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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지만 확실한 디딤판이 될 당사자를 위한 전주달팽이집

김창하 민달팽이주거협동조합원 2월 말부터 입주를 시작한 전주달팽이집이 벌써 2018년의 끝자락 까지 와있다. 누가 봐도 무모했고, 사업으로서의 지속가능성, 공공으로서의 효과 둘 중 어느 하나 장담할 수 없었지만, 이번 사업이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끝까지 책임을 다하고 있는 구성원과 도전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도움을 주었던 많은 분들 덕에 올 한해를 무사히 넘긴 것 같다. 물론 쉐어하우스가 뭔지도 모르고 들어와 잘 살아준 식구들이 제일 신기하고 고맙다. 마치 지역의 청년의 모든 주거문제를 해결할 것 같은 마음으로 시작했고, 협동조합으로서는 나름 거액의 돈을 들인 것과 다르게 입주를 시작한 시점부터 전주달팽이집은 전주 청년을 위한 달팽이집 이 아닌 전주의 직장인 청년을 위한 달팽이집으로 시작했다. 사회주택이라는 공공성을 가진 사업이지만, 서울처럼 사회주택을 통해 시중가보다 싼 월세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긴 힘들었다. 독립을 경험해보고 싶은 지역 청년 누구나 살 수 있도록 월세의 문턱을 낮추고 싶었으나, 지역에서 민간단체에서만은 풀 수 없다는 한계를 체감했다. 살아보니 월세를 낼 수 있다고 해서 청년 누구나 살 수 있는 집도 아니었다. 마당, 옥상 거실, 부엌, 화장실 등 공용공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집은 손이 많이 가서, 식구들과 살림을 적절히 나눠서 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살림에 대한 부담이 전가되던지, 누구도 살림을 안하면 집이 망가지고 불쾌해지는 공간이 되 버린다. 적어도 살림을 나누는데 동의하고 자신의 몫은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전주달팽이집에 살 수 있다. 집안의 따뜻함과 안정감도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닌, 매일매일 사는 사람들의 손길로 만들어 진다는 것을 살림을 경험해 보며 알았다. 반상회에 참여하지 않으면 살기 불편한 곳이기도 하다. (가족도 마찬가지이지만) 다양한 사람,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달팽이집에 살고 있고, 저마다 주거공간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제각각이다.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달에 한번 반상회 자리에서는 다른 식구들이 이해 할 수 있게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충분히 대화하고, 서로가 인정할 수 있는 수준에서 협의하고, 협의된 내용을 이행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습관이던지 사고방식이던지 변화를 겪게 된다. 결국 한 사람을 이해 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해해의 폭을 넓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반상회에 참여는 달팽이집 살이의 필수요소이다. 이외에도 민달팽이협동조합에 대한 이해를 통해, 거주하고 있는 달팽이집이 조합원의 자산이며 조합원들을 위해서 집을 소중히 다루었으면 하는 당부와 월세는 조합의 자산으로 다음 달팽이집을 제공하는데 보탬이 되며, 월세의 일부는 조합의 자산을 관리하는 상근자가 마땅이 받아야 하는 일에 대한 보상이자 생계를 위한 비용이므로 월세를 내는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살아 보기도 전에, 당부와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이 문턱을 만들어 내는 것 같지만, 1년을 지내보니, 전주달팽이집은 모두를 위한 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가오는 해에는 주거환경과 관계의 변화를 통해 당사자가 긍정적인 변화를 줄 수 있는 확실한 디딤판이 될 수 있도록, 발을 닫기 전에 명확히 보이고 디딘 후 올라 설 수 있는 안전하고 분명한 안전망 중의 하나로 다듬으려 한다. 2019년도 달팽이집살이를 통해 당사자의 삶이 조금 더 긍정적으로 변화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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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30 19:08

편의와 불편

최아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이런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도시의 미관을 해치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용 노란 보도블록을 제거했다는 뉴스 말이다. 시각장애인용 보도블록은 비장애인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다. 오히려 몇몇 비장애인들은 보도블록의 여기저기 튀어나온 노란 발판이 도시의 미관을 해치니 없애거나 기존 보도블록과 같은 색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다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하지만 발판이 노란색인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시각장애인에게 가장 구분이 잘 되는 색상이 노란색이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의 이동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도시의 미관을 해치기 때문에 불편하다는 의견은 관철되었어야 한다. 어떤 요구가 타인의 기본권을 해칠 우려가 있다면 다수의 기분이나, 불편이 먼저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 그 선택이 누군가의 생을 위협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필요와 불편함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만 이런 위협을 가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연에도 위협을 가하고 있다. 최근 환경단체 그린피스가 플라스틱 빨대의 사용을 금지하자고 했다. 어떤 음료 체인점에서 플라스틱 빨대의 사용을 철회하고, 종이 빨대를 도입했다. 종이 빨대는 플라스틱 빨대보다 내구도가 낮고, 사용감도 불편하다. 사람들은 종이 빨대로는 음료를 섞을 수도 없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종이가 눅눅해져 빨대의 기능도 잃어버린다며 푸념했다. 효율성이 떨어지는 불편함을 선택한 것이다. 왜 플라스틱이라는 좋은 발명품을 두고 흐물거리는 종이를 선택했을까? 몇 년 전, SNS를 통해 화제가 되었던 동영상은 여러 사람의 공분을 샀다. 바다 거북의 코에 플라스틱 빨대가 아주 깊숙이 끼어있었다. 그것을 사람들이 힘겹게 제거하고 바다로 다시 보내주는 영상이었다. 몇 분이나 지속되는 영상을 보고 사람들은 거북이 불쌍하다,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자와 같은 말을 남겼다. 비슷한 영상으로 무인도에 플라스틱이 가득 떠내려가 쓰레기 섬이 되어버린 영상 역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분명 그때 사람들은 편의를 위해 인간들이 사용했던 플라스틱이 쓰레기이자 무기가 되어 자연과 생태계를 위협하는 모습을 봤다. 꼭 저 두 가지의 영상이 아니더라도 수없이 다양한 영상을 통해 기억해왔다. 무리한 일회용의 사용은 자연을 해치고 있다고. 그리고 얼마 전 종이 빨대가 도입되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또 화를 냈다. 불편한 것이 이유였다. 지난 영상과 같은 이야기가 수없이 반복되는 동안 불쌍하다며 목소리를 냈던 사람들은 그 대안에 대해 다시 불편해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의 불편은 때때로 어느 생명에게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을 가한다. 물론 현재의 대안으로 나온 종이 빨대 역시 바다 대신 산을 갉아먹고 있다. 아마 종이 빨대가 최종적 대체제가 되어버린다면 우리는 또 다시 나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걱정하고 말 것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생활에서 점차 일회용품 사용을 줄여나가는 것이 맞다. 나 하나 줄인다고 티가 나겠어? 라는 생각이 든다면 말을 조금만 바꿔보자. 나 하나 더 보태보자.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시각장애인용 보도블록 철거, 더빙 영상에 대한 불만, 노년의 디지털 소외를 고려하지 않은 오프라인 매장의 변화와 같은 사례들은 삶에서 기본적인 것조차 공유하지 못하게 되는 위협이 될 수 있다. 때로는 나의 불편이 누군가의 편의와 효율을 제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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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23 19:28

