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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기록 그리고 창작에 대하여

▲ 최아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6월 27일 개봉한 영화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삶의 가장 큰 이야기이며, 여전히 지구 어딘가에서 비슷한 역사가 반복되는 일이기도 한 이야기다. 혹자에게는 지겨워져버린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마저도 아니라면 버거워 좌시하지 못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영화 허스토리와 아이캔스피크의 이야기 방식이다. 흔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은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실 그대로를 담아내고자 한다. 이전의 역사, 실화 영화들은 그런 이야기 전개 방식을 충실히 답습해왔다. 그러나 이 두 영화는 오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생생하게 과거를 기억한 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허스토리와 아이캔스피크는 여타의 공통점을 제하더라도 당사자들의 현재를 담았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학부생 시절 교수님께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준비해 오늘을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역사다. 결국 우리는 과거로부터 와서 현재를 살아간다는 뜻이다. 과거로부터 배워서 비슷한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를 기억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영화는 역사적 의미를 충분히 다 하고 있는 셈이다. 이전에 쏟아졌던 다른 역사, 실화 영화를 되짚어보자. 최대한 자세하고, 적나라하게 당시의 상황과 실제를 섞는다. 그곳에 한 방울씩 그런 상황에 처했을 법한 당사자에게 감정을 섞고 약간의 관계를 섞어 넣는다. 그들이 관계를 형성하고 상황을 만들어가는 곳에 역사적 사실은 남지만 오늘은 남지 못한다.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은 대체로 끔찍해하고, 힘들어한다. 다시는 이를 반복하지 말아야한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짐하지만 대체로 분노에서 끝이 난다. 오늘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생각은 지속되기 어렵다. 영화 속의 장면이 되풀이되느라 괴로움의 연속일 것이다. 당장 나조차도 하루하루 견디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어쩌면 그 다음의 상상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창작자는 창작물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조금 더 현실에 가깝게 만들어야 한다. 비극적인 과거의 상황을 여러 번 다시 설명하는 것보다 당사자의 목소리로 전하는 편이 나을 테다. 피해 당사자가 피해 사실에 대해서 본인이 증언하는 것과 제 3자가 그날의 모습을 세세하게 재연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나치게 정밀하게 반복되는 창작물은 다시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음을 창작자는 기억해야만 한다. 창작자는 기록자가 아니다. 창작자는 사실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같이 새로운 오늘을 보내고 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지 못하고,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와 같을 수 없다. 당시의 공통된 기억을 가졌더라도 각자 현재를 살고 있는 모습은 다르다. 오늘의 사람들을 두고 과거의 상황만을 반복하는 것은 창작이 될 수 없다. 실화를 다루는 창작자라면 꼭 기억해야 한다. 실화를 다루되, 2차 가해는 하지 않는다. 2차 가해나 지나치게 정밀한 재연 없이도 훌륭한 창작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 예시가 바로 허스토리와 아이캔스피크다. 기억은 기록으로 남기고, 기록은 2차 창작이 된다. 다만 창작이 기억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기억을 선명히 되풀이하기 위한 창작은 창작과 예술로서의 기능을 잃게 될 것이다. 창작과 예술은 오늘의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방식이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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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05 19:43

독서를 죄책감으로 하는 이에게

▲ 김신철 독립서점 북스포즈 공동대표 내가 동화책을 읽었을 무렵이다. 아버지는 삼국지 전권 세트를 사주며 말했다. 삼국지를 3번 읽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하지 마라. 덕분에 수년간 아버지와 대화 다운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야 삼국지를 3번 읽게 되었다. 문제는 그 사이 아버지는 삼국지를 더 읽었다는 것이다. 삼국지를 5번 읽지 않은 사람과는 말을 섞지 말거라. 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한국에서 독서량이란 그 사람의 수준을 평가하는 지표다. 하지만 이런 외침도 독서량 통계라는 팩트 앞에서는 겸손해지기 마련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7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인 1명이 연간 평균 8.3권의 책을 읽는다고 한다. 독서자만을 대상으로 하면 평균 13.8권이다. 그리고 항상 이 통계의 말미에는 지난해에 비해 독서량이 너무 떨어졌다, 세계 최하위 수준이라는 설명이 붙곤 한다. 그런데 독서량이 적은 게 나쁜가? 아니 애초에 우리의 독서량은 적은 것인가?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책을 읽는 세대다.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를 보면 1250년에는 잉글랜드의 제법 부유한 가정에서도 책을 3권(성서, 기도서, 성인의 전기)을 가진 경우는 비교적 행운에 속했다며 말한다. 우리는 아직 읽지 못한 책들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나 단테보다 이미 더 많은 책을 읽었음을 간과하고 있다.라고 밝힌다. 우리는 이미 이름을 대면 알만한 위인들보다 책을 많이 읽었다. 지금 이 글을 읽을 정도의 독자라면 소크라테스! 넌 날 따라오려면 멀었다라고 당당히 외쳐도 된다(아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독서량 통계는 종이 책만을 포함한 것이다. 여기에는 전자책, 만화, 잡지, 학습지, 교과서 등이 빠져있다. 또한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접하는 많은 정보는 어떠한가? 분명 쓸모라고는 눈곱만큼?찾을 수 없는 것들도 많다. 하지만 가끔 책 보다 괜찮은 가르침을 주기도 한다. 나는 책이 사람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밝혀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왜 책이 아닌가? 지난 금요일 북스포즈의 심야책방에서는 종이책이 아닌 만화책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이나중 탁구부라는 엽기 만화였다. 이 책을 인생 만화로 꼽은 분은 탁구대를 훔쳐간 할아버지와 되찾으려는 아이들 사이에서 말다툼하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할아버지와 아이는 누가 탁구대를 사용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느냐로 나름의 논리대결을 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만화를 소개해준 분은 그 장면에서 늙음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고 했다. 그냥 웃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니.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를 생각해지면 독서가 피로해진다. 적게 읽어도 좋으니 혹은 그것이 책이 아니어도 좋으니 재미있는 것을 찾고 곰곰이 깊게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도 이런 대사가 나오지 않은가. 어떤 이들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고 단순한 모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다른 어떤 이들은 껌종이에 쓰인 성분표를 읽고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다. 물론 책을 많이 팔아야 행복한 서점 주인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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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29 19:02

이제 서울로 올라가시나요

▲ 김은총 이상한계절싱어송라이터 전주에서 갓 음악을 시작했을 무렵, 만족스럽게 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올 때면 어김없이 들었던 말이다. 이제 서울로 올라가시나요? 그 생경한 인사 앞에 나는 늘 거짓말을 했다. 네 곧 올라갑니다. 곧 올라가야죠! 지역에서 음악 좀 오래 했다는 선배들에게 물어도 답은 한결 같았다. 지역에서 음악하는 것, 숨겨야 관객들이 더 좋아해, 지역의 ㅈ만 말해도 관객은 너의 노래를 들으려 하지 않을 거야., 지역 냄새나게 굳이 밝힐 필요가 있겠니? 타당한 말이다. 내가 느끼기에도 지역 팀이라고 밝히는 순간 관객들의 긴장은 풀어지고 흥미를 잃은 듯한 태도를 보였으니까. 지역의 인디뮤지션. 그 자체만으로 지역에서 낯선 존재인 우리는 최대한 서울에서 온 인디뮤지션인 척 해야 했다. 그게 공연을 끝까지 집중도 있게 이어가는 데 유리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의 인디뮤지션, 그 중에서도 지역뮤지션에겐 어쩌면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전략이었다. 그러나 자못 가슴 한편이 답답한 건 시간이 흘러도 해소되지 않았다. 지역과 거리두기는 합리적인 공연전략임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게 풀어헤치려 할수록 더 깊게 조여 왔다. 내 안에는 왜 이렇게 숨겨야만 하지?, 나는 지역이 부끄러운가?, 내 음악이 부족해서인가? 등의 괴로운 질문들로 이어졌고, 결국 이곳에서 열심히 노력해 서울로 올라가야지, 이 곳은 나의 진짜 무대가 아니야라는 생각이 내게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분명했다. 그때의 나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지 않았고, 지역을 연습무대 정도로만 여겼을 뿐이다. 만족스러운 무대 뒤에 이어지는 그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묘하게 으쓱해했고, 지역에 있어선 안 될 것이 있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들을 즐겼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뮤지션이면서 지역 냄새를 숨기고 지역과 거리를 둘수록 나의 음악적 가치와 자신감이 높아지는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금방 공허해졌다. 나는 어디까지나 서울로 가지 못한 지역뮤지션이고, 지역에 남겨진 패배자일 뿐이었다. 지역뮤지션으로 지닌 낮은 자존감은 지역과 거리두기만으로는 결코 높아지지 않았다. 소위 홍대에서 잘나간다는 인디뮤지션의 무대와 그들이 누리는 인기를 볼 때면 한없이 작아졌다. 그럴 때마다 더 노력해야지, 더 좋은 음악 만들어야지 라는 원론적인 다짐을 반복하지만, 이미 나는 처음부터 실패한 채로 아등바등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지역에서의 삶은 나를 패배자로 만들었다. 이는 슬프게도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또래의 지역청년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행복한 지역청년을 만나기 쉽지 않다. 인 서울하기 위해 재수에 삼수를 거듭하는 입시생, 대기업 입사를 목적으로 취업뽀개기에 몰두하는 취준생, 고시원을 전전하는 공시생, 취업을 유보한 채 망명한 대학원생의 모습으로 지역에 산다. 그렇게 지역을 등지거나 나의 존재를 지역에서 철저하게 숨겨야만 한다. 이렇듯 잘나고 좋은 것들은 모두 서울에 있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회, 반면에 지역에 남겨진 것들은 모두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는 의식은 우리 곁에 뿌리 깊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 열등하고 부족한 것은 나와 내 지역에 대한 자존감, 지역에 사는 우리 스스로를 가치있게 바라보는 자의식이 아닐까? △김은총 싱어송라이터는 2014년 4월 첫 EP(봄)으로 데뷔해 지역음악 르네상스를 기치로 활동 중이며, 최근 싱글 <전주에 가면>, <키스하지 말걸>, 세번째 EP(겨울) 등을 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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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22 20:03

