 지령 2만호를 발행했다. 전북의 근현대사를 함께한 전북일보의 역사는 곧 지역언론사이기도 하다. 전북일보는 정부방침에 따라 재출범하기도 했고, 뉴미디어 발달과 함께 독자와 만나는 채널도 다양화했다. 일찍부터 편집 자율권을 확보하고 정도언론의 길을 걷기위해 노력했으며, 신문발행외에도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이어왔다. 지령 2만호를 쌓는 동안 전북일보가 걸어온 길을 정리한다.△1950년 한국전쟁 중 창간오늘의 전북일보는 1950년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박용상(1910-1980)씨가 전북시보(全北時報)를 인수해 전북일보(全北日報)로 이름을 바꾸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10월 15일자부터 전북일보라는 제호로 발행했는데, 지령 1호는 타블로이드판 2면이었다. 창간호는 민중의 대변자로 여론의 강력한 창달기관으로 또 한 국가 목적을 급속히 달성구현하는 기관으로 나아가서는 적과의 과감한 사상투쟁의 무기로서 적의 선전공세를 완봉하여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고매한 건국이념을 만민에게 함양하는 높은 교도기관으로서 부하된 사명을 완수하는데 일료 매진할 것을 맹서하는 바이다고 창간 목적을 밝히고 있다. 초대 사장은 이승룡씨, 편집국장은 박용상씨가 맡았다.전북일보는 1952년 고사동에 사옥을 마련하고, 이듬해 윤전기와 활판인쇄기, 연판기, 사진조판시설, 문선 조판 및 출판시설 등을 새롭게 갖추고 현재 크기의 신문을 제작했다. 1956년부터는 4면, 1962년부터 6면, 1969년부터는 8면 발행체제로 확장해왔다. 1970년에는 최신 윤전기시설을 구축하는 등 전북일보는 전북지역 대표신문으로 기능했다.△ 1973년 1도1사 조치로 재출범전북일보는 자율정화라는 미명아래 이뤄진 박정희 정부의 1도1사 방침에 따라 1973년 6월 1일 전북매일(全北每日)과 호남일보(湖南日報)를 흡수통합해 전북신문(全北新聞)으로 재출범했다. 이때부터 전북일보는 정론을 신념으로 봉사를 사명으로 도민을 주인으로를 사시(社是)로 내걸었다. 1988년 언론자율화 조치까지 16년 동안 전북지역 유일의 지역신문으로 기능했다.전북신문은 창간 10주년을 맞은 1983년 6월 1일자부터 제호를 전북일보(全北日報)로 회복했다. 제호 변경은 유신정부 강압에 의한 언론탄압의 소산이었기 때문이다. 서정상(1928-2001)대표이사가 사장으로 취임하고, 전주시 금암동 현재의 자리에 당시 전북지역 최고층인 15층 사옥(우석빌딩)을 마련했다. 이후 각종 제작시설을 확충하고, 지면을 늘리는 등 사세를 거듭 확장했다.1988년 11월 신문발간 자유화조치로 전북지역에도 종합일간지가 등장하면서 경쟁시대가 다시 시작됐지만 여론을 선도하는 전북일보의 위상은 공고했다.△변화와 개혁 앞장서는 신문금암동 이전 후 전북일보는 1991년부터 전 지면 CTS(컴퓨터제작시스템)제작이라는 획기적인 변화와 1994년 시간당 최고 15만부를 인쇄하는 최신형 고속 윤전기를 들여놓는 등 제작 시스템을 현대화했다.1998년 서창훈 대표이사 취임후 정보화시대에 부응하는 경영체제와 미래사회에 대비하는 신문, 편집권 보장을 통한 자유언론 등을 목표로 변화를 적극 모색했다. 뉴스를 거리에 내보내는 전광판시설도 도내에서 전북일보가 처음 구축했다. 1998년 3월 27일 지령 1만5000호를 기념해 신문사 외벽에 전광판(파워비전)을 설치하고 뉴스를 표출했다. 제작 시스템의 완전 전산화와 인터넷 웹사이트 구축 등 정보화 전략도 같은 해 실현했다. 정보화 부문에서도 지역 대표지로서의 위상과 지위를 확고히 다졌다. 젊은 신문으로 변신해야 한다는 대명제아래 한자 제호를 한글로 바꾸고 전면 가로쓰기 편집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1999년 1월 4일자부터는 창간이래 고수해온 석간발행에서 조간체제로 전환했다.창간 49년인 1999년 6월 1일 전북일보는 전북지역 언론사에 또 하나의 새 장을 열었다. 전 과정 컴퓨터 제작시스템을 기반으로 인터넷신문 서비스를 시작했다. 전북일보는 인터넷신문 콘텐츠 강화와 언론 영역 확장을 위해 동영상뉴스 서비스도 시작했다. 2011년 12월 종합편성채널이 출범하면서부터는 동아일보가 설립한 채널A와 협업시스템을 구축하고 방송뉴스 제작에도 참여했다.정론보도를 위한 편집 자율권 확보도 일찍부터 이뤄졌다. 전북일보는 1988년 노동조합 설립후 편집국장을 기자들이 선출했다. 편집 자율권과 취재 윤리 준수 등 건강한 지역언론을 표방해온 전북일보는 2007년부터 10년 연속 정부가 지역신문 활성화를 위해 지원하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대상에 선정됐다.전북일보는 신문제작에 독자 참여를 늘리고 다양한 시각에서의 보도를 위해 2003년 독자권익위원회를 구성했다. 또한 2006년부터는 다양한 분야의 독자들이 신문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시민기자제도를 운영했다.△지역사회 가꾸는 사회활동전북일보는 지역사회 발전을 선도하는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한국전쟁중에는 피난민에게 잠잘 곳과 먹을 것을 제공하는 전라도 인심 되살리기 운동을 벌였으며, 학교 가는 길 확보를 위한 통학의 다리놓기 캠페인도 이끌었다. 전북장학숙 필요성도 전북일보가 주창한 것이며, 새만금 사업의 단초가 된 개발 필요성 기사도 전북일보에서 처음 썼다.전북일보는 전북의 역사를 정리하는 출판사업도 꾸준히 이어왔다. 1973년부터 <전북연감>을 매년 발행하고 있으며, 월간지 <포토전북>(19731977)도 발행했다. 전북의 현안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향토개발연구소(1980)도 운영했다. 전북출신 재경인사들의 단합과 지역에 대한 관심을 도모하기 위한 재경 전북인사 신년하례회는 1983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문화체육사업도 활발하게 벌였다. 1959년부터 미스전북 선발대회를 열었고, 전북역전마라톤대회(1989년)와 전북일보 사장기 테니스(1990)배드민턴(2001)족구대회(2006), 웰빙 태권댄스 페스티벌(2005) 등도 개최했다. 전북일보 신춘문예는 문학청년들의 등단 무대로 주목받고 있다. 2014년에는 전북 지도자들의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리더스 아카데미를 신설했고, 지난해부터는 골프아카데미도 열었다.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찾아 응원하기 위해 무궁화대상과 전북보훈대상도 운영하는 등 전북일보는 전북의 역사를 함께 써왔다.

