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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웹툰작가이다 2

나와 형은 지원사업을 통해 전시회와 함께 웹툰 원고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어느 웹툰 플랫폼에서 공모전이 있었다. 광복 70주년 주제로 제작하고 있는 원고였지만, 상업성과 대중성을 고려해서 동양판타지 장르로 만들고 있던 중이어서 공모전에 출품하기에 괜찮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공모전 성격에 더 맞게 탈고를 한 뒤에 작품을 공모전에 출품을 했다. 기다렸던 결과는...되지 않았다. 같이 일하고 있는 형과 씁쓸한 위로주를 하며 멘탈을 다듬고 다음 날, 다시 원고 작업을 하던 중에 메일이 하나 왔다. 공모전을 열었던 웹툰 플랫폼에서 온 메일이었고 내용은 수상은 못했지만 작품의 가능성을 보고 미팅을 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형과 나는 기뻐서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있다. 담당자님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미팅할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두근거리는 마음과 함께 만나게 됐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설레는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당황스러움만 남았었다. 그분이 말씀하시길, 아직 등단하지 않은 작가들이기에 연재의 신뢰를 할 수 없고, 작품도 가능성은 있지만 많은 수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큐베이팅'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몇 화 분량의 원고를 만들고 연재를 결정하자는 거였다. 내용으로만 생각해보면 괜찮은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설득도 되었다. 아직 등단하지 못한 예비 작가들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회당 고료는 20만 원, 또 원고를 만드는 동안 작품에 담당자의 많은 관섭이 있을 거라는 것. 당황스러웠다. 20만 원이면 한 달 꼬박 해도 80만 원을 받을 수 있다. 이 돈으로 형과 함께 생활해야 했다. 또 분명 우리가 저작권을 갖고 있는 작품을 말 그대로 담당자 마음대로 수정을 쥐락펴락하겠다는 말이 굉장히 불편하고 거북했다. 물론, 대화 중에 느껴지는 담당자의 무시가 깔려 있는 태도도 한몫을 했었다. 생각을 해보기로 하고 형과 작업실로 돌아와서는 한동안은 둘 다 조용히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생각 끝에 형과 나눈 대화의 끝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인큐베이팅동안 이 작품에만 전념하라는 조건이 있는데 그 고료로는 도저히 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작품을 우리는 아직 미숙하니 의도와 생각을 갖지 말고 시키는 대로 만들어라는 작업 형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조심스럽고 예의 있게 거절의 메일을 담당자님한테 보내드렸다. 다음 날, 읽음이라고 써 있는 거 보니 메일을 확인은 했는데 우리에게 답장조차 안 해줬다. 시간이 지나고 웹툰 작가로 경험이 쌓였을 때 이때를 생각해보면 불공정 계약의 하나였다. 그 당시에는 웹툰 시장이 이제 막 커지고 있을 때라 예비 작가들이 많아질 때였다. 이 틈을 노려 실력은 있지만, 정당한 계약 내용이라든지, 최소한의 고료가 얼마인지 저작권의 이해가 없는 예비 작가들의 등단하고 싶은 마음만 건드려서 불공정 계약으로 웹툰을 만들어 팔던 게 흔할 때였었다. 그 담당자도 그중 하나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이런 피해들이 속출하다 보니,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표준계약서를 만들고 누구든 사용할 수 있게 공유하고 적극 활용을 위해 많은 홍보도 하고 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어진 문제지만, 그때 나와 형이 그 담당자의 손을 잡았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관련된 일을 준비하시는 분이라면 문체부에서 고시한 표준계약서를 꼭 참고하시길. /홍인근 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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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3 15:49

함께 자라나기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계절이 왔다. 유난히 길고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으니 이제 다시 마당으로 나갈 시간이다. 좋은 날씨가 이어지면 큰아이는 자연스럽게 캠핑을 하자고 이야기한다. 미리 예약해 두지 않아서 어쩌지 하는 걱정은 필요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마당에 텐트를 치고 놀이 테이블을 옮겨 놓으면 그것으로 캠핑 준비는 끝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루 온종일 마당에서 볕을 쬐고 바람을 느끼며 아침, 점심, 저녁을 보낸다. 부엌에서 요리한 음식도 바깥에 차려 먹으면 레스토랑의 야외석처럼 느껴진다. 보드게임도 텐트 안에서 하면 더욱 재미있다. 여유가 있다면 이틀, 삼일 정도 텐트 생활을 한다. 집에서 하는 캠핑이 시시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안과 밖의 온도와 감도는 엄연히 다르다. 아이들은 바깥에서 더욱 쑥쑥 자란다. 우리집 아이들에게 바깥 생활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봄‧가을에는 마당 캠핑을 하고 여름에는 옥상에서 수영을, 겨울에는 마을의 경사진 길에서 봅슬레이같은 눈썰매를 탄다. 덕분에 팬데믹으로 집에서만 생활해야 했던 때에도 심심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층간소음 걱정 없이 마음껏 뛰어놀고, 소리 지르며 놀 수 있어 좋은 점도 있겠지만 가장 큰 장점은 땅과 식물, 벌레들의 존재이다. 아이들이 집안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느낄 땐 마당으로 나왔다. 시골의 마당에는 계절마다 할 일이 너무도 많은데, 아이들과 재미나게 잡초뽑기 대회도 하고 물주기 시합도 하다 보면 두어시간 지나는 동안 함께 마당 정리를 마치게 되기도 한다. 책 속의 식물들과 곤충들의 진짜 모습이 내 옆에 있는 놀라움은 덤이다. 처음에 흙을 만지기 싫어 했던 첫째는 ‘흙 묻으면 털지 뭐’ 하고, 벌레를 무서워했던 둘째는 ‘저거는 뭐야?’ 한다. 아이들과 우리 부부는 여기서 같이 자라고 있다. 나와 남편이 귀향 계획을 친구들에게 알렸을 때, 아이들 학교는 어떻게 할 거냐고 했다. 나와 남편의 대답은 ‘그건 그때 가서 봐야지.’ 였다. 어디에 살든 아이가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무엇을 잘하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우리가 서울에 산다고 아이들을 더 잘 키울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더 잘 키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기도 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앞으로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무엇을 원하게 될지 모르겠고, 나와 남편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격변하는 시대에 ‘라떼는 말이야’ 하고 어줍짢은 코치를 하려 했다간 오히려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해서 우리가 지금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은 지금의 환경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하자는 데 까지 왔다. 우리가 자랄 때는 맹목적으로 달려나가느라 지나치고 주목하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 찾아와 발견한 일이 결코 의미 없는 회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은 언제든 돌아올 곳이 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사람과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다른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는 사람은 훗날 좌절이나 실패가 다가와도 다시 잘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좋겠다. 인간의 문제는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아이들은 여기서 우리와 함께 자라며 무엇이 되었든 자기가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아차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유새롬 작은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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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26 14:52

