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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산방(萬德山房) - 전일환

 
만덕산 허리를 신작로가 갈라놓았다. 곰티잿길이다. 아예 한자로 웅치(熊峙)잿길이라고도 부른다. 이 길은 여름철엔 원시림 같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수풀터널을 이루고, 골골이 쏟아지는 산골물소리가 온몸을 시원스레 감돈다. 옛날은 진안과 장수, 장계, 무주를 가려면 반드시 이 길을 거치지 않으면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길은 근처에 사는 사람 아니면 등산이나 소풍, 혹은 웅치전적지를 찾는 사람 외에 별로 찾는 사람이 없는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길이다.

 

만덕산은 만덕(萬德)이 뜻한 것처럼 많은 덕을 안고 있는 산이어서 임진란이나 6.25동란에도 이 지역 주민들은 전화(戰禍)를 입지 않았다 한다. 곰티로는 건강을 위해 산보를 하거나 가볍게 조깅을 하는 사람, 사이클을 타는 사람들이 이따금 보이기도 하지만, 다람쥐나 고라니들이 하나 둘, 길을 건너는 것 말고는 거의 움직임이 없는 적막한 산길이다. 천길 험한 산등성이에 아흔 아홉 굽이 산모롱이길이어서 엄청난 버스전복사고가 잇달아 일어났던 마(魔)의 고갯길이었다. 그래서 터널을 뚫은 모랫재길을 새로 내고, 또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앞두고 왕복 4차선의 소태정길을 내더니만 요즘은 다시 곰티재터널로 통하는 익산 장수간 고속도로가 훤히 열렸다.

 

곰티로는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강제점령한 후에 우리가 생산한 각종 산물들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신작로였다. 나는 1962년 8월 전주유학을 위해 이 길로 처음 웅치재를 넘어 전주 대처로 나왔다. 트럭을 개조한 낡은 버스인지라, 고향인 장계에서 전주까지 오는데 거의 하루가 걸렸다. 비포장 길인데다가 읍면 단위 정유소마다 쉬어가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속도전을 벌이고 살아가는 요즘 세상의 눈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내가 어릴 적엔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이 곰티잿길로 전주를 왕래하셨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아버지는 전주에서 전주복숭아 한 박스를 자전거 뒷자리에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 오셨다. 누나와 난 그 복숭아를 정말 맛있게 먹었다. 지금도 난 아버지가 사다주신 여름날의 그 복숭아의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때 먹었던 그 복숭아를 수밀도라 했다. 수밀도(水蜜桃)! 글자대로 꿀물복숭아였다. 이후 전주에 살면서도 꿀물 흐르는 그 수밀도의 복숭아를 맛보질 못했다.

 

90년대 말 베이징문화대학 한국어과 초빙교수로 북경에 갔을 때 그 곳에서 먹어보았던 복숭아 맛과 흡사했다고나 할까. 무더웠던 베이징의 여름날, 아내와 시장에 나갔다가 먹음직한 복숭아 3㎏을 샀다. 중국은 채소나 과일 등 모든 산물은 중량으로 달아 판다. 개수로 파는 우리네완 정말 딴판이었다. 사온 복숭아의 껍질을 벗기니 꿀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온 손을 다 적셨다. 이내 복숭아를 입에 넣으니 사르르 녹아내린다. 영락없이 어릴 적 아버지가 사다주었던 복숭아 맛 그대로였다. 지금도 이 곰티로를 걸을 때면 어린 우리 남매에게 주려고 무거운 그 복숭아 상자를 자전거에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 가파른 길을 오르셨을 아버지를 생각한다.

 

난 틈만 나면 아련한 옛 추억이 오롯이 남겨진 이 곰티로를 안고 있는 만덕산을 즐겨 오르내렸다. 그러다가 급기야 십 수 년 전엔 은퇴 후를 대비해 채전(菜田)도 가꾸고 독서공간도 마련할 겸, 이 산 아래 달윗마을 월상(月上)리에 자그만 터를 장만해 두었다. 그리고 농막(農幕)과 때론 문방으로 스스로 자연에 귀의코자 달팽이만한 한 칸의 와옥(蝸屋) 산방을 마련하였다. 이름하여 만덕산방(萬德山房)이라 할까보다.

 

※ 수필가 전일환씨는1993년 <한국수필> 로 등단했다. 수필집 '그 말 한마디','예전엔 정말 왜 몰랐을까', '옛 수필산책'등이 있다. 전주대 부총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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