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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자산(암호화폐) 규제 공백

박지원 변호사 암호화폐 커뮤니티는 매년 5월 22일을 피자 데이(Pizza Day)로 기린다. 2009년 탄생한 1세대 암호화폐 비트코인이 2010년 5월 22일 처음 피자라는 실물과 거래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피자 두 판이 1만 비트코인에 거래되었는데, 현재 1 비트코인의 가격이 수 천만 원이니, 11년간 천만 배 정도 오른 셈이다. 그 사이 2세대, 3세대 암호화폐들이 속속 등장했고, 가상자산 거래액이 주식시장 거래액을 추월하는 시대가 되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2006년작 부의 미래에서 분야별 변화속도를 수치로 표현했다. 기업금융의 변화속도가 100이라면, 정부관료는 25, 정치조직은 3, 법은 1로 표현되었는데, 사회 변화 최후방에서 뒤치다꺼리를 하는 법률분야 종사자로서 코인 광풍을 아연히 바라보며 다시금 그의 통찰에 공감한다. 개인적으로 가상자산 관련 입법규제가 뒤쳐져 혼란을 예상했던 분야는 게임이었다. 게임 내 효용만 있는 아이템이 현금으로 거래가 되고 심지어 사기나 성매매의 발단이 되는 등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미증유의 논점들이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게임회사 야구팀이 한국시리즈 우승 뒤 2억 원에 거래되는 아이템 검을 치켜드는 시대에 법률가나 경제학자는 고민한다. 정보코드에 불과한 게임머니나 아이템이 절도나 횡령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소득세상속세증여세는 부과될 수 있는지, 게임 내 경제에 발생하는 인플레이션에 따른 유저들 재산은 어떻게 보호할지, 독점담합양극화 문제 등등 끝도 없는 신세계가 머릿속에 펼쳐진다. 하지만 세월이 십 수 년 흐르는 동안 게임머니 관련 입법 규제는 생각보다 정교해지지 않았다. 거래규모와 피해 수준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일까. 어쩌면 규제당국은 암호화폐 또한 일종의 게임머니 정도로 가벼이 여겼는지 모른다. 그러다 2017년 투기가 심해지자 돌연 ICO(Initial Coin Offering)를 전면 금지하여 국내 발행을 막더니, 거래소 폐쇄 방침은 발표 후 하루 만에 번복하면서 유통시장을 혼란 속에 방치해버렸다. 국내에서는 만들지 못하게 할 테니, 거래하든 말든 모르겠다는 식이었다. 그 결과 수많은 암호화폐가 규제당국의 감독 없이 우회상장처럼 해외에서 발행되어 국내에서 거래되었으며, 투자자 보호 장치는 마련될 기회조차 없었다. 그러나 작금의 거래량은 발행 금지, 유통 방치라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면피성 정책 기조를 용인할 수 없는 수준이다. 발행유통 금지나 규제 하에 발행유통 허용 중 하나를 선택할 때가 온 것이다. 탈중앙화된 디지털 화폐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고, 블록체인 기술 발전에 암호화폐가 필요 없다면 중국이나 인도처럼 가상자산의 발행거래보유를 금지해야 한다. 반대로 암호화폐와 퍼블릭 블록체인이 불가분이고, 그 사회적 효용이 투기를 감내할 만큼 크다면 발행과 유통을 허용하는 대신 금융상품에 준하는 규제감독을 해야 한다. 주식이나 파생상품도 자금조달이나 위험 헷징 등 순기능이 크다면 일부 투기는 용인하되 규제로써 역기능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가상자산에도 같은 이치가 적용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 경우라면 자본시장의 거래소처럼 시장 진입 가능 요건을 정하고, 투자자에 대한 설명 후 일정 수준 이상의 상품만 상장유통시키며, 시세 조종 같은 불공정거래를 감시하는 등 투자자 보호를 위한 관리감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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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5.23 18:46

353570 프로젝트

정은실 사회활동가 2021년 5월 15일 기준으로 세는나이 35세, 만 나이 33세. 70세까지만 살고 싶다는 계획 아닌 계획의 50%를 지나는 중이다.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지나버렸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음에도 살다 보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많은 목표와 해야 할 일들이 주어졌다. 본능적인 욕구로 먹고 자고 싸며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것에서부터 꼭 하지 않아도 되지만 자연스레 가져진 자아실현의 욕구까지 크고 작은 목표들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라는 궁금함으로 삶을 돌아보면 그때의 주어진 상황마다 사는 대로 살았었다. 운이 좋게도 20대 중반에 건강한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모여서 사는 대로 살아도 후회하지 않을 공동체 안에서 머물렀기에 큰 문제의식이 없었다. 하지만 공동체에서 나와 새로운 일들을 펼쳐가는 시기에 내 삶을 어떻게 꾸려가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세는나이 35세에서 만 나이 35세로 접어드는 기간에 남은 50%를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해 천천히 생각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인생의 반절을 지나는 지금,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거주지를 옮기고, 새로운 주거공동체에 살기 시작했다. 일을 그만두고 직장인의 타이틀을 던져버렸으며, 하고 싶은 일을 담을 수 있는 작업실과 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다. 사랑하는 연인과 안정적으로 함께 살 수 방법들을 찾고 있기도 하다.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앞두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비슷한 고민이 있는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과도 함께 할 수 있어서 놀면서 하는 재미난 일을 기획할 수 있겠다. 지나온 인생을 스승으로 삼아 남은 인생의 반을 계획하는 프로젝트라면 어떨까? 예상할 수 없지만 본이 생각하는 인생이 70년이라고 한다면 프로젝트 353570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프로젝트 353570은 지나온 35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35년을 계획하는 작업이다. 각자의 중요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면 좋을 텐데 나라면 3가지 키워드가 있다. 첫 번째는 공간을 주제로 그동안 머물렀던 지역, 살았던 집, 일했던 곳, 자주 가던 장소 등을 살펴본다. 각각의 장소공간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나의 삶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정리한다. 두 번째는 사람을 주제로 지금까지 함께 했던 사람들, 여전히 함께하는 사람들, 앞으로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가깝고 친근한 친구들, 가족들 뿐 아니라 이제는 연락하지 않는 초등학교 친구라거나 직장생활 내내 괴롭혔던 선임, 심지어 헤어졌던 연인까지 가릴 필요는 없다. 인터뷰를 통해 나에 대한 추억을 묻고 그들이 생각하는 나라는 사람은 어떤 인간인지를 마주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기록을 주제로 내가 남겼거나 함께한 이들이 남겨준 사진, 글, 메모, 편지, 오랜 시간 곁에 함께한 물건들까지 온갖 흔적들을 모아 정리한다.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와 시간에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이 묻어날 수밖에 없다. 또한 물건을 대하는 습관들도 남아 있기에 사는 방식도 돌아볼 수 있다. 어디에 어떻게 머무르고,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무엇을 남겨 추억하는지를 통해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를 계획해보는 것은 어떨까? /정은실 사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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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5.16 17:52

포화된 혐오

이주경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 주임) 의미 포화라는 말이 있다. 특정 대상에 과도하게 몰입할 경우 그 대상의 정의나 개념이 희박하게 느껴지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일종의 미시감처럼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말하다 보면 그 의미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현상을 말한다. 최근 각종 매체에서 혐오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다 보니 단어 자체가 너무나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마나 내가 그 단어에 노출이 많이 되었으면 이런 느낌이 들었는지 궁금해졌고 그래서 나는 지난 한주 동안 혐오라는 단어가 들어간 인터넷 기사가 얼마나 되는지 검색 해보았다. 검색결과 약 3만 여개. 물론 중복되는 기사도 있고 객관적인 지표로서 활용 할 수 있는 자료는 아니지만 혐오라는 단어에 얼마나 많이 노출 되고 있는지 단편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수치였다. 혐오라는 단어는 언제부터 우리 곁에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냈을까? 내 기억에 처음으로 혐오의 시대라는 표현을 인식한 것은 2016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당시 우리 사회는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이 분노할 수 있는 이슈가 있었고 또 그에 따른 진영 간 갈등 또한 최고조에 이르렀다. 자신이 속해있는 진영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을 끌어내리는 혐오의 양상은 당연하게 나타났으며 바로 이듬해 새롭게 선출된 미국의 대통령이 더 강한 미국을 외치며 주변국과 이민자에 대한 다소 강압적인 정책들을 꺼내 놓으며 혐오의 시대라는 표현을 매체를 통해 더 자주 접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이슈로 예를 들어 이야기 했지만, 나 또한 지난 몇 년간 여러 계층사이에서 존재하는 혐오를 목격 할 수 있었고 또 경험할 수 있었다. 과거 우리사회에서 혐오는 국가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재단되고 폐기되어야 할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사용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수면 아래 있던 소수자인권들이 하나 둘씩 이슈가 되면서 성소수자 인권, 양성평등, 이민자들의 인권들이 논의가 되고 서로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계층 간의 갈등은 혐오라는 감정과 함께 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혐오라는 정서는 안타깝게도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장과 전염병과 같은 공통의 불안정성, 그리고 경제적인 양극화를 바탕으로 더 널리 퍼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성별, 장애, 정체성과 관련된 멸칭을 하나씩은 들으며 사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삶이 되어버렸다. 자신을 지키려는 본능에서 바탕을 두고 있는 감정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생기는 사회 전반에 스며드는 무신경한 폭력성을 어떤 식으로 마주해야 할까. 나는 개개인의 비극을 용기 있게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계층 간에 혐오에 따른 폭력은 언제나 우리주변에 산재하고 그것은 상투적인 보도의 형태로 가공되어 일종의 정보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정보로서 다가오는 타인의 비극에 둔감해 질 수 밖에 없다. 개개인의 비극이 가지는 단독성을 마주하고 그들이 차별 받게 되는 이유가 온당한지 그들이 속해있는 공동체에서 개인의 존엄성이 무시되는 과정을 면밀히 살피고 평범한 정보로 추락 할 수 있는 개인의 비극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한명의 개인으로 당장의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혐오의 시대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이주경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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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5.09 17:50