도시를 걷는 법

“뭔가를 지도로 만드는 것은 대개 좋은 일이다. 세상의 구석구석에 햇빛을 비추는 일이니까.” 데니스 우드, <모든 것은 노래한다>(2011, 프로파간다) 지역재생의 활동으로 자주 거론되는 단어는 ‘아카이빙’ 또는 ‘매핑(mapping)’이다. 도시와 동네를 함께 걸거나 공간에 대한 지역민의 미시사를 이야기 나누고 그것을 기록하며 의미화한다. 아카이빙이라는 것은 현재 존재하는 것에 애정을 가지며 그것의 현재를 기록함에 목적이 있지만 어찌 보면 그 대상이 변화하거나 사라질 때 의미를 가지는 아이러니함도 있다. 변화가 당연한 시대 속에서 아카이빙과 매핑은 도시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앞서 인용한 데니스 우드는 기존 지도의 객관성을 믿지 않고 누군가의 주관적 시선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했다. 하여 그는 ‘짖는 개’, ‘나무의 나이’, ‘건물 자국’, ‘일광의 리듬’ 등의 여러 요소를 통해 공간을 탐구하고 기록했고, “서정적이며 개인적인 임무(아이라 글래스)”로 책을 ‘지도’를 완성해 냈다. 그의 방식은 내가 군산에 정착하며 단순히 경제적 활동을 해내고 주거가 있는 공간이 아니라, 삶의 터전으로 인식한 과정과 유사하다. 군산의 첫인상을 한 단어로 정의하면 ‘틈’이다. 깨진 벽 사이에서 자라는 나무들, 동네 골목에서 쉽게 발견되는 버려진 욕조를 대용화분으로 쓰며 키우는 식물들, 과거와 현재가 섞여 있는 낮고 고른 건물의 선들. 천천히 자신만의 시선으로 발견할 때 도시는 내 것이 된다. 모든 애정은 관찰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어딘가 부족해도 사랑하게 되는 공간들. 그냥 지나치면 스쳐 지나가면 그저 풍경으로 끝나버리는 동네의 모습을 ‘아, 이곳에 이런 게 있었네.’, ‘이 시간엔 늘 저 고양이가 있네.’라는 생각으로 산책하고 걷고 관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동네와 지역에 애정이 생긴다. 그렇게 자신만의 동네 지도가 완성된다. 수저가 깨끗한지 확인하며 놓고, 테이블이 끈적여서 친구와 대화하는 내내 식탁을 닦아야 할지라도 어딘가 편안하고 그곳에서만큼은 진실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술집처럼. 자신만의 동네 지도가 완성되면, 나의 마음과 상태에 따라 발길을 편안하게 닿는 나만의 아지트가 생기는 것이다. 오래된 간판의 디자인이 남아있는 구도심, 곳곳에 놓인 화분과 의자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주택가의 골목, 노을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아름다운 빛을 만들어내는 동네, 마음이 번잡할 때 훌쩍 달려가 복잡함을 털어놓고 올 수 있는 해변. 군산에서 숨 쉬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나의 군산 풍경들이다. 다시 돌아온, 기후 위기의 무서운 경고장인 지난한 여름도 이번 주면 끝이라는 일기예보가 있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엔 동네를 걸어보며 내가 발 딛고 있는 풍경을 관찰하는 건 어떨까. 겨울에 두릅나물을 먹고, 초봄에 냉이가 들어간 된장을 먹으며 식탁에 내려앉은 계절을 느끼는 것처럼, 지금 이 시기에만 내려앉는 햇볕과 지금 존재하는 건물과 사람들 그리고 동네의 여러 새와 동물을 보다 보면 매년 같이 느껴지는 시간과 공간, 계절과 일상이 조금은 특별해질 것이다. 애정 하는 우만의 동료(김다희)가 과거 『우만플러그, 군산』(2021, 우만컴퍼니)의 마지막에 쓴 글을 마지막으로 글의 마침표를 찍는다. “‘지역’이란 게 사람이 아닌데 그에겐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현재를 생동하며 살고 있는 것까지. 어쩌면 생명체인 나보다 살아있는 존재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그 움직이는 것 안에 있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움직이며 살게 되는 게 아닐까?” /김나은 여성주의 문화 기획사·출판사 우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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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19 15:53

평범해서 찬란한 000의 삶

고백하자면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는 끝 삼재라 몸과 마음이 이렇게 힘든가 싶은 일의 연속이었다. ‘그런 거 믿지 않는다’라고 하면서도, 뒤돌아서면 ‘진짜 삼재라는 게 있나?’ 싶었다.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귀촌을 했으니 건강하게 살 것 같지만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고 또 다른 고민과 걱정이 이어졌다. 퇴사 후 나를 설명할 수단이 없어진 것 같았다. 시간이 많아졌지만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사실 그건 내가 몽골에 살든, 캐나다에 살든 어디에 살아도 겪을 힘듦인데 그것들이 어느 날은 큰 고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귀촌이 대다수 청년의 선택지는 아니었기에 평균의 범주 안에서 살던 내게 귀촌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특별했다. 평범한 내가 한 특별한 선택,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하는 일로 증명해 보이고 싶어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올해 초 퇴사와 함께 여러 관계가 정리되며 진짜 내게 남은 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됐다. 귀촌 두 글자가 주는 특별한 마법은 사라진 것이다. 평범한 나, 무기력함에 초조함을 느낄 때면 그것을 잊으려 정리를 한다며 집을 뒤집어놓거나 유튜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최근 중독에 대해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중독에 빠지는 주된 이유가 바로 고통으로부터 회피라고 했다. 강사님은 마약을 예시로 중독과 고통을 이야기 해주셨는데 코카인과 헤로인, 두 가지 약은 인체에 작동하는 기제가 다르다고 한다. 코카인은 감각들을 활성화해서 쾌락으로 고통을 잊게 하고 헤로인은 모든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차단해서 고통으로부터 외면하게 하는데 공통점은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고통으로부터 해방감을 원했겠지만, 특히 헤로인을 하는 순간 즐거움과 행복조차 느끼지 못하는 생기 없는 삶을 살게 된다. 피하고 싶은 것만 선택해서 느끼지 못하게 할 순 없는 것이다. 결국, 고통은 삶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생각지 못한 중독 강의에서 배우게 되었다. 머리로는 삶에서 고통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며 살았지만 정작 내가 고통스러울 땐 제발 고통을 없애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피고름을 바늘 찔러 빼야 하듯, 강의를 통해 고통을 도구로 생각해보니 내가 이 도구를 삶에서 어떻게 사용했나 돌아보게 됐다. 평범하고 중간인 삶은 종종 고통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평범함을 긍정하기 쉽지 않은 사회다. 나의 특별함을 찾아보려다 평범하기만 한 나를 마주하면, 온갖 이유로 자신을 고통에 몰아넣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실수임을 알고 있어도 반복하는 실수다. 그렇지만 동시에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중독을 단계별로 치료하듯 실수하고 바로잡는 과정에서 평범함의 아름다움과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도 점차 성숙해질 거라 믿는다. 오늘 하루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원고를 쓰며 막힐 때 때마침 전화 온 친구 덕에 환기했다. 곧 쉴 수 있는 명분 가득한 명절이 있다. 그 속에 친척들의 눈치와 질문 폭탄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도 평범하게 잘 살아온 것 자체로 내가 나를 기특해하려 한다. 그래서 나처럼 제목의 000에는 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분들이 자신의 이름을 넣어 스스로 한 번 응원해줬으면 한다. /조아란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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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12 16:11

난 웹툰작가이다

나는 현재 웹툰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10년 가까이 활동하면서 여러 작품을 연재하고 에세이툰도 출간했으며, 여러 공모전 수상 경력도 있다. 예전부터 만화는 존재했었고, 만화의 대표적인 나라를 떠올리면 일본이라는 건 웬만한 일반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김산호, 김광식 같은 작가분들께서 초반 일본 만화의 형식을 보고 배우면서도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만들어가며 한국 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70년대 군부정권 시대의 개막과 함께 만화를 사회 5대 악 중 하나로 규정하면서 심한 탄압과 함께 만화 불태우기 운동까지 했었다. 하지만 어디 깊이 자리 잡힌 문화란 것이 쉽게 죽으랴. 이후에 이현세, 김수정, 이두호, 허영만 등으로 대표되는 신진 작가들이 등단하여 보다 다양한 장르를 개척하였으며, 9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만화 대여점이 생기면서 일반인들이 좀 더 쉽게 만화를 만나게 될 수 있었다. 물론 대여점을 통한 유통이나 인세, 등 문제점들도 꽤 있긴 했었다. 그러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마린블루스 등을 필두로 웹툰이라는 콘텐츠가 나오기 시작했고, 강풀, 강도영 작가님들의 작품이 흥행하면서 웹툰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만화는 앞서 이야기했듯 일본을 보고 모티브 삼아 배워온 것들이 많았다면, 웹툰은 그 만화를 보고 즐기며 성장해온 젊고 새로운 작가들이 만들어낸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온 콘텐츠이다. 나는 만화를 보며 컸고 고등학생 시절에 웹툰을 접하고 두 장르를 다 경험하며 자란 세대이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가라는 꿈이 있었지만, 가정환경으로 인해 꿈을 접고 입시만화학원에서 전임강사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유명 만화작가분의 어시생활과 웹툰에서도 어시로 일한 경험이 있는 형을 만나게 됐고 그 형의 여러 번의 권유로 같이 웹툰 작가가 되보기로 결심했다. 30이라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였고, 모아놓은 돈도 없을 떄였다. 당시 웹툰 시장은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에 작가로 등단하는 게 꽤나 어려울 때였다. 그걸 알기에 형과 나는 학원을 그만두고 등단이란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했다. 작업실이란 이름의 원룸을 하나 구했고, 그곳에서 우리는 숙식과 작업을 같이 했다. 방을 구하고 작업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컴퓨터와 모니터 타블렛을 마련하고 나니 우리에게 남은 돈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작품을 만들어서 플랫폼에 연재 제안을 하려면 못해도 석 달은 필요했는데 당장 생활비가 없었다. 이때 형이 개인적으로 대출을 받아 조그만한 생활비를 마련했다. 그렇게 작품을 만들던 중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지원사업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지원사업을 살펴보던 중 우리가 만들고 있는 작품과 맞는 지원사업이 있는 걸 보고 지원하게 됐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제2의 각시탈과 같은 만화작품을 찾는 지원사업이었다. 운이 좋게 당선이 됐고, 우리는 원고료를 받으면서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정말, 생활비가 딱 떨어질 때였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의 미팅이 있을때는 진흥원 여러 담당자님, 관계자분들께서 잘 대해주셨고 덕분에 부천에서 작품 전시도 할 수 있었다. 작품 전시회는 우리 말고도 당선된 작가분들의 프로필이 적혀 있었는데 너무나도 화려했었다. 반면, 우리의 프로필은 전시된 작품 딱 한 줄. 우리는 그렇게 시작했다. 이렇게 고마움으로 시작됐으나, 일이 좋은 일만 있으랴. 이후에 웹툰 시장의 씁쓸함을 느끼는 경험도 있었다. 다음 예찬에서 이어서 하도록 하겠다. /홍인근 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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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5 16:53

