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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예찬] 나의 이웃은 적이다?

나는 공동체를 경험해 보지 못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공동체라는 말이 참 어렵고 어색하다. 왠지 내 사생활이 침해당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이렇게 어색하고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사는 빌라 이웃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른다. 지나가다 얼굴을 마주치지만 인사도 거의 하지 않는다. 이상하게 이웃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냥 불편하다. 대학가 50개의 원룸이 있는 대형빌라에 거주하면서도 이웃은 적이었다. 복도에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그냥 괜히 불편했다. 이러니까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이 발생했다. 집에서 날카로운 뚜껑에 발이 크게 베였다. 피가 생각지 못하게 많이 나와 너무 무섭고 당황스러웠다. 집에 응급치료물품이 없었다. 누구도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다. 이웃은 모두 적이었다. 결국은 수건으로 한참 동안 피를 막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발바닥을 다쳐 신발을 신고 치료용품을 사러 갈 수도 없었다. 또, 지금 사는 빌라에 많은 문제들이 있다. 빌라 앞에는 늘 분리되지 않고 막 버려진 쓰레기들로 가득하다. 음식물 쓰레기통 안에는 배달용기와 비닐이 늘 함께 있다. 심지어 빌라가 경매에 올랐다. 그 결과 관리비로 사용하던 인터넷과 TV가 끊어졌다. 하지만 이 빌라에 사는 나를 포함한 누구도 함께 소통하며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내가 공동체를 처음이자 어색하게 경험한 적이 있다. 아프리카 카메룬에서 KOICA봉사단을 할 때였다. 작은 마을에서 거주할 때, 수도로 말없이 출장을 갔었다. 며칠 출장을 다녀와서 보니, 이웃들이 많이 서운해했다. 왜 출장을 가는데 아무 말도 없이 갔냐고, 인사도 없이 가면 어떡하냐고 했다. 굉장히 당황스러웠고 어색했다. 공동체라는 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그렇게 2년 가까이 살았다.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결론적으론 참 좋았다. 집에 먹을 밥이 없어 저녁에 이웃집에 가서 현지식을 얻어먹었다. 다음날 입을 행사복이 찢어져 밤에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찾아가 옷 수선을 부탁했다. 수도로 출장을 가기 전에는 모든 이웃들과 포옹을 하고 갔다. 돌아올 때면 수도에서만 살 수 있는 과일과 초콜릿을 사서 이웃들에게 나누어줬다. 현지인들에게 시달려 힘든 일이 생길 때면 저녁에 이웃집 군인 아저씨에게 찾아가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며 털어놓기도 했다. 이제는 전주라는 도시에 살게되면서 새로운 공동체 개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해라고 생각지 않으면서, 내 이웃들과 소통하고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살아가 보고 싶다. 급하게 약이 없으면 빌리고 싶고, 때론 음식이 많이 남으면 서로 나누고 싶다. 1인 가구가 사기에 매번 부담스러운 야채 뭉치들도 함께 사서 나누고 싶다. 어느 명절연휴 시작 날이었다. 나에게 이웃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당연히 내가 사는 빌라의 이웃들은 이웃이 아니었다. 늘 반갑고 친절하게 맞아주시는 집앞 편의점 사장님과 미용실 원장님이 진짜 이웃이었다. 인사드려야 할 높은 어른들에게 선물하지 않았다. 작은 과일선물세트를 사서, 편의점 사장님과 미용실 원장님께 드렸다. 편의점 사장님은 자리를 옮기셨지만, 그 동네에 갈 때면 늘 들린다. 아직도 반갑게 안부를 주고받는다. 미용실 원장님은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주라고 하신다. 별거 아니지만, 이런 따뜻한 이웃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 보고 싶다. 우리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만 같다. 김민재 전주지속가능발전협의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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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20 18:44

[청춘예찬] MZ세대를 거부합니다

오늘(14일) 진행하는 전북대학교 입학식 취재를 준비하다 보니, 체감하지 못했던 ‘2025년’이라는 존재가 드디어 피부에 와닿는다. 대학생이 된 이후부터는 신년이 다가옴을 1월도, 학기가 시작하는 3월도 아닌 2월에 느낀다. 매년 2월 중순이 되면 입학식을 비롯한 신입생 환영 행사들이 연이어 시작하기 때문이다. 신입생들 역시, 1월은 드디어 성인이 됐다는 오묘한 감정으로 보내고, 굵직한 교내 행사가 진행되는 2월이 돼서야 진정으로 성인이 됐다는 것을 체감할 것이다. 어느새 익숙해진 이 공간에 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다 보니, 문득 ‘나’라는 존재를 돌아보게 된다. 어쩌다 보니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학생’이라는 역할과, 책임을 중시하는 ‘기자’라는 역할을 입학과 동시에 얻게 되면서 생성된 이중적인 자아에 대해서다. 그렇기에 최근 나이에 맞지 않게 떠오르는 생각이 종종 떠오르곤 한다. 예를 들면 “조직 생활하려면 본인을 조금 굽히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거 아닌가?”, “요즘 애들은 고생하는 걸 너무 싫어하네” 따위의 생각들이다. 물론 개인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잃으라는 말도 아니다. 다만, 자신이 맡은 일이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응할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지면서 학보사에서 일하다 보니 여기저기 돌아다닐 기회가 많았다. 이런 조건 덕분에 나이에 비해 다양한 인간상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상대를 무시하는 사람, 사실관계도 제대로 파악 못 했으면서 일단 큰소리부터 치는 사람, 거만한 사람 등 주변을 살피기보다 본인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적잖게 만났다. 하지만 그중 가장 불편하고 불쾌한 인간들은 무언가를 실행하려고 노력조차 안 하는 부류와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부류였다. 흔히 미디어에서 표현하는 MZ세대의 모습이자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표현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들을 보고 ‘역시 MZ세대 특징’이라며 지적한다. 즉 일부로 인해 전체가 평가받는 참담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미디어에서나 볼 법한 MZ세대의 모습을 실제로 보니 생각의 전환이 시작됐다. 일상 속 예시를 들면 친분이 있는 누군가가 무거운 짐을 들며 끙끙대더라도 빤히 쳐다보고 있다거나, 조금만 일이 어렵고 힘들면 더 해보지도 않고 쉽게 포기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예의를 강조하고, 근성을 중시하는 나 혼자만 이상한 사람이 된 거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특이하게 부모님의 말씀이라면 잘 듣지 않던 자녀들이 “거짓말하면 안 돼”라는 부모님의 말씀만은 너무 잘 듣는 거 같다. 이에 따라 ‘선의의 거짓’이라는 말 역시 사라지는 거 같다. 돕기 싫으면 안 돕고, 하기 싫으면 “그래도 해볼게요”라는 말 대신 “안 할래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때론 자신의 본성이 아니더라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려면 본성처럼 보이려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다. 나랑 안 맞는 거 같아도 한 번쯤은 가면을 쓸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사회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요즘 어떠한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대를 배려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하는 시대이다. 본인 개성을 먼저 강조하기 전,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건 어떠한가? 이예령 전북대신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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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3 18:28