  • 기획
  • 은수정
  • 2016.04.04 23:02

[전북일보로 본 현대사] 전쟁 포연 속 내딛은 정론 첫발, 도민과 함께 울고 웃었던 역사

1950년 625 전쟁의 포연 속에서 탄생한 전북일보가 창간 66년만에 지령(紙齡) 2만호를 발간했다.지령 2만호를 맞기까지 전북일보는 매 순간마다 도민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특히 전북일보는 이리역 폭발사고, 위도 훼리호 침몰 등 각종 재난 현장에서 빠르고 정확한 보도로 독자들의 눈과 귀가 됐다. 또 새만금 종합개발계획대형마트 의무휴무일 지정백제유적역사지구 세계유산 등재 등 도민들의 삶의 질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사건에 대한 심층보도를 통해 전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이처럼 정론직필이란 정신을 놓지 않고 달려온 끝에 도달한 지령 2만호를 맞아 전북일보는 지난 60여년 간 일어난 주요 사건사고를 정리했다.△625 전쟁 포화 속에서 창간1950년 10월 15일 공보부(문화공보부)에 등록된 전북일보는 전쟁의 포연 속에서도 발행 초창기 전황을 알리는 전령사였다. 라디오나 TV가 없던 시절, 신문은 유일한 국민들의 언론매체였다.1953년 정전협정이 이뤄질 때 까지 전북일보의 1면 기사는 주로 전쟁 관련 기사로 채워졌다. 전황을 알리고 도민들의 전쟁에 대한 각오를 다지게 하는 내용의 기사가 많았다.1952녀 7월 20일자 전북일보는 치욕의 발아래 짓밟히던 날, 적비(赤匪)는 2년 전 오늘 본도에 침입했었다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수억만원에 달하는 재산의 소진은 그만두더라도 도내에서 1만8000여명이 생죽음을 당했다고 기록했다.또 전북일보는 남원과 임실, 고창, 부안지역의 공비들의 잔학성과 잔비소탕에 나선 경찰 국군의 용맹을 현지에서 생생히 취재한 종군기사를 엮어내기도 했다.△완주 소양면 곰티재 교통사고1966년 6월 6일 오후 5시께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속칭 곰티재에서 오후 1시 30분 발 무주 구천동 발 전주행 동아여객 소속 버스가 140m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이 사고로 15명이 숨지고 5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전북일보는 곰티재 교통사고 관련 기사를 사고 발생 후 한달여 동안 수시로 지면에 실었다.6월 9일자 책임 전가에 급급, 사고원인 못 캐내, 도경간 심각한 대립의 기사를 통해 전북도 운수당국과 경찰을 질타했다.12일자에는 울다 지쳐 눈물도 말랐다 벗들아! 고이고이 잠들라란 제목으로 전주공설운동장에서 5000여명이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희생학생 8명의 합동추도식 관련 기사도 실었다.사고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인 7월 2일 오전 10시 45분 곰티재에서는 또 다시 교통사고가 나 2명이 숨지고 2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 발생지점에서 불과 30m 떨어진 지점이었다. 이날 사고를 합해 1966년 한해 모두 3건의 버스 추락사고가 발생했다. 현재 곰티재에는 차량 통행은 가능하지만 여객버스는 다니지 않는다.△이리역 폭발사고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께 이리시 창인동 이리역 구내 입환 4호선에 정차중이던 폭발물 적재 열차가 폭발, 시가지를 삽시간에 폐허로 만드는 사상 최악의 참사가 발생했다.12일자에 전북일보는 사건 경위 및 피해, 사망자 명단을 게재, 도민들의 이해를 도왔다.보도내용에는 15초 간격으로 3번의 폭음이 울리면서 발생한 이 폭발 사고로 사망 56명, 실종 2, 중상 184명 경상 1158명이 발생했으며, 재산피해는 55억원, 철도 관계 피해 23억원 등 모두 78억원으로 집계됐다. 이재민은 무려 1만명에 달했다.폭발 지점으로부터 직경 16km 이내의 건물은 폭음으로 진동, 가옥 675동이 전파됐고 1289동이 반파되는가 하면 호남, 전라선의 모든 열차는 새벽 6시까지 운행이 두절됐다.이날 사고는 한국 화약의 폭발물 호송잭임자로 사고차량에 탑승했던 신무일(당시 36세)씨가 술을 마시고 만취한 채 화차로 돌아가 촛불을 켜놓고 자다 불이 폭약에 인화돼 일어났다.이리역 폭발사고를 계기로 전북일보는 단순한 치유나 봉합이 아닌 새로운 도시 건설을 지속적으로 주창해 현재의 익산을 만들어 냈다.△위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일요일인 1993년 10월 10일 오전 10시 15분께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 앞 격포기점 4.5km 해상. 앞서 9시 40분께 승객 342명을 태우고 위도 벌금항을 출발, 격포항으로 향하던 군산 서해훼리사 소속 110t급 여객선이 침몰했다.이 사고로 승객 292명이 숨지고 70명만이 배에서 떨어진 구명복과 낚시용 얼음상자 등에 매달려 있다 주변에서 조업중인 어선들에 의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전북일보는 10일자로 2개면의 호외를 발행하고 11일자에는 1, 2, 3, 13, 14, 15면 등 6개면에 사고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풍랑속에 기우뚱하면서 정원을 초과한 여객선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전북일보는 정원을 초과한 무리한 항해가 2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며 대형 참사는 천재가 아닌 인재라는 점을 지적했다.바다에 가라앉았던 배는 우여곡절 끝에 사고 발생 17일만인 10월 27일 인양됐다. 이 사고후 종합적인 위도종합개발이 본격 추진됐다.△군산 개복동 화재 참사2002년 1월 29일 대낮, 군산 개복동 성매매집결지인 속칭 감둑 거리 한 업소에서 화재가 발생해 11명의 윤락여성이 숨지고 3명이 중태에 빠지는 대형 참사(결국 14명 사망)가 발생하자 도민들은 경악했다.앞서 2000년 9월 19일 오전 사고현장 인근 대명동 군산역 앞 속칭 쉬파리골목 매매춘 업소 화재로 5명의 여성이 숨지는 사건과 너무나 유사해 당국에서는 과연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전북일보는 2000년 화재방지시설이나 환기시설 등이 없이 영업을 해온 점 등을 지적하며, 안전불감증이 빚어낸 또 하나의 인재로 단정하고 철저한 수사와 대책을 촉구했다.특히 9월 24일과 10월 13일에는 각각 숨진 윤락녀의 일기장과 생존 윤락녀의 검은 커넥션 진술을 단독 보도해 경찰과 행정당국에 대한 여론의 비난은 극에 달했다.그런 상황에서도 1년 4개월 만에 또 화재가 발생하자 전북일보는 여종업원들이 사실상 감금상태에서 현대판 노예상활을 했던 사실을 알렸다.△부안 방폐장 입지 선정 파문김종규 부안군수가 2003년 방폐장 유치를 신청했을 때만해도 국가적 과제인 방폐장 입지선정 문제가 해결되는 듯 했다.