좋아하는 일로 살아가기

어쩌다 책방을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원래 책을 다루던 일을 했는지, 전에 하던 일과 관련이 있는지, 전공은 무엇인지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커피를 좋아해서 카페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하고. 꿈으로 삼고 전공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원하던 학과에 진학했는데 내가 가진 재능이나 성향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른들은 뭐든 대학만 가면 다 된다고 했었다. 그래서 모두 미루고 열심히 공부만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찾아온 막막함은 해결할 방법을 몰랐다. 대학생활은 짧고, 다음은 취업이었다. 나는 어떤 일을 잘할 수 있는가, 어떤 상황에 취약한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은 중요하지 않았다. 회사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이든, 나는 어떤 일을 잘하든 상관없이 취업의 문만 통과하면 되는 것이었다. 결국 주어진 보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택을 했다. 당연히 계속 부딪혔고 자아실현은 별개로 생각하자 싶어 일은 도구로 여겼다. 서른이 넘어서야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아무리 오래 해왔더라도 회사를 벗어나면 내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일은 가짜노동에 가깝다. 내가 톱니바퀴가 아닌 일을 하면 똑같이 갈아 넣더라도 내 안에 무엇이라도 쌓이지 않을까. 평소에 좋아하던 것이지만 업으로 삼기에는 가장 뒤로 미루어 놓았던 것을 떠올렸다. 내내 책만 끼고 공부만 하던 사람이 가려고 하기에는 망설여지는 길이기도 했다. 6개월간 핸드드립 전문가 과정을 마치고 커피 전문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론과 실전이 다르다는 건 말로만 들었지 처음 겪어 봤다. 책상머리에 앉아만 있던 내가 처음 겪은 체험 삶의 현장이었다. 처음 3개월 동안 커피에는 손도 못 댄 채 설거지와 서빙을 했다. 3개월만에 겨우 커피 제조를 하게 되었는데 수십종류가 넘는 커피 메뉴를 숙련된 동료 바리스타와 같은 품질로 만들어내는 일은 여태 해 온 일 중에 가장 힘들었다. 연습하고 평가받기를 수백 수천번 지나 이제 됐다 소리를 들었을 때, 정말로 내가 내린 커피를 돈을 받고 팔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을 때, 남편에게 흐드러지게 자랑을 했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게 되어 돈까지 벌다니. 노동강도에 비하면 박봉이지만 출근길에도 퇴근하고 싶던 회사에 다닐 때와는 달리 새벽에 출근을 해도, 한밤중에 퇴근을 해도 좋았다. 내내 톱니바퀴같이 어디에 껴 있는지도 모르게 살던 나는 그제야 내 의지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책방은 처음 카페에서 일을 할 때와 같은 마음으로 시작했다. 이왕 삶을 바꾸기로 한 거, 좋아하는 것들만 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어쩌다 책방을 하게 되었냐는 질문에는 ‘카페에서 일을 했었는데요,’ 다음에 ‘책 읽기를 좋아해서요.’ 라고 대답한다. 이제야 책에 대한 애정을 밝히기는 새삼스럽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좋아서 자발적으로 꾸준히 해 온 일은 사실 책 읽기다. 안 팔리면 내가 읽으려고 한다는 농담 뒤에는 사실 내가 잘해온 것,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삶을 꾸리려는 마음이 가장 크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제든 찾아오고 싶은 취향의 은신처, 소도시에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엄연히 존재하는 공간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녹슬지 않는 커피 맛과 독서의 경험을 제공하며 오래오래 지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유새롬 작은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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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9 16:41

WK리그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합니다

최근 나의 가장 큰 관심사이자 열정의 대상은 여자축구이다. 평생을 한번 빠지면 끝장을 내는 불도저로 살아온 성미였지만, 이번엔 나조차도 “이게 맞나?”라고 몇 번이나 다시 묻고 의심하는 일을 벌였다. ‘여자축구 문화 전문지’ <STAND>를 8월 31일 창간하게 된 것이다. 운명처럼 접한 2023 호주·뉴질랜드 FIFA 여자 월드컵 조별리그를 계기로, 대표팀 경기를 ‘직관’하고 싶어서 고민도 없이 제19회 항저우 아시안게임 티켓을 구매하고 보러 간 지 약 1년이 되는 2024년 8월, 기어이 자비 약 천만 원을 들여 책까지 낸다. WK리그는 2009년 출범한 한국여자축구 실업 리그의 명칭으로, 프로 리그가 없는 현재 한국여자축구 최상위 리그이다. 여자축구 리그는 전 세계적으로 34개 국가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WK리그도 그중 하나다. FIFA가 2023년 발행한 ‘Setting the Pace: FIFA benchmarketing Report Women’s Football‘에 따르면, 전 세계 34개 리그 중 WK리그가 눈에 띄는 부분은 여성 감독 비율이 8개 구단 중 5개 구단으로 가장 높다는 점이다. 필드를 달리는 선수도 여성, 심판도 대부분 여성인 WK리그에는 우리 사회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여성의 모습이 있다. 거침없이 드러내는 승부욕,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 체력적으로 힘들어도 이기겠다는 의지로 치달리는 끈기, 살짝 걷은 소매에서 선명히 드러나는 햇볕에 그을린 노력의 흔적. 득점과 승리 그리고 우승이라는 목적을 향해 함께 달려가며 자신의 능력과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몸을 사리지 않는 걸 보고 있으면 반할 수밖에 없다. 무패 행진을 하던 1위 팀을 상대로 선제골을 넣고 끝까지 실점 없이 지켜내 승리하여 첫 패배를 안기는 하위권 팀. 후반 경기 추가 시간의 추가 시간까지도 골을 넣고 먹히는 반전과 투지 속에서 기쁨과 환호와 아쉬움과 한탄이 섞인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후 필드에 누워버리는 선수들을 보고 있으면 인생이란 게 그곳에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이런 아름다움을 혼자 보기 아쉬워 더 많은 관중 속에서 선수들이 경기를 치르고, WK리그가 부흥하길 바라며 한 명의 팬이자 여성으로서 매거진 <STAND>를 창간하는 것이다. 8월 31일 군산북페어 2024에서 최초 공개되는 매거진 <STAND>는 영어단어의 의미 그대로 저항과 경기장에서의 관중석 그리고 의견을 뜻한다. 창간호인 1호는 ‘여자축구 WK리그 A to Z’를 주제로 하여 A부터 Z에 속하는 단어를 활용해 각각의 키워드로 WK리그를 훑는 간단한 흐름으로 WK리그를 안내하는 가이드북이다. WK리그 출범 후 현재까지 운영되면서 고쳐야만 하는 고질적 문제는 분명하다. 매거진 <STAND>는 그런 문제점을 짚음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선수와 함께 고전하는 구단 스태프들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고 즐기는 팬의 뜨거운 애정에 보다 집중한다. 책을 접하는 독자가 WK리그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기를. 더 나아가 현재는 2015년 화천군으로 연고지를 옮긴 KSPO의 전 연고지였던 전북에 다시 한번 WK리그 팀이 창단되어 멋진 WK리그에 다채로움을 더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람이 담겨있다. 이 칼럼과 매거진 <STAND>를 읽고 언제나 여러분을 환영하는 WK리그 세계로 구경 와보는 건 어떨까. /김나은 여성주의 문화 기획사·출판사 우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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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2 16:06