펜 한자루에 청춘을 담고-2

인천 영종도는 11월 중순이면 눈이 흩날리고 12월엔 바다가 얼어붙었다. 공항 화물터미널에서 보내는 겨울은 따스한 남쪽 사람인 나에겐 혹독하기만 했다. 공항 활주로를 쉼 없이 오고 가는 지게차들 속에서 두툼하게 방한복을 껴입고 일해야 하는 길고 시린 겨울은 내 몸과 마음을 더욱 지치게 했다. 남초 회사에서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는 엄청난 결함에다가 지연, 학연, 무엇하나 공통점이 없었던 나는 동료들과도 친분을 쌓기 힘들었고, 아웃사이더로 찍혀있었다. 작업을 위해 오가는 활주로에 소복이 쌓인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면 학창시절 별다른 고민 없이 숨 쉬듯, 밥 먹듯 당연하게 해왔던 것, ‘그리고 싶다’라는 맹목적인 욕구가 솟구쳤다. 며칠 밤낮을 고민했을까? 결국 나는 영종도의 활주로를 뒤로하고 친구와 가족들이 있는 고향 전주로 내려왔다. 인천공항에서의 숱한 내 고민과 자괴감이 무색하게, 이룬 것 하나 없이 빈손으로 돌아온 백수 아들의 등을 힘껏 안아주시는 부모님의 품은 그 무엇보다 큰 위로이자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봄이 오고 있었다. 돌아온 고향 전주에서 나는 한동안 멍 때리듯 그림을 그렸다. 전주의 멋진 건물들, 명소, 어릴적부터 좋아했던 장소들을 그리고, 또 그렸다. 오랜만의 ‘그리다’라는 행위는 나를 무아지경에 빠지게 할 만큼 행복하게 했다. 그림을 완성할 때마다 페이스북에 일기 쓰듯 올렸고, 친구들과 지인들이 그런 나를 따스하면서도 단단하게 응원해주었다. ‘그림을 그리며 살아야겠다’는 나의 결심은 갈수록 확고해져갔다. 그때 즈음일까? 무심하게 지나쳤던 고향의 작은 한옥마을은 ‘가장 한국다운 도시 전주’의 대표 관광지로 변모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전주는 예능프로그램의 핫플레이스였고 누적 관광객이 천만 명이 넘었다는 뉴스도 단골 보도가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 미술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호기심에 찬 눈으로 여기저기 기웃대던 풍남동, 교동, 오래된 골목길을 미디어를 통해 새롭게 만나는 기분은 묘하기만 했다. 한옥마을 붐은 개발로 이어졌다. 비포장도로와 쓰러질 것 같이 낡은 판잣집들이 멋들어진 보도블럭과 반짝이는 새 기와를 얹은 한옥으로 탈바꿈했다. ‘맛의 고장’이라고 널리 알려진 전주의 이미지에 맞춰 ‘한옥마을 먹방’도 대박 행진이었다. 곧 한옥마을의 메인거리에는 전국 팔도의 먹거리를 판매하는 상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반면, 관광기념품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심지어는 서울 인사동에서 판매하는 기념품들을 전주에서 만날 수 있을 정도였다.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주여행을 기념할 수 있는 전주한옥마을 엽서를 만들어야겠다!’. 나는 그동안 꾸준히 그렸던 그림들을 살펴 전주한옥마을의 12곳을 골랐다. ‘전주한옥마을 전경, 경기전, 풍남문, 전동성당, 전주향교 대성전, 전주향교 명륜당, 오목대 전망대, 전주동헌, 전주풍패지관, 전주사고, 남천교, 한벽당’. 계절마다 다른 색과 향으로 가득한 매력적인 열두 곳을 매일, 매주 돌아보며 연구하고 그려냈다. 그리고 1년간 인천공항에서 눈물 콧물로 모은 돈을 다 털어 엽서를 제작한 것이다. 엽서 한 장 한 장 투명봉투에 담아 정성스럽게 스티커 작업까지 끝낸 나는 떨림과 기대로 부푼 마음을 안고 한옥마을 인근에서 열리는 프리마켓에 입점 등록을 했다. 화창한 하늘과 따스한 햇살 가득 희망에 찬 날이었다. 박성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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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06 15:46

불편한 임시동맹을 위하여

12·3 내란 사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집회 현장으로 나왔다. 정치 고관여층 인사나 진보성향의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평소에는 집회에 잘 참여하지 않고 정치에도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광장에 모였다. 2030세대의 여성들이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집회에 나와 특히 주목을 받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이화의 학생들이 두려움을 잊으려 불렀다는 “다시 만난 세계”가 만들어낸 세대 간의 융합은 최근 집회에서 절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중장년층이 케이팝을 배우고, 청년층은 오래된 민중가요를 배웠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메시지를 들고 집회에 참석했다. 깃발은 문화가 되어 서로를 고양했다. 시민들의 자유발언 주제도 넓었다. 계엄의 부당함과 현 여당에 대한 규탄을 포함하여, 정치개혁, 페미니즘, 환경, 퀴어 등, 이전 박근혜 탄핵 집회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주제를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불편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집회는 하나의 통일된 메시지를 내보내야 효율적이라거나, 이익집단들이 기회주의적으로 큰 집회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다. 간단히 말하면 대의에 방해된다는 말이다.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반대편에서 윤석열 탄핵 반대를 외치고 있는 사람들이 대의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이지, 내가 동의하지 않는 문구의 피켓을 들었다고 훼방꾼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 집회에서 무지개 깃발을 들고 있을 때 “나는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으니, 깃발을 내려라.”라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대의가 될 수 있는가. 그들이 말하는 “대의”는 한껏 쪼그라들어 있다. 마치 내란수괴와 일당들이 합당하게 처벌받으면 버려질 것처럼 조잡해 보인다. 그렇게 해서 어떤 세상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박근혜 탄핵 당시의 그 결여가 지금의 윤석열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놓치고 있다. 광장에서 불편한 메시지를 던지는 사람들은 다음 세상이 어때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용기 있게 말하는 이들이다. 세계의 미래를 제시한다는 면에서 대의라는 단어는 이들에게 더 잘 어울린다. 다양성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에 있어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 사회는 단일한 목소리가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사회이다. 다양한 의견과 관점이 존중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더 나은 해결책을 찾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단순하지 않다. 복잡하고 다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따라서 집회에서 이렇게 다양한 주제와 메시지가 나오는 것은 오히려 우리 사회를 위해 권장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정권 심판이 아니라, 나아가 더 많은 존재가 보호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집회 현장은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진격하는 열병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다양한 의제들이 연결되고 경합하는 각축장이 더 바람직하다. 당신의 불편함은 당연하다. 그게 집회다. 피켓을 통일하라고 하지 마라. 무지개 깃발을 내리라고 하지 마라.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귀를 막지 마라. 집회에 나온 옆 사람이 당신과 똑같은 사상을 공유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당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배신감 느낄 필요도 없다. 우리는 같은 적을 두고 있지만 같은 편은 아니다. 언젠가 당신과 치열하게 싸울 것이다. 당장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임시동맹일 뿐. 천기현 시집책방 조림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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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30 16:44

소나기가 내린다고 꼭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화면에서만 보던 난민캠프를 가보았다. 40도가 넘는 기온에 수키로미터 물을 뜨러 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아프리카 우간다의 흙먼지 가득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들었던 말이다. “소나기가 내린다고 꼭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벌써 8년전의 이 말은 나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내 인생을 가르치고 있다. 소나기가 내리는데 왜 꼭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이 소나기를 맞고 있다. 소나기를 맞는 그 사람은 우산 살 돈이 없고, 비를 피할 곳이 없어 소나기를 맞고 있었다. 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 우산을 씌워줬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사람이 아니다. 다시, 한 사람이 소나기를 맞고 있다. 역시 우산 살 돈이 없고, 비를 피할 곳이 없었다. 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찾아왔다. 그리고 우산을 씌워주지 않았다. 그냥 그 옆에 가서 함께 비를 맞았다. 함께 비를 맞으며 그 사람의 기분을 잠시나마 함께 느껴주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며, 때로는 시원하게 비를 맞으며 바보같이 함께 웃기도 했다. 나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바로잡고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소나기를 같이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척척박사가 되어 우산을 씌워주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의 이야기, 슬픔, 고통, 어려움을 짧지만 같이 느끼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소나기를 함께 맞는 바보같은 사람이 진짜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아프리카 카메룬으로 떠났다. 마을사람들과 수백마리의 개미에 온몸을 물어 뜯기기도 하고, 말라리아에 걸리기도 하며, 뜨거운 날씨에 농사를 짓고, 배우고, 양동이에 물을 뜨러 가는 세찬 비를 함께 맞았다. 마을 회의를 처음 했던 날이 생각난다. 나와 한국을 소개하며, 이 마을에서 함께 일하고 싶다고 하였다. 발표가 끝나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물어보는 질문이 있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 뭘 해줄거야?” 나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때 했던 답은, “나는 외국인입니다. 만약 카메룬에서, 이 마을에서 전쟁이 나고 전염병이 돌고 문제가 발생하면 제일 먼저 도망칠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것을 먹고,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배우겠습니다.” “그 이후에 여러분들과 함께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다행이 마을사람들이 웃으며 동의했다. 그리고 오늘부터 너는 우리의 가족이자 친구라고 해주었다. 그 이후 20개월 동안 마을사람들과 함께 소나기를 맞으니, 너무 자연스럽게 보였다. 마을엔 물이 없었고, 수익도 없었다. 말로만 듣던 세계 최하위 빈곤층이 여기에 있었다. 물이 없으니 농촌마을에서 농축산업을 확대할 수 없었으며, 수인성질병 등 다양한 문제를 계속해서 낳고 있었다. 그렇게 두 번째 회의를 했고, 진짜 가족과 친구가 된 마을사람들과 나의 의견이 일치했다. 단순한 우물 사업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우물을 만들고 관리하며 이 소중한 물을 이용해서 마을을 발전시켜볼 계획을 세웠다. 소나기를 함께 맞았기에 진짜 마을 사람들이 원하는 프로젝트를 함께 만들 수 있었다. 나는 소나기를 맞는 일이 아직도 어렵지만, 기후위기 시대, 불평등,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이 사회에서 바보같이 소나기를 계속 맞을 것이다. △김민재 연구원은 아프리카 2개 국가에서 KOICA 봉사단원으로 근무하고, 기후위기,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민관협력 정책사업을 추진하며 청년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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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23 18:10