주민지원금도 3000억원에서 6000억원으로 늘린다고 정부는 약속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고 주민들의 갈등과 반목이 계속되자 정부는 갈등사업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2004년 2월 반대위측 주민투표에서 압도적인 반대표가 나왔고 2004년 5월 31일 추가 후보지 공모에는 전국 4개도, 7개 시군, 10개 읍면동이 주민청원을 접수했다.특히 방폐장유치 찬성쪽과 반대쪽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1년이 넘게 수백명의 주민과 전경이 부상당하고 민선군수와 군의원이 주민에게 폭행당하고 관공서가 파손되는 사건이 이어졌다.이 바람에 부안군민들은 물론 전북도민들은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안아야 했다.방폐장은 결국 2005년 11월 3일 경주가 방폐장 후보지로 최종 결정됐다.전북일보는 부안과 군산지역의 방폐장, 유치 무산에 따른 상처와 후유증을 돌아보고 찬성과 반대로 나뉜 부안지역 주민들 사이의 갈등을 아우르는 작업을 꾸준히 펼쳤다.△새만금 종합개발계획 확정정부는 2011년 3월 새만금 종합개발계획과 새만금 유역 2단계 수질개선종합대책을 확정했다.이는 새만금 내부개발 기본구상을 토대로 토지이용계획과 기반시설 구축계획을 보다 구체화한 것으로, 1991년 첫 삽을 뜬 지 20년 만이다. 명품 복합도시의 밑그림이 확정됨에 따라 새만금 사업은 본격적인 내부개발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이와 함께 새만금 1호 방조제 도로높임 공사가 완공되고 방조제 전 구간이 24시간 개방되면서 새만금은 새로운 관광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당시 정부가 확정 발표한 새만금 종합개발계획은 새만금을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조성해 국가발전을 견인하는 명품도시로 개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다. 다양한 기능이 배치된 명품복합도시를 비롯해 탄소 프리도시, 신재생에너지 메카, 랜드마크로 조성하는 것을 들 수 있다.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새만금은 산업 및 국제업무 관광레저 등의 시설이 들어선 복합도시용지(23.8%), 농업용지(30.3%), 생태환경용지(15.0%), 과학연구용지(8.1%), 신재생에너지용지(7.2%), 산업용지(6.6%), 도시용지(5.1%) 등으로 구성된다.△전주시 대형마트 의무 휴무일 지정2012년 전북지역 경제분야 최대 이슈는 유통업계의 대형마트 영업규제 논란이다.유통산업발전법 개정에 따른 영업시간 제한 및 의무휴업 도입은 법적 공방 등 많은 논란 속에서도 전주시의회가 전국 최초로 조례제정을 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됐다.대형 유통기업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여 관련 조례에 대한 행정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 당해 6월 서울 강동송파에서 행정법원이 절차상의 하자 이유를 들어 의무휴무 취소를 받아들였다.이후 대구지방법원, 전주지방법원, 서울행정법원 등이 잇달아 대형마트 의무휴업 집행정지 가처분 소송을 기각하는 결정이 내려졌다.특히 대형마트와 SSM이 각각 인구 30만, 10만 미만의 중소도시에서는 신규 출점을 자제하기로 하고 월 2일 이내의 자율휴무 시행을 이끌어 냈다.△JB금융지주 광주은행 인수JB금융지주의 광주은행 자회사 편입이 2014년 10월 1일 최종 승인되면서 전북은행과 광주은행이라는 두 기둥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권 대표 금융그룹의 출발이 시작됐다.전북은행을 모태로 2013년 7월 출범한 JB금융지주는 광주은행, 우리캐피탈, 더커자산운용 등 자회사를 인수하면서 자산 규모 40조원, 연간 순익 1500억원 이상의 명실공히 호남 최대의 금융지주사로 거듭났다.이러한 외형 확장으로 자회사간 연계 영업이나 자금 동원력 확보가 가능해져 보다 많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서민 등에 자금 지원이 가능해졌다. 또한 도내 현안사업인 새만금개발사업이나 전북혁신도시도 본사를 이전한 국민연금공단 등과의 협력 사업에 능동적으로 임할 수 있게 돼 지방은행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시너지가 증폭됐다는 평가다.특히 전북은행과 광주은행으로 이뤄진 투 뱅크(two bank) 체제 출범으로 광역도시 이상에만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지방은행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지난해 7월 익산 미륵사지, 왕궁리 유적 등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백제역사유적지구는 익산 미륵사지, 익산 왕궁리 유적, 공주 공산성, 공주 송산리 고분군, 부여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부여 능산리 고분군, 부여 정림사지, 부여 나성 등 8곳으로 이뤄져 있다. 전북도는 고창 고인돌유적(2000년)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등 2개의 세계문화유산, 판소리(2003년)매사냥(2010년)농악(2014년) 등 3개의 인류 무형유산을 포함해 총 5개의 유네스코 등재 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이와 관련 전북도는 홍보, 관광, 인프라, 보존관리 등 4개 분야 38개 세부 사업에 총 6987억원을 투자하는 종합 대책을 수립했다.앞서 전북도와 익산시, 통합관리사업단은 지난해 5월 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 대응 전담 TF팀을 가동하고, 홍보관광SOC 및 인프라보존 관리 등 4개 분야 38개 세부 사업을 발굴했다.백세종, 최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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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04 23:02

[전북일보가 배출한 인물] 언론인으로 단단해진 사람들, 세상 밝히는 등불로