청년 공유주택, 지역 청년문화의 시작

▲ 김창하 민달팽이주거협동조합원 3년전, 서울에서 받고 싶은 교육이 있어 2달 정도 고시원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1인 침대, 책상, 침대발치 위에 걸린 옷장이 빼곡이 들어가는 방 한칸. 오로지 자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공간이 빽빽이 나열되어 있었다. 옆집 사람과 인사조차 소음이 되고, 내 방에서 조금만 소리를 내도 옆방에 불편을 끼치는 그런 곳이었다. 고시원 입구에 다른 사람과 마추칠 때면 괜히 눈을 피하게 되고, 통화를 하는 도중 감정이 격해질 때 혹시 시끄러울까봐 감정조차 참으며 지내게 된다. 이런 고시원 생활 이외에도 현장직 일을 할때 공동합숙생활, 학교 다닐때의 기숙사 생활, 군대 생활 등을 겪으며, 내 한 몸 쉬기 위해 나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알아갔다. 주거란 공간은 소위 처신과 예의를 잘 차려야만 그마나 쉴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원룸 주거형태 조차 부실한 공사와 관리로 내 집이 되지 못한다. 부실한 집은 윗층의 문자오는 소리도 들릴 정도이고, 이웃과 소통이 되지 않는 주거는 언제나 이웃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여성의 경우는 내 집이지만 안전을 보장받기 힘들다. 누군가 침입하더라도 나를 보호 할 수 없는 그런 장소이다. 현재 달팽이집 생활에서 가장 좋은 점을 꼽자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다는데 있다. 혼자 사는 것도 아닌데 뭐가 편하냐는 의문이 들겠지만, 일단 대화의 상대가 또래인 것과 기존 주거형태에서 감내해야하는 역할이 적다는 점은 주거의 심적 부담을 줄여준다. 역할에 대한 심적 부담이 줄면서, 비로소 자신의 취향이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동기가 마련된다. 이미 살림을 나 이외에 담당하는 집과 다르게, 서로의 선호를 맞춰가며 공용공간을 꾸려나가게 된다. 요즘 냉장고 안은 블록을 쌓는 느낌이 든다. 냉장고 안이란 네모난 공간에 각자의 물건을 어디에 배치해야 할지, 이 좁은 공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그런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각자의 음식취향, 물건을 두는 습관을 확인하고 조율한다. 청소를 언제 할지, 빨래는 언제 널어야 할지, 공용 물품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정하며, 주거지 곳곳에 서로에 흔적이 쌓이고, 주거라는 공간이 나에게 맞는 역할과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내 공간이 되고 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 보통 청년의 소비문화를 지적하지만, 정작에 지속적인 문화는 일정한 공간을 두고 쌓인다. 지역에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청년에게는 사용하자마자 증발되는 소비문화 이외에 문화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달팽이집이라는 청년공간을 확보하고 지내면서 지금의 청년 문화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나조차도 이제야 느끼고 있다. 이번에 지역 청년후보의 공약으로 내새웠던 청년정처럼, 청년 공간을 두어야만 그 공간에 지금의 청년의 문화가 형성되고, 그 문화가 지역사회에 반영 되어야 청년이 숨 쉴 수 있는 지역이 될 수 있다. 기성세대의 여러 시도가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과 청년이 사회가 자신을 재단한다고 느끼는 점은 청년 문화를 받아들이는 사회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아서 이다. 지금의 달팽이집과 같은 공유주거는 주거 안정 이외에도, 청년의 문화 형성과 지역사회 진출을 역할을 해낼 수 있으리라고 본다. 앞으로도 지역에서 청년들이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청년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지속적으로 확보하여 청년 문화 형성의 기틀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지역의 청년 문화는 이제 시작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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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15 18:12

투표가 민주주의의 일이라면

▲ 최아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여러모로 시끄러운 6월이 지나갔다. 의외의 결과가 나왔던 월드컵도 한 몫 했지만, 조금 더 강렬하게 남은 것은 6월 지방선거다. 오늘날 우리는 대의 민주주의를 선택하고 있다. 대리자를 선출하고 그를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 대한민국은 이 개념을 잘 이행하고 있다. 겉보기에 멀쩡했던 양파가 속이 멀쩡하지 못한다면 그건 무슨 이야기일까. 양파의 속을 들여다보려면 양파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보는 수밖에 없다. 지난 지방선거 기간 동안 전주의 남부시장 청년몰에 청소년들이 모였다. 청소년들은 모여 스스로가 교육감 선거에 대한 공약을 내걸고 유세와 선거를 진행했다. 학생 인권 조례와 같은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당장 학교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에 대한 개선책을 들고 나온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전국에서는 18세 이하의 청소년들의 모의투표가 진행됐다. 청소년들이 직접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교육감을 뽑았다. 청소년들은 각자 자신이 바라는 방향의 정책을 시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사람에게 한 표를 던졌다. 공약을 꼼꼼히 읽고 나에게 맞는 공약을 내건 후보자에게 힘을 실었다. 위와 같은 행사를 진행한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18세 참정권 실현을 위한 613 지방선거 청소년 모의투표 운동본부 등의 단체가 진보 성향이 두드러지지만 이러한 의견도 수용할 가치가 있다. 이들 모두 미래의 유권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부모가 이러한 정치 성향을 따르거나, 이 후보자가 유명해서 한 표를 행사하지는 않았다. 청소년들은 현재 지역구에 살고 있는 당사자이자, 정책 시행의 주체로서 의사를 표현했다. 하교 시 교통편 제공 및 교육 정책 진행에 있어서의 학생 의견 반영 등 실질적인 행정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교육 정책의 주체로서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것들을 청소년들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 모의투표의 결과는 실제 선거 결과와 달랐다. 전국의 당선자 중 대구, 대전, 경북, 전남의 4명의 당선자가 청소년들의 모의투표 결과에서는 낙선했다. 유권자와 청소년의 견해가 갈린 것이다. 이와 같이 실제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사람과 교육정책 안의 당사자의 이해관계에는 괴리가 있음이 분명하다. 당장 정책 시행의 대상자가 되고, 그 정책으로 하여금 입시 정책과 학교 안과 밖에서의 보호가 시시각각 달라지는 청소년에게야 말로 참정권이 필요하다. 정책시행의 당사자가 자신의 대표자를 뽑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사회는 민주시민을 기를 수도 없고, 민주주의 사회로 성장할 수 없다.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은 정보 습득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터넷이 있는 모든 곳에는 늘 정보가 있고 가장 먼저 시험이 되는 대상과 기민하게 반응하는 대상 모두 청소년이다. SNS에 정보가 범람하고 있고, 청소년과 비청소년 모두 다양한 매체를 통해 학습한다. 청소년은 이전 세대에 비해 다양한 매체에 접근이 용이하며, 새로운 매체는 10대~20대를 타겟팅하기도 한다. 그만큼 이전 세대보다 훨씬 기민하게 정보에 반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문에 청소년들에게는 적어도 교육감과 최소수준의 지방선거의 참정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주체가 대리인마저 뽑을 수 없다면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투표가 민주주의의 일이라면 유권자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최아현 씨는 전주대에서 역사문화콘텐츠와 한국어문학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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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08 19:00

