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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6.25 남침' - 장세균

오늘은 북한이 6. 25 전쟁을 도발한지 59년째의 해이다. 반세기가 넘은 사건이다 보니 남의 나라 일인것처럼 느끼는 젊은이들이 너무도 많다. 남북한 합쳐 민간인 약 300만명 남북한 군인 약 100만명이 살상된 이 사건은 민족의 큰 상처로 남을 수 밖에는 없다.

 

6.25 전쟁의 원인을 놓고 여러 학설이 난무하고 있다. 노상(路上) 위의 폭행사건을 놓고도 여러 원인이 들추어지는데 하물며 전쟁의 원인에서야. 미국 남북 전쟁의 원인을 놓고도 음모설, 충돌설, 수정설등이 있어 그 원인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6. 25전쟁 원인에 대해 미국의 커밍스(B,Cummings)라는 사람은 미국 고문단의 문서를 중심으로 내전론(內戰論)을 내세운다. 내전론은 6.25전쟁은 한반도 자체내의 문제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첫째는 토지개혁이다. 북한은 해방 후 바로 토지개혁을 단행했는데 남한은 그렇지를 못해 남한의 토지개혁을 완성키 위해 일으킨 전쟁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웅진반도에서 남한과 북한의 잦은 충돌이 있었는데 1950년 6월 24일 새벽에 남한측의 도발과 여기에 대한 북한의 반격이 비화되어 철원, 금화, 양양 등 38선 전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구소련의 극비 문서가 공개되자 6.25의 실상도 투명해 질수밖에는 없게 되었다. 최신 공개된 소련 문서에 의하면 6.25 전쟁 직전에 소련은 북한에게 차관형식으로 약 5 천만 달러에 달하는 최신 소련제 무기와 장비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에게 남침의사를 정식으로 표명한 것은 1949년 3월 5일 모스크바 회의에서 였다고 하는데 그 자리에서 스탈린은 여려 단서를 달았다. 다시 1950년 1월 17일에 김일성은 남침여부를 스탈린에게 타진했고 얼마 후 1월30일에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4월에 다시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극비회담을 가졌는데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해졌다고 하며 남침에 대한 중국의 승인을 받기를 요구했다.

 

한달쯤 지나 김일성은 중국의 승인과 협조를 얻기 위해 중국의 모택동을 방문했고 그 자리에서 중국의 모택동은 미군이 참전하면 중국도 참전하겠다고 했다. 남한의 북침설은 참으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장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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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균 desk@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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