언론이 다루는 영역은 시대와 지역, 분야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밑바닥부터 최상위 사회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뉴스를 만들어내는 직업이 언론인이다. 독자들에게 보다 신속히, 정확하게, 심층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노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경쟁에서 생존할 수 없다. 그만큼 스스로를 단련시킬 수 있는 곳이 언론사다. 언론인 출신들이 각계에서 다양하게 활동할 수 있는 배경도 이런 언론의 특성 때문이다. 66년 역사의 전북일보 역시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지령 2만호를 맞아 전북일보와 인연을 갖고 각계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을 정리했다.△언론계= 전북일보 출신 중 국내 언론계에 족적을 남긴 언론인들이 많다. 김대중 정부시절 KBS사장을 지낸 박권상씨(1929~2014)는 625전쟁 직후 전북일보에 입사해 기자로 활동했다. 당시 전북일보 편집국장이던 박용상씨의 동생이기도 한 박권상씨는 합동통신과 한국일보를 거쳐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주간을 거치며 필명을 날리기도 했다. 이윤수씨(1928~)는 6.25 전쟁때 종군기자로 활약한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으며, 합동통신서울신문 등을 거쳐 사)대한언론인회 총무이사를 지냈다. 비슷한 시기에 기자로 활동했던 정인량씨(1929~)는 합동통신한국일보서울신문을 거쳐 한국방송개발원 이사장을 역임했다.서울신문 편집국장과 스포츠서울 사장을 지낸 김행수씨, 동아일보 체육부장과 편집위원을 역임한 이종세씨는 1970년대 전북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시사저절 편집부장편집위원으로 활동했던 고 박준웅씨, 연합뉴스 전북본부장을 지낸 조순래씨, 경향신문 편집부국장을 역임한 김정주씨는 1980년대 전북일보에 적을 뒀다. 이해석(중앙일보)임송학(서울신문)정태우(한겨레)김용권(국민일보)박임근씨(한겨레신문)는 90년대 중앙일간지로 적을 옮겨 활동하고 있다.전북일보 출신들이 전북의 다른 언론사에서도 여러 중책을 맡아 활동했다. 편집국장 출신의 고 신현근씨는 전북도민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역시 편집국장 출신의 고 강제천씨는 호남매일신문 사장을 역임했다. 전민일보 사장을 지낸 이중호씨는 90년대 전북일보 편집부장으로 활동했다. 현재 전라일보 사장인 유동성씨도 전북일보에 적을 뒀었다. 박규덕이한영백남혁양재숙장용웅김승일김홍철씨 등은 전북일보가 배출한 논객으로 기억되고 있는 인사들이다. 소용호육완태이건웅씨 등은 90년대 편집국을 이끌었다.전주MBC기자와 JTV전주방송 보도국장을 지낸 장병원 현 전북애향운동본부 사무처장, 전주MBC 보도국장을 지낸 박노훈 전 전북도체육회 부회장, JTV 강혁구KBS 안태성이성각조경모 기자 등은 방송으로 옮긴 경우다.△정치계= 청와대 대변인과 전주에서 두 번의 국회의원을 지낸 임방현씨는 1950년대 전북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후 정치에 입문, 민정당 중앙위원회 의장까지 지냈다. 전북일보에 몸을 담았던 김진배씨도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정치에 입문, 두 차례 국회의원과 농어촌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1980년대 전북일보 기자로 활동했던 장세환씨는 전북도 정무부지사와 18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올 총선에서 국민의당 후보로 뛰고 있다.90년대 지방자치의 부활과 함께 전북일보 출신들이 지방정치에 활력소 역할을 했다. 편집부국장 출신의 김철규씨(75)는 전북도의회 의장으로 광역의회를 이끌었으며, 금융결제원 감사를 지냈다. 고 김희원씨와 김병윤씨는 전북도의원을 지냈다. 전북도의원과 남원시장을 지낸 윤승호씨(62)는 90년대에 전북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편집국장 출신의 황이택씨는 군산시장 선거에 도전했으나 실패한 후 사업가로 변신했다.△문화계학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 소설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최일남씨는 1950년 전북일보 창간 당시 수습기자 형태로 상당기간 근무한 인연이 있다. 70년대말 편집국장을 지낸 이치백씨는 전북향토문화연구회를 이끌며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원광대 교수로 재직하며 고고학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고 전영래씨도 1950년대 전북일보 문화부 기자와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논설위원으로 재직했던 고 이봉섭씨는 소설과 평론,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지역 문화를 일궜으며, 80년대 후반 전북예총 회장으로 활동했다. 전북일보 첫 직선제 편집국장을 거쳐 사장을 역임한 김남곤씨(시인)는 90년대 전북예총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도 전북문단의 맏형 역할을 하고 있다. 문화부장과 논설위원으로 활동한 문치상씨는 지역 연극발전에 디딤돌 역할을 했으며, 전북도립국악원장을 지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동생으로, 현재 미당문학관 이사를 맡고 있는 서정태 시인은 1970년대 전북일보에 몸을 담았었다. 전북 아동문학을 이끌어온 서재균씨도 전북일보 기자로 활동했다.3사 통합 후 첫 편집국장을 지낸 이호선씨, 1965년 공채 1기의 은무일씨, 문화부 기자로 활동한 이영환씨는 교수로 새 출발했다.△사회활동 = 전북일보 초창기에 10여년간 편집국장과 사장을 지낸 진기풍씨는 대한적십자사 전북지사장, 전북애향운동본부 부총재 등으로 활동했다. 편집국장과 전무이사를 지낸 최공엽씨도 적십자사 전북지사장을 역임했다. 고 윤재옥씨는 퇴임 후 전북유도회장을 맡았다.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긴 정동익씨는 동아투위 및 민주언론협의회 등 에 몸담으며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서정일씨는 전북수영연맹회장 등 체육계에서 활동했다. 편집국장 출신의 김종량씨는 퇴임 후 언론중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역시 편집국장 출신의 김재금씨는 우석대 사무처장을 거쳐 현재 언론중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를 지낸 이상원씨, 정읍과 전주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김석곤이덕춘씨, 외무고시를 통해 외교관으로 변신한 김동진씨도 전북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김상규씨는 농협 전북본부장과 농협 신용보증국장을 지냈다. 편집국장 출신의 곽임환씨는 편집의 달인이었던 김호현씨와 함께 지방의정연구소를 이끌었다. 편집국장과 상무이사를 지낸 이광영씨는 대한석탄공사 감사를 지냈으며, 군산분실장으로 활동한 박노길씨는 군산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냈다. 정치부장 출신의 문경민씨는 현재 하림 상무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최범서씨는 여수 엑스포조직위원회 감사로 활동했다. 장수근씨와 전영철씨도 성공한 사업가로 꼽힌다.