한복 입지 않은 지역 미디어는 가능한가

김신철 마시즘 에디터 한복 입고 나오면 채널 돌린다 자주 보는 프로그램이 지역 방송국의 프로그램 편성에 밀리자 친구가 말했다. 그는 조건을 이어 붙였다. 한옥마을 가면 돌린다, 판소리 부르면 돌린다. 친구의 불평도 이해할 법하다. 왜 우리 방송은 한복을 입고, 한옥마을에 가며, 판소리를 부르는 걸까? 그것은 관광객이 느끼는 전주의 이미지일 뿐, 우리가 한복의 핏을 가지고 감탄하고 전율하는 사람은 아닐 텐데 말이다. 하지만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말을 들으면 과연 전주다운 것은 무엇인지, 전주다운 것을 바라는 사람은 있을지 근본적인 고민이 되기 마련이다. 지역 미디어 관련 컨퍼런스들에 참가하면 비슷한 고민을 느낄 수 있다. 답은 없는데 숙제만 쌓여가는 느낌이랄까. 젊은 독자층은 텔레비전과 신문을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터넷에서 지역의 뉴스를 보는 것도 아니다. 이런저런 고통배틀을 하고 나면 결국 그래도 지역 미디어가 필요해라는 구호로 끝이 난다. 뿌듯하긴 했는데 돌아가다 보면 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니! 지역 미디어가 필요하다는 건 원래도 알고 있었잖아! 문득 생각해본다. 우리의 그 비장함이 오히려?지역 미디어를 살리지 못한 독이 되기도 하지 않을까? 오히려 지역 미디어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역이라는 키워드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의 인터넷 환경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단군 이래 콘텐츠를 이렇게 대충 만들어도 성공할 수 있는 시대. 많은 고민과 의미를 치열하게 짜낸 콘텐츠 보다도 쉽고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는 재미있는 콘텐츠에 열광하는 때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보다 현장의 스마트폰 동영상이 설득력도 전파력도 높은 시대다. 이제 제작비와 파급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그저 약간의 감각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니 우후죽순 작은 미디어들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남은 녀석은 성장한다. 물론 이런 인터넷 미디어 환경에서지역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서울도 메리트가 없다. 비싸. 마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루는 마시즘은 딱히 지역성을 드러내지 않지만 지역 미디어다. 사무실이 점점 집으로 가까이 가고 있다. 가끔 서울에 미팅을 가면 왜 전주에서 하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집이 편해서요 우리 콘텐츠는 만드는 사람이 편하게 만들어야 보는 사람도 편하다. 그러니 멀리 떠날 일이 없다. 한 가지 더. 기존의 미디어들도 조금 더 가볍게 생각한다면 좋겠다. 꼭 청소년부터 어른까지 모든 독자를 잡아야 하는 걸까? 본인 업무만 소화하기에도 벅찬 인력을 사진과 포토샵과 동영상까지 제작해서 터미네이터로 만들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들 것이다(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도 다 한다는 게 함정. 그래도 재밌어서 한다). 더욱 힘을 빼야 한다. 그래서 더욱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다 할 수 없다면 젊은 대학생들에게 그들만의 미디어 실험을 만들어 보라고 기회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짓고 있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초인적인 능력으로 지역 미디어를 지키고 있는 분들에게 존경과 함께 걱정의 메시지도 드리고 싶다. 내년에는 고민도 부담 없이,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이웃들을 많이 만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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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16 19:44

지역을 살리는 천명의 기적

김은총 이상한계절싱어송라이터 잡지 [Wired]의 창간자 케빈 켈리는 「천명의 진정한 팬(1000 True Fans)」이란 책을 통해 개인 창작자는 골수팬 1000명만 있으면 먹고 산다고 주장한다. 성공하는 소수 20%들만 누리는 블록버스터급 히트, 소위 대박을 터트리지 못하더라도 천 명의 골수팬들이 미적지근한 팬들에 비해 더 많이 구매하고, 창작자에게 직접 구매하고, 새로운 후원 모델을 지지해준다면, 창작자들은 굶어죽지 않고 지속가능한 창작활동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내가 지역에서 음악을 시작하고 가장 많은 시간 고민해온 주제 중 하나도 지역에서 음악하며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이다. 독립적인 주체로서 내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찾는 건, 한 사회구성원으로서 필수적이고 이 시대 청년들이 앓는 공통과제로써 모두에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음악창작을 업으로 하는 뮤지션에게 먹고 사는 문제는 단순히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만이 아닌 직업으로서 음악활동의 지속유무가 달려있는 난제다. 그동안 지역에서 음악을 지속하는 방법은 레슨이나 다른 일용직 일을 병행하거나 창작을 최소화하고 공연수익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순수하게 음악창작활동만으로 이룬 성공사례는 매우 드물다. 음원수익은 소수에게만 편중되어있고, 지역은 최소한의 지역음악시장조차 매우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 지역에서는 여유 있게 음악활동 하는 것을 바라거나 상상할 수 없고,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창작하며 활동하는 팀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케빈 켈리의 골수팬 모델을 지역에서 이룰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지역 내 골수팬들을 확보하고, 그들의 소비를 통해 창작자들의 작업이 지속가능하도록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창작자들이 안정적으로 창작을 이어갈 수 있고, 지역만의 독창적인 창작물이 탄생할 확률도 높아질 것이다. 고무적인 것은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창작자 후원 모델이 최근 꽤 많은 성공사례를 낳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지역에서도 천 명의 힘이 발휘된 사례가 있다. 바로 천년전주사랑모임에서 매년 연말 가장 활발하고 유의미한 활동을 한 문화예술가에게 수여하는 천인갈채상이다. 천 명의 시민들에게 1인당 1만원씩의 후원금을 모금하고, 후원한 시민들이 직접 후보를 추천, 모바일 투표로 수상자를 선정한다. 그렇게 시민들 천 명이 자발적으로 예술가들에게 상과 상금을 수여함으로써 지역예술가들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상의 의미를 넘어선다. 상을 수여하는 시민들에게는 직접 지역예술가를 후원하는 특별한 경험을 갖게 하고, 지역예술가들은 지역민들에게 자신의 활동성과를 인정받는 자부심을 갖게 한다. 그렇게 시민들과 예술가는 상을 매개로 만나게 되고, 그 속에서 진정한 골수팬도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상을 통해, 케빈 켈리가 말하는 천명이 한 창작자를 살리는 사례를 어렴풋이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 개개인이 천 명의 수를 모으기엔 쉽지 않지만, 우리 모두는 얼마든지 천 명 중의 한 명이 될 수 있다. 골수팬 모델은 지역의 다양한 창작자들에게 얼마든지 적용가능하고,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하다. 다양한 분야의 창작물을 지속적으로 소비해주는 것만큼 지역문화와 예술을 살리는 확실한 길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화를 통해, 지역민들이 더 풍요로워지고 풍족해질 수 있다면, 1000명이란 숫자는 결국 우리 모두를 살리는 숫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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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09 19:52

오롯이 나를 위한 삶을 살아보자

김창하 민달팽이주거협동조합원 토요일 아침, 주말치고는 이른 시간 옥상을 청소하기 위해 빗자루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 간다. 분주히 옥상을 청소하는게 거슬렸는지 아침 일찍 방문한 페인트공의 초인종 소리에 잠이 달아 났는지, 자고 있던 식구들이 하나 둘 각자의 방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한명은 잠이 깬 김에 부엌과 거실을 청소하고, 또 한명은 옥상을 혼자 청소하는 것이 힘들어 보였는지, 빗자루를 챙겨 옥상에 온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실내 청소를 마친 사람, 이제야 잠이 깬 사람도 각자 빗자루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온다. 낮 일정이 있는 나는 서둘러 오늘 집에 있을 다른 식구에게 페인트칠 공사를 잘 봐달라고 부탁하고 나갈 채비를 한다. 일찍 집을 나서, 행사에 맞춰 전주에 온 친구와 함께, 먹음직스런 요리와 시원한 맥주로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1시 달팽이집 사례를 이야기 하는 발제 준비를 한다. 달팽이집이나 사회주택이 궁금한 분들이 삼삼오오 모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정해진 시간을 조금 넘긴다. 이후 관심있는 강의를 듣고, 동료들과 전주시의 차없은 거리 행사장을 방문하여, 아는 분들과 인사하고 행사장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3일간 바빴던 외부 활동을 마치고, 다시 달팽이집으로 들어간다. 옷을 갈아입고 부엌에 가니, 오전에 페인트칠 공사를 부탁했던 식구에게 페인트칠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진행과정에 어떤 일들을 조정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샤워를 하고 부엌에 다시 오니 2층에서 쉬고 있던 식구가 내려와 저녁을 먹고 있다. 저녁을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괜히 먹는 모습을 보니 식욕이 생긴다. 대충 내가 먹을 밥과 수저만 챙겨서 식사에 합류하여, 예전 기숙사 생활의 불편했던 이야기, 요즘 직장 생활에 생겨나는 이야기를 주제로 대화를 한다. 영화제작 수업의 시나리오를 쓰던 친구는 조언을 구하기 위해 2층에 쉬던 식구들 데려와 시나리오에 대해 이것 저것 질문하고 수정해 나간다. 그 와중에 서울방문 일정이 있는 식구는 갔다와서 보자며 인사를 나눈다. 인사를 나누는 중에 조만간 있을 반상회 전달사항을 혹시 잊을세라 나가는 식구에게 전달한다. 이후 전날 있었던 함께채움 세미나 이야기한다. 서로의 토론내용을 이야기하며 어떤 점이 좋았고 어떤 점이 아쉬웠는지 대화한다. 포럼이란 공식행사에 직접 참여하면서 본인들이 처한 현실의 무게와 행정의 결정권자들이 생각한 무게가 많이 다름을 인지했는지, 앞으로 지역 청년의 주거 상황을 알리고, 주거환경을 개선시키는 일에는 반드시 참여하겠다고 의지를 보인다. 어느덧 밤 10시가 다 되어가고 한 식구가 요즘 새로 만든 레시피라며 바나나와 유자차를 갈아만든 주스를 해준다. 3일동안 피곤했던 난 주스를 마시고 일찍 잠이 든다. 글을 쓰는 지금, 어제의 일상을 적어본다. 달팽이집 일상속에서 살림을 나누는 모습에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 그리고 달팽이집이란 공간을 소중하게 여김을 느낄 수 있다. 달팽이집을 통해 안전을 느낀 청년들이 바깥에 나가서는 마치 유능한 영업사원처럼 달팽이집을 홍보하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다른 청년들도 안전한 공간에 살고 싶음 바람에 토론회 같은 자리에 자기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자신의 충족을 통해 다른 이들도 충족했으면 하는 마음, 앞으로의 달팽이집의 생활도 자신과 타인을 만족시키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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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02 20:52