내가 한 게 귀촌이라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할까

귀촌이라는 단어는 내 인생에 없을 줄 알았다.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인데 완주로 오고 나서 귀촌 청년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귀촌과 귀농은 엄연히 다르지만 묶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확실하게 다른 것은 귀농은 정말 농사를 짓겠다는 결심 혹은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농사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지만 귀촌은 그러기엔 애매하다는 점이다. 삶의 터전을 시골로 이동하는 것은 같지만 직업은 농사를 짓고 사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하다 보니 하나의 교육으로 묶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본적으로 내가 사는 지역에 대한 이해는 내가 살면서 터득하고 배워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어떤 이웃을 만나는지에 따라 영향도 많이 받는다. 막상 귀촌했지만 뭐 먹고 살아야 하나 그 막막함을 첫날부터 느꼈다. 그렇게 일주일은 동네를 탐방하며 뭘 하기 전에 일단 지리부터 파악했고 기웃기웃 궁금하고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어 뽈뽈 돌아다녔다. 그러다보면 나에대해 이야기 할 곳이 생긴다. 동네에 이런 청년이 있구나 하며 관심 가져주는 어른들이 계셨던 것은 감사한 일이고 운이 좋았다. 그리고 귀촌을 장려하는 지자체 별로 다양한 교육들이 많다. 그 교육들을 살펴보면 관심 있는 것들 생각도 못해 본 교육들이 있다. 일단은 별로 흥미가 없어도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육을 신청해서 들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러다 보면 거기서 기회가 생긴다. 나 역시 교육을 통해서 사회적경제 중간지원조직에서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일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귀촌을 하고 나서 많은 청년들이 대부분 이런 중간지원조직에서 근무를 하며 지역을 배워가는 비율이 높다. 한정된 일자리, 농사가 아닌 일 선택지가 다양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선택지가 다양하지 않다는 것이 지역을 떠나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에겐 지역으로 오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걸 느낀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먹을 때도 이왕이면 작은 마트, 큰 마트, 프랜차이즈 아이스크림 전문점 등이 있으면 고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그런 편하고 다양한 선택지 때문에 어느순간부터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순간이 왔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모든 생활에 100% 만족은 어려운 것처럼 여기서의 아쉬움, 저기서의 아쉬움 말하자면 끝이 없으니 그냥 내가 선택한 이곳에서 지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행복감을 느끼려한다. 여기에도 노력은 필요하고 도시에서의 노력과 결이 다를 순 있다. 그렇지만 귀촌을 장려할 수 있냐고 내 스스로 물어본다면 50%이다. 나에겐 맞는 부분이 더 컸지만 아닌 경우도 많았고 나 역시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지 그건 더 살아봐야 아는 것이니까 다만 이쯤되니 이젠 언제까지 더 있지? 이런 고민에서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많은 준비를 해서 온 친구들도 있었지만 떠난 친구도 있고 준비 없이 와서 나처럼 사는 친구들도 있고 그 사이 다른 지역으로 고향으로 각각 떠난 친구들도 많다. 여전히 시골에선 할 일이 많다. 그게 세상이 말하는 멋짐과 다를 수도 있지만 거기서 흔들리는 나, 비교되는 나 그럼에도 그 안에 있는 행복을 누리는 나도 나다. 비교는 끝없고 어딜 가도 나를 따라올 것이다. 내게 귀촌은 비교하는 나를 멈추고 일단 나를 바라보는 작업의 연장선이다. /조아란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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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5 15:34

자생2

사람은 사는 모양새가 다 다르니 내가 사는 방향과 속도는 알아서 나아가야 한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딱히 내 인생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걸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살, 고등학교 졸업 후에 나는 독립을 했다. 아버지의 술주정이 심해 이사를 자주 했던 난 마지막 초등학교로 전학갔을 때 만난 괜찮은 친구들을 어머니가 보신 후 더 이상 전학을 가면 안된다고 생각하신 거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지역으로 어머니와 이사를 갔고 난 살던 동네에 남아 다니던 학원에 보조강사로 취업해 독립했다. 아버지 술주정 때문에 어머니가 걱정되긴 했지만,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에 뭔가 좋기도 했다. 그곳에서 벗어났으니 하루빨리 내 스스로 성공해서 어머니를 모셔야겠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주정을 안보면서 생긴 안도감일까, 안쓰러운 어머니를 자주 못보면서 무뎌진 독함이었을까. 방울만 달리고 독은 다 잃어버린 방울뱀처럼 성공을 위한 이야기만 뱉어낼뿐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나태하기 짝이 없는 나였었다. 그렇게 군대를 가게 됐다. 전역할때쯤에는 이미 친구들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위한 준비에 바빴었고 휴가때마다 뵙는 어머니는 갈수록 늙어가는게 눈에 보였었다. 많은 복기를 한 뒤에 전역할때는 다시 난 독기를 품을 수 있었다. 26살에 대학교를 신입생으로 다시 들어갔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으로 꿈에 다가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수업이든 학과생활이든 후회없게 열심히 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중에..일이 터졌다. 1학년 방학 전 쯤에 아버지 전화로 전화가 왔었다. 음주로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에 어머니도 동승을 하셨고 큰 사고가 나서 어머니가 많이 위독하다는 전화였다. 하던 기말고사 과제는 내팽겨치고 택시를 타고 어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갔었다. 도착한 병원 응급실에서 어머니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셨고 아버지는 조금 떨어진 병원침대에서 아직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수술에 들어간 어머니는 결국 다리를 하나 잃으셔야 했다. 이 후에는 모든게 다 무너졌다. 그냥 난 나를 지웠다. 그냥 돈이나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봤던 일이 학원강사일이니 일했던 미술학원 강사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곳에 먼저 있던 만화반 동료강사인 형이 있었다. 그 형은 나에게 계속 이야기를 했다. 네가 아깝다. 네 작품을 시작도 안해보고 꿈을 놓기에는 너무 아깝다. 라고. 처음에는 그냥 위로를 받는다 생각하고 넘겼다. 그렇게 한해,두해가 지나도 형은 사석에서 만화이야기를 나눌때면 그 얘기를 꼭 나에게 말해줬다. 그리고는 웹툰제작을 위한 디지털 작업방법도 많이 알려줬다. 그러면서 용기를 얻었던거 같다. 죽어가던 나에게 만화가가 되고 싶단 불씨에 바람을 불어줬다. 그렇게 형과 함께 공모전을 준비하고 대상을 탄 뒤 웹툰작가가 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꿈으로 가는길엔 형의 도움이 젤 컸지만 사는데 여러번의 좌절에서 친구들에게도 많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자생1에서 나를 인정하고 그에 어울리는 무기가 될만한 숙련도가 필요한 이야기였다면 이글에선 나의 모자른걸 가르쳐주고 채워주는 인생의 동료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그래도 살만한 인생이지 않을까란 이야기다. /홍인근 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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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8 18:38

대체불가한 ‘그런 것’

가끔 큰 도시에 살다가 정읍으로 이주해 온 손님들을 만난다. 작은 책방의 존재가 신기한지 ‘원래 정읍 사람이냐’ 하는 질문의 다음은 어쩌다 정읍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 없는 것들이 많아서 불편하지는 않은지 등등이다. 각자의 불편함을 토로하기에 앞서 나오는 문장은 ‘여기에는 그런 게 없잖아요.’ 인데, ‘그런 것’의 존재는 지역의 인구와 직결된다. 정읍시 규모에서는 유지가 불가한 종류들이다. 그리고 그 종류는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다양한 취향을 유지하려면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절대적인 수가 필요하다. 손님과의 대화는 여기에서 조용히 다른 화제로 넘어간다. 누군가에게는 음식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물건일 수도 있고 혹은 무형의 분위기일 수도 있는 ‘그런 것’의 부재를 채우는 ‘다행인 것’이 있기에 정읍에서의 삶을 꾸릴 수 있다 하는 소소한 만족을 주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각자의 ‘다행인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의 경우에는 마당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집 마당의 잡초를 대신 뽑아주는 엄마가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마당이 있는 집에 살면서 얻은 행복은 그 비웃음을 견뎌내고도 남을 만큼 매우 크다. 단순히 취향을 만족시키는 ‘그런 것’들과의 일상을 포기하는 기회비용이 겨우 마당이라고 하면 공감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때때로 나를 둘러싼 환경이 어떤 존재를 특별하게 만들어 줄 때가 있는데, 마당이 생긴 직후에 코로나 펜데믹이 발생했고 우리의 경계는 어디까지였을까 떠올리면 이 이야기기가 조금 더 설득력을 얻게 될 것 같다. 마당이 주는 기쁨이 단순히 취향을 포기하고 자연과 가까워지는 삶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코로나 펜데믹 때문에 시작한 마당에서의 시간이 처음에는 내게도 ‘다행인 것’이었다. 지금은 대체불가한 ‘그런 것’이 되었다. 사실 마당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들은 1년에 몇 일 되지 않는다. 그런데 짧아서 소중한 그 날들이 주는 기쁨은 어디에서도 구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따뜻한 볕이 들기 시작하는 3월에서 5월, 여름의 더위가 벌레들의 극성이 살짝 사그라드는 10월에서 11월 사이, 문을 활짝 열고 마당과 거실, 부엌을 오가며 안팎을 자유롭게 누린다. 조금은 좁은 듯 했던 실내가 확장되고, 볕과 공기를 마음껏 즐긴다. 일부러 마당에 상을 차려 이웃과 친구를 초대하고, 계절이 주는 축복을 마음껏 누린다. 볕에 타는 것도, 벌레도, 까끌거리는 모래나 흙이 집안에 들어오는 것도 질색했던 나는 이제 앞장서 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연다. 누구에게든 정읍에서 살면서 없으면 안 될 ‘그런 것’의 존재를 자랑할 수 있다. 얼마 전 서울에 갔다가 경복궁 뒤 인왕산을 보고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서울에 살던 때 광화문의 풍경은 광화문과 그 앞 8차선, 광장이 전부였다. 늘 차가 빽빽하게 밀리던 도로였고, 사람이 많은 광장이었다. 뒤로는 빛나는 야경을 보러 올라가는 곳에 불과했던 인왕산 기슭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하늘을 배경 삼은 인왕산이 보인다. 계절에 걸맞는 푸르름이 보이고, 그 아래 사람과 건물과 차들이 뒤섞인 혼돈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당이 없었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의 방식을 바꾸면 보이는 것들도 달라진다. /유새롬 작은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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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1 17:52

