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꺼지지 않은 불꽃처럼 가슴을 뜨겁게 하는 꿈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쁜 일상에 그만 이를 잊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맞아, 내가 그때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어!"라며 희미하게나마 젊은 날의 무지개를 되돌아본다. 이 이야기는 화가 고갱의 자서전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 소설적 장치가 어떠하든 우리에게 가슴에 묻어 둔 꿈을 한번쯤 돌아보게 한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 서너 명과 함께 강천산에 올랐다. 정상 부근 옛 절터를 에워싸고 있는 나무들을 우러러 보면서 우리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즉 우뚝 선 나무의 줄기에다 각자의 이름을 새겨놓고 소망을 빌기로 한 것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몰상식한 일이지만, 신라 화랑들이 돌에 서원(誓願)을 새긴 것처럼 우리들은 나무에다 새겼으니, 철부지들의 생각치고는 엉뚱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우리 친구들에게는 각기 별도의 이름이 있었다. 나는 "염우구박(廉牛求博)'이라는 우스꽝스럽고 낯선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의미만큼은 나름 심오했다. '廉牛'는 '청렴한 소'로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삶'을, '求博'은 '널리 구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제때에 상급학교에 갈 수 없을 만큼 가난했기에 '廉牛'는 당시의 적나라한 나의 모습이었고, '求博'은 무엇이든 많이 알고자 했던 나의 지적 욕망을 압축한 것으로 배움에 대한 나의 서원(誓願)을 담고 있다.
당시 함께 했던 세 친구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지만, '廉牛求博'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나를 들뜨게 하였다. '廉牛求博'이란 이름은 지금까지 누구의 입을 통해서 들은 바도 없고, 사전(辭典)이나 선현의 고사에서도 본 일이 없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내 가슴을 달궈주었던 나만의 이름이기에 늘 정겹다.
어릴 적 서원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뼘 지혜를 넓히는 데에 소홀히 했고, 언제나 바쁜 일상에 휘청거렸던 것 같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나는 조금씩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책을 읽고, 틈틈이 내 생각을 나만의 글 바구니에 담기 시작하면서 '求博'의 삶에 다가가고자 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스스로 마음 밭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족함이 많지만, 글밭을 가꾸면서 스스로 성장의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현재의 삶의 수준이나 양상을 크게 바꿔주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늘 새로운 일이었고 작은 기쁨으로 이어졌다. 내 컴퓨터 '글마당'에 한 편 한 편 늘어가는 글들은 언젠가는 나만의 향기가 담긴 책으로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廉牛求博! 세상 물정 몰랐던 어린 시절에 내가 뽑은 '廉牛求博'이라는 괘(卦)를 내 평생의 괘(卦)로 삼을 줄이야. 이는 내가 작명한 이름이기보다는 이제는 내가 가야할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줄곧 외길 교직의 길을 작은 사명감으로 설레면서 살아왔고, 남은 기간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일상의 편린들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하여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스트릭랜드가 파리의 뒷골목에서 그림에 빠졌듯이 나 또한 자그마한 서가에 갇히고 싶다.
* 수필가 송일섭씨는 2010년 '수필시대'로 등단했다.
현재 장수교육지원청 교육지원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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