인생을 바꿔주는 책을 믿지 마세요

▲ 김신철 독립서점 북스포즈 공동대표 고백하겠다. 학생 때 가장 싫어하는 공간은 서점이었다. 당시 서점에는 온통 명령하는 책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잘팔리는 책의 제목은 꼭 미쳐라로 끝이났다. 공부에 미쳐라. 여행에 미쳐라. 재테크에 미쳐라. 1년만 미쳐라. 100일만 미쳐라. 하루만 미쳐라. 이런책을 보다 보니 조용한 서점에서 환청이 들렸다. 아무래도 뇌가 미쳤나 보다. 아시다시피 청년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시대다. 반대로 잘 나가는 책의 성량은 더욱 커지고 다양해졌다. A처럼 일해라, B처럼 공부해라, C처럼 놀아라식으로 롤모델을 붙여주더니 용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멘토나 셀럽이 직접 등장해서 외친다. 하고 싶은 대로해라,하고싶은 대로 말하라. 요즘에는 괜찮다, 네 잘못이 아니니 괜찮다라는 위로가 되었고 이제는 정말 끝물인 것인지 퇴사해라, 퇴사하고, 퇴사해라란다. 제발 그만해라. 우리는 자기계발서를 혐오하면서 동시에 자기계발서를 신봉하는세대다. 당장 저런 책이 싫다고 밝힌 나조차 다른 이들의 시험후기, 합격후기, 취업후기를 읽으며 위로와 힘을 얻었다. 그렇다. 나는 자기계발은 싫지만 동기부여, 자아성형, 멘탈방어를 말하는 텍스트를 쫓고 있었다. 하는 말이야 똑같았다. 미쳐라. 누구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실패해도 괜찮다. 퇴사해라. 송민수 작가의 <도대체 내가 뭘 읽은 거지?>라는 책도 이런 물음에서 나왔다. 저자는 자기계발서만 100여 권을 읽었을 정도로 충성도 높은 독자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허탈함을 느꼈고, 시중의 자기계발서를 유형별로 구분하고 좋은 점과 위험한 점을 구분한다. 한 가지 흠이라면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는 책인데, 자기계발서처럼 이야기를 풀어낸다. 아마도 진성 자기계발서 덕후였기에 이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독자에게 미쳐라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자기계발서는 제법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다만 너무 과도하게 읽힌다는 것이 문제다. 마치 젊은이들이 취업문을 넘지 못하는 이유가 개인의 역량을 깨우지 못했기 때문으로 굳혀지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너무 높아진 문턱을 일단 고치는 것이 먼저다. 그렇지 않다면 외국어부터 각종 자격증까지 온갖 능력을 다 갖춘 다음에 문턱을 넘어와 엑셀에 숫자를 채우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나는 책이 읽히길 바라는 사람이지만, 독자의 인생을 강제로 바꾸려고 하는 책이 있다면 책장을 덮기를 원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세대는 이런 책들 사이에 자신의 자존심과 자아를 책갈피처럼 꽂는 일이 많다. 그럴 바에는 정신승리를 하는 게 낫다. 적어도 내가 지드래곤보다 나은 점은 있겠지. 내가 글씨는 더 잘 쓰지 않을까? 밥은 내가 더 복스럽게 먹겠지? 적어도 나무젓가락은 내가 더 잘 쪼개겠지.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 싶으면 그냥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고 비교를 그만두면 된다. 내 위치를 인정하고 마음 편하게 내가 갈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월드컵을 지켜보는 관중이 된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정작 관중석에 있는 것은 책이고 경기를 뛰는 것은 당신이다. 책은 그냥 이것저것 당신이 잘 뛰라고 응원과 훈수를 외치는것이다. 그 와중에 훌륭한 책은 관중석에서 뛰쳐나와 패스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골을 넣어야 하는 것은 언제나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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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01 18:03

우리는 이렇게 달팽이집에서 살아가고 있다

▲ 김창하 민달팽이주거협동조합원 처음 3명으로 시작되었던 우리의 주거살이가 이제 6명이 함께 하고 있다. 이제는 집이 비어있는 시간보다 누군가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고, 늦은 밤 귀가 길에도 누군가의 방의 불빛이 나를 반긴다. 내방은 출입문 옆, 자주 입구에서 마주치고 인사를 건네는 친구가 나를 보고 빼꼼이 라 부르기도 한다. 이제서야 달팽이집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사람이 늘어나니, 이전에 집안 청소만 하고 엄두를 못 내었던 일들이 진행이 된다. 새로 이사 온 부지런한 친구는 이사 온 날 집 곳곳을 청소하고, 너저분했던 책장을 다 정리했다. 한 친구는 오자마자 부엌에 필요한 걸 채워 나가고, 옥상에 빨래대를 설치한다. 먼지뿐인 빈방들이 각자의 취향에 맞춘 물건들로 채워지고, 집의 이곳저곳이 여럿의 삶의 흔적으로 채워져 가고 있다. 식구가 많으니 저녁식사 때 북적댄다. 넓은 부엌에서 둘이서 요리를 하면, 일부는 테이블 세팅을 한다. 식사 후 다른 이가 설거지를 한다. 자취를 오래했던 친구는 집에서 저녁식사를 푸짐하게 했던 적이 오랜만이라 하고, 설거지와 뒤처리를 자신이 하지 않는다는 것에 연신 고마워했다. 식구들이 대신 설거지를 척척 해준다며 남에게 자랑까지 한다고 한다. 한 친구가 고기를 사오는 날 저녁은 회식자리가 마련된 것 마냥 더욱 화기애애하다 집안 정리가 잘 되니 집 밖의 것들에도 눈이 간다. 마당의 포도나무는 벌써 포도송이 열러 곧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시들시들 타들어 가는 명자나무는 물을 더 열심히 줘야 하는지 벌써 분갈이를 해줘야 할지 고민이다. 마당 블록 틈새의 잡초가 무성히 자라서 주말에는 식구들과 잡초 뽑는 일정을 잡아 두었다. 옥상은 벌써 한 친구가 간단히 술한잔 할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를 들여 놨다. 빨랫줄에 큰 이불을 널 때는 왠지 뿌듯함 마음 든다. 집 바로 앞 정자에 쉬는 동네 주민과 인사를 며칠째 나누니, 인사도 정감이 있다. 이전에 집을 보고 간 목수님(목사님이기도 하다)이 원목 테이블을 만들어 주기로 하여, 공방에서 식구들과 함께 테이블을 만들고 있다. 내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든다는 경험은 언제나 즐겁다. 서툰 초보자의 솜씨로 마감이 삐뚤기도 하지만, 내가 만들었다는 것에 벌써 애정이 생긴다. 넓은 테이블에서 여러 사람들과 놀 생각을 하니 설레기도 한다. 반상회를 통해서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 할 때, 각자가 생각하는 주거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여러 의견들 속에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조율들을 해 나간다. 물리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부터, 청소를 어떻게 할지, 생활용품을 어떻게 나눠 쓸지, 새로운 식구를 어떻게 받아 들 일 것인지를 이야기 했다. 각각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정해야만 같이 살아 갈 수 있고, 각자가 역할을 다할 때, 비로소 이 집의 주인으로 지낼 수 있다. 집의 삶이 익숙해지고 사는 사람이 더 담아낼 수 있는 품이 생기면, 자연스레 주변도 기웃거리고, 결국에는 지역에서, 청년인 나로서 살아가는 방식을 조율해 나갈 것이다. 달팽이집에 사는 모습 자체가 지역에 청년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좋은 대답이 될 것이라고 본다. 함께 살아가려 하는 것이 공동체를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이렇게 달팽이집에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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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4 16:39