언니, 안녕

여러 지역을 다니다 군산에 자리 잡으며 속으로 가장 많이 되뇐 단어는 ‘언니’였다. 이모도, 선배도 하물며 엄마도 아닌 언니라는 호칭에 담기는 친근하면서도 기댈 수 있는 느낌은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다. 관광지의 맛집에서 현지인들만 아는 메뉴를 시키는 것처럼. 군산살이 7년 차, 의지할 수 있는 언니들을 많이 만났다. 말은 ‘00 님’이라고 하지만 ‘00 언니’라고 속 발음한다. 월명동에서 사람들이 편히 드나드는 방앗간 역할을 하며 여러 소식과 필요한 사람 간 연결을 해주는 책 언니, 인생의 풍파를 거닐며 어떤 일에도 초월한 미소를 보이는 호탕하기 그지없는 왕 언니, 세상에 복수하고 싶은 발칙한 마음이 들 때 찾아가서 속 풀이를 하면 깜찍한 해법을 제시해 줘서 결국 세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청 언니.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면 한 사람이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언니들이 필요할 것이다. 스포츠에도 언니가 있다. ‘멋있으면 다 언니’라는 말이 불길처럼 번진 여성 스포츠를 사랑하는 J는 언제나 언니를 입에 달고 사는데, 그는 언니는 조금 늘어트려서 ‘언니이-’로 발음한다. 호칭을 마무리하는 길이와 부호에 따라 감정이 드러나는데. 경기에 진날은 ‘언니..’, 걱정되는 날은 ‘언니..!’, 너무 멋진 날은 ‘..! 언니!’다. 세상 곳곳의 언니들을 찾아 헤매며 어릿광대 역할을 하던 나도 어느새 언니 역할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굴고 싶다가도, 대부분의 모임에서 내가 연장자가 된 걸 알아차리면 사회적 얼굴을 갖춘다. 그럴 때 명확한 얼굴이 아닌 추상적인 ‘언니’가 더 그리워지지만, 내가 누군가를 불렀든 다른 이가 나를 ‘언니’라고 부를 때면 내가 받았듯, 모든 걸 주고 싶어진다. 우는 아이를 어찌 달래줘야 할지 몰라 손에 화려하고 소리 나는 모든 걸 들고 흔드는 사람처럼. 그대, 나를 언니라고 부르면 나 그대에게 언니가 되리. 백은선 시인의 시 중 <언니의 시>가 있다. 두 번째 문단에서 “언니, 언니가 그렇게 썼잖아 나는 그걸 읽고 언니,”라고 언니를 애틋하게 부르기 시작하여 계속 반복하는 이 시는 ‘언니’라는 호칭이 가지는 판타지의 결정이다. 시의 화자처럼 왠지 나도 “언니의 시가 너무 아름다워서”, “영원히 내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언니”와 경험을 한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그리고 이 시 속의 ‘언니’라는 호칭에 담긴 간지러운 느낌을 이해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칠 수 있을 것만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이런 언니 예찬의 글을 쓰다가도, 슬픔과 화가 담기는 ‘언니’의 세계도 있다는 걸 떠올리면 가슴이 뻐근해진다. 반성매매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는 H에게 ‘언니’는 다른 의미이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유령 같은 언니들을 만나기 위해 친구는 밤에 바삐 움직인다. 군산에도 ‘언니’들이 있다. 대명동·개복동 성매매업소화재참사(2000년, 2002년) 이후 언니들은 사라진 것 같지만, 우만컴퍼니 사무실이 자리 잡은 월명동의 밤거리를 거닐다 보면 언니들의 그림자를 만날 수 있다. 새벽, 주차된 차로 걸어가는 나를 향해 “언니, 노래방 어디 가야 해?”라고 묻는 취한 남자를 마주친 골목. 남자들은 왜 ‘언니’라고 부를까. 온몸에 소름 돋는 징그러움을 떠오르다보면 ‘언니 최고’보다는 그저 얌전히 모든 언니들의 안녕과 행복을 바라고 만다. /김나은 여성주의 문화 기획사·출판사 우만컴퍼니 대표 △김나은 대표는 여성주의 문화 기획사이자 출판사인 우만컴퍼니를 운영하고 있으며, 군산시청년정책위원회와 군산시청년협의체 위원과 함께 전북양성평등센터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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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5 16:59

완주 거기가 어디야? 대구 거기서 왜 왔어?

2019년 3월,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을 뒤로 하고 홀연히 완주로 왔다. 그리하여 어느덧 1인 가구 6년차에 접어들었다. 홀로 왔지만 진짜 혼자는 아니었고 고향 친구가 먼저 완주로 와서 살고 있었다. 그렇다. 친구 따라 완주로 온 것이다. ‘아니 너는 무슨 삶의 터전을 바꾸는 걸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하냐’하면 할 말이 없다. 터를 옮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간다고 결정했으니 왔고 그 곳이 완주였다. 처음부터 완주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온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마침 완주에 왔을 때 청년들의 귀촌이 붐처럼 시작되고 있었다. 지역살이에 관심을 가진 친구, 타 귀촌으로 유명한 지역에서 살아본 친구들도 많다는 것을 와서야 알게 됐다. 완주로 가기 전 이민 가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낯선 지역으로 간다고 하니 친구들과 모이는 시간이 많았다. 그때마다 친구들의 반응은 완주? 거기가 어디야? 혹은 강원도 원주로 가는 줄 아는 친구들이 많았다. 왜 만주로 가냐고 정말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물어보던 친구가 잊혀지지 않는다. 원주까지는 예상했었다. 나도 그랬기 때문에. 그렇지만 만주는 정말 생각도 못했던 곳이라 깔깔 웃었다. 내 완주행을 설명할 때 가장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완주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대화하다 보면 억양 때문에 금방 내 고향이 탄로난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사투리를 덜 쓴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내 생각일 뿐이다. “나 사투리 안 쓰고 있지?”라고 물어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쓰고 있다”는 답을 듣는다. 말투에서 티가 나다 보니, “왜 완주로 왔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건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의 통과의례가 됐다. 대구에서 왔다고하면 유독 더 놀라는 친구들이 많다. 아무래도 동서 간의 왕래가 잦지 않아서일까. 그 다음 질문은 보통 “직장 때문에 완주로 왔냐”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아니다. 완주로 오기 전 당시의 나는 혼란스러운 취준의 시기를 겪던 취준생이었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 나름의 계획과 포부를 가지고 시작한 일은 나와 맞지 않았다. 내 인생 최초의 암흑기였다. 출근길 버스에서 ‘크게 다치지 않고 회사만 안 갈 수 있을 정도로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자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이대로는 안된다고 생각해 초강수를 뒀다. 내 삶을 바꾸려면 내가 살고 있는 터전을 바꿔야 한다는 마음으로 완주행을 택했다. 한 번도 가족을 떠나 살아본 적 없었다. 막연하게 언젠가 독립을 하겠지 했지만 그게 혼자 연고가 없는 타지로 가는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 못 했다. 그러나 삶이 다 그렇지 않은가 예상치 못한 변수는 늘 있고 마침 그때의 내게 찾아온 것이다. 퇴사 후 일주일만에 완주로 왔다. 바로 직전까지 일을 하다가 갑자기 할 일이 없었다. 대구보다 더 조용한 이곳에서 무얼 해야할지, 좋으면서도 막연했다. 기껏 짐 싸들고 와서야, ‘무작정 온 것은 아닐까’, ‘여기서 내가 뭘 하고 살 수 있을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눈물이 났다. 그럴 때는 밖으로 나가 동네를 탐험하며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비비정마을부터 삼례문화예술촌과 책방 그리고 삼례성당까지, 돌이켜보니 그곳에서 참 위로를 많이 받았다. 조용하면서도 쉬어갈 수 있는 곳, 아무도 내게 닦달하지 않는 동네. 그렇게 나의 완주 정착기가 시작됐다. /조아란 프리랜서 △조아란 프리랜서는 2019년 완주로 귀촌해 완주소셜굿즈센터 청년정책담당, 완주청년공간 청촌방앗간 대표를 거쳐 현재 결혼이주여성과 중도입국자녀들의 한국어 강사와 풀뿌리교육지원센터 마을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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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8 15:21