두려워도 한 발짝

대학가의 비좁은 한 자취방, 어두운 공간 속 휴대전화 불빛은 오늘도 환하게 켜져 있다. 부지런히 하루를 보낸 후,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 휴대전화를 보는 것은 이제 하루 끝의 행복으로 자리 잡았다. 어쩌면 ‘부지런히’라는 단어를 붙임으로써 나의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누워 꽤 오랜 시간 동안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보다 보면 어느새 훌쩍 지난 시간에 ‘헉’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작디작은 고철 덩어리에 붙잡혀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잠을 청해야 한다는 자신에게 실망한 것이다. 그렇게 휴대전화를 충전하고 눈을 감으며 다짐한다. “아, 내일은 진짜 10분만 보고 자야겠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책을 열 페이지라도 보고 자야지. 아직 1월이니까 올해 진짜 달라질 수 있어.” 1월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으로 우글우글 모인 집합소 같다. 누구는 담배를 끊겠다고 몇 년을 거듭하며 마음을 다잡고, 누구는 연애하겠다고, 또 누구는 올해 저축을 잘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올해 1월, 나는 성인으로서의 세 번째 삶과 맞닥뜨렸다. 스무 살의 1월은 생각보다 아쉬운 입시 결과에 쌉싸름한 감정이 절대적이었고, 스물한 살의 1월은 조금씩 대학에 적응해 가는 나의 모습에 만족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스물두 살의 1월은 조급한 마음으로 가득한 듯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이 대기업에 취업하고, 거금을 들여 유학길에 나서는 모습을 보면 나 자신이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 사람들처럼 작아진다. 특히 밤이면 밤마다 보는 인스타그램이 이런 나의 소심한 마음을 더욱 자극한다. 물론 인스타그램에 무언가를 올리는 것은 인간의 과시 욕구에 기저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보다 훨씬 잘난 타인을 비교하다 보면, 마음 깊은 곳에 큰 구멍이 뚫려 허한 감정을 숨길 수 없게 된다. 그렇게 감정은 허하지만, 영혼만큼은 수분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바닥 끝으로 내려가고, 또 한없이 내려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쿵’하고 무언가에 부딪힌다. 그럼,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저 사람들을 마냥 부러워하는 것이 큰 의미 있는 시간일까?” 얼마 전, 스무 살 1월에 기록한 수첩을 읽어봤다. 나의 수첩은 단순 일기장 개념이 아니다. 그 당시 느꼈던 감정과 목표 등을 적어 놓은, 이 세상에서 그 당시의 나를 가장 잘 아는 ‘이예령 스무 살 종합 백서-1월 편’인 셈이다. 읽다 보니 고작 한 달의 기록임에도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내리는 감정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꽤 흥미로웠다. 어느 쪽은 이 세상에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단어는 전부 모아놓았고, 또 어떤 쪽은 ‘희망’으로 가득했다. 그때는 심각한 고민이었지만, 이제 와서 보니 이런저런 혼란스러워하는 감정들이 전부 귀여웠다. 이에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걱정들도 몇 년 후면 다 귀여워질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기 가득했던 영혼의 솜이 보송하게 마른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앞서 언급했듯, 1월은 새로운 생각과 마음가짐의 집합이다. 여러 생각을 하나, 둘 정리하다 보니 스물두 살 1월에 느끼는 조급함이 나쁜 거 같지는 않았다. 조급함을 느낀다는 것은 본인이 타인으로부터 자극을 받았다는 것이고, 이는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을 뒤따라갈 수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감정을 절대 가벼이 하지 않고 두려워도 한 발짝 나아갈 것이다. △이예령 편집장은 전북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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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16 15:38

펜 한자루에 청춘을 담고-1

2024년 12월, 설렘과 두근거림을 담은 힘찬 발걸음으로 서울 테헤란로 빌딩 숲을 지났다. 인스타그램&페이스북을 운영하는 글로벌 소셜 네트워킹 그룹 메타(Meta)에 크리에이터 작가로 초대를 받았던 때이다. 초대장 인증으로 다소 철저한 이중 경비를 지날 때의 벅참도 떠오른다.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 답게 컬러풀하고 감각적인 인테리어에 작지만 예쁜 케이터링 서비스까지. 그 자리는 그룹 메타(Meta)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그림, 사진, 글 크리에이터 작가 15명 초대해 네트워킹을 하는 자리였다. 100만 팔로워 작가부터 50만, 30만 팔로워에 빛나는 작가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자니, 마치 연예인이라도 만난 듯 신이났다. 나는 그들에 비하면 병아리 수준이었지만 내 작품과 나를 알아보는 분도 계셨고 메타 매니저들의 적극적인 응원과 호응 덕분에 긴장으로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이 녹아내렸다. 행사장 정면의 대형 LED 화면에 초대받은 작가들의 프로파일이 멋지게 펼쳐지고, 자신의 작업과 더불어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 작가들이 서울,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반면, 지방 그리고 전주에서 활동하는 내가 제일 멀리서 상경한 작가가 되어버렸다. 덕분에 올라오느라 고생했다라며 인사치레를 계속 받았고, 또 관광 도시 전주의 유명세와 한옥마을 이야기로 화제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고즈넉하고 조용한 여행지를 떠올리며 나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인 전주와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내 삶을 낭만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메타에서의 몇 시간은 마치 꿈처럼 지나갔다. 작가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있었던 웃픈 과거, 치열한 현재, 흥미롭고 새로운 미래들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시 전주로 향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내 두 팔 안에는 메타에서 받은 굿즈로 가득한 선물 보따리가 그 신기루 같은 몇 시간을 증명하고 있었다. 문득, 나의 지나온 시간들과 현재, 다가올 앞날은 무엇으로 증명해 낼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시간을 거쳐 현재의 내가 되었는가? 나는 미대를 졸업했다. 하지만 전공과는 무관한 항공회사에 취업했다. 화물선 카고파트에서 일하게 된 나는 남자들밖에 없는 화물터미널에 머물렀다. 가까운 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고 그렇게 나의 영종도 섬 생활이 시작되었다. 직장은 3교대 근무로 일주일마다 낮과 밤이 바뀌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단지 이 다람쥐 쳇바퀴 같은 반복 작업을 매일 같은 위치에서 20년 넘도록 해야 한다는게 흠이라면 흠일까. 물론 월급이야 오르겠지마는 어디 대기업 놈들이 월급을 그냥 주던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일의 양과 강도로 사람을 잘도 길들이더라. 신입인 나는 황금 같은 휴일 이틀을 주말이 아닌 평일에 쉬어야 했다. 덕분에 먼 고향 전주에 다녀오는 것도, 서울에서 일하는 친구들 얼굴 보는 것도 포기. 혼자서 공항철도를 타고 홍대나 서울역을 거쳐 안국역을 자주갔다. 안국역에 내리면 인사동과 삼청동, 북촌을 둘러보기가 좋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관광지인 만큼 외국인이 참 많았다. 기념품 가게 또한 넘쳐날 만큼 많았는데, 하나같이 같은 공장에서 제작된 똑같은 사진, 엽서 정도가 다였다. 이때부터 였을까? 무언가 그려야 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들었다. △박성민 작가는 전북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양화과 석사 과정 중에 있으며, 전주신시가지에 '작가의 취향' 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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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9 18:36

육체노동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

나는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책방은 일곱 평 정도의 아담한 크기이다. 대부분의 책이 시집이고 나머지는 시인들의 에세이나 시론집 등 있다. 책방에서는 책을 정리하고 청소하고 사람들에게 소개할 책을 고르며 책방을 돌보기도 하지만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읽고 쓰면서 보내고 있다. 멀리서 보면 낭만적이다. 구도심의 작은 책방에서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보내는 일상.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부러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도 즐겁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책방으로는 생활에 필요한 만큼 돈을 벌지 못한다. 현재 책방 수입은 대부분 책방 운영비로 다시 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나는 매일 새벽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바로 택배 하역이다. 택배 물류센터에서 화물차로 들어오는 택배를 컨베이어에 올리는 단순한 일이다. 보통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한다. 조금이라도 더 자는 것이 좋기 때문에 아침은 먹지 않는다. 곧 땀을 흠뻑 흘릴 것이기 때문에 씻지도 않는다. 이십 분 정도 차를 운전해서 전주 장동의 한 택배 물류 센터로 간다. 차에서 내려 오 분 정도 스트레칭을 한다. 스트레칭이 끝나면 물류센터로 들어가 안전 장구들을 착용하고 컨베이어 라인 앞에 선다. 잠시 후 여섯 시 반이 되면 물류센터에 벨이 울리고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나는 택배를 가득 실은 화물차 안으로 들어가 물건을 컨베이어 벨트에 올린다. 계속 같은 것을 반복한다. 무거운 물건도 있고 가벼운 물건도 있다. 한 시간마다 오 분에서 십 분 정도 휴식한다. 근무 시간은 들쭉날쭉하지만 보통 네시간으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몸이 힘든 작업이다 보니 체감상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노래나 시를 떠올리며 일하거나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 더욱 그렇다. 근무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씻고 점심을 먹고 책방으로 출근한다. 책방 사장의 일상과 택배 하역 노동자의 일상이 잘린 듯 나누어져 나의 하루를 이루고 있다. 누군가는 빨리 물류센터에 출근하지 않아도 될 만큼 책방의 매출 올랐으면 좋겠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조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가 은연중에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시간은 버려지는 시간이라는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에 언짢았다. 또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슬펐다. 하지만 두 일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하나의 몸으로 양쪽 일을 하고 있는 이상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어느 한쪽이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다. 그 단적인 증거가 이 글이다. 이십 킬로그램짜리 쌀가마니를 들고 내려놓으며 머릿속으로 이 글의 초안을 상상했다. 독자가 읽기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정도의 생각이 드는 미지근한 글이 되기를 원했다. 반대로 책방에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물류센터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짐이 컨베이어 벨트에 내릴 때 나는 쾅쾅거리는 소리, 절인 배추 박스의 무거움, 잠깐의 휴식 시간에 마시는 믹스커피. 현실적으로도 하역 노동은 나와 책방을 지탱해 내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생활에 필요한 돈을 벌 수 있게 해준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고, 근육이 붙었다. 이것만으로 만성적인 우울함이 많이 나아졌다. 어떤 시간은 다른 시간을 위해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도 나를 긍정적으로 만들어줄 요소는 분명히 있다. 나는 언제나 나이기에. △천기현 대표는 전주에서 시집책방 조림지를 운영하고 있다. 천기현 시집책방 조림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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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2 17:01