'하나 그리고 둘'과 이유, 쓸모, 가치를 찾는다는 것

▲ 최진영 독립영화감독 남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라고 쓰인 편지를 양양은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낭독한다. 양양은 우연히 얻은 카메라로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기 시작한다. 그의 삼촌이 왜 뒷모습을 찍냐고 물으면 양양은 삼촌이 뒷모습을 못 보는 것 같아서요 라고 답한다. 아이다운 대답 같지만 사실 꽤나 철학적인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등장 하면괜히 롤랑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가를 죽음의 대리인이라고 표현한 말까지 떠오른다. 양양의 행동은 세계의 절반을 타자의 시각으로 인식해 도출한 현상을 다시 재인식하며 삶을 완성하는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이 영화는 대만영화감독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이라는 작품이다. 2000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18년 만에 한국에서 재개봉을 한다. 에드워드 양은 영화가 시대를 말하는 방법에 있어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았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감독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양 을 무척 좋아하는 나는 깨끗하게 디지털 리마스터링 된, 이미 수십 번 본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보기 위해 경주 출장을 가기 전 부산영화제에 들려 영화를 본 후 부산에서 택시를 타고 경주까지 갔던 적도 있다. 아쉽게도 에드워드 양은 십 여년 전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 내게 왜 영화를 하고 싶어 하냐고 묻는 다면 아마 양양과 같은 대답을 내놓진 못할 것 같다. 온갖 미사여구와 수식을 동원하여 탄복할 만한 대답을 내놓기 위해 시간을 더 달라고나 하지 않을까 싶다. <하나 그리고 둘>의 재개봉 소식을 듣고 나는 왜 돈도 못 벌고 시간만 어영부영 보내고 있으면서 계속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할까 조용히 생각해봤다. 십대 때는 오로지 영화가 좋았을 뿐이고, 이십대에는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순 없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보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고, 삼십대인 지금은. 이렇게 돈도 못 벌고 시간만 어영부영 보냈던 게 아까워서 꾸역꾸역 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너무 시시하지만 솔직한 심정이라 반박을 못하겠다. 할머니의 죽음 직전까지 아무 말도 못했던 양양은 장례식장에서 편지로 구구절절하게 말을 한다. 차마 하지 못했으나 결국은 뱉고야 마는, 그리고 그 과정까지 카메라라는 도구로 타자의 세계를 인식하는 양양이라는 주체의 성장을 화면 너머 바라보는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영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것을 바라보는 타자를 위해서인가. 아직 답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알아가기 까지 나는 계속해서 이 일을 해 나갈 듯 하다. 그 일련의 과정을 마무리 할 때쯤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양양과 같이 순수하게 대답했으면 한다. 내가 태어난 이유, 나의 쓸모, 누군가와 함께 노동하며 살아갈 가치, 이 모든 것들을 한큐에 설명할 수 있는 답이면 참 좋겠다. 1년 동안 1650자라는 글자에 나의 사고와 어떤 지침을 담기엔 턱없이 모자랐지만 매번 쓰면서 어떤 가치에 대한 생각을 하고 만다. 그 가치를 찾아가는 것 또한 위에서 말한 영화를 하는 이유를 찾는 과정과 함께 해야 할 듯 하다. 모든 쓸모와 가치를 위하여 글을 읽으신 독자분들도 각자의 이유를 찾으셨으면 한다. 좋은 지면을 주셔서 감사하단 말씀을 끝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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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17 19:39

우리가 만드는 서점

▲ 김신철 독립서점 북스포즈 공동대표 날씨가 1도 화상이다. 전북대학교 앞 동네책방 북스포즈는 지난해보다 이르게 에어컨 리모컨을 들었다. 덕분에 이곳은 집과 학교를 오가는 학생들의 오아시스가 된 모양이다. 더위가 책방의 호객행위를 하다니. 한동안 꼬리를 내렸던 책방지기의 입에는 웃음꽃이 폈다. 그날도 책방의 문을 열기 무섭게 학생들이 서점을 가득 채웠다. 하나, 둘 여덟 명이 오픈하기도 전에 문 앞에 모여있었다. 줄을 서시오! 허준에 나오는 임현식의 기분이 이랬을까? 북스포즈의 구석구석을 꼼꼼히 구경하는 이들을 두고 나는 공상에 빠졌다. 좋아 이대로라면 곧 2호점을 내겠어 나는 서점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학생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그러더니 단체석에 함께 앉아서 나를 부르는 것이다. 사장님 혹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성공에 부푼 꿈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 설마 이거 초여름에 옥장판이라도 팔러 온 거 아니야? 현실은 언제나 나의 기대와 불안 중간에 붕 떠 있는 법이다. 다행히 이들의 정체는 전북대학교 학생이었다. 창의적 문제 해결이라는 수업을 함께 듣는데 지역기업이나 가게의 고민을 듣고 창의적인 멘토링을 하는 것이 수업 내용이라고 한다. 이들의 모습이 제법 진지해서 한 가지 고민을 던졌다. 사람들이 책과 서점을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한 학기 동안 대학생들과 만남이 이어졌다. 나는 나대로 북스포즈가 왜 생겼는지 어떤 방법으로 운영이 되는지 알려주었고, 학생들은 손님 입장에서 느끼는 책과 책방에 대한 프리뷰를 해주었다. 더 나아가 가끔 북스포즈에 첩자(?)를 보내서 어떤 부분에서 개선이 필요할지를 조사를 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매주 들고 오는 여러 아이디어를 가지고 책장을 새로 구성하기도 했다. 진짜 대학생들이 자기들이 관심 있어 하는 주제를 가지고 서점을 꾸몄다. 서점의 매대에 책을 배치하는 것은 집에서 서재를 꾸미는 것과는 다른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눴다. 결국 우리가 찾은 답은 북스포즈 구석구석에 손님들의 손때를 묻히는 것이었다. 이름도 붙였다 우리가 만드는 서점. 많은 동네책방이 사장님의 취향과 기획능력으로 운영이 되는 것과는 다른 길이다. 하지만 북스포즈가 처음 만들어지며 세웠던 목표는 언제나 서점이 아닌 지역 커뮤니티 공간이었다. 물론 우리 기획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사행시 대회를 열었는데 참가율이 저조했다. 제시어가 북스포즈였기 때문이다. 너무 어렵다. 하지만 이 기획은 심야책방에서 다시 사용했다. 밤새 책을 읽는 모임 중에 글을 써달라 한 것이다. 다행히 모두 자신의 생각을 짧은 글로 표현했다. 여러 솔직한 글귀가 나왔고 이것을 책갈피로 만들었다. 심야책방을 찾았던 손님 중 한 분이 말했다. 북스포즈란 공간이 주는 느슨한 연결이 좋았다. 같은 공간에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던 것만으로도 손님들과 서점 사이에 연대감이 만들어지는 듯하다. 이런 소감을 들은 것만으로도 나름의 목표를 이룬 것이다. 학기가 끝나가며 대학생들과의 만남도 끝났다. 다시 서점과 손님의 입장으로 돌아가려니 시원섭섭하다. 전문가 입장의 조언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들의 천진난만한 열정이 도움이 되었다. 이런 에너지는 북스포즈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지역의 많은 상점과 기업들에 젊은 대학생들의 활동이 이어지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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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10 18:15

"농촌문화를 이어가는 청년농부입니다"

▲ 신성원 또바기농장 대표순창 더불어농부 회장 하루일과를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하는게 음악 틀기다. 요즘 여름을 맞이해서 아이돌의 신나는 노래들이 줄기차게 나온다. 자 오늘 떠나요 공항으로 좋다 역시 노래는 신나는 아이돌 노래지. 한동안 한참을 듣다가 갑자기 지난주 공연에서 들었던 대금 연주가 생각이 난다. 그 연주곡 참 좋았는데 다시 듣고 싶다. 그런 비슷한 음악이라도 찾아서 들어봐야 겠다는 생각에 우리 국악공연 연주곡을 찾아 틀어 놓고 일을 시작했다. 뭔지 모를 평온함이 든다. 일의 속도도 달라졌다 가요를 틀어 놓고 농삿일을 하면 몸이 빨리 움직이긴 하지만 꼼꼼함은 없다. 하지만 우리 전통악기 연주곡을 들으면서 일을 하면 차분해지면서 내가 안 보던 곳까지 보는 꼼꼼함이 생긴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우리 전통음악을 좋아하나? 지금은 전자기기로 음악을 듣고 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동네 어르신들이 밭일을 하면서 부르던 노동요를 바로 옆에서 듣곤 했는데. 그 노동요라는게 정말 우리 농촌음악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누가 부르지도 않고 이어가는 사람이 없어 찾아보기도 힘들다 노동요만 그럴까?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품앗이, 두레, 기우제, 기청제, 쥐불놀이, 샛거리, 당산제 등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이제는 다른 곳에서도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다. 왜 이렇게 돼버린 것일까? 왜 농촌에서 농촌문화를 보기가 힘들까? 아마 시작은 아주 예전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농부라면 대단하고 정말 훌륭한 일을 한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못 사는 못 배운 사람이 하는게 농사고 농사지어서는 돈 못 번다고 도시로 가야한다고 하시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본 자식들은 당연해 도시로 떠나고 시골보단 재미있는 도시에서 살려고 했다. 시골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도 없고 돌아오는 후손도 없고 농사로 얻는 소득이 많지가 않다보니 자연스레 농사를 포기하면서 문화도 많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럼 이제 사라져가는 농촌문화는 누가 지킬것인가라는 주제와 과제를 가지고 문제를 풀어가야할 것이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농사를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농촌에서 농사란 우리 문화이자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농사가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하면서 많은 문화들이 만들어지고 이어져 왔을것이다. 두 번째는 마을과 지역을 보며 자신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찾아봐야 한다. 크게 본다면 청년과 지역주민들과의 상생 찾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순창 청년들이 모여 시작한 품앗이와 샛거리 문화. 이게 즐겁다.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면서 일도 하고 샛거리도 먹으면서 일을 하니 왜 우리 선조들이 이렇게 살아 왔는지 이해가 되는 느낌이다. 이런 우리 농촌문화지킴이 활동을 하면서 우리 농산물을 알리는 일도 같이 하고 있는데, 우리 농산물을 사람들이 알아줄 때 제일 기분이 좋고 농부로서 자부심이 생긴다. 이는 우리가 농사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원동력이자 농촌문화활동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난 우리 농산물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바로 농촌문화지킴이입니다. 한평생 농촌을 지켜오신 부모님 뒤를 이어 나도 농촌에서 살면서 농촌문화를 이어가고자 한다. 부끄럽지 않다. 난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누군가 나에게 뭐하는 분이세요 물어보면 난 항상 이렇게 말한다. 농촌문화를 이어가는 청년농부 신성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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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03 16:47