  • 기획
  • 김원용
  • 2016.04.04 23:02

지령 20000호…전북일보에 바란다

● 이선홍 전주상공회의소 회장 - 전북의 더 나은 미래 설계하는 리더 역할 부탁황량한 대지에 파란 새싹이 돋아나고 나뭇가지에 꽃망울이 움트고 있음에 이제 완연한 봄의 기운을 느낍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의 계절을 맞아 전북일보사의 지령 2만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한국전쟁이라는 비참하고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던 지난 1950년 창간한 전북일보사는 지난 66년 동안 전라북도의 현대사와 발걸음을 함께하며 그 세월의 무게만큼 지역발전을 위한 대표 언론사로서의 명맥을 유지해 왔습니다.전북일보가 이같은 명성을 지속적으로 이어온 데는 오롯이 창간 정신을 되새기며 시대변화에 맞는 개혁과 도전을 주문해 왔고, 우리 전북이 나아가야할 올바른 정책방향을 제시해왔던 전북일보사 임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현재 우리 전라북도는 많은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남보다 앞서 생각하고 준비하지 않는 다면 살아남기 어려운 격동의 시대에 지역경제의 회생과 발전을 위해서는 도민 모두의 역량을 결집하고 의지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항상 그랬듯이 전북발전을 위해 도민의 화합과 역량을 결집하고, 변화와 혁신을 선도함으로써 전라북도의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 리더가 되어주시길 부탁드리며, 전북일보 지령 2만호 발간을 다시한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태근 전라북도 정무기획팀장 - 긍정적이고 따뜻한 미담기사 많이 다루길전북일보는 1950년 10월 15일 창간한 이래 전북 발전에 이바지해 왔다. 새만금사업, 서해 훼리호 침몰사건 등 굵직굵직한 역사의 현장에서 전북 발전의 한 축을 담당했다. 도민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지금도 전북의 대표적인 언론으로 역할을 해내고 있지만, 도민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사랑받기를 바란다.도민들은 전북일보에서 정보를 얻고, 가치 판단을 내린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현상보다 사안에 대한 배경, 지향점, 여론, 파급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도해야 한다. 심층 분석으로 독자가 올바른 사고와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목소리가 큰 일부 주장이나 단편적인 현상만 보도되면 말 없는 다수의 목소리가 사장되고, 일부가 전체 의견인 양 왜곡될 우려가 있다.또 한 부분이지만 전체 삶을 투영해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기사가 많이 발굴되길 기대한다.1986년 공직에 입문하면서 전북일보를 구독하기 시작했다. 당시 1도 1사 체제 속 전북일보의 위상은 막강했다. 직접 기획추진한 정책이 언론에 보도될 때는 업무에 대한 보람과 긍지를 느꼈다. 습관이 된 신문 구독은 퇴직 후에도 이어질 것이다. 결국, 지면 세대는 신문에서 깊이를 느끼고, 세상의 흐름을 인식하게 될 테니 말이다.● 김제김영 시인 - 적외(赤外)에서 자외(紫外)까지전북일보가 지령 2만호를 맞았다. 1950년 10월 15일에 창간호를 내어 66년째 발행되고 있다. 그동안 지역 근대사의 격변기와 민주화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받아 적었을 것이고, 초가지붕이 함석지붕을 거쳐서 슬래브 지붕으로 변하는 과정을 다 담았을 것이고, 말 그대로 뽕나무 밭이 변해서 아파트 바다가 되는 것을 꼼꼼히 기록했을 것이다. 사람으로 말하면 농익을 대로 농익어서 여유도 있고, 깊이도 갖추었고, 한 살림을 다 꿰뚫는 혜안도 생겼으리라. 지령 2만호를 깊이 축하하며 이제는 성숙한 어른이 된 전북일보에 몇 마디 첨언해본다.첫째는 신문의 역동성을 확보해 달라는 것이다. 종이 신문에 위협적으로 생각되는 인터넷과 디지털 매체를 상보적인 관계로 인식하여, 새로운 소식이나 단순 보도는 디지털 매체로 시시각각 제공하고, 심층기사나 분석기사는 종이 신문으로 보완해 주었으면 좋겠다. 둘째는 미래지향적이고 가치중립적인 보도를 많이 해달라는 것이다. 어느 신문이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지역신문은 지역민들에게 희망적이고 따뜻한 보도를 많이 할수록 좋다. 공동의 선을 이룰 수 있는 어젠다를 개발하고, 사건보도 보다는 공동체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전북일보가 지면을 할애해 주었으면 좋겠다.마지막으로 폭넓은 스펙트럼을 갖추어 달라는 것이다. 단순 보도를 줄이고, 미담이나 인재 발굴기사를 늘렸으면 좋겠다. 시민 참여 기회를 확대하고, 전문가집단을 아웃소싱하는 것도 신문을 풍성하게 하는 힘이다. 이런 노력은 지역민의 다양한 색깔이 신문에 반영되어 적외의 색에서 자외의 색까지 통섭하고 통찰할 수 있는 신문이 되게 한다. 이렇게 할 때 전북일보에는 더 선명하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뜰 것이다.● 취업 준비생 전주 표나라 씨 - 지방지 강점 살려 전북청년 목소리 대변해야전북일보를 구독한지 3개월 정도가 된 것 같다. 고창에서 나고 자라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전북일보를 구독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서울생활을 경험해보니 현실적으로 고향의 발전과 나의 발전이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다.전북지역에 많은 신문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전북일보를 우선 신뢰한다. 그러나 전북일보는 아직 젊은 층에 어필하기에 호소력이 약한 부분이 있다. 일자리 문제를 다룰 때 기업과 지자체의 문제만 다룰 것이 아니라 청년들의 사례를 심도 있게 다뤄줬으면 좋겠다.고향에 남고 싶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전북을 떠난 친구들이 많다. 나도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갈 수밖에 없었지만 경제적 부담감이 커 다시 돌아와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청년들의 타지 생활은 만만치 않다. 여가생활은 커녕 의식주를 해결하기도 벅차다. 힘든 상황에 처한 전북의 청년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인프라를 조성하기 위해 전북일보의 역할이 막중하다.