사랑의 몽둥이

최아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똑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타고났으므로 서로를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의 내용이다. 이 당연한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시대가 왔다.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수많은 약자가 상대적 강자에게 폭력을 당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있다. 놀랍게도 뉴스를 본 사람들은 왜 맞았는지에 대해 집중한다. 혹자는 맞을 만한 짓을 한 것 아니냐고, 폭력에 대한 원인을 제공했으니 맞아도 되는 것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도대체 그럴만한 짓이 무엇이기에 맞을 만한 짓이 되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이 맞을 짓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난 것은 학교였을 것이다. 얼마 전,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청소년 문제가 나날이 심각해지는 이유는 아이들이 더 이상 맞지 않게 되어서라고, 체벌이 부활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체벌하지 않은 역사보다 체벌한 역사가 훨씬 길다. 고로 체벌로 교육을 받고 자라온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가 뒤죽박죽 엉켜있는 셈이다. 같은 나이의 사람들, 같은 시기에 학교와 사회 안에 사는 사람들만 봐도 그렇다. 비슷한 나이더라도 누구는 맞고 자랐고, 누구는 맞지 않고 자랐다. 그런데 또 누군가는 여전히 다시 때려야 한다고 외친다. 오랜 시간 축적되어온 낭설이 정설이 되어버린 것이다. 때리면 말을 잘 듣는다. 한국은 무엇이든 때려야 된다. 젊은 세대조차 우스갯소리로 작동이 되질 않는 기계를 두드리며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체벌에 관해 이상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과연 맞을 짓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맞을 짓을 도표화할 수 있을까? 그럼 그것을 도표화하고 그 수준에 맞게 어떻게 맞을 것인지 체벌 수위를 정하고 그것에 순응하면 되는 일일까. 그 모든 순서를 상상해보면 이만한 지옥도가 없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맞는 사람의 입장은 거의 고려되지 않을 것이다. 소위 맞을 짓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은 모두 상대적으로 힘과 권력에서 앞선 사람들이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선생이 학생에게, 상사가 부하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당장 맞아서 해결되는 것은 면피용 반성뿐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폭력을 통해 문제가 소강상태에 접어든다면, 때리는 사람은 문제가 해결됐다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맞는 사람은 다르다. 이 눈만 피한다면 그만이다. 구체적으로 내 실수나 잘못에 관해 어떤 부분을 시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는 생략된다. 직접적 경험을 통해 학습할 기회를 빼앗기는 것이다. 그저 다음번에 맞지 않기 위한 행동을 할 뿐이다.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은 자신보다 약자를 만났을 때 그런 기회를 제공할 것인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흔히 듣는 우리 땐 다 그러고 자랐어. 나? 잘 자랐잖아. 폭력은 계속해서 그럴듯한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다시 인권 선언문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존엄을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 이 명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나도 남의 존엄을 존중해야 한다. 억압과 폭력을 통해 지켜지는 존엄 같은 건 없다. 누군가에게 허용되는 폭력이나 체벌의 방향은 언제나 나를 향할 수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남의 존엄을 지켜야 내 존엄도 지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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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25 19:58

마시즘, 요즘 것들의 미디어 소비

김신철 마시즘 에디터 북스포즈 서점의 휴업 소식이 전북일보 지면에 실린 후 많은 연락을 받았다. 하나같이 한겨울의 핫팩처럼 가슴에 품고 싶은 이야기들이었다. 다만 나의 앞날을 계속 지켜봐야 하는 가족들은 달랐다. 마시즘 뭐 음료수에 대해 글을 쓴다고 어릴 때부터 맨날 콜라를 달고 살더니 기어코!! 모두 걱정에서 튀어나오는 말이었다. 그럴 줄 알고 마시즘으로 번 돈으로 선물을 드렸다. 부모님은 말했다. 그럼 열심히 마셔거라!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선물... 아니 1년 반 동안 음료미디어마시즘을 운영하며 얻은 확신이었다. 하루 조회수 17짜리(중에 10건은 나의 것) 사이트가 10만이 되고, 50만이 되고, 100만 이상을 찍기도 한다. 무엇보다 마시즘을 일부러 찾아오는 분들이 많이 생겼다. 그중에는 우리 지역의 대학생들도 있다. 그들은 묻는다. 어떻게 서울에 가지 않고 이런 것을 운영할 수 있죠? 음료수 마시고 글을 쓰는 일인데, 굳이 서울까지 가서 해야 하나요? 그렇다.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환경으로 장소적인 제약을 넘어설 수 있다. 문제는 모두가 콘텐츠 제작자이자 소비자인 이 아수라장에서 어떻게 기억에 남는 콘텐츠를 만드는 가다. 나는 그들에게 1년 반의 경험을 말했다. 미디어의 세계는 매일같이 신상이 터져 나오는 곳이다. 카드뉴스, 유튜브, VR, AR이름 모를 형식까지 흥미롭고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런데 마시즘에서 사용한 형식은 텍스트. 그것도 엄청나게 긴 글이 되었다. 어떤 전략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할 줄 아는 게 그거밖에 없었다. 새로운 시도와 미디어를 한다더니 겨우 글이라니! 많은 분들의 한숨소리가 스테레오로 들리는 듯하다. 실제로도 그랬다. 요즘 애들이 누가 긴 글을 읽어?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정말 잘 읽는다. 인터넷, 모바일 환경에서 사람들이 읽게 되는 텍스트의 양은 엄청나다. 너무 많다 보니까 골라서 읽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콘텐츠와 독자의 사이는 연애 같다.내가 널 좋아하면 열심히 읽어줄게, 하지만 모르는 사이라면 일단 무시당할 각오하고 내 마음을 빼앗아보렴 너무 걱정하지 말자. 꾸준함을 가지고 있다면 형식은 필요 없다. 오직 진심만이 남을 뿐이다. 실제로 요즘 독자들은 미디어나 콘텐츠를 어떤 성격을 가진 캐릭터로 느끼는 듯하다. 그들은 이 콘텐츠에서 광고인지, 진심인지를 구분한다. 만약 진심으로 만들어진 콘텐츠라면 모자란 부분도 매력적으로 볼 정도로 너그럽다. 마시즘 역시 그랬다. 트와이닝 홍차 이름을 순간 아이돌 걸그룹 트와이스라고 잘못 적었는데도, 댓글로 트와이스 노래를 불러주면 말을 다 한 것이다. 물론 오타를 내서 죄송합니다. 결국 미디어를 시작하는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다. 유행에 따라서, 벌이에 따라서 미디어를 만드는 것은 할 수도 있고 괜찮은 일이지만 괴로운 일이다. 물론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미디어를 만든다고 꽃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힘든 작업 중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에 대해 깊게 볼 수 있는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당신을?알아봐 줄?많은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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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8 19:35

우리의 일은 음악입니다!