자생1

나는 왜 나인 것일까. 다른 모든 사람들은 내가 볼 수 있지만, 나는 거울을 통해야만 나를 볼 수 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큰 머리, 평범한 이목구비 등 이 몸은 내가 선택한게 아닌 태어나보니 이 몸이었다. 부모님도, 집도, 태어난 곳도, 모든 게 내 선택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건 살면서 한번쯤 고민할 이야기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중요했다. 나의 존재가. 난 태어났다. 1985년 아주 가난한 집에서, 말 그대로 집에서 태어났다. 무슨 말이냐면, 주위 또래 친구들에게 물어도 병원이 아닌 집에서 태어난 나같은 아이는 거의 볼 수 없었다. 허름한 시골 할아버지댁 단칸방에서 날 낳은 어머니는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할머니가 시키는대로 집안일을 해야했다. 그러다 내가 태어난지 보름만에 부모님은 할머니댁에서 쫓겨났다. 뭐, 아버지가 새로 사오신 작은 냉장고를 부엌에 안두고 어머니가 지내시는 단칸방에 뒀다는게 이유라고 들은 거 같다. 고작 그 이유에 갓난아기를 업고 길바닥에 친할머니에게 쫓겨 나가야했던 것이다. 커서 들어보면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집 구할 돈 한푼이 없어 어머니가 친정에 겨우 사정해 돈을 빌리고 허름한 달방을 구한 뒤에야 부모님과 나는 또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흔하다. 이게 또 무슨 말이냐면, 드라마나 영화에 흔히 나오는 클리셰처럼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개차반이 되고 가정에는 신경을 거의 쓰지 않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자식만 바라보며 온갖 힘듦을 다 안고 사는 그런 분이었다. 초등학교때쯤에 나는 이런 집이 명확하게 뭐가 잘못됐고 싫다기보다는 그냥 마음이 뭔가 허전했다. 친구 사귀는건 좋아했지만 아버지의 술주정 때문에 한곳에 오래 살지 못하고 이사를 자주 가야 했기 때문에 초등학교만 학교를 7개를 다녔다. 그러니 진득한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고 텃세에도 많이 시달리기도 했다. 내가 사춘기를 겪고 큰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사춘기를 얘기하라면 꽤나 일찍부터였었나보다. 그래서 그 허전한 마음을 채우려 나는 만화책을 많이 보기 시작했다. 당시 책방에서 100원, 200원에 만화책을 빌려봤었는데 처음봤던 게 '짱구는 못말려'였던거 같다. 그러면서 노트에 낙서를 끄적이기 시작했는데 참 재밌고 설레였다. 내가 원하고 상상하던 것들을 만들고 그것들이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대로 그려나가는 게 친구를 만나거나 어디 놀이동산을 가는 것보다 더 환상적인 놀이였다. 그렇게 만화에 미쳤었다.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고 단행본도 직접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대여를 해주며 작은 용돈도 벌기도 했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엄청난 재능도 아니었다. 나 말고도 만화를 그리는 친구들을 만나보면 나보다 훨씬 잘 그리는 친구도 있었다. 처음 그 경험을 했을 때는, 아! 일반 친구들이 나를 봤을 때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소름 돋는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지고 싶지 않은 승부욕에 또 그림을 열심히 그렸었다. 만화를 그리는 건 나에게는 단순 취미가 아니었으니까. 다 말하지 못할 힘든 가정사에 어머니의 든든한 사랑과 만화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내가 아닌 망가진 내가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부모, 환경, 신체 등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받은 삶이 어떻게 생각해보면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고민의 끝에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인 나의 이 삶에서 살아가는데 한가지 쯤은 미치는 것도 좋을 거 같다. 미쳐서 쌓인 숙련도는 외면의 무기가 될 수도 있고, 내면의 방어구가 될 수도 있다. 삶은 전쟁터와 같으니까. /홍인근 웹툰작가 △홍인근 작가는 네이버 카카오페이지 등에 웹툰을 연재하고 있으며 T스토어 OSMU 웹툰 공모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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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1 15:13

전전긍긍하지 않는 삶을 위하여

다시 정읍에서 삶을 꾸려온 지 올해로 만 5년이 되었다. 열다섯에 떠나 서른다섯에 돌아왔으니 20년 만이다. 정읍은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이 서넛 생긴 것 말고는 어린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시내 풍경을 보며 근근이 명맥을 이어온 옛 도시의 모습을 본다. 오히려 쇠락한 느낌도 지울 수 없다. 나는 왜 이곳으로 돌아왔을까. 아무것도 명확히 하지 않은 채로 귀향을 결심했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전전긍긍하지 않는 삶을 위해서. 5년이 지난 지금 좌충우돌 끝에 이제야 땅에 발이 닿은 기분이 든다. 무엇이든 내가 선택하기만 한다면 내 것이 될 줄 알았던 시기에는 더 많은 기회가 있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런데 기회가 있는 곳 에서는 공부를 할 때에도, 돈을 벌 때에도 돈과 시간과 노력 등등을 쏟아부어야만 했고, 가족을 이루어 선택과 집중을 통한 안정감이 겨우 생겨날 즈음에는 출산과 육아라는 인생 최대의 고비가 찾아왔다. 나와 남편은 아이와 같이 행복하게 지내고 싶었고 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그것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나누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과연 원하는 만큼의 행복을 구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분명한 건 돈이건 시간이건 더 가져야 했고, 가지지 못하면 불안할 것이었다. 우리가 그간 얻은 것을 구하던 방식으로는 평생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이루어도 부족한 삶. 발을 동동 구르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안을 안고 전전긍긍하는 삶은 애초부터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누구의 딸이 아닌 내 이름으로 살고 싶어 떠났던 고향이었다. 돌아와서 보아도 여전히 누구누구의 딸로 살아야 할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는 어디서건 내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겠다 하는 묘한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무엇을 해야지, 정한 바도 없이 덜컥 삶의 장소와 방식을 바꾸고자 했으니 분명 앞길이 캄캄했지만 불안함을 안고 살지는 않을 것 같은 믿음이 있었다. 나와 남편이 그동안 공부하며 일하며 얻은 것들은 여기 어딘가에서 분명히 쓰임새가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다행히도 나와 남편은 그간 쏟은 노력의 결과물들로 가족을 건사하며 지낼 수 있었다. 이름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직업을 가진 남편은 특유의 성실함과 전문성으로, 나는 나대로 쌓아둔 실력을 풀어 부모님의 이름이 아닌 내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지난 5년간이었다. 물론 부모님의 이름은 여전히 내 이름의 한켠을 장식한다.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5년이기도 했다. 귀향의 거창한 이유를 찾아보려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아무리 떠올려도 우리의 선택에는 큰 동기가 없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이루어진 일의 연속이어서 원래 세웠던 계획이었나, 싶기도 하다. 넉넉하지 않지만 우리는 부자가 되려고 정읍에 온 것이 아님을 종종 돌이켜본다. 지금의 상황은 돈만으로는 얻어낼 수 없다. 작은 소도시의 삶은 대체로 잔잔하고 평화롭지만 그 덕분에 사소한 것에도 기쁨을 느낄 수가 있다. 40년도 더 된 노포임에도 기다림이 짧은 맛집, 피 터지는 예매와 전혀 상관없는 여유로운 영화관람, 귀갓길에 선물처럼 나타나는 내장산의 노을처럼 지나치게 사소한 일상들을 성글게 이어간다. 정읍에서의 삶에 조금 더 성실해지는 이유들이다. /유새롬 작은새책방 대표 △유새롬 대표는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정읍에서 독립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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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4 15:14