우리 지역 청년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청년들과 만나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명 흙수저라 불리는 청년들의 하루는 어떠한지, 지방 청년들의 애환을 대변할 수 있는 신문이 되어주길 바란다.● 길명환 익산경찰서 순경 - 2만번 발행하려면 하루도 안 쉬어도 54년 8개월전북일보의 2만호 발행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말이나 공휴일 하루도 안 쉬고 2만번을 발행하려면 계산상 54년 8개월이 걸린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습니다. 31살의 새내기 직장인인 저에게 2만번 신문이 발행되었다는 것은 큰 의미를 던져줍니다.현재 저는 경찰공무원으로 홍보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일선 경찰관들의 활약 등을 홍보하기도 하고, 여러 경찰관들의 활약상을 전북일보를 통해 매일 보고 있습니다.미담사례, 사건사고 등 매일 아침 전북일보 속에는 우리 경찰관들의 활약상과 전북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건사고를 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경찰들이 시민을 위해 항상 가까이에서 종횡무진하고 있는 미담사례를 그때그때 보도함으로서 자신감과 함께 경찰로서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경찰관은 시민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며 최일선에서 주민들과 항상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약상이 지면에 보도되면 많은 경찰관들에게 큰 힘이 되며 자긍심을 갖게 됩니다.오랜 역사를 지닌 전북을 대표하는 전북일보가 우리 경찰관의 활약상을 시시각각 보도해주시기를 바라오며 전북일보의 앞날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 기획
  • 전북일보
  • 2016.04.04 23:02

[활자에서 디지털까지…전북일보 혁신사] CTS·웹서비스 이어 카드 ·웹툰뉴스로 '독자 니즈' 반영

본보는 오늘 날짜부터 납 활자를 청산하고 전면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로 제작 발행하게 됐습니다(1991년 2월 1일자 1면)전북일보의 디지털화 역사는 지난 1991년 2월 1일, CTS 도입으로 시작됐다. 지령 1만2821호 때다.그리고 25년이 지나 지령 2만호를 맞기까지 전북일보가 디지털 시대에 따라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노력을 할 예정인지 짚어본다.△컴퓨터로인터넷으로직지와 구텐베르크 성서 이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출판인쇄의 기본은 바로 활자였다.활자는 글자의 세트를 만들어뒀다가 필요할 때 꺼내 묶어 판을 짜 잉크를 발라 찍어내는 방식으로, 전북일보를 비롯한 신문들 또한 전통적으로 활자를 통해 인쇄돼 왔다.이 패러다임이 바뀐 것은 1980년대였다. 당시 출판업계를 중심으로 조판인쇄 과정에 컴퓨터가 도입되기 시작했는데, 막 민주화 바람을 타고 호황기에 접어든 언론계에도 변화의 물결이 밀려온 것이다.컴퓨터로 판을 만들고 인쇄하는 CTS가 전북일보에 도입된 것은 지난 1991년이었다. 바로 전 해 11월부터 일부 지면을 전산으로 제작하는 시도가 이뤄졌는데, 3개월여 후 전 지면에 이 시스템이 도입된 것이다.커다란 변화였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사실 납 활자가 컴퓨터 인쇄기로 바뀐 정도에 불과했다. 여전히 기사는 원고지에 썼고, 편집은 프린터에 찍혀 나온 종이를 놓고 했다.기자 개개인에게 노트북 컴퓨터가 지급된 것은 1998년 12월이었고, 1999년에는 기사를 전산으로 전송하는 집배신 시스템과 사진 파일을 관리하는 화상 DB 등이 도입됐다.그렇게 완전한 의미의 컴퓨터 제작시스템은 1999년 3월에 완성됐다.△인터넷에서도 전북일보를사이버 공간에 전북일보 사이트가 구축된 것은 1999년이었다.1999년 6월 1일, jeonbukilbo.co.kr 도메인으로 웹 사이트가 시험 개통됐고, 한 달 뒤인 7월 1일에 인터넷 서비스가 정식으로 열렸다. 이로써 전북일보도 본격적으로 실시간 속보 경쟁과 온라인 콘텐츠 경쟁에 뛰어들게 됐다.이어 2004년에는 인터넷 회선을 기존의 초당 256kb급에서 초당 10mb급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웹 사이트의 전면 개편을 준비했다.일단 jeonbukilbo.co.kr이라는 주소는 전북일보에서 연상되니 직관적이기는 했지만, 직접 주소를 기억하고 입력해 접속하기에는 너무 길고 복잡했다. 그래서 2005년 1월 1일부터 전북 제일의 알찬 뉴스라는 뜻을 담은 jjan.kr으로 주소를 바꿨다.또 각각의 콘텐츠에 접근하기 쉽도록 기사 배치를 조정했고, 온라인 서비스에 알맞은 콘텐츠를 발굴하려는 노력도 지속적으로 기울였다.가장 최근의 리뉴얼은 지난 2014년 5월 1일 있었다.이와 함께 소셜 미디어 및 모바일 뉴스 시대에 발맞춰 2010년부터 트위터와 페이스북 계정을 잇따라 개설했다.△디지털뉴스국 출범과 새로운 혁신2010년, SNS의 영향을 받아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 민주화 운동이 시작됐다. 이른바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이 항쟁들은, 소식을 전달하는 통로가 완전히 새로워졌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이와 같은 미디어 환경 변화의 바람은 한국도, 전라북도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에 따라, 전북일보도 이에 맞춘 혁신을 준비하고 있다.지난해부터 온라인 뉴스 강화 방안을 깊이 모색하기 시작한 전북일보는, 지난 3월 9일에 디지털뉴스국을 공식 출범시키고 새로운 활로 개척에 나섰다.우선 온라인에서의 전북일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SNS 운영 체계를 바꾸고, 카드뉴스웹툰뉴스를 제작하기로 했다.카드웹툰뉴스는 지난 3월 11일 공개된 리그 3연패도 한 걸음부터: 전북 vs 서울 K리그 클래식 개막전 편, 3월 16일 공개된 Man vs A.I. 편을 시작으로 주 2회 꼴로 시범 제작에 나섰으며, 이후 좀 더 다양한 시도를 선보일 계획이다.또 창간 66주년을 맞는 전북일보가 그간 쌓아온 방대한 정보를 한데 묶어, 전북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다면 우선 전북일보 웹 사이트부터 찾도록 하는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도 준비 중이다.이와 함께, 미디어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콘텐츠, 즉 내용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독자들의 입맛에 맞는 양질의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해 믿고 보는 전북일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방침이다.