ESG가 뭐죠?

안선우 문화예술공작소 작가 최근 뉴스에서 ESG 경영이 자주 언급된다. 뉴스에 등장하는 저명(著名)한 CEO들은 ESG가 일시적 유행이 아닌, 근본적이며 필수적인, 기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 목소리를 모은다. 일단 ESG가 중요하다는 것은 눈대중으로 알았다. 하지만 필자는 ESG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맥락(脈絡)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찾아보고, 정리해보았다. ESG는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약자다. ESG가 기업에 중요하다는 것은 환경, 사회, 지배구조라는 요소를 기업의 경영에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의미다. 과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업의 목표가 오직 이윤 극대화였다면, 앞으로 펼쳐질 자본주의는 환경 및 사회문제 해결과 같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필요하다. ESG가 기업들에 중요해진 배경에는 코로나19에 있다. 코로나19의 주요 원인은 기후변화 때문이다. 기후변화로 동물의 환경이 바뀌고, 인간의 야생동물 포획과 섭취가 늘어나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생긴 바이러스는 인류에게 불행을 안겨주었다. 자연을 주인이라 생각했던, 인간의 오만(傲慢)이었다. 자연의 공격에, 인간은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코로나 2년 동안 인간은 크게 두 가지를 깨달았다. 자연의 공격과 인간의 방어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인간은 영원히 패배한다는 믿음이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를 요구했다. 더는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지 말 것을 말이다. 인간이 욕망을 멈추지 않는다면, 코로나보다 더 심한 재앙을 안겨준다는 자연의 경고가 코로나바이러스에 담겨있다. 환경 문제에 대한 고민은 코로나 이전에도 있었다. 구제역이 돌아 죄 없는 동물들이 땅에 생매장당하는 사태에도 겪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인간의 목숨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인류의 삶이 파괴되고 있는 현실을 경험한 후 인간은 달라졌다. 코로나 이전의 세상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환경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전 세계가 코로나 위기를 겪으면서 기업이 환경과 사회문제에 책임을 갖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기업의 성장과 환경은 상충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동안 기업에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꾸준히 있었다. 사회적 가치 창출이 경제적 가치 창출보다 앞선다는 말도 있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그럴듯한 수사로 인식되었으나 이번만큼은 다르다. ESG는 환경, 사회, 지배구조의 균형과 조화다. 균형과 조화에는 이윤을 넘어서 기업의 선한 힘이라는 철학이 담겨있다. 기업의 선한 힘은 구체적으로 기업의 지속가능성, 사회적 책임, 공유가치 등으로 파생될 수 있다. 결국, ESG의 핵심은 생태계다. 환경, 사회, 지배구조도 생태계라는 단어에 수렴한다. 기업은 생태계의 다양한 이해관계의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앞으로 자연과 더불어 사회와 지배구조의 상생만이 기업의 수익을 보장할 것이다. 코로나를 통해 누구나 느꼈듯, 생태계가 파괴되면 기업도 인간도 무너질 것이다. 변화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떠한 불행이 다가왔는지, 길게 말하지 않아도 역사를 돌아보면 짐작할 수 있다. /안선우 문화예술공작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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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5.02 17:42

미얀마 군부와 문민통제

박지원 변호사 지난 2월 미얀마 군부가 총선 결과에 불복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여러 차례 자국민을 학살해 온 군부는 이번에도 평화 시위로 저항하는 민간인을 무력 진압했고, 지금까지 수백 명이 사망했다. 미얀마에게는 민주화를 지지해 달라고 기댈 만한 외세가 없다. 미얀마는 소수민족 학살 문제 등으로 서구세계로부터 외교경제 제재를 당해 상당 기간 고립되었다. 그 사이 중국과의 교역은 점차 늘어 현재 미얀마 수출입의 30% 이상을 중국이 차지한다. 미국이 강하게 개입하려 들면 미얀마 내 친중 세력이 커지니, 미국도 주저할 수밖에 없다. 미얀마 시민들은 국제기구 차원의 군사개입을 호소하고 있지만,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을 가진 중국은 일대일로 사업과 자원수급에 지장이 없는 이상 민주세력을 돕거나 군부를 적대할 이유가 없다. 이처럼 미국이 머뭇거리고 중국이 뒷짐 진 형국에서는 국제사회가 공허한 성명 발표를 넘어 어떤 실효적 조치를 하기 어렵다. 군부가 반인륜적 범죄를 서슴지 않을 수 있는 배경이다. 결국 미얀마 내부의 힘만으로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인데, 어떤 시나리오도 녹록지 않다. 시민들이 비폭력시위를 넘어 무장 투쟁하는 것은 실현가능성도 낮거니와, 1980년 광주처럼 더 큰 유혈사태로 치닫기 십상이다. 소수민족 반군이나 정글 지역 군벌과 연합한다면 곧 끔찍한 내전을 의미한다. 한국의 1979년처럼 암살 등으로 권력 교체가 시도될 수 있지만, 우리가 1980년에 경험했듯이 쿠데타 위험은 상존한다. 미얀마도 1988년 8888항쟁의 성과를 군부 쿠데타로 고스란히 날린 경험을 갖고 있다. 미얀마 군부의 권력은 막강하다. 미얀마 헌법은 4장 입법부, 5장 행정부, 6장 사법부 외에 7장에 Defense Services라는 권력기관을 두며, 국군통수권자는 대통령이 아니라 군부의 최고사령관이다. 군부는 상원과 하원 의석의 25%를 점유하는데, 헌법 개정에 75%를 초과하는 의석이 요구되므로, 군부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재벌과 유착하여 경제력도 틀어쥔 군부는 비상사태가 선포되면 3권을 모두 장악한다. 유신헌법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1950년대 영국 일간지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느니 쓰레기통에 장미꽃이 피기 바라는 것이 낫다고 적었다. 우리가 미얀마 군부의 작태를 보며 느끼는 마음과 같았을까. 미얀마 시민들의 헌법 화형식을 보노라면 한편으로 6월 항쟁 끝에 직선제 개헌과 하나회 숙청을 이루어 낸 우리 역사에 경이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 출신 국방장관은 없고, 국방개혁에는 소극적인 우리 군대가 과연 충분히 민주적 통제를 받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역사적으로 무력을 장악한 전사, 무신 등은 귀족 계급이었다. 이들 군인은 상인, 현인(사제, 정치가, 관료) 집단과 더불어 통치 엘리트의 중요한 축으로서 언제나 헤게모니 다툼의 중심에 있었다. 비록 지난 30년 동안 군이 비교적 잠잠했다지만, 2017년 국군기무사령부가 촛불 정국에서 위수령과 계엄령을 검토했던 문건을 보면 방심은 금물이다. 언론 검열, 국회의원 구속을 통한 계엄해제 저지, 기계화사단기갑여단특전사 투입 계획 등을 읽어 내려가며 실감한다. 우리가 공기처럼 당연시하는 군에 대한 문민통제나 민주주의는 하룻밤에 뒤집힐 수도 있는 취약하고 불안정한 체제라는 것을. 미얀마 사태를 우리와 무관한 일로 치부해서는 안 될 이유이기도 하다.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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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25 16:54