6·13 지방선거, 서로가 만나야 할 그 순간

▲ 김창하 민달팽이 주거협동조합원 이제 지방선거가 곧 치러진다. 지역에 많은 후보들이 자신의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분주히도 움직이고 있다. 명함 한 장이라도 더 돌리기 위해 새벽부터 움직이고, 소개를 받고 인사를 다녀도 짧은 기간 유권자 중 일부만을 만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선거 치루는 사람들은 유권자를 만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고민하게 된다. 특이한 유세 방식을 강구하거나 지인들과 연락으로 사람을 모은다. 각자의 시도가 유권자를 웃음을 짓게도, 눈살을 찌푸리게도 한다. 그 방식의 결과가 어떻든 보다 많은 유권자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한다. 서로마다 수많은 선거운동 방식이 있겠지만, 하루하루 명함한장 더 나눠 줄 수 있도록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유권자에게 명함 한 장을 나눠 줄 수 있다는 건 후보가 가진 특별함이다. 의원이 되기 전 후보자로서 가지게 되는 권리가 있다면, 시민에게 명함을 나눠 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권리라고 생각된다. 시민에게 다가 갈 수 있는 권한을 공식적으로 후보에게 준 것이다. 유권자를 만나는 방식은 후보에게는 전략적 선택 일 수도 있지만, 유권자 입장에서는 후보의 행동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후보가 가진 정책과 목표의 중요성을 많이들 이야기 하지만, 내 지역의 일을 해나갈 지방선거의 기초의원 후보에게는 친밀함도 중요하다. 내 생활을 변화시킬 의원을 뽑는데 내 생활을 이야기 할 정도로 친밀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지역의 의원과 친밀해야 된다는 것은 지향점이지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내 지역의 기초의원이 누군지도 잘 모른다. 기초의원은 2인이상 선출하는 중대선거구제라는 것도 나또한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정치에 관심있는 사람들 조차도 기초의원을 해당 지역구위원장의 하부조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때지난 생각일까? 국회의원과 지방의원의 역할은 엄연히 다르지만 지방의원의 쓰임을 지역 유권자들이 느끼기에는 아직 생소한 것 같다. 지금의 시선을 떠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지방의회를 알릴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이런저런 잡음들이 들리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나쁘지 않다. 전주시만 볼 때 본 선거를 치루는 이삼십대 청년 후보가 8명 남짓 된다. 정당의 이미지 메이커로 전락하고 홍보 유세에만 동원되었던 이전의 일들과 다르게 본 선거에 많은 수의 청년들이 후보가 되었다. 비로소 청년들에게 친밀한 후보를 뽑을 수 있는 선택지가 생겼다. 지방방송사에서도 후보들을 알리기 위해 발언과 토론회를 기초의원 후보에게도 확장하는 것도 고무적이다. 다양한 정당의 후보들이 보이는 것도 유권자의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 우리는 조금 더 나아가야 한다. 촛불 이후 많은 시민들은 광장의 참여를 통해 정치의 효능감을 몸소 체험했다.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아직 지역정치의 문은 너무 좁고 불편하다. 이번에 도전하는 젊고 새로운 후보들이 조금더 힘을 내어 변화된 시민에게 다가가길 바란다. 기성의 정치구도에 편승하기 보다 새로운 시민을 찾아갈 방법을 고민하고 해나가는 것이 선거운동의 변화를 가져오고 지역의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는 초석이 되리라 본다. 첫 만남은 어색하고 힘들지 모르지만, 도전하는 후보와 변화된 시민이 만나는 그 순간을 기대해 본다. 만남 이후 다음의 민주주의로 한걸음 나아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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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7 16:49

미소의 선택

▲ 최진영 독립영화감독 최근에 가장 인상 깊게 본 한국독립영화가 있다. <소공녀>라는 작품이다. 아동과 여성의 고난을 착취하고 전시하며 작금의 산재된 문제들을 드러내는 방식의 여러 영화들에 질려있어서인지 시종일관 자신의 존엄과 취향을 지키며 살아가는 주인공 미소를 끝까지 응원할 수 있는 동력이 극이 진행되는 동안 차곡차곡 쌓여있던 영화다. 경향으로 여기고 싶진 않지만 지금까지 많은 한국독립영화가 캐릭터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방만하지는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소공녀 속 미소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더군다나 여성이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지 여성창작자로서 고민해볼 수 있는 문제와 질문에 대해 새로운 답을 제시해줘서 반가운 영화였다. 소공녀 속 미소는 담배와 위스키 그리고 남자친구만 있으면 되는 친구다. 담뱃값과 위스키 값이 오르자 그는 단칸방에서 나오며 24시간 패스트푸드점과 친구들 집을 돌아다니며 도시의 하루를 버텨낸다. 그렇다고 그녀가 노동을 안하는 게 아니다. 일일가사도우미로 일당을 받거나, 재워주고 먹여주는 대가로 집을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노동을 제공한다. 그렇게 벌어들인 일당은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병을 늦춰주는 한약을 사거나,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담배와 위스키 값으로 지불된다. 스포일러가 되니 자세한 뒷이야기는 못하지만 극의 끝에서도 그녀는 집을 포기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지키는 인물로 남는다. 집은 포기하지만 자신의 취향과 존엄을 지키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나를 돌아보는 건 당연했다. 내가 집을 포기하고 지키고 싶은 건 뭘까. 집 만큼의 교환가치를 생각이나 하고 있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머릿속을 헤집는 와중에 타인의 시선들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만약 미소였다면 내 주위의 사람들은 그런 나를 철없고 게으른 사람으로 매도할게 틀림없는데. 선택은 내 몫이지만 그런 시선들을 거둘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기에 내가 미소의 삶을 버텨낼 재간이 없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 내 소유의 집이 없다. 백수가 된 후 독립생활을 마치고 다시 부모님 집으로 들어오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이미 친구들을 밤 늦게까지 초대해서 놀 자유,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올 자유, 거실에서 크게 볼륨을 높이고 음악을 들을 자유 등을 반납할 각오를 했다. 얼마 전에는 라디오에서 나가 왜 다시 캥거루족이 됐나?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상당수의 자유를 월세와 공과금으로 교환했으니 나는 결코 미소처럼 지키고 싶은 취향은 별로 없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지난 해 전국 고시원 숫자가 10년만에 251%가 증가한 1만1800개라는 통계청의 조사결과가 나왔다. 이제는 고시를 준비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청년주거문제의 대안이 된지 오래다. 쉐어하우스도 신주거 문화의 대안이 됐지만 아직 건축법, 주택법 등 관계 법령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정부는 올해부터 25만실의 쉐어하우스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제대로 된 법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 안전에 취약한 건 불 보듯 뻔하다. 청년들의 취업실업 문제뿐만 아니라 주거취약계층을 위한 주거문제 해결 또한 나아질 기미가 안보인다. 임대주택 확충과 같은 실질적 대안을 제시하지만 아파트 값 떨어진다고 임대주택 건설을 막는 플래카드를 보면 소공녀 속 미소의 선택이 최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더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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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0 17:04

청년은 정당으로 쳐들어갔을까?