김은총 이상한계절싱어송라이터 2015년 즈음 홍대 클럽 공연을 다닐 무렵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일은 음악입니다. 한 뮤지션의 기타에 적힌 표어는 나의 가슴에 깊게 와 박혔고, 벌써 3년여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날로부터 조금도 흐려지지 않고 선명하다. 그 표어는 내 가슴속에 늘 일렁였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던 혹은 말할 용기가 나더라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방법을 몰랐던, 나의 음악활동과 음악 노동의 처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은 음악입니다(Music is Work)는 노동조합 <뮤지션 유니온>의 캠페인이다. 우리는 흔히 노동이라 했을 때 어떤 제품을 만드는 공장 노동자나, 농작물을 재배하는 농부, 혹은 사무직의 노동자들을 떠올리지만, 뮤지션 유니온은 모든 노동이 종류와 관계없이 평등하다면서 음악을 만드는 작업 또한 노동이라고 선언했다. 그를 통해 음악이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고도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같은 뮤지션 유니온의 시도는 국내에서는 아직 낯설고 생경한 것이지만, 해외에서는 꽤 다양한 사례가 있다. 미국의 과 영국의 등의 노동조합이 100여 년 전부터 음악인들의 노동보호를 위해 활동 해왔고, 가까운 일본의 경우에도 50여년의 역사를 가진 음악인 노동조합 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면 국내에서는 뮤지션 유니온의 캠페인이 낯선 만큼 음악활동이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뮤지션의 음악노동을 인정하는 것은 음악의 대가 지불의 근거가 되기에 뮤지션이 음악생활을 지속적으로 영위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하지만 개인화된 작업방식과 음악 산업의 특성상 음악을 값싸게 또는 무료로 소비하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합리적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 결과 음악노동은 뚜렷한 급여기준이 확립되지 못한 채 제각각 천차만별이다. 나 역시 음악이 노동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해 겪는 곤란한 상황을 아주 빈번히 겪어왔다. 이를테면 무대를 마련해줄테니 와서 그냥 놀아 달라거나, 저마다 고결한 취지를 봐서 재능기부 해달라는 식의 노동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요청들을 말이다. 어느 정도 커리어를 쌓은 후에도 여전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연시간에 맞춰 최저시급으로 공연료를 주겠다는 제의나 음악 그룹을 인원수에 맞춰 일당제로 산정한 공연료 책정은 허망하다. 물론 무대에서 갖는 공연시간은 하루 일당을 받는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에 비해 매우 짧다. 짧으면 십여 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 가량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대개 그 하나의 공연을 위해서 일반적인 노동 시간 이상의 시간을 쓴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운동선수들이 매일 훈련을 하듯 무뎌지거나 녹슬지 않도록 연습하고, 공연취지에 맞춰 셋리스트를 짜고, 멘트를 준비 하는 일들이 그 근거다. 다만 그 노력은 무대에서 크게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많은 이들이 음악을 즐기고, 음악의 가치를 말하지만 정작 음악노동의 가치는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뮤지션조차 속물로 취급될까봐 자신의 음악 노동에 대해서 쉽게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다. 그러나 명백히 음악은 우리의 일이다. 고도의 기술과 노하우를 집약하고, 어쩌면 예술의 영역에까지 가 닿을 수 있도록 공력을 들이는 전문 직업이다. 뮤지션의 음악노동이 가치를 인정받고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어야 더 많은 뮤지션들이 나타나고 더 양질의 음악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게 우리사회가 꿈꾸는 문화적 풍요로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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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1 16:16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면, 봄은 오지 않는다

김창하 민달팽이주거협동조합 조합원 올해 봄, 입주를 시작으로 이제 달팽이집에 겨울이 오고 있다. 무더웠던 여름 열기와 습기 탓에 집의 온 문을 활짝 열어 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문을 제때 닫지 않으면, 한기에 잠이 깬다. 귀가 후, 비교적 따뜻한 부엌 식탁에 삼삼오오 식구들이 모여 든다. 이야기의 시작은 밖에 춥지? 너 방은 따뜻해? 이런 질문으로 시작으로, 큰 창문에서 흘러오는 한기를 어떻게 막을지, 보일러 온도는 어떻게 할지, 더 추워지면 어떻게 할지 이런저런 구체적인 고민들을 이야기하고 함께 대책을 고민하고 있다. 앞으로 겨울을 맞아 이런저런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보일러 점검도 한번하고, 하루 날을 잡아 창문에 뽁뽁이와 문풍지를 붙일 예정이다. 이 글을 다 쓰고나면, 여름 화단에 심어 놨던 로즈마리도 화분에 옮겨 실내에 둘 예정이다. 혹시 동파 될 수 있는 수도는 있을지, 집 앞에 눈이 많이 와 얼면 어떡할지, 집에 자주 방문하는 길고양이는 괜찮을 지까지 겨울이 오는 데 많은 생각도 함께 오는 것 같다. 이렇든 겨울은 오고, 우리는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해야만 한다. 저마다 다른 온도, 각각 다른 방의 상태처럼, 각자의 겨울은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는 저마다의 겨울나기를 준비해야 한다. 근래에 집에 퇴사를 하고 취업을 준비하거나, 쉬고 있는 식구들이 늘었다. 필자는 퇴사 후 이런저런 일을 할 조건이 되지만, 다른 식구들은, 아직 퇴사라는 여유를 즐기고, 자기만의 시간을 삶의 전환으로 삼기에는 통잔 잔고가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퇴사 후 시간의 여유는 있을지 모르지만, 잔고는 전혀 여유가 없다. 결국 답답하고 수치스런 마음에 퇴사를 했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마음이 꽁꽁 얼어 있다. 입사를 준비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연 이 회사가 나의 미래를 책임 질 수 있을까? 나의 경력에 어떤 도움이 될까? 라는 이야기 보다는,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좋은 상사를 만날 수 있을까? 야근, 주말 근무를 하더라도 수당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근로조건을 지켜줄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근로기준법 정도의 이야기지만, 정작 취업 당사자인 친구들은 근로기준법을 지켜주는 소위 제대로 된 회사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곤 한다. 회사에 불만과 문제가 있어도, 무직자의 삶이 두려워, 이내 잘못된 회사에 버티고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이, 행복은커녕,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생기게 하고, 자존감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린다. 회사의 잘못된 방식과 여러 가지 문제를, 신입사원인 청년에게 너가 아직 몰라서 그래 이런 것도 못해? 혼나면서 배우는 거야 넌 왜 융통성이 없니? 이렇게 말하며, 문제의 원인은 당신이 능력이 모자라거나, 노력하지 않아서야. 라는 식으로 몰아간다. 가장 안타까운 건, 많은 청년들이 이런 환경 속에서 자존감이 바닥을 치면서 자살충동까지 경험한다. 경직되고 단절된 사회, 여전히 근로기준법도 사업주의 이익에 따라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역의 상황은, 청년들이 회사를 다니든 다지니 않든지 간에, 이미 생존을 위협받는 겨울이다. 청년의 겨울이 따뜻해야만, 비로소 봄을 꿈꿀 수 있다.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면, 봄은 오지 않는다. 추운 겨운 식구들과 함께 봄을 기다리며, 따뜻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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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04 19:12

폭풍눈물 눞옾곡롬

최아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폭풍눈물 눞옾곡롬 이 단어의 뜻은 무엇일까요? 언뜻 보기에 창의력 문제나 난센스 문제일 것 같은 저 질문의 답은 같은 말이다 이다. 눞옾곡롬이라는 단어를 거울에 비추듯이 돌려보면 폭풍눈물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인터넷에서는 폭풍눈물과 같은 의미로 눞옾곡롬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기발한 상상력의 언어를 모두가 신기하게만 보는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한글을 파괴하는 것이라며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인터넷 용어와 젊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신조어에 대한 지적은 한글날이면 매번 되풀이되는 이야기다. 외계어와 같은 한글 사용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펼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미 한글은 창조와 동시에 전통을 깨부순 언어다. 국가에서 반포했으나, 널리 통용되기까지 국내외로 많은 반발을 얻었다. 조선사회가 완전히 붕괴하고 나서까지도 대부분 인쇄된 문서에서 국한문 혼용은 통상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통의 한글 사용법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엄밀히 말하면 한자도 외국어 아닌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서도 한자어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글의 창제 자체가 신종 국어 표기법이 아니었나 하는 주장을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한복판에 살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한글 반포 직후의 어느 사대부이거나, 아니라면 아예 한자를 모르던 사람이다. 난데없이 나타난 직선과 곡선이 뒤엉킨 이 모양이 문자라고 한다. 익히기 쉽고, 들리는 대로 쓸 수 있다. 첫째로 사용하기 아주 편리했으며, 둘째로 배우기도 쉽다. 셋째로 새로 창조된 것이다. 한글 반포 당시해 마주하며 느꼈을 이 세 가지의 감상이 인터넷 용어를 마주하는 기성세대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낯설고 외계어 같으나 젊은이들 사이에서 쉽고 빠르게 배우며 간편하다. 무엇보다 그 세대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언어다. 어쩌면 신조어를 매 순간 만들고 있는 세대들이 한글의 전통적 가치를 되새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글은 배우고 사용하기에 쉽다는 장점 이면에 몇 가지 난해함을 가지고 있다. 불규칙 변형이 많고, 구어의 대부분이 표기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교육의 빈도와 강도를 떠나 국민 대부분이 사용하는 말씨가 조금씩 다르다. 세대가 변할 때마다 조금씩 억양과 언어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자주 사용하게 되는 단어는 살아남고 사용되지 못한 단어는 조금씩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간다. 언어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세대 간에 자란 환경이 변하는 것조차 막을 수는 없다. 구어와 표기법의 틈이 마냥 벌어지도록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이유로 국립국어원에서는 끊임없이 맞춤법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일 테다. 사실 줄임말과 신조어는 예전에도 있었다. 다만 그 언어에 대한 표현과 배경지식이 변화하는 것뿐이다. 옥떨메(옥상에서 떨어진 메주)와 같은 단어도 줄임말이 아닌가. 시대와 세대를 대변하는 것 중의 하나는 언어다. 당장 언어의 파괴를 걱정하기보다 통용되고 있는 언어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더 먼저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가장 자주 사용하고 창조해내는 단어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있는지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옛것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며 다그치는 것만큼 답답한 일이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눞옾곡롬 흘릴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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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28 19:31