  • 기획
  • 권혁일
  • 2016.04.04 23:02

송하진 도지사 "전북이 보유한 자원과 가치, 빛 볼 시기 곧 올 것입니다"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본보 지령 2만호를 맞아전북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라는 주제로 가진 대담에서 송하진 전북도지사는 전북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전북이 가진 자원들을 활용해서 성장 동력화 할 수 있다면 반드시 기회는 온다고 말했다. 송 지사는 전북이 가진 가치들이 중요해진 시기가 도래했다면서 앞으로 전북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미래 전북발전을 위한 과제로 보수성을 과감히 탈피하고 창조적으로 섞이고 연결하려는 노력을 강조했다.- 그동안 전북은 낙후 탈피가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그 결과, 적잖은 성과도 거뒀지만, 여전히 미흡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산업화 과정에서 겪었던 상대적 낙후로 실망감, 열패감 같은 것들이 우리 안에 쌓여왔습니다. 그로 인해 도민들의 자신감과 사기도 떨어진 게 사실입니다. 장기화된 낙후, 익숙해진 열패감에서 벗어나려면 새로운 방식의 발전이 필요합니다. 이미 저만치 앞서 가는 경쟁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승부해서는 이길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시대 흐름이 바뀌고 있습니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사회에서 ICT를 기반으로 한 지식정보사회로, 개발과 성장 위주의 발전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말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차원의 발전전략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게 바로 내발적 발전 전략입니다.- 취임 이후 줄곧 내발적 발전전략을 강조하셨는데, 내발적 발전전략이란 무엇입니까.내발적 발전 전략은 전라북도가 잘하고, 또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들을 발굴하고 경쟁력으로 육성하는 전략입니다. 깨끗한 생태자연, 농경문화, 오랜 역사와 전통, 도민의 끼와 재능 등 전북의 강점과 가치를 바탕으로 한 특화산업을 통해 외부의 관심과 투자, 지원까지 이끌어내자는 게 내발적 발전의 핵심입니다.내발적 발전 전략을 추진하면서 도정 전반에 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번지고 있어 다행입니다. 전라북도가 가야 할 길은 산업화 시대의 기준과는 다른 새로운 길이라는 공감대도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변화의 흐름이 도민들의 생각과 자세까지 새롭게 바꾸는 데로 이어졌으면 합니다.- 자칫 지역개발만을 앞세우다 보니 전북만이 갖고 있는 소중한 가치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북이 지니고 있는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어떠한 놀라운 창조에도 그 배경이 있기 마련입니다. 음수사원(飮水思源). 물을 마실 때면 그 근원을 생각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이 이뤄낸 기적적인 성장에는 수천 년 간 이어온 우리의 정체성과 문화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잊고 지냈지만 결국 한국을 여기까지 이끌어 온 원동력은 알고 보면 우리가 쌓아 온 과거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깊은 역사와 풍부한 전통, 또 이를 계승해나가는 창의적인 사람들, 깨끗한 생태환경, 삶의 원형이 살아 있는 농경문화와 인문학적 소양 등을 잘 지키고 보존해 온 전라북도야말로 이러한 우리의 본질과 근원의 보고(寶庫)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제는 전북이 지니고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물어야 할 때 입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성장의 한계에 직면해 있습니다. 국민의 행복지수는 바닥입니다. 양극화와 이념 대립, 계층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부작용이 심각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인간다움을 찾고 느끼고 싶어 합니다. 위로와 치유도 원합니다. 콘크리트 없는 곳에서 머무르길 소망합니다. 소박하고 따뜻한 삶을 꿈꿉니다. 깨끗하고 믿을 수 있는 먹거리로 건강해지길 바랍니다. 또, 우리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 나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존재의 의의를 찾기도 합니다. 전북이 지닌 가치들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지점입니다. 앞으로 전북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 것입니다.-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전북에는 위기가 아닐 수 없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전북으로선 상대적 낙후를 극복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그런데 이미 세상은 산업화로 발생한 기후변화, 화석연료 고갈, 인간성 상실 등의 부작용을 해결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ICT(internet communication technology)를 기반으로 한 제4차 산업혁명이 시작됐습니다. 상대적 낙후라는 지역적 문제를 극복하면서 동시에 고도문명사회의 부작용 해결, 지식정보사회에 대한 적응 등 인류가 맞닥뜨린 보편적 문제에도 대응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전북이 처한 삼중고(三重苦)의 위기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문명이 새로운 흐름으로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분별한 개발과 양적 성장, 일등주의에 치중하던 문화가 공존과 지속가능성, 질적 성장, 다양성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규범과 도덕적 자원의 고갈로 인간적인 문화와 배려, 협업, 관계의 중요성도 부각되고 있습니다.