▲ 김신철 독립서점 북스포즈 공동대표 이사 준비. 그것은 집안 구석구석에 무심코 쌓아온 시간을 정리하는 일 같다. 계약일 이후로 사용할 일 없었던 인감도장, 잃어버린 노트와 책, 사진집까지 찾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것들이 모두 돌아왔다. 어딘가 숨겨두었을 것이라 굳게 믿었던 비상금 빼고는.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전북대학교 강준만 교수의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 가라!>다. 책이 나왔던 2015년에는 그래 청년이라면 정당으로 쳐들어가야지라고 느껴졌던 이 책이 2018년 현재는 다르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동안 청년은 정당으로 쳐들어갔던가?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 가라!>에서는 말한다. 기성세대 혹은 정치인들이 정치혐오를 만들어 청년세대가 정치에 관심이 없게 만든다고. 하지만 청년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들이 사는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청년들에게 정치 출마를 권하는 건가? 그렇지 않다. 그저 청년들에게 정치에 대한 작은 관심과 행동을 권하는 책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청년들은 여전하면서도, 여전하지 않다. 정당정치란 정년들에게 아무래도 노잼(=재미가 없음)이다. 대신에 인터넷 커뮤니티라는 그들만의 정당이 더욱 세분화되었고, 이제는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인터넷 커뮤니티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정치나 이슈에 관한 언급은 금기시되었다. 반면에 최근의 커뮤니티는 앞장서서 이슈를 생산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한다. 시민단체나 정당처럼 전문적으로 이슈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청년들에게 부담이 없는 선에서 정치활동을 이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의 첫 번째 목적은 관심사에 대한 공유지만, 정치 역시 자신들의 관심사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 현재의 청년 정치 지형은 조금 달라졌다. 2015년에 사는 청년이 토익과 자소서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2018년은 짬을 내서라도 작은 관심을 갖는다. 촛불을 들어 정권을 바꾸었다는 사회적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작은 승리의 경험이라고 부른다. 작은 승리의 경험은 청년들로 하여금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 부조리를 외치게 만들었다.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이라도 공정성의 문제가 있으면 반기를 든다. 미투 운동을 발화하고, 응원하고, 부딪히는 과정들 역시 커뮤니티라는 청년세대들의 움직임이 중심이 되었다. 그들의 외침대로 세상이 변했는지, 아니면 그들 자신이 망가지는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가만히 있지 않으니까, 무언가는 변했다.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온라인 중심의 소속감이 현실까지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서울에 가면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줄까 내심 기대를 할 뿐이다. 청년을 위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기성 정치인들의 외침이 유독 큰 요즘이다. 지역에 일자리와 쇼핑센터처럼 돈을 벌고, 쓰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한다. 하지만 청년이슈를 얼마나 많이 발굴할 수 있는가도 중요하다. 그것이 지역 청년들을 건강하게 지역에서 살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할 거리만 던질 수 있면, 또 지역이 바뀔 소지가 있다면 청년들은 정당을 만들어서라도 쳐들어 갈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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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3 17:10

삶은 주거와 맞닿아 있다

▲ 김창하 민달팽이주거협동조합원 공유주거살이가 두달이 되었다. 공간이 바뀌면서 내 삶도 소소히 변해 가고 있는 것 같다. 늦은밤 아파트 주차장에 겨우 주차하고 무겁게 걸어가던 귀갓길이 이제는 산책길이 되었고, 하루일정을 마무리하고 차한잔 마실 맘에 꼭 드는 공간이 생겼다. 다른 주거살이 때보다 많은 이웃이 생겼고, 기웃하는 고양이와 이웃집개의 짖음도 이제 삶의 일부가 되었다. 물론 단독주택은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간다. 일찍 나가 밤늦게야 집에 들어오는 생활에서 한동안의 주말은 청소하는 날로 고정되어 있었다. 청소기 돌리고 걸레질만 반나절, 청소를 할수록 구석구석 더 치워야 할 곳이 눈에 띈다. 분리수거도 직접 해보니 쉬운일이 아니다. 평소처럼 시켜먹은 음식을 음식물이 묻은채 버려서 악취가 난적도 있었고 여전히 부엌은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집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 하나하나가 해야할 일로 귀결되곤 한다. 내 손을 거쳐야만 유지되는 집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은 집의 잘못이 아니라, 평소에 어지르고 다니던 나의 모습이다. 집을 정리하는 것은 한동안 산만했던 나의 마음속을 정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전히 공용공간은 치우지만 개인공간을 어질러 놓는 나의 모습은, 겉으로만 잘 보이려는 나의 성격을 투영하고 있는 것 같다. 애써 돌아보려 하지 않아도 나를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은, 돌아보지 못한 채 삶은 살아가는 나에게는 큰 축복이다. 나를 투영하는 장소에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것은 각별한 일이다. 사회주택, 공유공간이라는 형태가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이들을 맞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타지역 활동가들, 지역 동료들, 일정상 짧게 머무르는 손님이 숙박을 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면면 만큼 이야기도 다양하다. 활동, 삶, 연예, 요즘의 고민들, 각자 분야의 이야기들 이런 다양한 이야기도 겨울과 봄 계절이 바뀌면서, 날씨에 따라 나누는 대화가 달라진다. 이런 다양한 주제들도 결국에는 서로가 살아왔던 것, 지금 살아가는 것,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 결국 같이 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곤 한다. 같이 사는 식구들과도 바쁜 일상이지만, 한주에 한번은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 이야기를 한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국 공유주거는 주거의 물리적 정도도 중요하지만, 성패의 관건은 서로의 삶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 상대가 투영된 그 공간은 당연히 불편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해한다면 내가 투영된 공간에 누군가를 받아들이면서 안정과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물리적 공간은 제한되어 있기에 자신만 이해받기 원하거나 혹은 한쪽만 이해해주려 한다면 그 불균형은 삶 전반에 스트레스가 되어 공동체를 와해시킨다. 삶을 공유하면서 서로간 줄다리기는 계속 될 것이고, 서로의 탐색없이도 행복한 삶을 가지는 것이 아닌 어느 순간이든 상대를 이해 해보려는 노련함을 얻는 것이 공유하는 삶의 방향일 것이다. 공유주거는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은 사실 독립된 개인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당연히 감내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서로의 삶을 바라보며 다같이 행복하자고 권하고 싶다. 독립을 통해 사회에서 스스로 설 수 있는 경험, 공유를 통해 함께하는 경험 이런 것들을 함께 하자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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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9 18:02

지속가능한 지역의 창작가·활동가에게 필요한 것은

▲ 최진영 독립영화감독 올 봄 역시 벚꽃 풍경들을 놓쳤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점점 빨라지는 개화시기도 그렇지만 미세먼지로 밖에 나갈 엄두가 안났다. 날이 좋을 때 쯤이면 봄비가 내려 꽃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내가 오라해서 오란 적 없고 가라해서 가란 적 없는 게 계절이니 아쉬움은 이쯤 접어 두자. 그 사이 나무들 사이로 현수막들이 펄럭이고 있다.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를 알리는 현수막이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인구 67만 도시의 가장 큰 축제이자 영화 표현의 해방구라는 슬로건을 걸고 국내외 독립영화와 디지털영화와 같은 대안적 흐름에 관심을 갖고 개최되는 영화제 중 하나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영화제 평가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고 올해는 역대 최다 작품을 상영한다고 하니 가뜩이나 쏠림 현상이 만연한 한국영화시장에 불만인 영화 팬들에겐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다. 전주 토박이인 필자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영화제가 처음 열렸으니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싶고 그만큼 본인의 나이가 이렇게 먹었나 해서 씁쓸하기도 하지만 꿋꿋하게 영화제가 치러지고 외연도 확장되고 대표적인 축제로 거듭나는 걸 보니 지역의 영화활동가가 아니더라도 세금을 내는 시민으로서 흐뭇한 일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지역을 떠나지 않고 이 곳에서 창작활동을 하는 창작자의 입장에선 여러 가지가 아쉽다. 이 아쉬움은 영화제 측에 토로하는 게 아니니 부디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당부의 말을 먼저 건넨다. 전주국제영화제, 전북독립영화제, 전북인권영화제, 익산여성영화제, 시민영상제등을 제외하면 도내에서 창작되는 작품들이 소개될 기회가 많지 않다. 물론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이 있지만 온전히 지역에서 창작된 작품들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이 상영되진 않는다. 최근 들어 지역의 젊은 활동가들이 힘을 모아 대안적인 상영구조로 이뤄진 무명씨네 도킹텍프로젝트 협동조합 같은 다양성영화전용극장이 생겼지만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민간 극장의 활동이 잡히지 않는 현재의 구조로는 활동가들의 생계비와 상영료가 제대로 돌아갈수 있을지 걱정이다. 다양한 영화를 취사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세금을 내는 시민들이 누려할 또 하나의 권리다. 그러기 위해선 지속가능한 상영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도 행정가와 정치가들이 고려해야 할 몫이다. 영화표현의 해방구라는 슬로건은 창작활동가들에게 반가운 표현은 분명하지만 위태로운 생계의 최전선에서 당장 내일의 삶을 고심하는 활동가들에게 무엇이 최선일까? 갑자기 뻥하고 봉준호가 튀어나오진 않는다. 갑자기 알을 깨고 박찬욱이 튀어나오진 않는다. 당연히 그런 거장 감독님들도 젊은 시절 갖은 고생을 거치며 높은 자리에 올랐을 터다. 그러나 너희들도 고생을 거치고 그 자리로 가려무나 라는 말은 모질다. 최저임금이 오르니 사장님은 해고를 하고, 당장 인건비를 이유로 김밥 값은 오백원이 올랐고 시나리오를 써왔던 까페의 커피값도 오백원이 올랐다. 우리라고 마냥 노는 게 아니고 활동가들은 어디선가 웨딩 촬영, 오십만원 짜리 뮤직비디오 촬영, 다가오는 지방 선거 아르바이트를 준비 하고 있다. 굳이 서울이 아니더라도 (물론 서울에 안주할 집값 또한 없다) 이 지역에서 계속 창작을 해보겠다는 젊은 창작자들이 노동을 하면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어떤 건지 고려해보는 정치가와 행정가를 만나보고 싶다. 아시아의 문화심장터라는 전주시의 굳은 의지가 비웃음으로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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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2 17:11