북스포즈, 포즈합니다

김신철 마시즘 에디터 전북대학교 지하보도 앞 편의점을 기억한다. 그곳은 모임, 데이트 등 여러 만남의 출발점이 되는 곳이었다. 물론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곳을 조금 더 벗어나면 하나 남은 음반사가 있다. 좋아하는 가수 앨범을 몇 번 사본 게 다였지만 뿌듯한 곳이었다. 물론 그곳은?분식집이 되었다. 용도가 아닌 분위기로 기억에 남는 공간이 있다. 그런 공간들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들리면 마음이 헛헛하다. 이런 말을 쓰는 이유. 바로 북스포즈가 문을 닫았다. 동네책방들의 삼성 같은 곳이 어쩌다가 나는 재미있게 듣지만, 말씀해주시는 분들은 걱정이 가득하다. 이게 다 인사를 제대로 못한 탓이다. 2000권 가까이 되는 책들을 정리하고, 기록하고, 포장해서 보내니 주변에 인사를 할 여유가 사라졌다. 한 권씩 봤을 때는 책이지만 상자에 포장하여 나르면, 내가 있는 곳이 책방인지 피라미드 공사현장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당최 진지할 수 없는 것이 나의 단점이다. 20대의 마지막 자락을 함께한 공간을 정리했으니 허전한 마음이 생긴다. 전북일보의 청춘예찬에 연재했던 책방의 이야기들처럼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침대 밖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던 내가 다양한 경험을 했다. 이게 다 함께 북스포즈를 만들어준 북스포즈 디렉터님들과 손님들 덕분이다. 송은정 작가의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라는 책이 있다. 누구나 책방이나 한 번 열어볼까?하는 시대. 책방을 열었고 여러 이유 때문에 문을 닫게 된 웃픈 내용이다. 송은정 작가의 책방 이름은일단멈춤이었다. 결국 책방 이름 따라간 것이 아닌지 쿡쿡 댔었는데. 우리 책방 이름은북스포즈(Pause의 뜻은?일시정지)였다. 여러분도 책방을 내시려면 이름을 크게 지어라. 진지하다. 동네책방 대기업이라던가, 동네책방 돈방석이라던가. 북스포즈는 왜 멈춤을 선택했는가? 여러분의 걱정과 달리 심플한 이유였다. 북스포즈를 만들 때 우리는 2년을 기한으로 일종의 실험을 했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이 되었고 북스포즈를 되돌아봤다.우리는 더 좋은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아니었다. 다행히 우리가 잠시 문을 닫더라도 좋은 동네책방들이 전주에 정말 많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은 손님들 때문이다. 북스포즈가 문을 열기도 전부터 언제 문을 여냐고 찾아왔던 단골부터, 학교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는 곳이었어요라고 말하는 학생까지. 그들에게 조금 더 잘 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지면을 빌려 정말 감사했다는 말씀을 전한다. 아쉬워하지 말자. 생각해보면 많은 책들을 이렇게 (강제로)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덕분에 예상치 못하게 한 가지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 음료수다. 평소에 마실 것을 참 좋아하지만, 이 안에 숨겨진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와 북스포즈 사람들은 마시즘(마시다+ism)이라는 온라인 미디어를 만들고 1년 동안 운영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더 잘하기 위해 책방을 정리한 것이다. 북스포즈의 문을 열리지 않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여전히 전주에서 좋아하는 일을 활발히 하는 사람들이다. 지역에 대한 애착, 그리고 시민들에게 받은 사랑을 기억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다시 만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쉬워하지 마시라. 즐거운 일이 가득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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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21 17:40

MADE IN JEONJU, 음악을 심은 사람

김은총 이상한계절싱어송라이터 장 지오노의 책 <나무를 심은 사람>에는 황무지를 울창한 숲으로 일궈낸 양치기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는 매일 묵묵히 도토리를 심었고, 한그루씩의 떡갈나무로 키워내 결국엔 아름다운 숲을 이뤘다. 그렇게 단 세 명의 사람밖에 살지 않던 척박한 땅은 만 명의 주민이 이주해올 만큼 살고 싶은 곳이 되었고, 우리에게 한사람의 열정과 헌신이 자연과 인간에게 얼마나 큰 희망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나무를 심은 사람>의 이야기가 실화임에도 우리 주변에는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처럼 낯설게 느낀다.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무한 이기주의와 경쟁 속에 살아가며, 남을 밟고 서지 않으면 내가 밟히고 만다는 냉정한 위기의식을 늘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결한 신념을 갖고 모두를 위해 묵묵히 도토리를 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타인에게조차 쉬이 강요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양치기를 발견한 장 지오노의 마음으로 한 사람의 열정이 만들어낸 축제 메이드 인 전주(MADE IN JEONJU)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1년 기획자 정상현을 중심으로 시작된 메이드 인 전주는 제1회를 서울, 광주, 대구, 부산 그리고 전주를 순회하는 전국투어로 이뤄냈다. 그 후 전주 구도심에 위치한 클럽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지역팀들을 초대해, 최대 50여팀 이상이 참여하는 어엿한 페스티벌의 형태를 갖추었다. 유의미한 성과도 거두었다. 전주인디뮤지션들과 신진뮤지션들에게 등용문의 역할을 감당하고, 미약했던 지역인디음악계를 새롭게 형성하는 계기가 되어주었음은 물론이요. 과거 지역뮤지션에겐 허락되지 않던 공간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지역인디밴드가 공연한 첫 사례를 만들어냈고, 전주세계소리축제와 연계하여 시너지를 내는 등 지역문화계에서 주목하는 축제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메이드 인 전주 페스티벌은 2015년 제8회를 마지막으로 멈춰 섰다. 페스티벌이 커질수록 기획자 한 사람에게 짊어진 짐은 너무 무거웠고, 척박한 지역에서 혼자 음악을 심어가기에 전주는 너무 광활한 황무지였다. 기획자와 지역뮤지션은 뚜렷한 한계를 드러냈고, 지역음악에 관심을 갖고 페스티벌을 관람하러온 관객들 역시 소수에 불과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규모는 커졌지만, 공연장의 공허함도 함께 커져갔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한 기획자와 지역뮤지션을 주축으로 순수하게 만들어낸 민간 지역페스티벌은 거대자본의 지원을 통해 만들어지는 여타의 페스티벌의 그것과 결코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메이드 인 전주 페스티벌과 지역음악은 이제 심겨지고 자라나는 숲이다. 지금은 그 가치를 다 알 수 없고, 다소 무모해보일 수 있겠지만 우리 지역이 더 많은 이들이 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줄 그런 숲이다. 단 한사람이 심은 나무가 많은 이들을 이롭게 했다. 우리는 개개인이 그런 나무를 심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지만, 지역에서 음악을 심는 일은 생각보다 쉽다. 여전히 지역음악은 공연되고 있으며, 멈췄던 메이드 인 전주 페스티벌도 11월 16일~17일 양일간 다시 열리기 때문이다. 공연 관람을 통해 우리 지역에 직접 음악을 심어보자. 당신의 전주가 음악으로 아름다운 숲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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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14 18:36

다가올 이별, 막연한 두려움에 자신을 놓지 않길 바라며...