지금 그대로의 생각과 마음을 기록한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이번에는 사람과 기록을 주제로 글을 쓸 생각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사람과 기록이라고 적은 뒤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현재 진행형이다. 아카이브 작업에 대해 그렇게 떠들어댔건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으니 자책하는 마음이 든다. 사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그래서 이번에는 무엇을 적을까 고민하기보다는 지금 그대로의 생각과 마음을 적는 데 집중해본다. 그동안 기록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한 이유는 무엇일까? 새롭게 무언가를 하려는 시도는 아니었다. 기록에 관한 이야기는 습관의 연장선이다. 오랜 서울 생활을 마치고 내려와 본가에서 지내던 중 우연히 고등학생 때 쓴 다이어리를 펼쳤다. 월간 달력의 한칸 한칸마다 깨알 같은 글씨로 그날 있던 이야기들이 적혀있었다. 고등학생 시절에 내 삶의 대부분이었던 친구들, 만남들, 생각들이 제각각의 사건들로 뒤엉켜 있었다. 이런 일이 있었구나 되새기니 반가웠다가도 이런 짓도 했었나 눈을 질끈 감으며 어둠 속으로 묻어버리기도 했다. 다이어리를 눈앞까지 가지고 와야 보일 정도로 작은 글씨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에 왜인지 모를 간질간질함이 있었다. 그날그날의 이야기를 담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글자들이 마치 말을 걸고 싶어 안달하는 것 같아서였을까. 다이어리 앞면 포켓에는 알록달록하게 유치찬란한 스티커사진이 한 뭉치 들어있었다. 글씨로 읽는 과거와 사진으로 보는 과거는 다른 느낌이었다. 얼른 덮어버렸다. 이어서 대학 시절 적었던 다이어리는 매일 시간 단위로 계획한 일정표가 늘어서 있었다. 무언가를 계속 계획하고, 실행하고, 실행하지 못한 일은 다시 적어서 잊지 않도록 체크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계획과 실천에 대한 기록이나 좋았던 강의나 글귀에 관한 내용이었다. 지금은 그때처럼 월간 다이어리를 쓰거나 꾸준히 일기를 쓰는 데에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더 예쁘게 더 제대로를 고민하다 어느새 손에서 놓아버렸다. 요즘 일로서 글을 쓰는 일이 잦아지면서 겪는 과정도 비슷하다. 글을 쓰기 위해 자판을 두드리는 그 순간에도 어떤 단어가 좋아 보일까? 문장은 어떻게 맺고, 어떻게 시작하면 있어 보일까? 고민하는 순간이 늘어갔다. 관련 자료를 반복적으로 찾아본다. 무수히 많은 정보를 정리하지 않은 채로 머릿속 혼돈의 바다에 집어 던진다. 그리고 다시 글을 쓰자고 하이얀 문서 화면을 바라본다. 아까 봤던 어떤 문장이 좋았는데, 저런 말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인데 하며 그 문장에 사로잡힌다.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다시 온전한 나의 이야기로 돌아와야 한다. 원래부터 내가 기록하고 싶은 것은 누가 봐도 멋지고,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날의 특별한 일, 그날의 멋진 장면, 그날의 슬펐던 문장 등 하루하루 삶이 녹아져 있는 이야기들이다. 모두에게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다. 일상의 대화일 수도 있고, 직장에서의 일정표가 될 수도 있다. SNS에 육아일기로 올라오기도 한다. 부분으로서는 각각의 일상이자 평범함이다. 그러나 개인이 모여 사회를 구성하듯 개인의 파편이 모여 사회의 단편을 보여줄 수 있다. 꼭 모두가 동의하는 긍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더라도 이런 것도 있었어., 이런 평범함이 우리의 삶이야.라고 말하는 기록에 집중하고 싶다. 지금 쓰는 글처럼 일상의 사소함을 기록하고 싶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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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18 17:06

문화의 소비와 재생산 - 공동체 안에서의 역할

이주경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 주임 1995년 10살 때까지 국민학교를 다녔던 나는 이듬해인 1996년부터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 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광화문 뒤에 있던 일제 강점기 건물은 당시 대통령의 버르장머리 발언과 함께 철거되었다. TV에는 흥겨운 가락과 함께 신토불이라는 노래가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판소리 완창으로 유명한 박동진 명창의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말은 각종 매체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경제 성장과 근대화의 과제 그리고 내전 이후의 체제 보존을 위해 우리나라는 일본과의 국교를 서둘러 정상화하게 되었고(1965년) 문화적인 측면에서 일제강점기와 내전의 폐허위에 중국 미국 일본의 문화가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을 가졌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문화적인 부분에서의 독립을 환기시켰던 시기였기에 그만큼 다양한 나라의 문화들이 혼재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문화의 수용과 재생산에 있어서 케이팝은 빠질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1992년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내한은 대중문화에아이돌이라는 개념을 각인시켰고, 이후 90년대 X세대 붐과 함께 해외의 음악들이 적극적으로 국내에 유입되었다. 각종 대형 기획사로 대표되는 아이돌 산업은 2000년대 201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에서 고유의 맥락을 가지게 되었으며, 지금은 세계인들이BTS에 열광하고 있다. 내가 경험하고 영향을 받은 역사적, 문화적인 환경이 가지고 있는 맥락들 살펴보며 80년대 말과 90년대 그리고 현재에 이르는 문화적인 흐름을 간략히 이야기했다. 1인 가족, 개개인의 단절과 같은 키워드가 일상인 요즘 세상과 동떨어진 듯이 사는 것 같은 느낌을 종종 받지만, 내가 하는 일 그리고 선호하는 것들을 되짚어 보면 언제나 역사적 정치적인 맥락이 작용한다. 영국의 철학자 알래스대어 맥킨타이어는 서사적 자아라는 표현을 통해 공동체가 개인의 출발점임을 명시하였으며 그의 표현을 빌리면 개인은?공동체가 지금까지 써온 이야기를 이어쓰는 서술자인 동시에 공동체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틀 안에서 연기하는 연기자이다. 자칫 전체주의적 해석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그의 말에는 공동체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방향을 탐색해야 한다는 주장의 단서 또한 제시되어 있다. 서사적 자아와 공동체 그리고 앞서 서술했던 나 자신이 경험했던 문화의 흐름들을 살펴보며 내가 존재하고 있는 위치 그리고 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 보았다. 앞서 언급했던 큰 범위에서의 열정적인 문화의 소비와 그에 따른 재생산의 과정은 현재 내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원로작가의 기록과 연구, 지역 교류를 통한 외부 기획자와의 협업으로 인한 지역 문화의 재해석, 이는 모두 지역기반으로 생성된 문화를 대중들에게 소비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제시하고 나아가 자생적인 재맥락화를 촉발 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 동안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우리사회는 지난 20여 년 동안 문화의 힘을 통해서 세계적인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지위까지 획득하게 되었다. 앞서 말한 사업을 통해 향유하는 계층에게 소비와 재생산의 계기를 제시하는 것이 우리가 가장 고민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미래를 위한 건강한 문화생태계 조성을 향한 걸음이 될 것이다. /이주경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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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11 16:43

로컬은 지방이 아니다

안선우 문화예술공작소 작가 1960년대부터 한국사회는 산업화로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이 시작된다. 2021년 현재,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서울경기인천)에 살고 있다. 사람과 자원이 수도권에 집중된다. 수도권과 지방의 불균형은 자원과 기회의 낭비를 가져왔다. 고도비만 수도권은 과도한 경쟁, 부동산 폭등, 출산율 저하를 낳는다. 지방은 소득, 건강, 교육의 불평등이 커지며 청년층 유출, 일자리 부족, 인구 고령화, 상품과 서비스 수요 감소 등을 겪는다. 마스다 히로야의 책 <지방소멸>에서 바라보는 일본의 미래는 참담하다. 일본에서 인구감소는 미래의 문제가 아니다. 현실의 문제다. 일본은 매년 한 개 도시 숫자의 인구가 사라진다. 2040년까지 896개의 지방자치단체가 소멸할 것으로 전망한다. 마스다 히로야가 분석한 인구 문제를 악화시키는 주범은 인구가 도쿄 한 곳으로만 집중하는 극점사회. 국토교통부 조사 결과 대한민국 수도권 직장인의 출퇴근 시간은 1년 중 한 달은 길바닥에서 보낸 만큼의 시간이라고 한다. 교통 혼잡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은 31조. 서울시 한 해 예산과 같다. 인구밀도가 높은 수도권에서의 벌어지는 총성 없는 전쟁. 그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신혼부부는 출산을 포기한다. 생존 본능이 생산 본능을 앞서고 있다. 2021년 대입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수험생이 대학 입학 정원보다 적었다. 벚꽃 피는 대로 망한다는 섬뜩한 소문은 본격적인 지방대 위기를 예고한다. 최근 로컬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한다. 로컬은 영어로 Local. 사전적 의미는 자신이 사는 특정 지역을 뜻한다. 로컬은 단순히 지리적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골목길 자본론>을 쓴 모종린 교수는 도시만의 문화가 바탕이 된 산업 형태가 도시의 미래라고 말한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지역 내에서의 생활이 중요해졌다. 도시의 특색있는 골목상권. 로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일, 문화, 놀이, 소비 모두를 해결할 수 있는 문화를 갖춘,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 기반은 로컬크리에이터에 있다. 로컬이라는 단어에서 이어지는 로컬크리에이터는 내가 사는 동네, 지역, 도시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여, 지역의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로컬크리에이터다. 지방 도시가 가진 사회적 이슈를 그 도시에 사는 로컬크리에터가 해결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도시를 실현한다. 지역의 음식, 상품, 이야기가 담긴 도시. 사람이 도시에 머무르게 하는 힘은 로컬 콘텐츠다. 사람이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이 모여 로컬이 된다. 지역만이 가진 특징들을 잘 살리면, 더욱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로컬에 담겨있다. 로컬이라는 말은 기존의 의미를 탈피하고 있다. 로컬은 단순히 지정학적 위치나 행정구역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도권과 지방으로 구분되는 차별적 구조가 아니다. 생태계가 유지되는 건 다양한 종들이 어우러져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힘은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로컬에서 나온다. 글로벌(Global)과 지역(Local)의 합성어인 글로컬(Glocal)은 지역의 특성을 살린 세계화를 말한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로컬이 담긴 도시를 우리 스스로 만드는 일이다. /안선우 문화예술공작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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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04 16:58