웹툰 콘텐츠가 지역에서 살아남으려면

웹툰시장은 대형 플랫폼, 네이버나 과거 다음 포털사이트에서 적극적으로 콘텐츠사업을 확장시키면서 점점 커져갔다. 그러면서 이말년이나 기안84같은 작가들이 공중파 방송에 나오면서 일반인들에게도 웹툰과 웹툰작가란 인식이 확장되고 유행하면서 웹툰시장은 더 인기를 얻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코로나시대가 열리고 외부활동이 어려워진 사람들은 웹툰이나 OTT같은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콘텐츠들이 더욱 사랑을 받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웹툰시장은 확장됐고, 개인작가들보다는 빠른 시간안에 안정적으로 작품을 뽑아 낼 수 있는 스튜디오들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어느순간부터는 연재되는 작품들의 대다수가 스튜디오 작품들이 다수가 되어버렸다. 이 상황은 분명 장·단점이 있다. 과거에는 개인작가로 웹툰작가가 되려면 모든 공정을 이해하고 완성도 있는 원고를 만드는 수준이 되어야 가능성이 생길 정도로 문턱이 높았던 반면, 현재는 한부분만 어느정도의 수준만 된다면 스튜디오로 취직해서 웹툰 관련일을 하며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게 장점이다. 하지만 단점으로는 결국 직원의 형태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작품에 제대로 올리기 쉽지 않고 작품을 만드는데에 어느 한 부분의 역할일 뿐 권리를 갖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또, 웹툰 스튜디오들이 지원과 여러 정보교류가 용이한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어서 작가지망생들은 지방을 떠나 어쩔 수 없이 낯선 수도권에 올라가서 생활하며 일을 해야하는 상황이다. 웹툰작가의 큰 매력이라면 일하는 환경과 시간 등을 작가가 알아서 취향껏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것인데 이 매력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 지방에서도 충분한 인재가 나오고 활동할 수 있고, 지방경쟁력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업체(스튜디오)를 꾸릴 수 있는게 이 웹툰 일의 매력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생활하고 있는 현재의 전라북도는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나의 첫 번째 목표는 육성 및 취업형 스튜디오를 차리는 것이다. 웹툰작가로 진로에 관심있는 학생들이나 등단에 진지한 작가 지망생들을 교육하고 그 안에서 충분한 인재를 골라 작품활동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굳이 수도권까지 가서 타향살이를 하며 빠져나가는 생활비와 정신력을 보호하고 지역,고향에서도 작가로써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고 싶다. 물론, 나도 작품활동을 하는데에 양질의 작가분들을 모시고 쓸 수 있어서 충분히 시너지 효과를 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나 혼자 스튜디오를 차리고 움직인다고 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나도 스튜디오화를 시켜 많은 작품들을 계약하고 연재할 수 있는 역량을 만들어내야 한다. 또, 스튜디오에 들어와 육성할 수 있는 인재들의 인프라가 필요하다. 다행히도 전주대학교에 24년부터 웹툰학과가 신설되고 현재 1학년이 다니고 있다. 그리고 전라북도 관련 기관에서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이 제안은 나와 작가지망생들의 문제와 성과일뿐 아니라 지역자체의 문제와 성과로 이어질 수 있고 젊은 인재들이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 좋은 제안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광주와 순천 등 각 지역에서는 스튜디오들이 자리잡고 교육과 취업의 선순환으로 아주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는 걸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한다. 더 늦기전에 나도 노력할 것이며 다른 관계자 분들이나 관련 기관에서도 많은 관심과 적극적인 움직임이 있기를 바래본다. 홍인근 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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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26 18:38

책 속의 세계를 나누는 일

내가 운영 중인 책방은 정읍 유일의 독립서점이다. 책은 내가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서 들여놓는데 그 기준은 매우 모호하다. 최근의 개인적인 관심사, 사회적인 이슈, 계절의 흐름, 좋아하는 작가 또는 출판사 등등 일관성이나 장르의 구분이 따로 없다. 출판사나 유통사의 도서 유통에 대한 이해관계에 상관없이 책을 구비 하는 서점을 독립서점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책방은 꽤 독립적인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책방에는 ‘나도 책방을 하고 싶은데’ 하며 궁금한 것들을 묻고 가시는 분들이 종종 오는데 내 대답은 한결같다. 꼭 책방 여시라고 말씀드린다. 동종 업계 사람들을 늘리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큰 이유이다. 특히 정읍에 열고 싶다 하시는 분의 경우에는 더욱더 꼭 책방 여시라 강권을 하곤 한다. 정읍이 소도시이긴 해도 엄청나게 다양한 책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취향을 만족하기 위한 서점을 찾고 있을텐데, 정읍에는 하필 나 혼자 책방을 하는 바람에 나와 취향이 같지 않은 독자들은 가고 싶은 독립서점이 없는 불행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린이 손님 한 명이 원하는 로맨스 소설을 찾지 못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기껏 이 작은 책방엘 시간을 내어 찾아왔는데 한참을 서성이며 책을 고르다 이내 돌아가는 손님들을 보고 나면 더욱 다른 독립서점의 존재들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하지만 나의 필요와는 별개로 책방을 운영하고자 문의하는 분들의 주 관심은 대부분 경제성이다. 책은 소비자가격이 정해져 있고, 공급가도 정해져있다. 인터넷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서점이 같은 가격으로 판매하도록 되어있다. 많이 팔지 않으면 결코 높은 소득을 기대할 수 없다.한 달에 얼마 정도를 벌기 원하시냐고 여쭤보고, 그에 맞는 판매량과 매출을 말씀드리면 질문하신 분의 얼굴은 어두워진다. 책방주인마다 다르겠지만 책만 팔아서 유지하시는 분들도, 공간을 대여하거나 독서모임을 하거나, 나처럼 음료를 판매하는 분들도 계신다. 각자의 능력과 사정에 맞추어 책방지기의 삶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전략은 다양하지만 목적은 하나임이 분명하다. 책 속의 세계를 나누는 일을 멈추고 싶지 않아서 책방을 운영한다고 해도 넘치지 않을 것이다. 경제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책방지기의 역량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웃 도시 전주시의 경우 <전주시 지역서점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조례>가 시행되고 있다. 전주시는 전국적으로 인구대비 가장 많은 지역서점이 위치한 도시 중의 하나이고, 도서관 또한 그 못지않게 많은 수를 자랑한다. 다양한 테마의 작은도서관과 작은서점들의 상생을 위해 조례를 통한 정책들을 시행중이고, 전국 규모의 도서전과 국제 도서전을 개최하는 등 독서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조례와 서점 수의 상관관계는 우상향이다. 전국의 독립서점들이 늘 문닫는 소식을 알리는데 전주시의 독립서점은 줄기는커녕 폐점 없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전주시의 조례가 부럽기도 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수많은 작은 서점들의 존재가 너무 부럽다. 이들 독립서점들은 든든한 버팀목을 딛고 본래 독립서점이 가고자 하는 길을 걷고 있다. 다양한 책 속의 세계를 나누는 일을 다양한 목소리로 하고 있다. 정읍시에서도 가능할까. 나도 언젠가는 동료를 가질 수 있을까. 요원한 그 날을 기다린다. 유새롬 작은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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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9 18:06