김창하 민달팽이주거협동조합 조합원 추석 연휴를 십여일 앞두고 아버지가 응급실에 가게 되었다. 일단 폐에 물이 차 있었고, 검사를 진행 해보니, 심장 판막 이상과 심장이 크게 부어 있다는 진단이 나왔고, 인공 판막 수술을 해야만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76세의 고령이지만, 운동을 즐겨하고 여태 병원 신세를 져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입원 수술 이런 것들이 매우 낯설게 다가 왔고, 평소에 입원비 수술비를 염려해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한 가족에게 병원비는 크나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수술에 대한 아버지의 두려움과, 차후 생길지도 모른는 수술이후의 환자로서의 삶,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자녀로써의 두려움은 수술을 바로 진행하는게 맞는데도 불구하고, 수술동의를 3일이나 미루게 되었다. 사실상 8시간 정도가 걸리는 큰 수술이기는 하지만, 요즘에는 일반적인 수술이고, 수술이 잘못될 확률이 5% 내외였고 수술 이외에는 다른 방도는 없었다. 수술 비용도 대부분을 의료보험에서 감당하고 있어서, 비용이 큰 부담이기는 하지만, 감당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막연한 두려움이 나를 망설이게 했던 것 같다. 혹시 모를 큰 수술비용과 수술 후 합병증에 대한 우려, 한번 수술을 하게 되면 병원신세를 계속 지게 된다는 생각, 이런 생각 때문인지 수술에 대한 제대로된 경과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병원비에 얼마없는 돈을 탕진하지 말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과 가족끼리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것을 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수술을 하더라도 명절이 코앞이니 명절을 지내고 수술을 하자는 이야기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수술은 명절 전에 하게 되었고, 수술경과는 잘나왔다. 아버지는 다른 합병증 증상은 없었고, 회복도 빠르게 진행되어 수술 후 일주일만에 퇴원하게 되었다. 병원비용 문제도 천만원정도 생각했던 비용과 달리, 의료보험의 적용을 예상보다 많이 받아서, 3백만원 가량의 비용을 부담하게 되었다. 이제는 무사히 넘겼지만, 내가 아버지보다 먼저 지금 생을 마감하지 않는 한, 아버지와의 인연을 정리하지 않는 한, 나는 아버지의 노쇠를 지켜보고 의료비를 감당할 것이다. 이번 경우처럼 막연한 불안감과 할 수 있는 게 돈을 지불하는 것 밖에 없는 무력감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마음속으로 막연한 불안감에 감정적인 선택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의료기술은 상상이상으로 발달하여 마음만 먹는다면, 생명을 더욱 연장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통장의 잔고만큼의 일만 가능하고, 사람의 생은 결국 연장할 수는 있어도 영원할 수 없다. 나에게 최선은 가족 구성원 서로를 상처주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범위에서 선택을 하는 것이었다. 오로지 아버지의 생명의 연장만을 바라고 주변의 모든 것을 쏟아 내는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의료기술 혹은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 하는 것처럼 나는 생각한다. 이번 일을 글로써 정리해서 기고하는 이유는, 나와 같은 상황에 있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그때 느꼈던 고민, 피어오르는 감정, 생각의 변화들을 공유하고, 부모를 떠나 보낼지도 모르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고, 현실적인 고민을 하는 것은 삶의 지속을 위해서 당연하며, 당위적인 선택이란 없고 선택은 놓인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나와 당신은 최선을 다했을 것이고, 죄인이 아님을, 세상이 조금 더 나아져 개인에게 너무 무거운 선택을 강요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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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07 19:17

이상한 나라의 왼손차별금지법

최아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참 이상한 말이다. 왼손잡이의 차별을 금지하는 것을 구태여 법으로 만들자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왼손잡이가 삶에 있어서 어떤 불이익을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 왼손잡이들을 위한 물품들이 제작되고 있고, 왼손잡이여서 살해위협을 받았다는 사람도 본 적이 없고, 왼손잡이라는 이유로 실직을 하거나 왕따를 당했다고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는 왼손잡이라는 이유로 아무도 그에게 묻지 않는다. 너 왜 왼손잡이야? 당연히 쓸모없는 질문이다. 날 때 왼손을 쓰기 시작한 사람에게 왜 왼손잡이냐고 묻는 것만큼 소모적인 질문도 없을 것이다. 당장 지금 학교나 가정에서 아이에게 왜 왼손을 쓰냐며 윽박지르거나 면박을 주고, 심하게는 물리적인 폭행까지 행사해가며 아이에게 오른손 쓰기를 강요한다면 아마 그 가정과 학교는 아동학대와 같은 이름으로 처분을 받게 될 것이다. 말이 안되는 이야기니까, 때문에 왼손잡이차별금지법이라는 말은 아주 이상한 말이 되는 것이다. 참 이상한 말이라고, 필요없는 법안이라고 비웃을 수 있는 건 내가 오른손잡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통념이 거의 사라졌다고 말하는 요즘 세대를 사는 청년층은 어떨까. 그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자라왔을까?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주변에 여럿은 어릴 때 강제로 왼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았다. 습관적으로 왼손을 사용할 때 마다 혼이 나거나, 행동에 제약을 받는 등 불이익을 당했다. 만약 가정에서 그렇게 가르치지 않아 운 좋게 학교로 넘어갔더라도 여전히 자유롭게 왼손을 쓰기는 불편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보기에 동생은 내내 왼손잡이로 사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무어라 나무라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아주 삐뚤빼뚤한 글씨를 써냈다. 물론 오른손으로 말이다. 공동체 안에서 소수이거나 조금 달라 보이는 사람에게 가해지는 사소하고 미묘한 시선과 압박들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구태여 누군가 굳이 나무라지 않더라도 어떤 이는 스스로에게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검열이 마침내 도달하는 곳은 부끄러움이다. 정상성, 대다수에서 벗어나버린 스스로에 대한 정의가 된다. 공동체 안에서 차별과 부끄러움이 함께 자라나는 것이다. 애초에 이렇게 태어난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것은 분명히 이상한 일이다. 지역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에서 반대집회를 연 사람들에 의해 사람들이 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다. 폭행 사건에 대해 알리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호소하는 SNS 글에 달린 댓글이 너무 오래 잊혀지지 않는다. 왼손잡이차별금지법 있는 거 봤냐? 이제는 왼손잡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통념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타의로 오른손, 양손잡이가 된 왼손잡이들이 있다. 편안하게 저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그가 오른손잡이라서 일지도 모른다. 다시 축제의 이야기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다. 다수가 거리와 같이 개방된 공간에서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공동체가 개인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이미 그렇게 존재하는 사람들을 부정하는 일이다. 여전히 이해가 안된다면 단어를 몇 가지 바꿔보자. 성인차별금지법, 전기밥솥차별금지법, 갈색머리차별금지법처럼 단어를 바꿔보고 이만큼이나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이제 저런 질문은 그만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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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30 19:26

풍요속의 빈곤, 지역음악

김은총 이상한계절, 싱어송라이터 전주는 무수히 많은 축제로 1년을 가득 채우는 축제의 도시다. 축제의 도시, 전주!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많은 축제들이 전주의 곳곳에서 펼쳐진다. 국제영화제, 세계소리축제, 비빔밥축제, 한지문화축제 등 전주하면 떠오르는 축제들부터 가게맥주문화를 소개하는 가맥축제와 책의 도시로 발돋움하는 독서대전에 이르기까지. 이제 전주는 도시를 상징하는 소재들을 발굴하고 축제화하는 것에는 가히 전국 최고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의 지역에서 음악하기의 여정도 전주의 축제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이상한계절의 활동은 작은 카페와 클럽에서 시작되었고, 직접 기획을 통해 정기공연과 미니콘서트의 형태로도 관객들을 만나왔지만 전체 커리어를 돌아보면 월등히 축제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엿한 무대와 공연료를 제공받는 축제 무대는 지역뮤지션이 소규모의 정기공연에서 얻을 수 없는 확실한 보상이 있어서, 음악을 영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공적인 축제에 이름을 올리고, 일정한 출연료를 받는 일은 지역뮤지션으로서 나의 음악이 굳건히 지지받는 안정감을 주었고 음악적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축제를 통해 얻는 수익 역시 작업실을 꾸리고, 음향장비를 구매하고, 앨범을 내기까지 자립적 음악생산에 필요한 전 과정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나의 사례만 보더라도 지역축제는 한 지역뮤지션의 음악을 지탱하는데 음악적 자존감과 비용적 도움이라는 꽤나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축제공연이 양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것과는 달리 지역뮤지션으로서 갈수록 빈곤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기공연으로, 한 뮤지션이 긴 호흡을 갖고 음악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무대다. 전주에 지역음악 정기공연의 생태계가 어엿하게 존재했던 것은 아니지만, 몇 안 되는 소수의 공간이라도 대관비용의 부담 없이 음향장비와 엔지니어를 갖추고 언제든 관객을 만날 수 있게 준비된 무대는 지속적이고 든든한 활동기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점차 줄어드는 유료관객과 비어가는 관객석, 오랜 시간 버팀목이 되어주던 음악전문공연장이 사라지는 현실은 빙하가 녹는 과정을 어쩔 수 없이 지켜봐야하는 북극곰이 된 기분이다. 물론 동물원에서도 북극곰은 살아 갈수 있겠지만 본디 살아온 북극의 빙하에 비할 수 없듯이, 이젠 더 이상 정기공연에서 이것저것 눈치 보지 않고 맘껏 자작곡을 풀어내거나, 가까이 나누는 교감을 통해 충성도 높은 팬들을 얻는 경험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불러온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고, 탁월한 음악이나 마케팅을 통해 강력한 티켓파워를 갖지 못한 지역뮤지션의 책임도 있겠지만, 자기 음악을 마음껏 선보일 수 있는 정기공연 무대와 연계 홍보 채널의 부족에서 근본적인 진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역음악의 산파역할을 감당할 공간과 정기공연, 그리고 홍보채널이 없다면 지역에서 새로이 음악하려는 이들은 탄생하기 어렵고, 지역음악은 계속해서 정체되고 경쟁력을 잃을 것이다. 전주가 풍요로운 축제의 도시가 되어가는 동안 축제의 한편엔 늘 지역뮤지션이 있었다. 하지만 지역뮤지션이 어떻게 음악활동을 시작하고, 어떤 방법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은 부족했고 빈곤했다. 이제라도 지역뮤지션의 등용문이자 요람 역할을 해주는 정기공연 무대를 위해 근본적인 지원을 해야 할 때다. 그랬을 때 경쟁력 있는 지역음악은 탄생할 수 있고, 질적으로도 더욱 풍성한 축제의 도시 전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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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택수
  • 2018.09.16 19:18