LH 사태와 ‘보이지 않는 발’

박지원 변호사 경제학도가 아니라도 보이지 않는 손은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사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한 번밖에 언급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기득권의 정경유착을 정당화한 중상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유경쟁의 효과를 소비자 대중에게 돌리자는 맥락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개념은 사익만 추구하더라도 사회 전체에 유익하므로 정부나 규제는 필요 없다는 희망 사항으로 오독되더니, 급기야는 경제학의 사상적 본령이라도 되는 것 마냥 수 세기를 유령처럼 공론장에 떠돌았다. 그러나 공익을 위한 어떠한 규제도 없는 상황에서 개인이 오직 사익만을 위해 움직인다면 무엇 때문에 힘들여 경쟁하겠는가. 공정한 시장의 규칙을 어기는 반칙에 의존하면서 자유경쟁을 회피하고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손쉬운 길을 놓아두고 말이다. 혹자는 이처럼 정치적 특권이나 특혜를 통해 인위적인 지대를 추구함으로써(rent-seeking) 사익을 극대화하려는 현상을 보이지 않는 손에 대비하여 보이지 않는 발이라고 부른다. 이는 곧 부패 문제기도 하다. 이번 LH 사태를 보며 보이지 않는 손에 비해 보이지 않는 발이 얼마나 더 영리하며 부지런한지 다시금 느낀다. 부패는 뇌물수수에 국한되지 않는다. 부패방지법은 공직자가 지위 또는 권한을 남용하여 자기 또는 남의 이익을 도모하는 행위, 공공기관의 경제활동에 있어 위법하게 재산상 손해를 입하는 행위 등을 부패행위로 정하고 있다. LH 직원이 업무상 알게 된 개발 관련 정보를 이용해 차명으로 토지를 사두고, 최대의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각종 탈법수단을 활용한 이번 일이 바로 법이 정한 부패행위다. 또, 이는 정보에서 열위에 있는 거래 상대방(원주민)에게 피해를 주며, 부동산 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예산이 낭비되게 함으로써 사회의 효율성과 공평성을 저해하는 부패의 부정적 양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중앙집권적 관리경제 체제를 통해 발전해 온 우리 경제사에서 부동산, 건설 분야의 부패는 수십 년 묵은 고질병이다. 이를 새삼스레 현 정권 문제로 치환시키는 공세가 의아하기는 하나, 어쨌든 이번 LH 사태가 더 나은 부패방지 시스템을 만드는 데 기폭제로 쓰이기 바란다. 특히 자유경쟁 자체에 거부감을 지닌 과거 세대와 달리, 경쟁을 당연하고 필요한 것으로 인정하면서 그 과정의 공정성만이라도 확립되기를 갈망하는 청년세대가 느낄 박탈감을 생각하면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아까운 기회다. 다만, 최근 제시되는 해결책이 분노 여론에 편승하여 주로 처벌 강화에 집중되는 점은 못내 아쉽다. 처벌 강화가 부패방지에 효과적인지는 논란이 있기에, 예방적 접근에도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부패를 일종의 거래로 보는 제도주의 경제학은 거래비용을 증가시킴으로써 부패를 막을 것을 제안한다. 거래신고제나 정기조사 및 결과공개를 통한 투명성 확대, 내부 공익제보자나 감사부서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 공직자와 중개인공동투자자명의대여자 등 관련자 사이 비대칭적 처벌, 부패계약의 불이행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방법 등 관계자 간에 배신을 부추기고 부패계약의 안정성을 허무는 방법도 고민할 만하다. 부패는 한자로 썩어(腐) 무너짐(敗)을, corruption은 함께(cor) 파멸함(rupt)을 뜻한다. 반칙에 끼지 못하면 뒤처지는 사회는 구성원들과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다.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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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28 16:52

공간과 기록

정은실 사회활동가 완산칠봉 아래 자리한 셰어하우스 달팽이집을 나와 청년몰의 약속장소까지 가는 길에서 지나치는 골목과 골목에는 그 공간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흔적이 담겨 있다. 이 마을에 오래 살지 않았지만, 그 흔적의 기억을 어렴풋이 가늠해 볼 때면 애틋함이 가득해진다. 100살이 훌쩍 넘은 완산초등학교에 다녔던 수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 뛰어놀던 학교 운동장, 친구들과 오가던 길. 가족들과 산책하며 계절의 변화를 느꼈던 곳, 때로는 연인과의 이별에 아파하며 가로등 불빛도 슬펐던 그 골목. 곳곳에서 마을 사람들의 시간을 가득 품고 있다. 원도심의 골목은 사람들이 떠나고 다시 찾아오고에 상관없이 마을 입구의 오래된 나무처럼 그 자리에서 사람들의 기억을 품고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오래된 나무가 긴 시간을 살아내며 마주했던 햇볕과 바람, 빗방울이 나무를 자라게 하듯이 골목의 집들과 가게, 빈터들이 서로의 햇볕이 되어주고, 그들이 만드는 풍경이 바람이 되어 골목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또한, 골목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주변 환경과 분위기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골목은 완성되어 가면서도 최종적인 완성형이라는 정의 없이 끝없이 변하고 있다. 전주로 돌아와 완산동 살이 1년의 세월 동안 매일같이 마주하는 동네의 풍경이 기억의 단편으로만 스쳐 가는 것이 못내 아쉽다. 내가 사는 동네의 변화를 원도심의 정책적이거나 경제적인 변화 혹은 예고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마주한 이별에 앞서 사라질 수 있는 것과 연계된 안타까운 감정으로 정의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죽기 전까지 항상 어느 공간에 머물며, 시간을 경험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살아낸다. 우리의 삶의 전 과정이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며 다양한 행위를 통해 공간에 많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공간에 남은 흔적은 우리의 시간이자 기억이고 삶이다. 개개인의 삶에서 공간은 집, 학교, 회사, 가게와 같이 특정한 건축물일 수도 있고, 골목, 동네, 마을처럼 전체적인 풍경이기도 하다. 작은 건축물부터 넓은 풍경까지 짧은 순간 안에서 공간은 그대로이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공간은 끝없이 변화하고 있다. 공간의 변화는 물리적인 변화뿐 아니라 기억의 상호작용을 통한 변화를 품고 있다. 우리 삶의 모든 행위는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은 자연스레 사람의 흔적을 갖게 되고, 사람도 공간의 흔적으로 기억을 갖게 된다. 이때 생기는 서로에게 생기는 기억의 상호작용이 사라짐에 대한 아쉬움이다. 몇 해 동안 살았던 집, 매일 출근하는 사무실, 자주 가는 가게처럼 지속해서 머무는 곳은 반복적으로 보는 풍경으로 익숙해져서 새롭게 보지 못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삶의 경험이 모두 다르기에 같은 공간이라도 사용자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고, 쓰임이 달라질 수 있다. 익숙한 공간의 새로운 발견을 통한 낯섦이 우리의 기억을 자극해 새로운 감정과 자극을 만들기도 하며, 공간 안의 사물 또는 사용자인 나에게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 새로운 가치는 공간과 사물과 사람을 다시 보게 하고, 다시 봄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애정을 갖게 마련이고, 이 애정은 애틋함을 넘어 아낌을 실천하게 하는 동기가 될 수 있다. 공간의 기록은 공간의 흐름, 공간의 시간, 공간의 기억을 기록함에 따라 이미 익숙해 매일 스치기만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공간의 새로운 쓰임과 아낌을 만들어줄 수 있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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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21 17:56