연필 깎는 일이 세상을 바꿀까

▲ 김신철 독립서점 북스포즈 공동대표 서점 카운터에 앉아있으면 책 보다 그 책을 읽는 사람이 더욱 궁금하다. 그들이 사 간 책을 통해서 이 사람은 이런 취향과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잠깐 상상을 하는 재미랄까. 가끔 너무 궁금하면 이 작가를 좋아하는지 물어보기도 하는데, 이번 손님은 톨스토이부터 임경선까지 다양한 종류의 책을 여러 권 샀다. 이런 경우는 상상을 포기하고 매출에만 만족해야 한다. 손님은 자리에 돌아가 친구들과 함께 구매한 책을 읽었다(역시, 여러 사람의 취향이 섞여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그들은 어떤 책 한 권에 매료되었다. 심지어 한 명이 책의 내용을 읊어주고 일행들이 감탄사를 외치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나의 청력은 21세기 공산당 선언 같은 현장에 집중되었다. 그들의 외침을 지면을 통해 밝힌다. 연필을 깎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연필과 연필 깎기. 그리고 충분한 상상력이다. 그렇다. 그들은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 깎기의 정석>이라는 책을 장장 3시간 동안 입으로 읊고 갔다. 문제는 나도 어느새 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한낱 연필을 깎는 일 때문에 톨스토이가 외면받은 상황에 분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에는 거대하고, 심오한 주제를 다루기보다 일상적이고 긍정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이 유행이다. 소소한 일상에서 확실한 행복을 찾는다는 소확행 열풍 때문이다. 지난해 내내 베스트셀러 리스트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던 <언어의 온도>도 바뀌어버린 독자들의 취향을 콕 짚은 책이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의 연필 깎기의 정석을 소확행 열풍으로 나온 책들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 이 위대한 책은 연필을 깎는다는 너무도 평범한 일을 아득한 경지에 올려놓는다. 연필과 연필 깎기의 종류는 기본이고 문필가와 예술가, 목수 등 직업별로 다른 모양의 연필 깎기 기술을 알려주는데 경외감마저 들 정도다. 심지어 샤프는 순 엉터리다라고 정파성까지 보여준다. 감탄스럽다. 이것은 순전히 연필을 깎는 일 자체에 몰두하고 행복해하는 작가의 태도 때문이다. 만약 연필과 연필 깎기에 대한 역사를 총망라해서 작성한 책이었다면 이 정도의 감동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연필 깎는 과정에서 중간중간 나오는 유머는 장인으로서 여유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책은 아주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소확행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감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책의 추천사를 빌어 말하자면 그는 가장 보잘것없는 일이 때로는 가장 심오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그에게 자신의 연필을 부탁하기 위해 35달러를 지불한다. 그리고 만족한 경험을 공유한다. 개인의 행복을 부르는 행위가 정체성이 되면 장인이 되고, 영감을 주고받는 공동체가 된다. 함께 진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장이 멈춰버린 시대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의 사사로운 행위가 더욱 건설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 들어 물질적인 소비 행위를 소확행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때에 소확행의 의미와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책이 아닐까? 적어도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나와 손님은 그런 뜨거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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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15 16:42

봄비가 내린 다음날에는 꽃들이 올라옵니다

▲ 신성원 또바기농장 대표순창 더불어농부회장 아침 6시 거실에서 흘러들어오는 티비 소리가 내 귀를 깨운다. 시골 어르신들의 부지런함은 몸에 배인 습관이라고 할까? 어김없이 6시면 티비를 켜시고 뉴스를 보신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보시지만 꼭 챙겨 보시는건 일기예보. 농사에 꼭 필요한게 날씨 정보이다보니 하루도 빠짐없이 똑같은 시간 똑같은 곳에서 티비를 보시고 나 또한 시골에서 농부로 살다보니 일기예보를 챙겨보는 습관아닌 습관이 생겨버렸다. 오늘 밤부터 전국적으로 봄비가 시작되어 내일 오전까지 봄비가 내리겠습니다. 기상캐스터의 저 말이 왜이리 반가울까? 기다리던 봄비다. 이제 정말 한해 농사를 시작하는 시기가 왔구나. 비가 온다하니 비가 오기전 서둘러 준비할게 많다. 미리 밭 정리도 해야하고 하우스안에 있던 모종도 밖으로 옮겨 심어야 하고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래도 농부라서 그런가, 나만 그런가, 비가 온다하니 기분이 좋다. 저녁이 되니 한 두방울 시작한 빗줄기가 어느새 집앞 밭을 다 젖게 할 정도로 내리기 시작하고 보일러실 지붕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나에게 자연음악회를 선사해준다. 난 비내리는 날이 좋다. 뭔가 거창한 이유는 없지만 뭔가 깨끗해지는 느낌과 어렸을적 비를 맞으며 놀았던 생각이 나서 그런지 비내리는 날이면 이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어진다. 비 내린 다음날 농장을 둘러보러 나가니 나올랑 말랑한 새싹들이 성큼 나와 봄을 알리고 또랑에는 계곡물이 콸콸 철철 흐르고 산이며 들판이며 푸른빛이 돌기 시작하고 있는데 봄이 우리들 곁에 왔다는걸 새삼 다시한번 느끼게 해주는 봄비였다. 사실 농촌에 봄비는 도시에서 보는 봄비와 의미가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시에 비가 내리면, 비 오네 우산 가져가야겠네 하는 것이 일상이겠지만 농촌은 비가 오면 논에 물대랴 밭에 모종 심으랴 물 모으랴 할 일이 많아진다. 또한 농사에 있어서 봄에 비가 어느정도 왔냐에 따라 올해는 풍년이다 흉년이다 하면서 한해 농사를 예견하는 풍습도 있고, 봄비가 와야 장마철까지 쓸 물을 모을 수 있기에 이런 작은 봄비 하나도 농촌에서는 큰 의미가 있고 바라보는 시선이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난 비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지고 비가 오면 하는 일들이 생겼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난 싫지가 않다. 비오는날 비옷입고 하는일이 왠지 모르게 재미가 있다. 온몸은 흙탕물로 뒤짚어 쓰지만 농촌에서 자연과 함께한다는 것은 농부만의 특권이 아닐까 한다. 누가 어디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농부니까 농사꾼이니까 누리는 특권이지. 하지만 다른 의미로 본다면 정작 봄비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농촌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의 봄비는 다른 의미로도 많이 쓰이고 있지만 난 점점 살기 힘들어지고 있는 현세대에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봄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봄비가 온다는 소리만으로도 사람들은 봄이 왔다는 느낌을 받고 설레고 기분이 좋아진다. 왜냐면 봄비가 내린 다음날에는 모든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기 때문. 어느때보다 청년이 살기 힘든 시대 이런 청년들에게 작은 봄비라도 내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봄비가 내린 후에는 모든 봄꽃이 화사하게 피어나듯 청년들도 그 어느 누구보다 화사하게 피어날 것이기에 하루빨리 우리의 청년들에게 봄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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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8 19:58