홍시가 익어가는 자리

오랜만에 엄마 밥을 먹었다. 배가 고프다는 말에 “별 건 없는데.”라며 배추와 시래기를 넣고 할머니가 준 된장으로 끓인 된장국을 식탁에 차려줬다. 곁들여 나온 김치는 군산 친구네서 받아 온 김치란다. 외식이 잦은 나를 0.5인분으로 계산한다면, 해봐야 1.5인분의 식탁을 차리는 엄마는 올해 김장을 고사한 대신 이모와 친구의 집에서 받아 온 김치들로 한 해를 날 예정이다. 3개의 집에서 각각 온 김치들은 청주, 부안, 군산의 지역 특색만큼 맛이 다르고 빛깔이 다르다. 이번 김치는 어떤 맛일까, 생각하며 먹었다. 아직은 풋내를 풍기는 매콤한 김치와 함께 겨울의 재료로 만들어진 된장을 느끼고 있으면, 계절이라는 게 촉각뿐만 아니라 미각에서도 느껴지는구나 확신하게 된다. ‘엄마’는 어쩌면 이렇게 계절마다 상차림을 바꿔서 먹지. 혼자 살 땐 느끼기 힘들지만, 엄마 집에서는 집안 곳곳의 물건과 식탁에서 계절을 실감한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는 이미 땡감이 홍시로 익어가고 있는지 오래다. “네가 좋아하잖아.” 나란히 놓여있는 땡감 3개를 보며 아는 체를 하자 엄마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단단하던 감이 볕에서 말랑하게 무르익는 것처럼 마음이 물러진다. 계절의 흐름 속에서 계절의 간식과 풍경을 맞이한다. 당연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요즘엔 당연한 풍경이 아니었구나 싶다. “봄이라서 냉이로 된장을 끓여봤다.”, “겨울 무는 달아서 무채 해 먹으면 맛있다.”, “5월에 나는 양파로 김치 담그면 시원하고 맛있단다.”, ‘무슨 계절엔 무엇이 몸에 좋단다.’ 등등. 옛날처럼 아궁이를 떼고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집이 아닌 네모난 시멘트 상자 속에서 살지만, 삶에 담긴 풍습은 여전히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진다. 삶 속속히 담긴 풍습과 얕은 믿음이 삶을 풍요롭게 지탱함을 느낀다. 생일을 이야기할 때 12월 22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팥죽을 먹는’ 혹은 ‘밤이 가장 긴 동짓날’에 태어난 탓일까. 아니면 내가 24절기를 구구절절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라 그럴까. 여름엔 열무와 같은 여름의 채소로 배를 채우고, 여름의 물건으로 더위를 나누고, ‘염소 뿔도 녹는 대서’라는 말로 여름을 나듯 겨울엔 냉이와 같은 겨울의 채소로 식탁을 차리고, 겨울의 물건으로 추위를 견디고,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소설’이라는 말로 겨울을 대비한다. 할머니가 만들어준 된장으로 밥을 먹으면서, 시장에 나가 메주를 사와 옥상에서 잘 씻어 볕에 말린 장독대에 된장을 담갔을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고 ‘맛의 비법을 배우러 가야 하는데.’라며 조바심도 내고. 친구 A의 집 베란다 캣타워에 매달려 있는 풍경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풍경소리는 액운을 풀어주지.’라는 말을 떠올리며 평온을 바란다. 풍습이 내게 스며드는 게 지겹거나 고리타분하다고 느껴지지 않고 삶을 충만하게 영위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느낀다. 이렇게 어른이 되는 걸까. 사회에서 말하는 ‘어른’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과거 크게 느껴졌던 어른이란 게 별거가 아니구나 싶어진다. 하지만, ‘별일 없이 산다’는 말이 대단한 말이 듯이 ‘별거가 아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큰 의미이다. ‘자기 몫을 하고 살며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자신만의 가치와 방식대로 스스로 영위하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한 모습이다. 어느 계절엔 시래기를 베란다에 잘 말려뒀다가 친구들이 놀러 오면 무 조림이나 국을 끓여 먹으며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다. 계절에 맞는 식탁을 차려 음식을 나눠 먹고, 생활 방식을 계절에 따라 바꾸는 것이 익숙하고 능숙해지면서‘어른’이 될 수도 있겠다. 식탁 위에 차곡차곡 쌓인 계절들을 음미하면서 말이다. 김나은 여성주의문화기획사 우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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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3 13:13

‘언젠가’에서 한발 나아가기

한 해의 끝자락,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 늘 정신없이 몰아치던 연말 일 더미에서 벗어나, 올해는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 보니 시간적 여유가 많아졌다. 늘 바빴던 연말과 달라 조금 낯설기도 한 올해 연말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까 고민하다 지난 몇 년간 마음의 여유가 없어 하지 못했던 일들을 11월부터 하나둘씩 시작해보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좋아하는 영화 수록곡을 피아노로 연주해 보고 싶었던 마음을 들춰보았다. '언젠가'라는 말 뒤에 숨기 바빴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고민한 시간이 무색하게도 학원에 등록하고 나니 그 자체로 이미 목표를 달성한 것 같았다. 왕초보 기초반부터니 원하는 곡을 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테지만 첫발을 내디뎠다는 것이 뿌듯했다. 그간 나를 위해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많이 미루어왔다. 소속되어 일할 땐 근무시간과 환경이 여의치 않다고, 제대로 하지 못할 거면 하고 싶지 않다는 어설픈 완벽주의가 발목을 잡았다. 핑계는 쉽고 시작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내 상황에 변동이 생기면 지속이 어려울 텐데 하는 막연함도 컸다. 피아노 학원 등록은 그러한 핑계들로 벗어나 무언가를 시작하는 새 마음 그 자체였다. 피아노 학원을 등록하고 나자 시작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혹시나 하는 생각 자체를 두려워 말자는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기회가 된다면 해야지 하던 공부를 시작할 기회가 생겼다. 얼마 전의 나라면 고민하다 공부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었을 것이다. 첫발을 내딛자 다음은 확실히 수월했다. 그렇게 공부도, 시간 되면 다시 해야지 하던 봉사활동도 정식으로 시작하게 됐다. 물론 지금이 전과 비교해 시간 여유가 많아져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작년처럼 일하고 있었더라면 피아노가 아니라 피가 말리는 시간과 싸움 속에 살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내 계획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환상에 가까울 것이다. 올해 상황이 달라지며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반대로 재정적으로 불안정해졌다. 그로 인해 일 인분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지 회의감이 들기도 했고, 괜스레 초라해지는 나를 마주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포기해야 하는 것, 포기되는 마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시작하자, 다음을 위해 준비하고 성장하는 사람이라는 용기가 채워진다. ‘언젠가’로 미루어두지 않는 것, 그 ‘언젠가’로부터 한 발짝 나아가는 것이 새해를 준비하는 마음에 걸맞다는 생각이 든다. 거창하지 않다도 좋다. 책장에 쌓인 책 한 권을 읽기 시작하거나 주변에 전할 크리스마스 카드를 손으로 써보는 것도 좋은 시작이 되지 않을까? 한 해를 잘 보내주고 새해를 시작하는 기쁜 마음으로 무엇이든 시작해보자. 이 지면을 끝으로 청춘예찬의 연재를 마무리하게 됐다. 나의 고민과 생각의 조각들을 나눌 수 있어 감사하고 동시에 부끄럽기도 했다. 부족함이 많은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전한다. 모두 평화롭고 충만한 연말이 되시길! 조아란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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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5 17:06

난 웹툰 작가이다 4

여러 사건들과 시간을 지나 네이버에서 연재를 시작하게 됐다. 작품에 많은 준비도 했었고, 어느 때보다 상기된 상태로 연재에 임하게 됐다. 연재가 시작되고 한달이 지날때쯤 우리 작품은 연재중인 카테고리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게 됐다. 대략 1달정도 유지하다가 순위가 조금 떨어졌지만, 그래도 10위권 안에서 계속 유지를 하며 연재를 했다. 10위권 안이라고 하면 뭐 대단한가 생각이 든다면 지금 네이버웹툰에 들어가서 요일마다 작품수가 몇 개가 있는지 세어보기 바란다. 그 안에서 10위권 안으로 유지한다는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1위에서 금방 떨어졌지만, 상위권 유지에 우리는 매우 기뻐하며 연재를 이어가고 있었다. 연재가 1년이 안될때쯤, 연말에 어머니와 통화를 하게 됐다. 마음 안에 “내 노력의 결실이 이제 조금씩 맺어지려나봐. 엄마, 새해에도 복 많이 받고 조금만 기다려”란 말을 안고 어머니와 통화하던 중에 어머니가 굉장히 힘 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나 암인가봐..” 대략 멍해지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있을때는 어머니를 모시고 대학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와 있었다. 가족은 나밖에 없고 다리하나를 잃으신 불편한 몸이시기에 내가 온전히 케어를 맡아서 해야했다. 여러번의 검사, 항암, 수술, 등..난 늘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갔고 입원했을땐 병원에서 몇일을 병간호를 하며 웹툰 연재를 위한 작업을 해야했다. 최선, 정말 열심히 했지만 원고의 퀄리티는 떨어질 수 밖에 없었고, 작품의 순위와 인기는 점차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 항암으로 같이 입원한 채로 작업을 하고 있을때였다. 같이 일하는 형의 여자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형이 뇌출혈로 쓰러져서 병원에 가는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난 어머니 간병중이어서 바로 가볼 수 없었고, 내 아내에게 부탁을 했다. 대신 가봐달라고. 형은 응급수술 후 중환자실에 있었고 아직 코로나로 인해 병원출입이 힘들때여서 아내도 나도 한참을 형을 볼 수 없었다. 연재는 당연히 휴재를 해야만 했다. 둘이 분업하던 것을 바로 내가 소화하기도 어려웠고 당장 대신 할 어시스턴트를 구하기도 어려웠으니 말이다. 4개월정도의 장기간 휴재였다. 그 동안 형은 힘든시간을 보내고 회복을 어느정도 한 후에 볼 수 있었다. 뇌출혈로 인한 왼쪽 편마비 상태였다. 재활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예전처럼 회복할 확률은 많지 않다는 말과 함께 그래도 기억이나 머리쪽에 문제나 장애가 안생겨서 다행이라는 형, 이 정도면 오른손으로 작업을 할 수 있다며 힘내보겠다며 멋쩍게 웃어보이며 말하는 형을 보는 난 가슴이 미어질 거 같았다. 힘들었지만, 형의 그런 의지를 살려주고 싶었다. 오히려 예전의 형처럼 대하려고 노력했다. 불필요한 동정으로 형을 깎아내리고 싶지 않았던거 같다. 그렇게 우리는 연재를 다시 시작할수 있었다. 하지만 장기휴재로 떠난 독자들, 내려간 순위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나마 중상위권까지는 다시 올려놨지만 그 이상은 힘들어 보였다. 개인작가인 우리가 최대한으로 할 수 있는 분량과 퀄리티는 대형 스튜디오의 퀄리티 높고 많은 분량의 작품들과 싸우기에 약했다. 그래, 어느정도 변명이다. 조금 낮은 퀄리티와 분량이더라도 그 안이 튼실한 알맹이라면 독자들은 아쉬움을 말하지언정 기대하며 떠나진 않는다. 그냥..좀 억울하고 분통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를 열심히 달려서 잘 이뤄보고 싶은 둘이었는데, 예상치 못하는 일들로 부딪히는 이 현실 때문에 작품에 온 힘을 다 못 실은게 참 억울할 뿐이다. 홍인근 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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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8 18:53