타인의 눈

이주경 전북문화재단 창작기획팀원 코로나로 인해 영화관을 마음 놓고 찾지 못했던 최근, 그만큼 영화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 같아서 보고 싶었던 영화를 미루고 미루다 보게 되었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2018)는 평범한 14살 소녀 은희(박지후扮)가 그 나이 즈음에 경험하게 될 풀리지 않는 주변 상황(가부장적인 가정, 남자친구와의 이별, 적당한 비행 같은) 속에서 아픔을 겪고 또 조금씩 성장해 가는 이야기였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한 은희는 새로 온 한문 학원 선생님 영지(김새벽扮)에게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고 항상 자신을 다그치기만 하는 어른들과 달리 자신에게 훈계가 아닌 공감을 해주는 영지에게 의지하게 된다. 비록 안타깝게 그들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지만 영지가 은희에게 써준 마지막 편지는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 남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그렇게 닮고 싶은 사람의 시선을 자기 안에 담으면서 은희는 성장하게 되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그것이 나에게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개인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변화의 구조와도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접하면서 예술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간접 경험하게 된다. 아름답고 섬세하게 묘사된 풍경화의 한 장면을 보면서 예술가가 삶속에서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기억들을 느끼고 우리 개개인의 삶에서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상기할 수도 있으며 쉽게 지나쳤던 일상을 포착한 작업을 감상하며 삶을 바라보는 좁은 시야를 자각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짧은 예시에 불과하지만 위와 같이 관람자의 마음속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성향의 작품이 있는 반면에 상대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도 존재한다. 사회화의 과정에서 밖으로 꺼내지 않음을 미덕으로 배웠던 터부시 되는 소재들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또한 동시대 예술의 매체적인 실험들은 우리가 집단 안에서 습득하여 고착화된 인식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그 과정 속에서 쉽게 피로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심리적 방어체계를 내려놓고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는 힌트 또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심리적인 경계를 넘어 들어온다고 해서 회피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 것은 어떨까? 실제로 예술의 역할이 종교적, 정치적인 선전의 도구를 지나 개인적인 영역으로 전환되면서 많은 예술가들이 사회 안에서 개인의 소외 그리고 당연히 마주하게 되는 부조리함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작품들 중에서 마음속에 미약하지만 계속 남아있는 작품 또한 우리는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약한 연결고리가 자신의 삶에 겹쳐졌을 때 선뜻 공감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예술가의 언어는 진실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 영화 속의 소녀가 자신이 동일시했던 대상의 생각을 쫒아 가며 성장 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술가의 시선을 감상하면서 자신이 잊고 있었던 가치를 찾고 또한 멈추지 않고 다가오는 삶의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마련했으면 한다. /이주경 전북문화재단 창작기획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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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14 16:48

예술인 일자리와 일거리

안선우 문화예술공작소 작가 예술인과 일자리. 틀린 말은 아니다. 옳은 말도 아닌 것 같다. 국어사전에서 예술인은 예술을 직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직업과 일자리는 같은 것일까? 필자는 극을 만드는 작가지만, 작가라는 직업이 일자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자리의 기준은 무엇일까? 일자리는 출근과 퇴근 시간이 있다. 작가라는 직업은 마감은 있어도 출퇴근은 없다. 예술인의 시간은 자유롭다. 다만 자유로운 시간에 대한 책임은 있다. 마감까지는 출퇴근 시간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가는 시간만이 있다. 정부는 매년 예산을 투입해 예술인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한다. 하지만 일자리가 생겼다고 말하는 예술인은 주변에 없다. 다만, 이제 예술을 그만두고 다른 일자리를 찾겠다고 말하는 예술인은 있다. 예술인과 일자리,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 명쾌한 답을 준 사업이 있다. 코로나19 전주시 청년 긴급 일거리 지원사업. 2020년에 전주시 사회혁신센터가 추진한 사업이다. 코로나19 시기에 청년에게 지원금을 주겠으니, 무엇이든 해보라는 사업이다. 정산도 필요 없다. 일자리가 아닌 일거리를 주겠다니. 일거리라는 단어를 곱씹어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분명해졌다. 일자리는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직업이다. 일거리는 일을 하여 돈을 벌 거리를 뜻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부는 예술인에게 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 9시 출근 6시 퇴근을 보장하는 예술인 일자리가 생긴다면 예술이 성장할까? 자유로운 시간을 책임 있게 쓰는 일거리가 예술인에게 필요하다. 코로나19와 같은 어려운 시기에 일거리가 더욱 중요하다. 한 명의 월급으로, 여섯 명의 일거리가 생긴다. 예술인과 일자리는 성립하지 않는가. 맞는 말은 아니다. 예술기관 단원과 예술 강사는 예술인 일자리라 부르는 게 마땅하다. 국가가 집중해야 할 일자리는 문화예술 기획자다. 기획자에게는 일자리를 줘야 한다. 월급을 받는 기획자들끼리 모여 예술인에게 어떠한 일거리를 줘야 할지 과감하게 맡겨보는 것은 어떨지. 얼마 전 전주시 문화예술인 복지정책 토론회에 참석했다. 필자는 토론자로 초청받아 예술인 일자리와 일거리를 이야기했다. 필자는 제안했다. 아이디어 수집에만 그치는 공모전이 있다면, 올해는 과감하게 없애보자고. 그 재원으로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에 예술인에게 일거리를 줘보자고 말이다. 정책사업은 솔직하고, 단호하고, 명쾌해야 한다. 불편한 과정을 없애고, 필요한 결과에 집중해야 한다. 예술인에게 일거리를 줘서 스스로 극복할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연구했지만, 일자리를 만들기는 어렵다. 일자리를 만드는 주체는 기업이다. 정부가 할 일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경쟁을 만드는 것이다. 정부가 투명한 일터를 만들면, 일자리가 생긴다. 무대는 사라졌지만, 새로운 무대가 있다. 전주시 모든 곳이 무대다. 전주라는 무대에서 예술 실험을 할 수 있는 일거리가 필요하다. 전주형 일거리 사업의 핵심은 예술 실험이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예술을 실험하고, 자신의 예술로 타인에게 감동을 주며, 전혀 다른 장르와의 예측하지 못한 결합이 필요하다. 3개월 일자리가 생겼다는 말보다, 올해 10개의 예술 실험이 예정되었다고, 많은 일거리에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계기가 될 거라는 말이 예술인에게 더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까. /안선우 문화예술공작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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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7 16:56

'학폭투 논란'과 검찰·사법개혁

박지원 변호사 미투(Me, too)에 이어 학폭투(학교폭력, too)의 시대가 오는가 싶다. 트롯 경연대회 출연자가 학폭 가해자로 밝혀져 방송에서 하차하더니, 쌍둥이 스타 배구선수들은 무기한 출전정지로도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아 영구퇴출을 요구하는 국민청원까지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최근 한 달 사이 폭력 관련 이슈가 많았다. 당 대표가 같은 당 국회의원을 추행하여 제명되기도 했고, 법무부장관 청문회에서는 후보자의 학창시절 패싸움이 도마 위에 올랐다. 볼썽사나운 사건들이지만 일련의 사태에서 분명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바로 우리 사회에서 사적 폭력에 대한 관용도가 점점 낮아진다는 점이다. 예전처럼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것이라는 여론이 우세했다면 방송 하차라는 단호한 결정이 내려질 이유가 없다. 30여 년 전 쌍둥이 배구선수의 모친이 속했던 배구팀 선수들은 피멍든 허벅지가 신문에 실렸지만, 경위서 제출과 감독 교체로 사건은 유야무야되었다. 과거 민주화운동권 내부 성폭력은 대의와 조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은폐되기 일쑤였다. 정치인이 자서전을 내면서 어린 시절 패싸움을 기록했다면 불우한 환경을 극복한 비행청소년의 아름다운 인간승리라거나 인간적인 면모 등 긍정적인 모습으로 독자에게 인식되기를 기대했으리라. 단기간에 이처럼 사적 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관용도가 낮아진 까닭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서 우리 사회가 점차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법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에 주목하고 싶다. 그리고 이는 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지는 현상과 동전의 앞뒷면 관계이므로 최근의 검찰사법개혁 요구와도 맞닿아있다. 폭력성은 인간에 내재되어 있다. 다만 문명사회는 필요에 따라 권력을 통해 폭력의 발현을 억압하기도 하고, 또는 이를 정당화시켜 권력과 결합하거나 조직화한다. 가령 군사독재 정권은 안보 위협을 이유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했고, 마찬가지로 민주화운동은 독재 타도를 외쳤기에 화염병을 던져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정당한 폭력도 실제로 행사되면 구성원의 폭력 민감도를 낮추고 관용도를 높인다. 쉽게 말해 폭력은 전염된다. 가령 안보 위협을 이유로 군대 규율을 강화하면 가혹행위 등 부조리한 군기문화가 생기고, 공산국가에 맞서 스포츠로 국위 선양의 성과를 내려면 체육인은 맞으면서 운동을 하게 된다. 이처럼 실제 행사되는 폭력 앞에 가해자와 피해자, 목격자와 방관자 모두 폭력에 둔감해지며, 이는 다시 각자의 일상 속에서 주취폭력, 가정폭력이나 체벌처럼, 또는 이를 경험한 자녀의 학교폭력처럼 세대를 따라 전이되어 내려가면서 폭력에 관대한 사회가 만들어진다. 반대로 폭력을 수단으로 저항할 대상이 줄어 더 이상 폭력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 정당한 공적 권위가 사적 폭력을 제어하여 현실에서 폭력이 발현되지 않는 사회는 곧 법치주의가 뿌리내려 평화와 안정을 구가하는 사회다. 이 때 구성원들은 더 이상 사적 폭력을 관용할 필요 없이 이를 제어하는 공적 권력의 정당성만 신경 쓰면 족하다. 이번 학폭투 사태를 보면서 검찰과 법원에 대한 개혁 요구가 함께 떠오르는 이유다. 사적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사람을 강제로 조사하고 잡아 가두는 공적 폭력을 행사하는 기관의 공정성이 한층 강하게 요구됨이 당연하다. 폭력이 만연하던 시절에는 법원, 검찰이 인권의 보루였을지 모르나, 이제는 그 폭력성에 시민들이 위협을 느낄 만큼 우리 사회가 진보한 것이다.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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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21 17:29

