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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항(雁行)

▲ 박영학

손가락이 자꾸 아둔해 지고 어께가 시리다. 나는 앉은뱅이책상을 밀치고 보일러 눈금을 한 칸 높였다. 눈송이가 창 너머 맞은편 쓰레기 분리대에 소담하고, 박새 두 마리가 향나무가지 속으로 날아든다. 나는 한참동안 눈을 바라보다가 눈주름의 뜻 없는 물기를 까닭 없이 닦았다.

 

겨울방학이었다. 얼굴도 모른 독지가가 보내준 앉은뱅이책상을 챙겨 들었다. 눈은 내리고 버스는 빈 들을 달렸다. 다시 갈아 탄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 들판을 무질러 후미진 마을을 거쳐 마을길을 돌고 멎다가 달리기를 반복했다.

 

군계(郡界)를 벗어난 막 버스가 눈보라 들판 어디쯤에서 벙거지 한 분을 태웠다. 맏형 또래였다. 버스는 해안 초입에 이르러 엔진이 멎고 하차하는 서넛 속에 나도 끼어 내렸다. 눈앞에 남짓 집으로 가는 길이 이십 여리 남짓 놓였다. ‘어쩐다.’

 

벙거지가 선뜻 눈발 속으로 들어섰다. 주춤하다 나도 나섰다. 나는 고2였다.

 

산굽이를 돌아들자 눈은 멎고 구름 틈으로 쏟아지는 달빛 폭포를 가르며 기러기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등성을 넘었다.

 

“‘형설 표’ 책상 아닌가.”

 

“어찌 아세요.”

 

“그게, 저……”

 

벙거지가 책상을 들어주었다.

 

“잿백이로 이사든 들녘 집 학생이든가.”

 

“예에.”

 

“할 마님은 아무개 댁이고….”

 

“……”

 

입이 얼어 대답이 쉽지 않는데 눈길은 몹시 팍팍하고, 춥고, 배가 고팠다. 손가락이 먹먹했으나 ‘쓰러지면 안 된다.’

 

“나도 소년 때 들녘의 꼴머슴이었다네. 육 ? 이오 전란 통에……”

 

뜬금없이 ‘6?25라니.’ 얼어붙은 머릿속이 새삼스레 오그라들었다. 넷째 고모가 들추어준 내 3살 때의 6?25는 몽둥이가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아버지의 행방을 집요하게 추궁했다던가. 안방 문짝이 박살나고 후려갈긴 간장독에서 검은 홍수가 쏟아지던 앞마당의 기억이 희미하다.

 

벙거지가 언 손을 후후 불었다.

 

“산토깽이가 마당으로 들었어. 그 해 겨울에.”

 

잡기는커녕 노마님이 시래기를 던져주었다 한다. 몽둥이패를 따라 나서는 집안 청년 몇을 만류하며 버선발로 고샅을 좇던 노마님이 선하다며 벙거지는 나를 보았다. 까막눈의 청년들은 그저 몰려다니며 패고 두들기는 모진 시국이었다고 한다. 행랑채 문구멍으로 숨어 듣던, 달빛 벙벙한 눈밭에 번진, 노마님의 맨 울음이 귀에 쟁쟁하다고도 했다.

 

벙거지는 ‘산굽이 하나를 더 돌아야한다’며 책상을 건네줬다.

 

“지서 들리면 나를 찾더라고.”

 

매운 산바람 한 줄기가 더 이상은 말을 아끼라는 듯 검은 털벙거지를 벗길 뻔 했다. 언 달은 푸른 밤하늘 틈을 비집어 숨바꼭질을 하고 책상을 출썩이는 손가락은 감각이 없다.

 

윙윙 울던 전신주가 마지막으로 물러선 언덕배기 저만큼 낮은 흙담집 추녀 끝의 자부룩한 불빛 속에 시래기가 어른거린듯하다. 할머니의 기척인 모양이다.

 

“노마님의 먹물 깊은 큰 아드님이 내 까막눈을 틔워 줬네. 꼴머슴인 나를 아들처럼 대접했어, 사람은 평등하다며.”

 

벙거지가 헤어지며 남긴 끝말을 곱씹다가 자칫 미끄러질 뻔했다. 문득 서너 살인 나를 지게에 걸머지고 천자문을 외우던 멀고 희미한 스틸 한 컷이 휘적휘적 ‘잔등’으로 접어드는 벙거지의 뒷모습에 겹쳤다. 꼴을 배려 나서는 지게를 향해 업고 가라고 때를 쓰던 내가 보인다. 나는 잔등을 돌아드는 굽은 그 등을 향해 하마터면 ‘성〔兄〕-’ 하고 부를 뻔했다.

 

반세기가 가까워지는 눈 오는 밤길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눈만 오면 아둔해지는 손가락을 주무르며 창밖을 넘겨본다. 눈보라가 아득하더니 어느새 어스름이 유리창을 넘어와 낡은 빠진 책상을 덮는다. 흐린 ‘형설표’를 덮어준다.

 

△ 수필가 박영학씨는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가람시조문학회장과 원광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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