살림, 일상에서 상대를 염두에 두는 것

김창하 민달팽이주거협동조합 조합원 살림은 생활을 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공간을 만들면, 공간을 유지관리하기 위해서 살림을 해야만 한다. 살림에 며칠만 손을 놓게 되도, 삶을 지속하기 위한 공간이 혐오시설로 변모한다. 이미 쌓여버린 식기들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기대감보다는 설거지를 해야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게 한다. 오랜 시간 방치한 쓰레기들은 벌레가 꼬이고 악취가 나 혐오와 불쾌감을 준다. 막힌 배수구와 곰팡이가 핀 화장실은 들어가면서 무심코 욕까지 나온다. 요리하고 싶은 주방과 정돈된 살림살이 나의 청결을 책임지는 화장실은 살림이라는 책임을 완수해야만 받을 수 있는 권리다. 하지만 살림의 가치는 과소평가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림을 기피한다. 기꺼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닌 마지못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살림을 해야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대부분 가정에서는 주부가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도시에서는 청소부가 해야 하는 일처럼 여기고, 공유하는 공간이 어질러지면 책임자라고 여겨지는 이들에게 불평을 하거나 이의를 제기한다. 공간을 사용하는 누구나가 마땅히 누리고 있지만, 책임은 일부에게 있는 일. 일상에서 살림은 기피되고 전가되어 누군가의 일이 되어 버렸다. 대부분 살림을 대신 해주는데 고마워하기 보다는, 상대의 역할이라 생각하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느낄 때 상대를 평가한다.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그에 걸맞은 대가와 감사함이 없다면 올바른 공동체라 할 수 있을까? 공유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공동체에서 살림을 나누는 일은 가장 큰 미션이다. 일단 일을 나누기 이전에 공간의 살림이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먼저 시작된다. 각자 살면서 살림의 이해 정도가 다양하고 지금 사는 공간에 대해 생소하다. 해야 할 살림이 무엇이 있는지 이야기 하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토론한다. 각자 집 밖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은 구성원들이라 그런지, 살림을 잘하기 위한 토론 보다는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을 찾고 방식을 정한다. 그렇게 살림을 통해 상태가 유지된다. 적절한 상태의 판단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할까? 나는 일상에서 상대를 염두에 두는 것이라 생각한다. 설거지해서 건조대에 놓인 식기를 다음 식사 전에 마른행주를 사용해 닦아서 정리해 놓는 것은 다음 사용자가 요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과, 정리를 상대에게 미루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주요 공유공간인 거실과 부엌을 주로 쓸고 닦는 것은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청결에서 오는 쾌적함을 같이 공유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이다. 공동체에서의 살림은 서로 간 대화도 중요하다. 서로의 생활 패턴과 욕구를 확인하고 적절한 협의를 통해 살림의 정도를 정한다. 늦은 밤 빨래를 널어 놓으려 2층에 올라가는 것은 2층 식구들을 놀라게 한다. 청소기를 사용하는 것은 청결을 위해 필요하지만, 때에 따라 다른 이의 휴식을 방해하기도 한다. 대화하고 협의하지 않는 살림은, 상대에 대한 배려고 했을지라도 상대는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달팽이집 생활을 하면서, 살림을 조금씩 배워 나가는 것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고 상대방을 인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살림을 통해 일상에서 함께 사는 법을 익히고 있다. 앞으로도 공동체를 위해 살림이라는 미션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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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9 19:03

한 집에 사는 사람들

최아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결혼 하고 싶어. 이 말을 하면서 친구 A의 목소리는 조금 들떠 있었다. 어떤 결혼? 사회적 결혼? 제도적 결혼? 참 아이러니 한 대답이다. B가 그렇게 대답했을 때, 함께 있던 친구들은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이 눈치없는 사람아. 너랑 결혼 하고 싶다잖아. 친구들은 B에게 귀여운 면박을 줬다. 이 이상한 대화는 사실 B가 고민하고 있던 가장 큰 문제였다. A와 B는 퀴어 커플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이란 남성과 여성이 가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대화를 듣고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B에게 결혼과 가족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에게 가족은 어떤 모습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그리는 결혼과 가족은 B의 생각과 많이 닮아 있다. 결혼에 성별이 정해져있다는 뜻은 사실 자격과도 같다. 결혼한 남녀에게는 제도적으로 다양한 권한과 혜택이 주어진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고, 어쩌면 헤어질 수도 있지만 결혼제도를 통해 가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아마 어느 이성애자 커플도 파트너의 결혼하고 싶다는 말에 사회적 결혼인지, 제도적 결혼인지 선택해야 한다는 고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결혼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끼리 하는 결혼을 말하는 거야? 아니면 다른 나라라도 가서 진짜 법적으로 결혼을 하자는 거야? 나에게 가족은 한 집에 사는 사람들이다. 때로는 이 사람들이 보호자가 되어야 하고, 수혜자가 되기도 한다. 나는 적어도 같은 거주지 안에 묶여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부르고 싶다. 1인 가구나 공동체 생활이 늘어나고 있는 요즘에 가족에 대한 재정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룸메이트라고 부르는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사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가족과 함께 산 시간보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친구와 더 오래 살았을 것이다. 지난동안 내가 본가에 다시 들어가 살았던 시간은 일 년이 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족관계등록부라는 끈끈한 서류로 본가에 있는 가족들과 묶여있다. 여전히 멀리 떨어져있는 경우에도 가족으로서, 보호자로서의 권한이 작동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타지에서 함께 살고 있는 친구에게는 어떤 권한이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나와 저녁을 같이 먹고, 출근을 함께 하고, 월세를 나눠 내는 것 말고 그녀에게는 아무런 권한도 없다. 가족이 아니고, 법이 규정하는 테두리 안에서 결혼했거나, 결혼할 예정이 아니라면 보호자로서의 권한 행사 자체가 거부될 수 있다는 뜻이다. 비상시에는 서로를 얼마나 신뢰하고, 얼마나 오래 함께 세월을 보냈는가보다 서류상으로 가족인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현대 사회는 1인 가구와 동거 가구가 급증하고 있다. 이 말은 곧 모두가 결혼이라는 제도 안으로 묶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대안적인 가족제도가 필요하다. 이미 동반자등록법, 시민결합제도, 생활동반자법 등등 각국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대안가족 제도가 존재한다. 제도 주변부의 사람들이 점점 더 늘고 있다. 마땅히 제도 주변 혹은 밖의 사람들도 제도의 수혜를 누려야만 한다. 바뀐 생활 방식에는 역시 알맞은 제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가족을 자격 없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다만 적어도 그 고민의 출발선은 같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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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2 19:29