공간과 사람

정은실 사회활동가 건축학과 5학년, 한 학기를 남겨 두고 학교를 떠나 청년 교육 및 공연 기획 활동을 시작하며 서울로 올라가 7년을 살았다. 학교를 떠날 당시 지속 가능한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친환경 건축, 재생, 회귀 등이 건축공모전의 단골 주제였다. 그때, 반복적으로 들던 의문이 있었다. 새로 짓기 위해 기존 환경을 계속 파괴하면서 친환경을 말할 수 있는 건가?, 아파트 단지, 공원의 조경과 동선계획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 싶은 길로 가는데 어떤 제안이 필요할까?, 일괄 반복적으로 지어지는 아파트의 공간 구획을 사람들은 잘 따르지 않는데,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해결되지 않은 의문과 고민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적절한 답을 찾지 못했고, 졸업과 취업이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건축은 점점 멀어져갔다. 자연스레 건축에 대한 열망도 약해지고, 그 약해진 틈으로 청년의 희망과 공감이라는 변화의 물결이 스며들어와 결국 청춘콘서트를 진행하며 전국을 순회하고 서울에 올라가 활동을 이어갔다. 그 물결 속에서 헤엄치길 7년. 문득문득 미처 마치지 못한 한 학기의 아쉬움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결국, 오래 해오던 일을 멈추고 학교로 돌아가 남은 학기를 마치고 늦은 나이에 건축설계사무소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주민자치센터, 유치원, 생태관광센터, 변전소, 의학복학관 등 다양한 성격의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면서 어느새 마음의 붙임이 생겼다. 이 건물을 직접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언제 듣는 걸까? 어떤 것이 필요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과정이 왜 없는 걸까?. 물론 누가 봐도 아름답고 편리한 공간을 계획해 모두가 만족하는 공간을 뚝딱 만들어내면 좋겠지만 그런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사용자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공건축물의 대부분의 건축 과정은 그렇지 못했다. 필요한 건물의 성격과 규모만을 가지고 현상설계라는 시스템을 통해 사용자는 배제된 채 예산과 스페이스프로그램을 두고 점, 선, 면이 요동치며 수없이 바뀌고 나를 괴롭히다가 마감을 위한 마감을 하기 일쑤였다. 결국,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으로부터 퇴사를 결정하게 됐다. 우리는 공간이 주는 영향력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변화를 원할 때, 오랜만에 집 청소를 하고 가구 위치를 바꾼다. 집이 답답하면 카페에 앉아 공부나 일을 하며 이마저도 충족하지 않을 때, 기분전환을 위해 밖으로 나간다. 공간은 발견의 영역이다. 우리는 집을 청소하고 구조를 바꾸기 전에 어떤 곳에서 내가 편안하다고 느끼는지 어떤 곳에서 집중이 잘 되는지를 천천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바꿀까? 이전에 내가 어떤 공간에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각자의 하루를 돌아보며 무엇을 했는지 떠올릴 때 필연적으로 공간이 배경으로 자리한다. 집에서, 학교에서, 공원에서, 직장에서, 때로는 우주에서?. 공간은 모든 것에 가장 기초하는 것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사람은 늘 공간 안에서 생활하고, 공간의 영향을 필연적으로 받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공간을 구성하고 새로운 관계와 질서를 고민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만든 공간이 어떤 제약과 틀로 우리의 삶의 관계와 질서를 바꿔나갈지 고민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공간의 주체인 사용자를 가장 중심에 둬야 한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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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14 16:47

아카이브: 좌초되거나 유영하거나

이주경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 주임) 아카이브의 출발점은 각각 다른 시간의 결속에서 이곳저곳 흩어진 자료들을 한데 모으는 것으로 시작된다. 셀 수없이 많은 내용들이 다양한 매체와 방법으로 다루어지는데, 자료의 물결 속에 때론, 어떤 것들은 좌초되어 주최자(아카이브)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하고 가라앉기도 한다. 한편, 아카이브 작업은 다양한 방식을 취하게 되는데, 공적인 자료도 있지만, 사적영역의 자료들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고 오는 방법에 있어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생기고 여러 과정을 거치며 중첩되어 흐려지거나 모호해 지기도 한다. 아카이브(Archive) 의 어원은 라틴어 아르키붐(archivum) 인데, 아르키붐은 시작, 원천, 기원을 뜻하는 아르케(arche-)로부터 유래된 용어이다. 아카이브라는 용어는 약 17세기에 형성되었고, 현재는 기록의 개념과 자료의 보관소라는 장소의 개념도 함께 가지고 있다. 요즘은 아카이브라는 용어는 상당히 역할에 한정짓지 않고 여러분야에 광범위하게 적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인물 아카이브에 한정해 이야기해 본다면, 한 사람의 일생 도처에 산재해 있는 이미지, 텍스트, 기념물, 채록자료 등을 시대와 연결 지어 주제의 층위별로 정리하여 보관하는 작업을 우리는 흔히 아카이브라고 한다. 인물 아카이브는 주로 예술계에서 원로작고 예술인을 대상으로 많이 진행된다. 국내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문화예술아카이브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이 대두되며, 시각, 공연, 문학 분야에서 실로 다양한 방법으로 예술 아카이브 사업이 진행되었다. 기초재단의 다양한 아카이브 사업부터 국립예술자료원, 국립극장 공연예술아카이브, 국립현대미술관 시각예술 분야 아카이브 구축 등 국립기관도 나서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나는 올해 지역의 원로?작고 예술인들의 예술활동을 연구하고 기록하여 현시대의 언어와 공유 콘텐츠로 개발해 재조명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 사업은 백인의 자화상이라는 사업으로 2012년부터 시작해 올해 10주년을 맞이하는 사업이다. 전주 지역의 문화예술 지형도를 그리고 전주예술의 뿌리를 찾아간다는 의미에서 그만큼 공공성과 책임감의 측면에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예술인 아카이브의 어떤 부분들이 유영해야할지 많은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예술아카이브에서는 기본적으로 분야의 특성에 따라 주요 주제 선정이나 하나의 새로운 콘텐츠로 변환되는 방법론이 다른데, 모든 기록 자료가 아카이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2020년 국내 아카이브 연구에서 김연희 연구자는 할 포스터의 아카이브 충동(An Archive Impulse)을 분석해 방대하게 나열된 자료 속에서 아카이브가 결코 총체성을 보여주거나 기억을 그대로 소환하는 작업은 아니란 것을 주장한다. 이제 우리는 예술아카이브에서 자료의 수집, 방법, 시스템,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창조적 자료의 변주로서 영민하게 구조화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자칫 수면위로 올라와야 하는 자료가 1차 자료 수집이라는 초기작업 안에 느슨해진 아카이브 경계의 선에서 좌초되어 본질이 흐려지거나 논점 자체가 없어짐을 조심해야한다. 올해는 백인의 자화상을 통해 그동안 조명된 전주의 예술인들을 돌아보며 10주년을 맞아 예술인 아카이브의 긍정적인 유영의 방법을 찾아보려 한다. /이주경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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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07 17:05