견뎌내는 힘

매년 반복되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올해는 유독 더 더운 거 같아”를 반복하는 계절, 여름이 찾아왔다. 정수리를 뚫을 듯 내리쬐는 햇빛과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생각하면 그리 좋아하는 계절이 아니다. 하지만 푸릇푸릇한 나무와 꽃들이 바람과 함께 살랑살랑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아 즐겁기도 하고, 술래인 햇빛을 피하고자 그늘을 찾아다니며 숨바꼭질하듯 일상을 보내고 나면, ‘나름 알차게 보냈구나’ 기억되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렇게 천천히 이 계절을 여러 감각으로 느끼다 보면 유독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 벗어던져도 덥고, 아무리 시원한 것도 뜨겁게 만드는 무더위에서 쓰러지지 않았음은 결국, 버티고 견뎌낸 자가 강한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달까.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로 요즘은 ‘견뎌내는 자가 강하다’라는 표현이 마음에 머문다. 살아남고 싶기에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강해야만 살아남는다’라는 우열을 나누는 사회적인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강함’이란 스스로, 혹은 소중한 무언가를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가치를 가졌기에 좋아하는 표현이지만 때로는 이 표현을 마음껏 담을 수는 없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소위 ‘약자’라 분류되는 질병과 장애, 가난과 소수자, 인종과 성별과 같이 ‘다름’을 가진 이들이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음에도 자본과 우월주의라는 테두리에서 강함과 약함의 기준이 되기도 하고 때론 강함을 드러내기 위한 이용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다름’을 가진 주체가 정말 약해서일지 아니면 다름을 존중하지 못하는 ‘차별’이 옳고 그름의 기준을 흐리게 만든 것인지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다름’에 의해 삶이 존중되지 못하고, 약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나 또한 지나왔던 삶에서 약자였고, 어쩌면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프레임은 잘 벗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 약해서일 수도 있고, 세상이 나를 약하게 만들어서 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현재 내가 가진 신체적인 장애는 극복할 수 없다. 그렇기에 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적응하다 보면 결국은 나만의 방식과 지혜로 견뎌내게 된다. 앞으로도 나를 비롯해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상황들을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견뎌내는 자가 강함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 기꺼이 함께 견뎌내자. 그래서 자신과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져보자. 여름의 무더위 속 목적지를 걸어가야 할 때, 그늘은 보호막이자 안식처가 되어 무사히 그 여정을 견뎌낼 수 있게 한다. 다르게 말하면, 공동의 목적지를 향해가는 주체들에게는 뜻을 함께하여 힘이 되어주는 공동체가 있다. 나에게는 해시담이 그러하며, 앞으로도 많은 당사자에게 그런 해시담의 가치가 닿았으면 한다. 약육강식 사회에서 나를 둘러싼 대부분이 나를 ‘약자’으로 바라볼 때, 내가 강해지겠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다름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하고 있는 해시담과 다양한 영역 및 형태를 가진 ‘공동체’의 노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가진 한계가 사회적인 한계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주어진 삶을 잘 견뎌내기 위해서는 제도, 환경, 서비스, 등 다양한 체계가 개선되어야 한다. 변화를 위한 힘은 지역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나’라는 구성원이 관심을 가지고 동참할 때 실현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윤해아 (사)사회적 협동조합 해시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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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7 17:26

지역에서 활동가는 어떤 존재인가?

최근에 한 청년단체와 인터뷰를 한 일이 있다. 인터뷰의 목적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획자들은 지역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였다. 구체적으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기획자들은 어떻게 ‘돈을 벌며’ 살아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인터뷰했다. 나는 둥근숲 공간을 운영하는 공간기획자로 인터뷰에 참여했다. 질문들에 하나하나 답하다 보니 지역에서 활동가로, 기획자로 지속가능한 삶을 산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에서 활동가로서 살아가는 삶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대체 활동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우선 활동가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어떤 일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 적극적으로 힘쓰는 사람.” 이것으로는 부족한 듯싶어 나무위키의 설명을 덧붙여보면 “대체로는 시민단체나 정당 등에서 사회운동에 투신하고 현재 실현되지 않았으나 원하는 사회의 모습을 갈망하여 행동하는 사람들을 운동가 혹은 활동가라고 호칭한다.”라고 쓰여있다. 꽤 무거운 설명이 아닌가 싶다. 내가 느끼는 주변의 청년 활동가들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을 위해 각자의 기획으로 변화를 도모하는 사람 정도가 적당하지 싶다. 이렇듯 우리는 활동가라는 지역사회가 정의하지 못한 단어의 범주에 많은 사람을 포함해 획일화된 태도로 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든다. 이게 활동가들의 지속가능한 삶을 어렵게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활동가는 앞서 말했다시피 사회의 변화를 위해 각자의 기획으로 여러 시도를 하는 사람이다. 그럼, 활동가들도 기획자라 할 수 있겠다. 이런 활동가들은 대게 지역에서 보조사업을 통해 예산을 마련하고 그 돈으로 여러 활동을 펼친다. 그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기획자들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고 예산을 정리하는 모든 일을 총괄한다. 프로젝트 매니저의 업무를 수행하는 것과 다름 없다. 예산의 규모도 몇백만 원에서 몇천만 원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이런 기획자 몫의 인건비는 그 예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일을 하고도 합당한 값을 받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지역에서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이게 지역 활동가들이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게 마음이 아프다. 내가 지금까지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보조금 사업을 해보기도 하고, 둥근숲 공간을 운영하며 보조사업을 받아 수행도 해봤지만. 이런 현실에 대해 이해가 되는 이유를 찾지는 못했다. 우리 지역사회가 활동가, 기획자를 바라보는 관점이 과거에 머물러 있어서일까? 사전적 설명처럼 지역사회를 위해 한 몸 투신하고 노력하는 사람이니 돈이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오히려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인데 오래오래 할 수 있도록 더 챙겨줘야 하는 게 아닐까? 좋은 마음으로 하는 활동들은 돈을 바라면 안되는지. 사회에 필요한 활동을 하며 돈을 버는 게 더 의미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난 아직 이런 물음에 명확한 답을 주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부정적인 이야기들만 늘어놓았지만, 여러 보조사업이 지역의 문제에 관심 있는 초기 단계의 활동가에게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이를 통해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기획하고 진행하며 경험을 가진 기획자가 된다. 중요한 건 이런 경험이 쌓인 기획자를 지역이 어떻게 지역에 남게 하고 성장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 지역사회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기획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우리의 태도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바꿔나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래야만 우리 지역의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을 테니까. /류영관 둥근숲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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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0 17:27

일상의 소중함

마지막 칼럼에 대한 내용을 많이 고민했다. 마지막이다 보니 주제에 대한 고민을 글을 쓰기 직전까지 고민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칼럼은 문화예술 번외로 최근 나에게 일어났던 일로 글을 적어보려 한다. 2주 전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할머니를 뵈러 가족들과 병원으로 갔다. 두려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도착했고, 이미 임종을 맞이한 할머니 얼굴을 뵙게 되었다. 할머니의 얼굴은 나의 예상과는 달리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계셨다. 할머니가 영영 떠났다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나를 뒤덮었지만, 동시에 안도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곧이어 가까운 친척들이 도착하고 장례식장으로 모두 이동하였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자마자 상복으로 갈아입고 엄마에게 하얀 리본 핀을 달아주었다. 슬픔이 잠식할 것만 같았던 공간은 점점 생기가 돋았났다. 오랫동안 못 보았던 친척들을 보니 매우 반가웠고, 찾아온 손님들을 맞이하고 육개장을 정신없이 날랐다. 그리고 입관식을 하였고 그때 뵌 할머니의 얼굴은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할머니의 연세가 97세였는데 그동안의 생명 연장 과정은 자식들의 욕심이 아니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할머니의 죽음을 맞닥뜨린 엄마와 삼촌 이모들은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그래도 장성한 자식들이 모두 잘 되어 함께하는 것이, 이것마저 복인가 싶었다. 장례 둘째 날이 되었다. 잠깐 쉴 수 있는 시간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촌들과 인사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3일이라는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뒤이어 삼우제를 지내고 친척들과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어색할 것 같았던 사촌들과 허물없이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10년 만에 본 사이인데도 어제 본 사이처럼 편안한 게 신기했다. 그리고 이 시간이 할머니가 주신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부고 소식에 뒤도 안 돌아보고 찾아와 준 친구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는데 이 소중한 관계를 내가 그동안 잊고 살았구나 싶었다. 상 중에 기업과 약속했었던 대규모 강의를 나갔었는데,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돈을 벌러 가는 내 모습에 마음이 힘들었다. 그런데 이때 했었던 강의의 블로그 리뷰를 좋게 본 기관에서 또 다른 강의 의뢰가 들어왔다. ‘일할 수 있는 기쁨’을 잊고 있었는데 의뢰 들어온 강의가 할머니가 주신 선물 같아 “할머니가 나를 도와주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을 겪고 내가 깨달은 것은 ‘일상의 소중함’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을 칼럼에서 하고 있는 내가 우스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다 아는 이 이치를 뼈저리게 느껴본 적이 있는가? 이 가치를 느껴본 사람이라면 나의 글에 공감할 것이다. 나는 이 가장 중요한 인생의 가치를 잊고 지냈었다. 말로는 현재에 감사하다고 했지만 온전한 진심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소중한 가치를 많은 사람이 느껴보았고, 느껴보지 못했다면 느껴보길 바란다. 진정으로 삶이 행복해지고 감사해질 것이다. 매사 소중한 시간이라 생각하니 기분 나쁜 일도 없었다. 이 글은 청춘예찬의 마지막 칼럼이 될 것이다. 마지막 칼럼은 모두가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 글을 쓰게 해주신 할머니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내가 행복한 것처럼 모두가 행복하길,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소정 문화예술교육공간 오이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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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3 15:11