여러 차례 말했지만 인문학적 자산, 깨끗한 생태자연과 먹을거리, 공동체 정신 등을 보유한 전북은 이런 점에선 우위를 점한 지역입니다. 전북이 가진 자원들을 활용해서 성장 동력화 할 수 있다면 반드시 기회는 온다고 봅니다.- 지사님께서 전망하는 전북의 미래는 어떤 모습입니까.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이 화제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의 패러다임이 전환하고 있음을 온 국민이 생생하게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ICT를 기반으로 한 제4차 산업혁명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음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인식한 계기가 마련된 셈입니다.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면 변화는 필연적입니다. 벌써 5년 내에 세계적으로 7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200만 개가 새로 생긴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AI(인공지능)가 가져다 줄 편리에 환호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도 있습니다. 변화의 촉각에 관심을 쏟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입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시대의 흐름에 대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천만다행입니다.전북의 미래도 4차 산업혁명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것으로 봅니다. 앞으로 어떤 산업이든지 ICT와의 결합은 피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ICT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가치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전북은 농생명 바이오산업, 탄소 중심의 융복합산업처럼 ICT를 접목하기 좋은 산업을 키우고 있습니다. 또 관광과 전통문화, 공동체 정신처럼 인간의 본질과 맞닿은 자산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의 주역이 될 수 있는 역량은 이미 충분합니다. 하지만 결과를 낙관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합니다.-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면.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현대를 진단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시대정신을 포착하기 위해서 입니다. 다음으로 시대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사회적 목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또 이러한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공동체가 함께 의지를 쏟아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시대의 의지란 리더가 일방적, 수직적으로 전달해 표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다수가 공감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대중의 지성과 능력을 수평적으로 연결하고 자유롭게 사고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해가는 문화가 자리 잡을 때 도민의 의지도 결집될 수 있다고 봅니다. 최근 들어 혁신적 사고와 개방적 관계에 기초한 협업의 문화를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특히 당부하고 싶은 점은 우리끼리의 협업과 융합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북의 분위기가 정체되어 있는 것은 보수성에서 기인한 바도 큽니다. 전북발전을 위해서는 과감히 보수성을 탈피해 창조적으로 섞이고 연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알파고도 컴퓨터 1200대가 연결됐다고 하지 않나요.(웃음) 협업하지 않으면 도태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413총선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전북 정치의 위상이 과거에 비해 많이 약화됐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총선 후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라 예상하십니까.전북정치 약화 우려는 야당이 호남 위주로 구성됐던 과거와 달리 전국 정당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호남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재는 과도기로, 이 시기가 지나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총선 후에는 정치권에 적잖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에 따라 전북정치도 크게 변화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 속에서 새로운 인물, 새로운 리더가 나올 것입니다.- 지령 2만호를 맞이 한 전북일보에 거는 기대와 소회를 부탁드립니다.전북일보 지령 2만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언론사답게 그간 전북일보는 지역발전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전북을 대표하는 주요 언론사로서 생동하는 전라북도를 위해 더욱 열심히 뛰어주길 기대합니다. 특히 빠르게 바뀌고 있는 시대를 균형 있는 시선으로 조감하고, 도민들에게 올바른 발전방향과 미래상을 깊고 폭넓게 제시해 주길 바랍니다. 미래적 가치인 융합과 협업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에도 함께 해줬으면 합니다. 전북일보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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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호
  • 2016.04.0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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