점과 선과 고랑

책방 앞으로는 아이들이 많이 지나다닌다. 학원 차를 기다리다 ‘지금 몇 시예요?’ 하고 물으러 들어오는 아이들, 책장의 그림책 표지에 홀려 엄마 손을 잡아끌다 저지당하곤 못내 발걸음을 옮기는 아이들, 길 건너에 친구를 두고 홀로 책방에 들어와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금세 ‘다시 올게요.’ 하고 나가는 아이들도 있다. 내가 책방을 연 이후 가장 기다리는 손님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와 자기만의 취향을 찾아가는 아이들이다. 어릴 적 정읍 시내에는 ‘개미음악사’라는 음반 판매점이 있었다. 시내에서 집에 오려면 개미음악사 앞에서 버스를 타야 했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늘 가게 쇼윈도에 붙은 포스터들을 살피거나, 새 음반의 출시 예정일이 전지에 빼곡이 쓰인 목록을 읽었다. 이름을 알고 있는 음악가의 소식은 기뻤고, 모르는 음악가의 소식이 쓰여 있으면 가게에 들어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샘플로 청음을 할 수 있는 음반은 청음도 해 보았다. 지금도 좋아하는 음악가의 새 앨범을 기다리는 마음은 비슷하지만 음악을 손쉽게 얻을 수 없던 그 시절에는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 출시를 앞둔 몇일은 개미음악사의 문턱이 닳도록 오가며 출시일을 확인했다. 문을 빼꼼 열고 아주머니께 ‘OO 앨범 언제 나와요?’ 물어보기 바빴다. 라디오나 pc통신을 통해 알게된 음악이 생기면 ‘이런 앨범을 구할 수 있나요?’ 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나의 음악 취향은 이 시기에 개미음악사에서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올해 처음으로 친구들과 손을 잡고 책방에 와서 책을 고르는 아이들을 만났다. 책방을 열고 기다린지 꼭 3년 만이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찾는 책이 없어도 좋고, 제목을 알아두었다가 인터넷으로 구매해도 좋다. 내가 개미음악사에 드나들며 알게 된 음악가들과 앨범을 떠올리면 책방에서 아이들이 만날 작가들과 책들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이 수줍게 책방의 문을 열고 들어와서 한참을 재잘거리며 고른 책들은 그들의 인생 어딘가에 조그마한 점처럼 남아 있기도 할 것이고, 가늘고 긴 선 혹은 굵고 깊은 고랑이 될 수도 있다. 책방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작은 도시일수록 직접 만지고 고를 수 있는 취향의 가게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정읍에 다시 왔을 때, 개미음악사가 없어진 자리를 보며 들었던 헛헛한 기분이 책방의 앞날을 계획하는데 꽤 많은 동력이 되었다. 작은 도시에서 아이들이 취향을 충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테지만, 훗날 어디에 가서든 내가 살던 곳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취향을 채울 수 있는 가게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정읍의 아이들이 책방을 취향의 공간으로 추억할 수 있도록 열심히 갈고 닦고 벼려서 녹슬지 않아야지 했다. 사실 욕심껏 말하자면 지금은 부모님 손을 잡고 오지만 언젠가는 혼자서 책방에 올 책방 키즈들, 타지에 있다가 본가에 오면 들르는 훌쩍 큰 아이들, 이곳을 오아시스처럼 찾는 어른들 모두를 기다린다. 모두들 정읍에서 보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도록 그치지 않고 작게 반짝이며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을테니 이곳에서 만난 작가들과 책들을 각자의 점으로, 선으로, 고랑으로 만들어 계속해서 이어가기를 바란다. 그만한 책방지기의 보람은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유새롬 작은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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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1 18:47

나의 집 (Home sweet home)

평소엔 관심도 없는 통감자는 휴게소에서 마주치면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떡볶이, 핫바 등 다양한 군것질 중 고민하다 동그란 통에 담겨 초록색 투명 녹말 이쑤시개가 꽂힌 통감자를 들고 차에 다시 몸을 싣는다. 차를 산지 겨우 2년하고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주행 누적 거리 100,000km를 채운 나에게 휴게소와 고속도로 풍경은 집 근처 동네의 풍경만큼이나 익숙하다. 심적 친밀도와 익숙함을 기준으로 동네라고 한다면, 군산에서 화천까지도 다니는 나에게 동네는 계절마다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오는 철새들처럼 넓다. 한 달에 많으면 5~6,000km를 주행하다 보면 ‘자동차’라는 기계 기술에 감동하게 된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하늘에 구멍이 난 게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로 쏟는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적지로 이동할 때면 나의 연장된 신체인 발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사방을 단단히 둘러싼 철로 나를 보호해 주는 ‘기계’가 생명처럼 느껴진다. 한낱 철 더미에 불과한 기계에 애칭을 만들어 부르고, 인생의 여러 중요한 목적지로 가는 길을 함께했다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며 자동차를 매각할 때 슬퍼지는 건 그런 이유일지 모른다. 날씨와 여러 외부 환경으로부터 오는 모든 일을 ‘함께’ 지나치는 자동차는 인생의 동행자이자 집이 되어주기도 한다. 한자 家(집 가)를 보면 지붕이 있다. 집을 그려보라고 하면 누구나 지붕과 벽을 그린다.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집’의 내부에 있는 것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단단한 외부선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빗줄기로부터, 매서운 겨울바람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든든함. 그래서 어떤 것이 ‘집’에 비유하게 될 때면 그 단단함과 안락함을 내포된다.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유행가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집이 되어주라.”라고 속삭이고 어떤 연애편지에는 “You are my home.”이라고 쓰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집은 명사로,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의 의미가 있지만 공간적인 의미를 넘어 공감각의 감각을 준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 내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곳, 어떤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곳, 바깥의 소란스러움을 잊을 수 있는 곳. 그 모든 의미가 섞여 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구성한다. 공간뿐만 아니라 사람이 집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순간이 집이 되기도 한다. [정기 휴무: 일요일. 단! 비 오는 날엔 열어요.]라는 사랑스러운 문구가 적혀있는 전 집에서 사장님의 손맛이 듬뿍 담긴 알타리 무김치에 라면을 안주 삼아 식탁을 둘러싼 친구들이 저마다의 취향에 맞춰 누군가는 막걸리, 누군가는 맥주 또 누군가는 소주를 각자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곳이 ‘집’이 된다. 그 어떤 외부의 평가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를 존재하게 해주는 내 집단으로서 인생의 지붕이자 벽이 되어준다. 새벽 도로를 달리며 마주하는 차를 볼 때면 저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궁금해진다. 각자의 사연과 시간이 휴게소에서, 고속도로에서, 카페에서 섞였다가 흩어진다. 모두가 어딘가에 닿기 위해서 출발해서 수많은 도로와 신호를 통과하여 도착을 하고, 다시 출발지로 돌아간다. 차에서 내릴 때면 가끔 ‘뒷자리 짐을 확인하세요.’라는 안내를 해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몇 시간을 달려 함께 이동한 그곳에 뭔가를 두고 내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몇 시간 동안의 여러 생각과 고민 그리고 순간들이 그곳에 쌓인다. 떠난다는 것은 떠날 곳이 있어야 가능한 말이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은 다시 돌아올 곳이 있기에 밖을 탐험할 수 있다. 그곳은 모두에게 집일 것이다. 김나은 여성주의 문화 기획사·우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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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14 17:29