동네책방 분투기

김신철 독립서점 북스포즈 공동대표 책방을 하는 사람이 왜 책방을 잘 몰라? 지인의 물음에 할 말이 없어졌다. 매일 같이 책 속에 파묻혀 살기 때문에 주말은 조금 벗어나고 싶었던 이유도 있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책을 파는데 왜 멀리까지 가서 사야 하는지 몰랐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변명 같았다. 그렇게 4개월 동안 책방 직원이 직업이요, 책방 손님이 취미인 생활이 반복되었다. 요리로 치자면 셰프가 치킨을 시켜먹는 것과 같다랄까? 물론 신분은 속이고 책방들을 구경했다. 북스포즈를 열 때만 해도 전주에 동네책방이라는 곳이 많이 없었다. 가장 많이 받은 문의가 서점인데 참고서는 왜 안 팔아요?라는?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동네마다 제법 멋진 동네책방이 생겨났고 동네책방이라는 문화공간이 사람들에게도 익숙해졌다. 이런 소규모 책방들이 동네에 자리를 잡을수록 전주라는 도시의 품격이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매체에서는 동네책방의 새로운 시도, 재기 발랄한 실험정신 등 타이틀을 붙여주고 있다. 책방 손님의 입장에서는 가슴 벅찬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책방 직원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아픈 일이기도 하다. 동네책방들이 생존을 위해 정말 갖은 노력과 시간을 쥐어짜고 있다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동네책방은 책으로 수익이 나는 공간이 아니다. 유통상의 문제 때문에 책을 사더라도 책방에 돌아가는 수익은 적다. 또한 출판사와 직거래가 아니면 판매량이 아닌 보유하고 있는 책의 양으로 매달 금액이 나간다. 책을 팔지 않으면 가지고 있는 책들에 대한 보관료를 내야 하니까 문제고. 책을 팔더라도 빈자리에 책을 다시 채워야 하니까 똑같은 돈이 나간다. 계륵이다. 그래서 많은 동네책방들이 책을 매개로 하는 커뮤니티를 만든다. 강연회, 전시회, 독서모임, 심야책방 등 사람들과 여러 활동을 하는 것이다. 책방지기는 본인의 취향과 공간, 그리고 모임을 제공하고, 책방 손님은 느슨한 소속감을 얻는다. 다행히도 출판사와 지자체 등에서 이런 활동을 지원해주고 있다. 다만 대부분 섭외비, 음료와 비품 값 정도라 책방지기 스스로의 임금은 다른 곳에서 벌어야 한다. 결국 책방지기들이 수익은 다른 곳에서 벌어야 한다. 투잡인 것이다. 동네책방이 많이 늘어났지만 동시에 많이 사라지는 것은 이런 요인이 크다. 겉으로 보이는 책방을 꾸며놓은 것보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곳에 쏟는 시간과 노력이 크다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일 것이다. 물론 어떤 가게나 문화가 정착되는 것에는 시간과 노력이 들기 마련이다. 이제는 동네책방의 시대라며 열매를 보여주지 않는가? 그럼에도 이 또한 유행에 그치는 것이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든다. 동네책방의 수는 크게 늘었지만, 독서율이나 출판시장은 런닝머신 위를 걷고 있다. 결국 어느 정도 정해진 인구들이 새로운 동네책방을 찾아 돌아다니는 모습이다. 더욱 새롭고, 독특한 취향을 위해 책방을 꾸미는 사이 우리가 말하는 동네는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르겠다. 다행히 이런 숙제를 풀어나가는 동네책방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한 때 지역에서 가장 독특해 보였던 동네책방들이 이제는 관광객보다 주민들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유행은 일시적이지만 생활은 영원하다. 동네책방의 갈 길은 아직도 멀었지만, 묵묵히 걸어나가는 책방지기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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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6 18:12

지역음악 자급자족(自給自足)

지역음악 자급자족. 최근 몇 년 동안 이상한계절의 활동기치로 내걸었던 말이다. 공연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마지막 곡 전주에 가면을 앞두고 지역음악 자급자족을 말할 때면 관객석에서 몇몇 실소가 터지곤 한다. 고도의 분업화시대에 자급자족이라니 게다가 한창 달콤따듯한 사랑 노래를 부르다 웬 정치적인 느낌의 언사란 말인가? 그 낡고 오랜 느낌의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왜 그 말이 거기서 나와?라는 식의 반응을 자아내곤 한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어떤 노래를 향해 위와 비슷하게 반응했던 기억이 있다. 과거 가수 배일호가 전국노래자랑에 나와 신토불이를 부르던 그 순간, 어린 나에게도 꽤나 낯설고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사랑 노래 일색의 무대 속에서 신토불이는 특별했다. 몸과 태어난 땅은 하나이며, 제 땅에서 산출된 것이라야 체질에 잘 맞는다는 신토불이의 정신이 그 당시 농촌에서 얼마나 큰 위안이 되고, 그들의 농업현장에서 환영받았는지 나는 느꼈기 때문이다. 자급자족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도 이뤄져왔던 일이지만, 이제 자급자족은 구시대에나 가능한 구호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급격히 변화한 사회속에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공급하는 일은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다. 신토불이가 쇠락해가는 농촌사회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던 것처럼, 지방소멸시대의 지역에 사는 우리에게도 지역살이의 자부심을 고취하는 음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다매체다채널의 환경 속에 다양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 같지만, 단적으로 음악소비에 있어서만큼은 여전히 특정 거대음원차트의 영향력 아래 많이 재생되는 혹은 많은 이들이 듣는다고 여겨지는 음악을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소비한다. 능동적으로 자신이 어떤 음악을 좋아하고 어떤 음악을 소비하고 싶은지 알고 스스로 결정하기 보다 저마다 개별적인 취향을 잃고 강요된 취향 속에 부유한다. 이러한 경향은 단순히 어떤 음악을 어떻게 듣는가 하는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문화산업의 다양한 영역에서 확장되어, 각자 개개인의 필요에 의한 문화소비가 아니라 산업이 형성한 특정한 유행을 집착하듯 쫓게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 특정한 문화와 정신만이 주류라고 취급하게 하고, 우리의 개성과 정체성 그리고 개별적 삶의 영역을 상대적으로 하등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 청년세대의 무기력과 낮은 자존감의 원인을 찾는다. 개개인의 자아가 다양한 기준과 가치로 인정받지 못하는 환경속에서는 그 누구도 진정으로 자신을 인정하고 만족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더 나다운 것, 더 내게 필요한 것을 찾고, 더 다양하게 욕망하고 소비해도 된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다양한 욕구를 채우는 일 앞에서야 나는 비로소 이 시대가 요구하는 자급자족의 필요성을 말할 수 있다. 지역음악 자급자족은 지역에서 직접 음악을 만들어 지역민과 더불어 나누고, 지역의 다양한 문화 욕구를 일깨우는 것. 그로써 지역을 더 자유롭고 풍성하게 하는 꿈이 담겨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게 다양한 나의 필요를 드러내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지역을 만드는 건 우리에게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지역에 산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가치, 이제는 우리가 직접 공급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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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19 21:41

우리는 일상을 이야기해야 한다

▲ 김창하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원 최근 친한 친구의 아버지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쌍둥이 남매여서 또 친한 동네 친구들이 많아서 그런지 문상을 또래가 많이 오게 되었다. 청년들과 활동을 자주 해서 그런지 나이를 잊고 지냈는데,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을 보니 내가 이정도 나이가 되었구나 하고 실감도 했다. 뭐 그런 마음보다는 활동 위주로 사람들을 만나고 지냈던 나로서 거의 8~9년 만에 보는 친구들이라 반가움이 무척 컸다. 둘째 날 오기로 약속한 친구들과 달리 첫째 날 혼자 와서 그런지, 너무 오랜만에 봐서 반가워서 그런지 상을 당한 친구가 문상을 온 나를 챙기며,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잘 지냈는지 묻는다. 먼저 도착해서 상차림을 도와주는 친구들과는 틈틈이, 8~9년전 생일파티 때 같이 재밌게 지냈던 추억, 서울에서 오순도순 지냈던 이야기, 지금 사는 이야기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야기를 하며 문득, 지금보다 단단하지 못했던 20대 시절, 민주주의니, 사회활동이니 몰랐던 그 시절, 나를 지켜줬던 것들은 정치, 종교, 공동체, 복지 그런 것들이 아니라, 그저 지금 만난 친구들이 주었던 위안, 격려, 대화등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었다. 마치 식물의 생장에 걸 맞는 환경이 필요하듯이 그 시절 나에게 걸 맞는 환경을 친구들이 제공해 준 셈이다. 서른 여섯이란 나이에 비로소 친구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기쁘다. 이런 생각을 가지면서 지금의 사회 활동을 고민하게도 되었다. 30대 후반으로 가고 있는 내가 생각하는 청년에게 필요한 것 말고, 지금 20대인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의 지금을 있게 해준 것이 어린 시절 또래가 준 소소것들 이듯이, 지금의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도 소소한 것이 아닐까? 내가 그 시절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결핍된 것이 무엇일까? 정치, 사회, 경제는 바라봐야 하는 가치이지, 문제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작은 것을 살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평소보다는 조금 다른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주변에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들이 제법 있다. 지금의 길은 가자니 너무 답답하고, 다른 길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고민에 아직 잘 몰라서 그래., 이런 것 해보는 것 어때?등 상대의 경험이 쌓이지 않음을 지적하거나, 조금 더 경험이 있다는 착각에 다른 권유를 하는 나를 바라 본다. 그 친구들한테 필요한 것은 그런 경험적 지식이 아니라, 그저 지금의 불안과 결핍된 환경을 채워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식물이 환경만 갖추어지면 알아서 원하는 대로 잘 자라듯이 그 친구들을 불안하게 하는 환경만 개선되면 알아서 꿈을 찾고 키워 나가지 않을까? 지금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 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먼저이지 않나 싶다. 사회는 청년이 어떤 환경에 쳐했는지도 가늠하지도 못하고 있고, 저변에 깔린 환경을 바라보려면 이러한 일상의 내용들을 쌓여야만 한다. 일상에서 겪는 공통된 문제가 세대의 문제일 것이고, 그 세대를 바라 볼 수 있는 좋은 지표가 될 것이다. 아울러, 상대가 처한 환경을 주시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삶 자체를 바라봐야 한다. 상대가 가진 가치는 삶의 지향점이지 삶이 아니다. 삶을 보려면 상대의 일상을 참조해야 한다. 그래야 일상을 참조해서 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 서로의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린 지금 서로의 일상을 나누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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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1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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