나는 잠재적 가해자가 맞다

▲ 김창하 민달팽이주거협동조합원 나에게 욕구는 존재한다. 얻고자 하거나 하고자 하다는 사전적 의미처럼 욕구는 무엇을 얻거나 행위를 함으로써 충족된다. 특히 욕구중 성욕 성적 행위에 대한 욕망의 사전적 의미로 보면 행위를 함으로써 욕구를 충족 시킨다.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대상이 필요하다. 그러한 대상은 물건이 아니고 나와 같은 사람이기에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 협의의 과정 없이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성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남성으로 산다는 것은, 매우 쉬운 방법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가지게 된다. 나의 형편이 어쨌든지 간에 스스로 마음만 먹고, 지갑에 몇만원만 있으면 자신의 성욕을 채울 수 있다. 성매매를 통한 특히 성매매집결지에서의 성행위는 상대에 대한 배려를 할 필요도, 성관계 후 상대에게 받는 피드백도 필요없다. 오로지 자신의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상대를 사용하면 된다. 마치 상대를 자위도구처럼 사용한다. 도구처럼 사용한다고 해서 상대가 사람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자위기구는 물건을 사용하는 것이지만, 성행위는 상대에게 가해지는 것이다. 돈으로 협의했다고는 하지만(성매매는 명백히 불법이다) 이런 일방적인 성행위는 상대에게 가해지는 분명한 폭력이다. 그래서 가해자는 처벌 받아 마땅하다. 성욕은 성별에 관계없이 가질 수 있지만, 성욕을 충족시키는 방법은 남성과 여성이 다르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경우 결혼과 연애(앤조이의 경우를 포함)등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동의를 받는 일정한 절차를 거치며 욕구를 해소할 수 있지, 남성의 경우처럼 마음먹고 얼마의 돈만 지불해서 욕구를 해소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남성의 경우 서로간의 확인을 하고 나서 합의하에 하는 관계보다 일방적인 관계를 경험을 더욱더 쉽게 할 수 있다. 온라인에서 각종 여성을 상품화 한 성관련 매체는 어디에나 있고, 성매매업소는 도심 지역 사람이면 어디있는지 누구라도 알고 있다. 요즘은 인터넷 어플을 통해 성매매업소 종사자가 아니어도 매매가 이루어 지고도 있다. 남성의 입장에서 서로를 이해하며 하는 정상적인 행위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상대를 어떻게 하든 뒤탈도 거의 없다. 의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남성이 한국사회에 적응하면서 욕구를 해소하는 방법은 서로를 확인하고 알아가는 방식보다,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방식을 쉽게 학습하게 된다. 일방적인 폭력에 떳떳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불편한 그런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가 각성하지 않는 한 잠재적 가해자로 있을 확률이 더욱 높다. 일방적인 가해의 경험(마음만 바꾸면 가해를 할 수 있는 상황)은 피해자에 한해 가해자를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만든다. 한 성별로 편중된 상황은 대상화된 남성을 권력자로, 여성을 종속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남성들의 자리에서 대상화된 여성을 하대하고 추행하고 강간한다. 마치 욕구 해소보다 권력행사로 우월감을 가지는 것으로 보일 때가 많다. 2018년 3월 5일 늦은밤 뉴스에 나온 미투 가해자의 모습은 한국에서 남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와 다르지 않았다. 내가 가해자가 아닌 이유는, 잘못을 이야기 해주는 주변의 여성 동료들 그리고 미투 피해자들의 용기 덕분이다. 나는 미투를 지지한다. 그리고 여성이 마땅한 권력을 취해 내가 더욱더 조심하는 세상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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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16:26

제주 4·3사건 70주년을 맞이하며

▲ 최진영 독립영화감독 제주도가 43희생자추념일 지방공휴일 지정에 관한 조례안을 공포했다. 지난 1월에는 전국 17개 광역시도의회가 제주 43 사건 특별법 조속 개정 촉구 건의를 상정,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제주 43 사건이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닌 범국가적 차원에서 논의 될 일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2016년 12월부터 2017년 3월까지 나는 매달 제주도에 가서 다크투어리즘을 했다. 43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몇 달을 그렇게 돌아다녀보니 제주도라는 섬 자체가 그냥 43 이었다. 곳곳이 학살의 현장이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평생동안 짊어지며 살고 있었다. 빨갛게 핀 동백은 섬을 더 아름답게 표현하는 꽃이지만 그건 섬의 아름다움을 좇는 이방인인 우리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거고, 상처를 갖고 살아야했던 제주도민들에겐 내 가족, 내 이웃이 흘리고 간 피였다. 함덕을 거치면 북촌리라는 작은 해변 마을이 있다. 북촌리는 국제법상 전쟁중일지라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제노사이드(집단학살)의 대표적인 사례를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다. 1949년 1월 17일 남녀노소 300여명이 한날 한시에 희생됐다. 또 아이고 사건, 즉 1954년 초등학교 교정에서 주민들이 모여 몇 년 전 소각됐던 자신의 마을과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묵념을 하면서 아이고 아이고 하며 대성통곡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다시는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각서를 쓰고나서야 풀려났다. 국가이성이 붕괴되고 야만이 통치하던 시절이였다. 그리고 연좌제에 묶여 남은 가족들과 생존자들은 신산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러고 보며 제주는 오래전부터 중앙정부의 가혹한 수탈이 반복됐던 곳이었다. 고려시대엔 몽골의 직접지배를 받았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연안지역에 정착하여 사는 두무악이라고 불리던 제주도민은 17세기까지 일반 양인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지도 못했다. 일제시대에는 태평양전쟁에 많은 도민들이 동원되었고, 일본군 7만 5000명이 진주하여 군사기시설을 구축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끔찍한 43을 겪어야 했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연좌제의 족쇄까지 견뎌야했다. 수탈과 착취와 참상이 반복됐던 그 질곡한 역사를 겪어야 했던 제주도민들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어떤 존경심이 피어오른다. 그들의 희생을 돌아보며 평화와 인권의 개념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본다. 사실 43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고민을 더 했어야 했고 잘 만들었어야 했다. 아직도 희생자들의 유족들과 피해자들이 생존하고, 유해 발굴이 되지 않은 곳도 많은데 너무 쉽게 이 사건을 접근하지 않았나 싶다. 누를 끼쳐 죄스러울 따름이고 영화라는 매체에서 재연되는 비극적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야할지 고민을 해본다. 겨울 이불을 빨고 널어놓으면서 봄 햇발의 기운을 느낀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43 사건이 그렇고 제주도로 향하다 침몰한 세월호가 그렇다. 그렇지만 마냥 슬퍼할 수는 없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억해야 한다. 그게 우리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극복이 아닐까 한다. 다시 한번 제주 43사건의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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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5 19:12

도쿄의 서점

김신철 독립서점 북스포즈 공동대표 봄이 싹을 텄다. 새 학기를 맞이하는 학생들은 기지개를 켠다. 동시에 전북대학교 앞에 위치한 서점 북스포즈에도 찾아주는 손님이 늘어났다. 오고 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급하게 찾고 있다. 바로 여권이다. 미안 손님들, 저 일본 도쿄에 좀 다녀올게요. 놀러 가는 것은 아니다. 도쿄의 현재에서 한국 그리고 전주라는 도시의 가까운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쿄 이 스포일러 같은 도시라고 생각하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화산 폭발 뉴스, 비와 추위가 우리를 맞이해줄지는 몰랐다. 비바람을 뚫고 먼저 찾은 곳은 다이칸야마에 있는 츠타야 서점이다. 마스네 무네아키의 <지적 자본론>을 통해 알려진 곳이다. 츠타야 서점의 특징은 책의 구분을 문학이나 역사가 아닌 주말에는 프랑스에 떠나는 게 어때요?라는 식으로 제안을 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내가 2년 전에도 츠타야 서점에 왔었다는 것. 그리고 한국의 서점들도 츠타야 못지않게 기획과 큐레이션을 잘한다는 것이다. 실망감에 한참 츠타야 서점을 떠돌다가 깨달았다. 나는 아직 오토바이 코너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곳의 오토바이 잡지와 단행본의 개수가 북스포즈 전체 책 보다 많았다. 그렇다. 도쿄의 서점들은 수집력이 돋보였다. 대형서점인 츠타야 서점의 장기는 아니었다. 근처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서점인 카우북스에는 좁은 공간에 꽂힌 책 하나하나가 모두 쉽게 구할 수 없는 책이었다. 70, 80년대의 빈티지 책과 잡지를 모으는 이곳의 책들을 어떻게 구해왔을지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반대로 서점을 찾는 손님 입장에서는 오래된 책을 구할 때 무조건 카우북스를 떠올릴 것이다. 책 자체에 대해서도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책은 굉장히 가볍고 가격이 저렴한 문고판이었다. 책의 종류도 많지만, 책을 구매하고 들고 다니며 읽는데 전혀 부담이 없었다. 우리는 어떤 책이 인기를 얻으면 일단 커버를 두껍게 교체하고, 내용을 추가해서 부풀린다. 아직 독서보다 기념품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과하면 독이 된다고, 이런 책들은 들고 다니기보다 베고 자는 용도로 많이 사용된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지갑은 마지막 서점에 닿아서야 열리고 말았다. 가구라자카 역 근처에 있는 동네서점 카모메 북스다. 여러모로 북스포즈와 닮아있는 이곳에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직원 분이 종종종 따라와 이런저런 책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친절함에 나는 책을 한 권 구입했다. 그런데 맙소사! 그들은 책을 예쁜 포장지로 감싸서 북커버를 만들어 줬다. 결국 다른 책과 연필, 수첩, 카모메북스의 배지까지 사고야 말았다. 이런 일본의 친절함은 오모테나시라고 불린다. 성심을 다해 손님을 모신다는 뜻이다. 혹자는 손님이 원하는 것을 예상해 요구하기 전에 제공하는 것을 일본의 오모테나시라고 말한다. 이들의 수집력, 실용성도 대단하지만 결국 첫 발을 딛게 하는 것은 친절함이었다. 만족스러운 일정이었다. 이제는 북스포즈를 방문한 분들에게 조심스럽게 말도 붙여보려 한다. 아직은 쑥스럽지만 이러다 보면 나도 오모테나시의 경지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마침 손님이 오셔서 이야기를 건넸다. 그는 말했다. 저 전북일보에 쓰는 글 보고 와봤는데요. 나는 고개를 또다시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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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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