깨지는 순간은 아름답지 않지만, 깨져봐야 아는 것

연말이 다가온다. 날이 추워질수록 자연스럽게 지나온 계절을 돌아본다. 내년이 되면 완주에 온 지 7년차가 된다. 3년차부터 사투리가 덜어지는 것 같더니 이젠 제법 완주 사람 같아보이나보다. 고향을 알고 놀라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많지는 않다. 7년을 앞두고 있지만 연차가 쌓인다고 완주살이가 쉬워지진 않는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귀촌한 친구들 중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얼마 전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귀촌 동기 친구와 만났다. 오랜만에 서로의 근황과 완주살이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 하는 일은 달랐지만 제법 비슷한 궤적 안에 살아가고 있었고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 시간 자체가 위로가 됐다. 몇 없는 귀촌 동지가 있다는 동질감을 느낌과 동시에, 소진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완주는 산업단지가 있어 젊은 사람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지역 활동을 하는 청년들의 수가 적은 편일 뿐 인구수로는 계속 증가추세다. 그러다 보니 직업으로 인해 이주한 친구들과 귀촌을 결심하고 이주한 친구들은 목적이 다르고 서로를 만날 접점이 없다. 요즘은 지자체별로 한달살이 등 귀촌을 장려하는 사업과 지원이 많아졌지만 그럼에도 귀촌은 여전히 보편적이진 않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이주한 친구들은 자기만의 색깔과 기준이 확실한 경향성이 보인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정도 깜냥은 있어야 자기 주도권을 가지고 낯선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기도 하다. 나는 후자의 이유로 완주로 왔지만, 성향은 전자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자기다움과 각자의 개성이 있는 공동체에서 묘하게 삐걱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함께 하며 배우기도 하고 즐거움을 느꼈지만 정작 그 안에서 나는 나다운 나, 온전한 내 모습이기 어려웠다. 각지에서 서로 다른 문화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당연하게 겪는 과정일 수도 있다. 서로에게 소중했고 많은 일을 함께 해온 공동체였던만큼 저마다의 노력을 들이부었지만 균열이 난 유리볼이 깨지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그제야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유리볼을 만들기 위해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여러개의 작은 구슬 같은 관계망이 지역 안팎으로 필요했음을 깨달았다. 추구하는 바와 지향점에 따라 함께 할 때 함께하고, 각자일 때는 각자로 서로의 선을 지키는 것이 서로다움을 존중하며 오래갈 수 있는 공동체라는 걸, 깨져보고 알게 됐다. 정답은 없다. 너에게 맞는 게, 나에게 맞는 것이 아니니. 그렇지만 ‘이럴수도 있구나’를 아는 건 도움이 된다. 인적 자본을 0에서 시작해야하는 귀촌 살이는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마음 편하게 지역과 서로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동기가 있다는 건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그렇게 마음을 내려놓고 나면 무게추는 다시 0에 맞춰진다. 친구에게 ‘우리 지치더라도 다시 끌어올리자’고. ‘이제 소진되며 나를 갉아먹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자’고. ‘7년, 10년 그 후로도 지속가능한 지역살이를 하자고 함께 하자’고 이 지면을 빌려 말하고 싶다. 내 스스로에게 하는 응원이기도 하다. 조아란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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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07 18:50

난 웹툰 작가이다 3

홍인근 웹툰 작가 저번 이야기에 이어서 공모전에 떨어지고 따로 만난 담당자와의 일도 마무리 지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작품을 기획해야 했다. 그러던 중에 광주진흥원에서 여는 웹툰제작지원사업을 알게 됐다. 형과 난 우리나라의 산신령이란 주제로 새로운 웹툰을 기획했다. 샘플원고와 캐릭터 시트와 기획서, 지원사업 발표를 위한 준비를 마치고 심사를 보러 갔었다. 10명이 심사위원이 앉아있었는데 그 중 한명이 인큐베이팅을 제안했던 웹툰 플랫폼 그 담당자가 앉아 있었다. 업계가 좁아서 뭐든 조심해야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좁을 줄이야. 심사를 마치고 집까지 걸어가면서 형은 얼굴이 죽상이었고, 나도 반 이상은 포기 상태였다. 몇일 뒤, 우리 예상과는 다르게 사업에 당선이 되었고 우린 생활비 걱정에서 다시 벗어나 작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 마운틴스쿨이란 제목으로 원고를 만들고 티스토어 웹툰 공모전에 출품을 해서 대상을 타게 됐다. 우리 웹툰 인생에 첫 이력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수상과 함께 티스토어에서 연재를 시작하며 웹툰작가로 데뷔를 할 수 있었고, 완결까지 낼 수 있었다. 이 후에 그슨대란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 꽤나 큰 공모전인 대한민국콘텐츠공모대전에서 웹툰부분 우수상을 타고 차기작으로 카카오에서 연재를 하게 됐다. 반년정도의 짧은 연재가 끝나고 이때부터는 오히려 걱정이 많아졌다. 매번 새로운 작품을 심혈을 기울여 짜서 어떻게 어렵게 연재까지 가더라도 반년 혹은 1년안에 끝나게 되고 다시 새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루틴. 새작품을 만들더라도 꼭 연재가 확정되지 않는 불안감, 연재가 되더라도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은 개천에서 용나듯 매우 어려운 확률성. 점점 나이는 먹어가는데 이런 불안정한 삶속에서 웹툰을 하는게 맞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그슨대를 끝내고 나서는 새작품을 만드는데 집중이 되지 않았다. 걱정만 끌어안고 술을 마시며 지낸 날이 꽤나 길었던거 같다. 그 고민에서 다시 내 어깰 두드리며 일으켜준건 같이 일하는 형이었다. 다시 한번 해보자고.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가다보면 빛이 보일거라며 날 다독였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형과 함께 다시 웹툰작업에 집중을 했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우리은행에서 운영했던 위비툰이라는 곳에서 작품을 연재하고, 서점에 에세이툰이라는 만화책도 출간을 했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작품을 준비하는 백수작가가 돼 있었다. 이때쯤 되니까 형과 나는 생각의 끝이 같았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웹툰 플랫폼에 들어가야 한다. 그 목표를 세우고 우린 다시 컴퓨터를 켜고 머리를 맞대어 회의를 하며 새 작품 구상을 시작했다. 우리의 기획안을 본 대형 기획사에서 계약을 하고 여러 수정을 거쳐 네이버에 투고를 했고 기다림의 끝에 우린 네이버에서 연재확정을 받아낼 수 있었다. 정말 꿈만 같았었다. 웹툰작가가 되는게 꿈이었지만, 작가가 되어보니 차기작을 할 수 있는 작가가 꿈이 됐고, 차기작을 하고 난 뒤로는 가장 큰 플렛폼에서 연재하는 작가가 꿈이 돼 있었다. 그 과정의 끝에 온거 같아 형과 난 정말 날 듯이 기뻤었다. 그렇게 22년 3월부터 괴이란 작품으로 연재를 시작하게 됐다. 그리고 알게 됐다. 이게 또 시작이라는 것을. 끝은 없었다. 인생에 굴곡이 있다는 말이 뼈저리게 통감이 됐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다. 홍인근 웹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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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31 18:58