우리는 모르지만, 안다

안선우 문화예술공작소 작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코로나19로 우리의 일상이 바뀔 수 있음을. 마스크, 비대면, 거리두기는 배고프면 밥을 먹듯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코로나19 초기에는 금방 끝나겠지하는 희망으로 버텼다. 코로나가 시작된 지 한 해가 지났다. 코로나는 더 심해지고, 끝은 보이지 않는다. 누구도 코로나19 이후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르지만, 안다. 우리의 일상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코로나19가 끝나더라도 새로운 전염병이 위협할 것임을 우리는 안다. 바이러스와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서라도 인류는 변해야만 한다. 변하지 않으면 인류는 종말을 맞을 것이다. 영국의 인류학자인 제인 구달의 말이다. 그녀는 코로나19로부터 인간이 얻어야 할 가장 큰 교훈은 인간과 자연과 동물의 새로운 관계 맺음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자연을 존경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 존중과 존경은 인간이 사는 도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코로나19로 도시에서의 이동과 접촉에 제한되면서, 도시의 변화와 방향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바이러스의 유행을 대비하기 위해 앞으로도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화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는 인간과 기업이 지구를 보호하기 위한 새로운 도전을 도시에서 만들어볼 기회이기도 하다. 이제 도시의 철학이 바뀌고, 도시의 공간도 재편될 것이다. 자연과의 공존을 위한 인간의 새로운 도전으로 도시의 재발견과 재배치가 이루어진 도시. 자연과 더불어 살려는 도시만이 인간이 살고 싶고, 머물고 싶은 도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갈림길 위에 서 있고, 역사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 도시는 기억이 쌓인 공간이다. 추억과 역사는 그 도시의 특별한 힘이다. 특별한 힘은 도시의 미래를 결정한다. 오래된 미래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역설적인 제목이다. 스웨덴의 인류학자 노르베리 호지의 책이다. 역설적인 제목에는 작가가 말하려는 핵심이 담겨있다. 그녀는 과거에서 도시의 새로운 내일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도시가 발달할수록,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과 다시 연결되기를 원한다. 삶의 속도를 늦추며, 인간적인 커뮤니티를 만들기를 선호한다. 잘 보존된 자연과 잘 지켜진 전통만이 도시가 택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길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코로나19는 인간의 삶에도 질문을 던졌다. 눈 비비면 달라지는 세상. 작은 틈도 견디지 못해 스마트폰을 들여다봐야 하는 세상. 빨리빨리를 외치며 달음질치는 세상을 살던 인간은 코로나19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아왔는지, 관계의 쉼표를 가지지 못했는지 아쉬움만 남는다. 더 많이, 더 빠르게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코로나19는 느리게, 조금 적게라는 선물을 주었다. 우리는 몰랐지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인류 문명의 발달은 동물의 희생과 자연의 파괴를 수반했다. 자연은 원했다. 인간이 생산과 소비를 낮추고, 자연과 공존할 것을. 인간은 깨닫지 못했다. 결국, 코로나19는 깨닫지 못한 무지한 인간을 향한 자연의 경고였다. 자연의 주인이라 생각했던 인간은 코로나19로 지금, 처절하고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있다. 자연의 공격과 인간의 방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모르지만, 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패배할 것임을. /안선우 문화예술공작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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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31 17:07

사면권의 지분

박지원 변호사 여당 대표가 전직 대통령 사면을 적절한 시기에 건의하겠다고 밝힌 뒤 한 차례 돌풍이 일었다. 배경에 대한 논란이 난무했지만, 아직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니라는 대통령의 입장 표명에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깊은 고민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처럼 사면은 분명 다시 점화될 의제다. 헌법 교과서에는 사면권의 한계가 적혀 있다. 권력분립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국가이익과 국민화합 차원에서만 행사되어야 하며, 당리당략에 따라 정치적으로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기술되어있다. 헌법 교과서를 현실에 비추어 읽다보면 공허할 때가 많은데, 사면에 관해서는 교과서에조차 역대정권이 필요에 따라 무분별하게 시행해왔다고 적혀 있기에 공허함이 더했다. 아무래도 헌법학의 이론과 성과는 사면권에 지분이 없는 모양이다. 사면의 명분이 가진 논리적 타당성은 어떨까. 이번 사면 제안은 다음과 같은 3단 논리다. A) 코로나는 전쟁에 준하는 국난이다, B)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 통합이 필수적이다, C) 따라서 사면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 전직 대통령을 사면하면 국민통합이 이루어지고, ㉯ 그리하면 코로나가 극복된다는 전제가 참이어야 한다. 여기서 코로나를 IMF 외환위기로 바꾸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의 명분과 같아진다. 과연 위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해서 국민통합이 되었는지, 덕분에 외환위기가 극복되었는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다만, 저 정도 논리정합성을 수긍하는 포용력이라면 A) 올림픽위원인 이건희 회장을 사면하면 2018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다, B) 그리하면 국가브랜드 및 국제외교 역량이 강화된다, C) 따라서 국익을 위해 이건희 회장을 사면해야 한다는 논리가 차라리 더 설득력 있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여당 대표는 사면 제안이 당리당략이 아닌 소신이라 발언했지만, 반대 여론을 맞이한 당 최고위는 당사자의 반성과 국민적 공감대가 우선이라 했다. 법 이론과 명분이 사면에 갖는 지분이 미미하다면 개인의 소신, 당사자의 반성, 국민의 공감 여론의 비중은 어떨까. 1997년 대선을 앞두고도 여당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건의했다. 당시 반대 여론은 55~74%, 찬성 여론은 33~40% 정도로 현재에 비해 결코 반대가 적지 않았으나, 김영삼 정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회만 되면 임기 내에 사면을 단행할 태세였다. 당사자의 반성과 국민적 공감대는 없었지만,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는 모두 경쟁적으로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김대중 후보는 화해는 사과해야 이뤄지는 것이지만 용서는 다르다. 반성하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응할 수는 없다는 소신을 내세워 동서화합의 이미지를 선점하였으며, 마음이 급해진 이회창, 이인제 후보도 곧바로 사면을 건의하고 긴급 기자회견을 하는 등 상대의 화합 이미지를 희석시키려 했다. 우리 기억 속 사면은 늘 명목상 대주주인 주권자의 의지가 정치공학이라는 체에 걸러지고, 여론조사라는 반죽으로 짓이겨진 채 소신과 명분, 반성과 용서 등의 고명을 얹어 내어진 패스트푸드 같았다. 혹자는 추운 날씨에 촛불을 든 시민들이 만든 성과가 정치권에 의해 허물어지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리라 전망하지만 더운 날씨에 최루탄과 맞선 시민들이 보는 앞에 3당 합당과 전, 노 사면이 이루어진 것 또한 우리 역사다. 언제고 다시 불거질 사면 논의를 통해 그 지분관계가 얼마나 변했는지 지켜볼 일이다.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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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24 16:54

공간에 대하여

정은실 사회활동가 지역에서 공간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며 잠시 대학 시절을 돌아본다. 건축과에 다니기 전 공간이란 개념은 곧 건축이었다. 부모의 생업으로서 건축을 먼저 접했기에 공간이 무엇인지 보다는 집 짓는 일의 건축으로 공간을 이해했다. 그러나 대학교 2학년 때 주거를 주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공간감이라는 좀 더 구체적인 단어로 공간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주거 프로젝트는 내가 살 집을 계획하기 위해 집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이끌었다. 각자가 살고 있는 이미 존재하는 집을 살펴보기도 하고,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집을 떠올렸을 때, 자신에게는 분명하게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이미지나 느낌이라는 이름으로 공유하기도 했다. 이어 앞으로 내가 살 집은 어떨지에 대해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내가 생각하는 집과 친구가 생각하는 집은 다르다는 것, 친구 미주의 집에 대해 내가 갖는 이미지와 미주가 갖는 이미지도 다르다는 것, 미주의 방에 대해서도 미주 엄마와 미주 동생, 미주가 갖는 느낌은 다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같은 공간이라도 누가 바라보냐에 따라 다른 공간이었다. 그 결과, 내가 살 집은 각각의 공간을 그대로 유지하는 형태를 띠었다. 거실과 부모님 방, 내 방, 오빠 방, 작업공간 등이 다 독립된 실로 만들고 지붕 없는 계단과 다리, 복도 등으로만 연결했다. 내방에서 거실로 갈 때, 비나 눈이 오면 우산을 써야만 했다. 게다가 평면상으로 거실은 원형, 부모님 방은 정사각형, 내방은 원형, 오빠 방은 사다리꼴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담당 교수님께서 자신의 컨셉을 1차원적으로 풀어내는 학생의 어리석은 행태를 교수님이 그리는 완성체로 가기 위해 깎아내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더 의미를 두고 무엇이든 해보게끔 하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 교수님의 교육방식이었겠지만, 사실은 나를 반쯤 포기했던 것인가 조금 의심스럽기는 하다. 그래도 덕분에 조금 특별한 시선으로 공간의 행간을 더듬어 보게 됐다. 공간은 사람에게 공간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 의미라는 안경을 통해서 우리가 머무르는 모든 공간에는 색깔이 생긴다. 이 색깔은 인상, 이미지, 분위기, 톤, 공간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자, 눈을 감고 자신이 머물렀던 공간들을 가만히 떠올려보자. 집, 학교, 회사, 친구 집, 집 앞 슈퍼, 동네병원, 공원 등등. 각각의 공간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나 사건, 그 사건이 주는 느낌 등이 있다. 이 느낌은 같은 공간을 두고도 각각이 느끼는 바가 다르다. 병원에 대해 어떤 친구는 힘없는 회색빛 흰색이라고 표현하고, 어떤 친구는 붉은빛 검은색이라고 표현했다. 앞선 친구는 어릴 적 어머니 대신 키워주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1년 동안 병상에 누워 계셨던 영향으로 병원은 밝고 깨끗한 흰색이 아닌 회색이 도는 힘없는 흰색의 이미지가 남았다고 한다. 뒤의 친구는 대학병원 레지던트를 그만두는 시기에 환자들의 피와 버거웠던 수련의 생활들이 스치며 핏빛 같은 검붉은색의 영향으로 불그스름한 검은색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고 말했다. 이렇듯 똑같은 공간이라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그들의 경험의 시간이 더해지면서 공간의 인상은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경험의 폭이 넓을수록 공간을 즐기고 영유할 수 있는 폭도 넓고 다양해지는 것이다. 공간 경험의 폭을 넓히기 위해 지역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정은실 사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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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17 16:50

취향의 발견

이주경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 주임) 요즘 나는 취향의 발견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연말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황금 같은 휴식에 마음을 편히 놓지 못한 건 지난 몇 년 간 이어오던 일상이 멈췄을 때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작년 한 해 우리는 겪어본 적 없는 공포를 마주해야 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고립된 일상으로 살아가기를 요구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나는 그저 혼란스러운 상황에 장기적인 계획 실천을 위한 걸음을 떼기보다 작금의 현상을 받아들이고 기존의 이슈와 가치들을 재점검하는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사회현상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실천 가치보다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에게 주어진 고립된 쉼 앞에 나에게 집중해보고자 했다. 사실, 그것 말고는 이 시국에 딱히 여행을 간다거나 영화나 전시, 공연을 보러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늦잠을 자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며칠이 흐르고,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새삼 무미건조한 나의 주변과 일과 관련된 물건들 말고는 재미를 느끼며 할 수 있는 것 즉, 취향이 반영된 것이 거의 없는 내 사적 공간구성에 적잖이 놀랐다.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이었나 싶은 마음과 함께, 나에겐 조금은 당황스러운 이번 시간이 취향에 대하여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된 듯하다. 잠시 취향에 관한 연구에 대해 간략하지만 흥미로운 내용을 언급해 볼까 한다. 사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복잡다단한 선택지 앞에 서게 되는데, 100% 그렇지는 않지만, 개인의 선택을 좌우한다고 여겨지는 것은 취향이다. 취향은 1970년대, 90년대 이후 그리고 현시대까지 각각 다른 시각과 의미로 규정되어 왔다. 시대별 대표적인 이론을 소개하자면,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다른 사회 계층끼리 차별화되는 문화 소비패턴에 의해 취향이 구별된다고 보고 이를 아비투스 개념을 이용해 취향의 동질성은 계층에 속한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90년대 이후 취향을 통해 계층 간 구별되는 지점을 중요한 포인트로 여기지 않으며, 소위 고급 취향과 저급 취향을 나누는 기준이 무의미함을 여러 연구자가 주장하기도 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기존의 이론들의 주장하는 특정 계층만의 취향으로 여겨지는 콘텐츠들이 그들만의 전유물로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현대 사회에서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및 다양한 플랫폼의 확산으로 콘텐츠가 개인에게 공유되고 소비되는 방식은 이전 세대에 비해 확실히 접근성이 높아졌다. 이로 인해 이제 취향은 특정 집단을 규정짓는 패턴이 아닌, 개인의 성향에 대한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의 다양화 안에서 생각 볼 이슈가 있다. 이번 글에서는 분량 관계상 이 내용을 자세히 다룰 순 없지만, 우리는 큐레이션이 지나치게 발달한 알고리즘 환경에서 가진 취향이 과연 온전히 그 개인의 기호에 의해 형성된 취향일지 아니면 어떤 선택하고 볼 수 있는 권한조차 단절되어 특정 취향을 강요받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한다. 좋은 취향을 가진다는 건 단순히 운 좋은 발견일 수도 부단한 노력일 수도 있다. 취향을 그저 받아지는 정보에 의해 수동적으로 형성되는 것에서 벗어나 온전히 진짜의 취향을 발견하는 노력을 해보는 건 어떨까. /이주경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 주임) △이주경 주임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문화예술경영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1.10 16:54

아직도 안하세요?

안선우 문화예술공작소 작가 요즘 돈을 벌었으니, 밥을 사겠다며 친구가 카드를 내민다. 넌 아직도 안 하냐며 긁듯이 묻는다. 수다 떨 듯 가벼이 다가온 말은 묵직하게 가슴을 두드린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해봐야 한다는 조바심. 그것이 원인일까. 요즘 이거 안 하는 청년들은 없단다. 일 이야기를 하다 누군가에게 또 듣는다. 안 작가님, 아직도 주식 안 하세요? 2020년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코로나19는 평범하고 당연했던 우리의 일상을 앗아갔다. 세계인구의 1% 이상이 코로나19에 감염됐고, 180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 언택트로 송년을 보내고 신년을 맞이했다. 친구들과 다시 학교 운동장에서 뛰놀고 싶다는 아이와 다시 가게 문을 열고 싶다는 아버지의 2021년 새해 메시지는 음울하게 들려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가고 싶던 채용 공고가 뜨지 않는다. 높고 좁아진 취업문은 바늘구멍이 아닌 나노구멍이라 부른다. 2021년 고용시장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뉴스에 청년들의 한숨만 깊어진다. 2020년, 20~30대 청년의 빚이 급하게 늘어났다. 모든 연령대에서 가장 높다. 청년들은 빚을 내어 불안한 미래를 주식으로 채운다. 주식설명회에 청년이 대거 몰리고, 주식 관련 유튜브로 하루를 시작하는 청년이 많아졌다. 일자리는 없지만, 시간과 스마트폰이 있기에 청년들 사이에 투자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말한다. 취업한 청년들 사이에서도 주식은 뜨겁다. 월급은 티끌이고 주식은 대박이라는 말과 퇴사해서 큰돈을 만졌다는 말이 떠돈다. 빚투(대출을 통한 주식 투자)와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로 한주라도 움켜쥐려 애쓴다. 필자는 학사는 국문학을, 석박사는 경제학을 전공했다. 전공이 바뀐 이유는 신문이었다. 경제면을 아무리 읽어봐도 자신이 한국인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경제학에 도전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기 전에는 주식 프로그램 진행자를 꿈꿨다. 서울에서 주식 프로그램 진행자를 만난 적이 있다. 강원도로 캠핑도 다니며, 전문투자자들과도 어울렸다. 대화의 주제는 주식이었다. 필자를 한동안 지켜보던 주식 진행자는 만약 자신이 다시 태어난다면 주식이 아니라 기타를 치겠다고 말했다. 너는 아직 젊은 청년이니, 예술을 하라고 했다.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대학원 세부 전공으로 금융을 선택했다. 투자 관련 수식을 공부하고, 논문을 쓰며, 금융 관련 연구직을 희망하기도 했다. 경제학도 치고 주식 안 하는 사람 없다지만 필자는 한 번도 주식을 사 본 경험이 없다. 그렇게 박사를 수료하고, 극작가가 되었다. 현재는 글쓰기를 업으로 삼아 평생을 살아보겠다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주식에 투자하지 않는가.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주가가 오르내리는 시장에서 소신을 잃지 않는 투자자가 될 자신이 없었다. 같이 살면 투자요, 혼자만 잘살면 투기다. 주식시장에서 같이 잘 살자고 투자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주식투자란 동업자를 선택하는 것이고, 평생 함께할 회사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투자자의 말을 이쯤에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20대에게 남은 유일한 사다리가 주식이라고 외치는 청년들에게, 그만두라고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주식투자로 청년의 일상마저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당연하고 평범했던 일상이 코로나19로 무너졌던 것처럼 말이다. 모두 입장했습니까? 아직도 들어가지 못한 1인이 남아있습니다. /안선우 문화예술공작소 대표 △안선우 대표는 판소리극 화용도와 창작음악극 여인, 1894, 꽃 찾으러 왔단다 등의 극본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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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0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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