망하지 않는다

얼마 전 sns에서 책을 한 권도 못 팔았다고 푸념을 늘어놓는 책방의 계정을 언팔로우 했다는 글을 읽었다. 안 팔릴게 뻔한 업종을 선택해놓고 안 팔린다고 징징대는 꼴이 보기 싫다는 내용이었는데 글의 대상인 책방주인이 안타깝고 애처로웠다. 대부분의 동네 책방들이 비슷하겠지만 나 역시 한 권도 못 파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서 어느 날은 괜찮다가도 어느 날은 막막함이 몰려온다. 동네책방이 뭐라고 왜 사줘야 하느냐 혹은 동네책방에 가서 살펴만 보고 인터넷으로 구매하면 된다는 댓글을 읽으니 조금 더 막막해졌다. 책은 공공재의 역할을 부여받은 상품이다. 어느 지역에나 주민들이 마음껏 무료로 책을 빌려볼 수 있는 공공도서관이 운영중이고, 지역의 동네책방들은 개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판매보다 공공도서관에 책을 납품하며 근근이 명맥을 이어간다. 그마저도 관행과 독점으로 소외되어 납품조차 하지 못하는 책방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런 동네책방들이 손님 없음조차 한탄하지 못하고 대형서점과의 생존경쟁을 해야 하니 막막하지 않을까. 앞으로 망하지 않고 오래오래 책을 팔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던 중에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소식을 알게 된 날 저녁에는 마치 내가 수상에 기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책방 손님들과 얼쑤절쑤 기쁨을 나누고,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물개박수를 치며 칭찬을 했다. 다른 물건과 책이 무슨 차이가 있길래 더 사주어야 하느냐며 책방 주인을 비난하던 목소리들은 이제 내 귀에는 안 들린다. 구차하게도 책의 가치와 동네책방의 필요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할 뻔했지만 이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한강 작가님 감사합니다. 노벨문학상의 권위여 영원하라. 그래서 노벨문학상 덕분에 동네서점의 책 판매량이 늘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지 3주 째, 이제야 대형서점에서 지역서점에 책을 공급하려 오프라인 매장의 판매를 제한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출판사와 직거래를 대량으로 하는 대형서점과 달리 동네책방은 중간 유통을 거쳐 책을 사입하고, 출판사와 직거래를 하는 경우에도 중간유통을 통해 사입하는 가격과 비슷하다. 심지어 대형서점은 지역서점의 중간도매상 역할을 한다. 대형서점은 뜻밖의 호재에 도매물량을 차단하고 온‧오프라인을 아울러 몇십만부씩 한강 작가님 책을 팔다가 그들의 공급을 받는 지역서점들의 항의에 못 이겨 지난 3주 간 독점한 물량을 이제야 나누어 주겠다 한다. 그것도 겨우 일주일 간 오프라인 매장의 판매만 제한한다고 하니 전국의 동네책방들은 대형서점의 오프라인 재고를 골고루 나누어 일주일간 판매대행을 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주시는 것은 감사히 받아야지. 다음부터는 제 때에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덕분에 책이 없어 몇주간 무수한 문의를 받았고, 사과를 했다. 감사하게도 많은 손님들이 책이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구매해 주셨다. 이래서 망하지 않는다. 대형서점이 나누어 주는 콩고물 때문이 아니라, 불편하고 느린데도 동네책방을 찾는 손님들 덕분에 망하지 않는다. 그런 손님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끊임없이 책을 읽고, 고르고, 갖추는 노력을 해야 망하지 않는다. 망하지 않아야 누구나 동네에서 슬리퍼를 신고 동네책방으로 책을 고르러 갈 수 있다. 유새롬 작은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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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24 18:20

전시장의 뒤편

김나은 여성주의 문화 기획사·우만컴퍼니 대표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물어오면 대답을 고르기가 어려운 때가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문화 기획’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기획자’라는 게 어딘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에야 “지역에서 문화 기획하며 출판사 운영하고 있습니다.”라고 매끈하게 소개를 하지만 한때는 그랬다. 기획자라는 게 어딘가 사기꾼 같은 면모가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종이에 담긴 계획과 청사진을 실현해 내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건 때로 계획보다 월등히 좋을 수도 있고, 계획된 바에 미치진 못했으나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과정임은 분명하다. 과업을 맡긴 사람은 기획자를 전적으로 믿고 맡기기에 신뢰의 무게를 견디며 자신의 맡은 임무를 해내는 것이 기획자인데, 이런 업을 하다 보면 매끈한 전시나 행사장에 가서 뒷면을 상상하게 된다. 그곳은 우스갯소리로 “전시 기획의 정수는 막노동이다.”라고 하는 말의 현장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사람들을 위한 몇 가지 체크리스트가 있다. -이른 아침에 집결하는가? Y -목장갑에 익숙하고, 공구와 크레인을 능히 쓰는가? Y -점심엔 국밥, 저녁 설치 완료 후에는 고기를 먹는가? Y -현장이라고 부르는가? Y -작업이 끝나면 어딘가 피가 나거나 멍이 들어있는가? Y -공기를 마치기 위해 주야 없이 작업하는가? Y -가족보다 화물차 기사님을 더 자주 만나는가? Y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노동력에 기대는가? Y 완벽하게 잘려 시공된 시트와 디자인과 작품 그리고 유려한 동선을 자랑하는 행사장의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다. 이건 비단 하나의 공간을 넘어서 여러 사람의 손길이 닿아 완성되는 책이나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글은 글을 쓴 사람과 닮았다. 종이에 기계적으로 인쇄된 자간과 행간일 뿐이지만, 그 사람만이 해석할 수 있는 문장과 사용되는 단어와 조사의 흐름 안에서 글을 쓴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느 잡지에서 촬영한 인터뷰 사진에서 드러난 뼈가 도드라진 발이라던가, 자신이 대중 앞에 서는 게 서툴다며 유창한 강연 대신 인쇄해 온 글을 읽던 모습이라던가, 머리를 넘기는 습관 때문에 헤집어져 있던 머리카락이라던가. 그럴 때면 글자들을 만져본다. 어떤 입체감도 느껴지지 않는 종이 속에서 글을 쓰는 모습을 읽어본다. 영화를 볼 때도 카메라에 담긴 화면을 바라보면서 카메라 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로케이션의 순간부터 촬영에 들어갔을 때의 모습 그리고 편집실에서의 뒷모습 같은 것. 영화를 보면서 촬영장에서 무전기를 통해 이야기하고 모니터 룸에서 스태프들에게 둘러싸여 촬영본을 확인하는 감독과 배우의 모습을 떠올려보는 건 영화를 이해하거나 비평하는 데 도움 되진 않지만, 영화가 살아있다는 느낌은 든다. 생동감 있는 손길과 호흡이 섞여 만들어낸 자식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러 사람이 만들어 낸 행사나 전시 또는 작품을 보면 작고 큰 희로애락 속에서 헤엄치는 사람의 인생사에서 가장 매끈한 것만 모아 담아놓은 것 같다.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걸 위해 며칠, 몇 달을 전전긍긍하며 보기 좋은 만듦새로 담아내는 시간, 염원, 바람, 열정... 비물질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에 담겨 전해지는 걸 상상해 보면서 결국 영원히 내가 사기꾼 같다는 기분을 떨쳐내지는 못하면서도 계속해서 ‘기획’을 하는 건 결국 어떤 아름다움의 이면에 매료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김나은 여성주의 문화 기획사·우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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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17 15:07

지역살이 그리고 먹고사니즘

올 초 퇴사를 하고 나니 휴대전화가 조용해졌다. 좋으면서도 씁쓸한 기분, 노는 게 제일 좋다고 하지만 젊은 나이에 갑자기 일이 없어지니 얼떨떨하고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나는 K-장녀 아닌가. 가뜩이나 혼자 산다고 걱정이 많은 부모님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고, 앓는 소리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가족들의 걱정을 덜기 위해서라도 지역에 잘 뿌리내리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동시에 드디어 ‘나도 지역의 일자리 문제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는군. 한 번 겪어보자!’ 하는 괜한 책임감과 출처 없는 용기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일을 구하게 된 건 취업사이트를 통해서가 아니었다. 새로운 일에 도전을 다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하던 전화기에 모르는 번호가 찍혔다. 전화 올 곳이 없는데 누굴까 하며 받은 전화 덕분에 처음으로 프리랜서로 일을 하게 되었다. 바로 지역 결혼이주여성들과 그들의 자녀인 중도입국 아동들의 한국어 선생님이 되는 일이었다. 중간지원조직에 근무 당시 이주 여성분들의 삶에 관심이 많아 관련 사업을 진행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 후 지원 기관에 방문 할 기회가 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협력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관계들이 쌓여 연락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자격이 필요한 일이었다. 일과 병행 가능한 수준에서 관심 분야 자격증을 준비했고 그 일과 관련된 지역 상황을 알고 있었으며 관계자와 소통했던 경험을 통해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아마도 크고 복잡한 도시에서는 이렇게 정보를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이 귀하고, 관계망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농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정보와 기회는 좀 더 쉽게 얻을 수 있으나, 공정성은 도시나 지역이나 똑같다. 얼마 전 한국어 강사를 병행하며 할 수 있는 다른 일도 추천을 받아 지원했으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자격을 갖추고 경쟁력을 만들고 업무의 특성과 맞아야만 기회가 내 것이 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물론 도시와 같은 근무 조건을 기대한다면 부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같은 프리랜서라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보는 화려한 조건들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나의 상황과 관심사를 기억하고 관심 분야의 일을 시작해볼 기회를 받았다는 점이 감사했다. 사수와 동료의 도움으로 함께 일을 하던 체계에서 프리랜서로 홀로 일을 해보는 경험도 소중했다. 나에게 맞는 업무 체계는 무엇인지 비교해볼 수 있었다. 새로운 분야의 일을 통해 앞으로 삶의 진로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특히 소비 습관을 다시 점검해보게 됐다.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사용하지 않는 신용카드를 처분했다. 불안정한 수입에 맞추려면 지출을 다이어트해야 지속 가능한 지역살이를 이어갈 수 있다. 완주살이 7년 차를 앞두고도 아직 처음 해보는 일이 한가득하다. 왜 불안하지 않겠냐마는 이젠 피할 수 없는 불안은 수용하고, 생각지도 못하게 나에게 기회를 주는 지역살이의 장점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러고 보니 이 청춘예찬의 지면 역시 일을 하며 맺은 다양한 인연을 통해 받은 연락이 시작이었다. 달리 보면 보이는 것들과 그런 시선을 키워준 지역에서의 삶에 새삼 감사하다. 조아란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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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10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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