청춘의 여정

한 회사에 오래 다니며 정년퇴임을 하는 우리의 어르신들의 성실함을 이어 받지 못한 걸까? ’한 가지 일에 끝을 봐야지‘라 말씀하신 어르신들의 충고가 왜이렇게 거스르고 싶은지. 이 것이 청춘인 건가? 2020년 4월 부터 준비하고 많은 시행착오 끝에 홀로 10월에 이름도 생소한 제로웨이스트샵을 오픈하였는데 시간이 흘러 5번의 해가 바뀌었다. 그 시간 동안 환경은 친환경에서 필환경이 되었고, 환경 교육이라는 게 더이상 특별교육이 아닌 의무교육이 되어 있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느냐 묻는다면 선두에 서서 변화의 혁신을 일으키진 못했으나 자원순환으로서 지역 내에서는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미는 전달하지 않았나 하는 자찬을 해 본다. 그러나 현재 내면의 거울을 보고 있노라면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의 색이 더 진한 잔잔한 강가에 자리 잡은 물고기 같았다. 잔잔한 강가 머물다 보니 안주해지고 더 이상의 그 이상이 생기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감도 때론 생각났으며, 또 신선한 물고기를 보면 질투도 났다. 점점 강의 색이 나의 색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어느 시점, 더 넓은 세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고민 끝에 이젠 이 잔잔한 강가를 떠나려 한다. 일각에서는 이정도면 자리 잡은 활동가인데 아깝지 않으냐라고 걱정해 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도 ‘제로 웨이스트’라는 단어가 생소했을 무렵에 ‘제로웨이스트샵’을 창업했고,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이 ‘제로웨이스트’라는 단어를 낯설어 하지 않고, 오히려 더 나아가 탄소중립을 외친다. 약해질 때마다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은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라는 조동화 님의 시를 매번 되새겼다. 내가 가진 신념에 대한 소신의 답이 있다면, 그걸 계속 증명해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의 대가로 만 4년 동안 지역에 함께 하면서 다양할 활동에 함께 참여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원을 순환하기 위한 재활용품 또는 재사용품들이 매장에 모이고, 또 절대적인 필환경을 외쳤을 때에 느꼈던 희열과 자부심은 그 어떤 순간들과 비교할 수 없게 자부심을 느꼈다. 낯선 단어였지만 이 단어의 뜻을 매장에서 형체화 시켜줬고, 어떻게 하는 방법을 알려 줬으며,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강의했다. 이런 성향의 나는 절대 이 강에 만족스러울 리 없다. 그래서 더 큰 바다로 나아가 가서 환경의 의미를 배우고 또 되새기기 위해 머나먼 향해를 떠날 예정이다. 제로웨이스트샵을 운영하는 환경활동가의 종말 서사를 이 칼럼에 기록하는 이유는 내 선택이 정답인지 오답인지 끝없이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전달 해주고 싶어서이다. 청춘, 푸른 봄이 지난 6월의 어느 날, 나의 청춘은 어떤 색깔일까? 그리고 어떤 모습일까? 많은 것들을 시도하고, 나를 찾아가는 시기이다. 36살의 청춘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증명해 나가기 위해 도전도 하고 모험도 떠나는 여정들이다. 그러면서 느끼는 배움의 결과물들이 40살의 나를 만들 것이고, 그 40살의 어느 날들이 모여 ‘나’라는 수식어를 꾸며줄 것이다. /서늘 제로웨이스트숍 늘미곡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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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6 15:33

대중(大衆)교통이 놓치고 있는 무리에 대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바쁜 일상 속 이동의 편리를 위해 다양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특히 ‘버스’는 일정한 시간대로 움직이는 규칙성과 택시나 지하철보다 저렴한 이용금에 따라 높은 접근성을 지닌다. 그리고 사회 속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의 인권이 발달함에 따라 버스의 형태도 계단이 많은 일반 버스(2단 이상) 형태에서 차고의 단차가 낮은 ‘준저상 및 저상’버스가 현행되고 있다. 이는 노인, 아동, 임신부, 장애인, 목발 이용자 등의 교통약자와 일반고객의 접근성에도 편리를 제공한다. 특히 입출구에 단차를 없앤 저상버스(초저상버스)의 경우는 휠체어나 유아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슬로프 장치과 좌석을 마련하여 배리어프리(barrier-free) 시설을 구축하고 있다.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장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안도감을 가지게 하는 것일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 감동을 알 것이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저상버스의 목적만큼 아직은 우리의 현실에서 다양한 교통약자들이 충분히 배리어프리의 장치를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통약자’라는 표현으로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 대상을 떠올릴 수 있을까? 노인, 아동, 임신부, 휠체어, 유아차, 목발 이용자, 등 다양한 대상이 있지만 아마 가장 많이 떠오르는 대상은 ‘노약자’이지 않을까? 버스를 타면 가장 먼저 보이는 좌석도 ‘노약자’ 우대 좌석이며, 대중교통의 이용 시 배려를 배울 때에도 “어르신들께는 자리를 양보해야 해”를 먼저 배운 세대들에게는 더더욱 교통약자의 범위가 제한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교통약자를 고려하고 배려하는 대중교통의 문화에서 아직도 이용대상에 제한적인 이미지를 준다는 것이 단순히 고정된 인식에서만 비롯된 것일까? 일상 속에서 스쳐지나간 우리의 기억을 더듬어보자. 우리가 버스를 이용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1. 자주 이용하는 정류장에서 휠체어 및 유아차 이용객이 기다릴 수 있는 배려공간이 있나? 2. 도로나 인도에 휠체어 및 유아차 이용객이 정류장에 접근할 수 있는 주변 경사로가 있나? 3. 버스를 타고 내리는 휠체어 및 유아차 이용객을 위해 슬로프와 좌석 안전장치가 작동하는 모습은 일주일에 몇 번 정도 봤지? 4. 교통약자 스티커에 어떤 픽토그램이 표시되어 있지? 5. 교통약자 좌석이 좁거나 턱이 올라와 있지는 않나? 이 의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풍부한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까. 매일 일상에서 다양한 사회구성원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다양한 교통약자를 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몇 주 전, 집으로 향하는 시내버스 안에서 교통약자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노약자, 임신부, 휠체어 및 목발 등을 사용하는 모습이 담긴 스티커였다. ‘이 자리는 필요로 하시는 분께 양보해 주십시오.’라는 문구와 좌석을 바라보는데 ‘모순’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가득 채웠다. 좌석은 손잡이 봉에 가려서 진입로가 너무나 협소했으며, 엔진으로 인해 바닥은 높게 올라와 있었다. 스티커에 담긴 그 어떤 대상도 편리해 보이지 않는 좌석이었다. 물론 모든 버스가 그렇진 않겠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편의에 대한 기준과 배려가 더 이상 왜곡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모두를 위한 환경과 사회적 가치가 그 역할을 실현하기 위해서 대상에 대한 인식에서만 멈추지 않고 실질적이며 진실되게 실천해야 하지않을까. /윤해아 (사)사회적 협동조합 해시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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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30 16:39

지역이 콘텐츠가 되는 시대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들

최근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의 콘텐츠 하나가 논란이 되었다. ‘메이드 인 경상도’라는 지역탐방 콘텐츠인데 그 지역 출신 유명인이 함께 나오기도 하고 직접 지역을 돌아다니며 웃음을 주는 개그 콘텐츠다. 나도 꽤 재미있게 즐겨보던 콘텐츠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최근 경북 영양군을 방문하여 찍은 편에서 지역을 개그의 요소로 사용하는데 선을 넘었고 지역 비하 논란으로 구설에 오르고 있다. 채널 운영자는 논란이 불거진 뒤 경솔하고 무지했음을 반성하며 사과문을 올렸다. 지역이 콘텐츠가 되는 건 환영이지만 이런 일들이 영 달갑지 않다. 보통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로컬콘텐츠라는 것들을 대부분 지역의 유명한 것들을 찾아보기좋고 이쁘게 만들어낸 것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없지는 않았다. 노잼의 도시 대전이라던가 마계인천 등 지역의 이미지와 연관 지어진 별명들이 밈처럼 개그콘텐츠화 되어 다양하게 소비되기도 했다. 이런 밈들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유쾌하게 콘텐츠가 되었지만 이번 피식대학의 영양군 콘텐츠는 그렇지 못했고 불쾌함만 남겼다. 나도 이런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역에서 로컬크리에이터랍시고 콘텐츠들을 기획하는 나를 돌아보게 했다. 그동안 나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지역을 소재로 콘텐츠들을 만들어왔나? 지역을 소재로 콘텐츠를 만들 때는 어떤 것들을 고려하고 고민해야 하는가? 주의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질문들이 머릿속에 쏟아졌다. 그동안 깊게 고민해 본 적 없는 것들이다. 지역에 살고 지역이 좋다고 말하면서 지역이 좋은 콘텐츠로 많은 이들에게 소비되는 것이 지역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왜 그 기준에 대해선 고민한 적이 없었다. 로컬시장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지만 아직은 작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당장에 소비되는 콘텐츠를 만드는 데 집중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팔리기 위한 자극적인 콘텐츠만 생각하다 보면 외부인이 아닌 지역에 사는 우리조차도 이런 실수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고민해 두어야 나도 나중에 비슷한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피식대학 사건과 관련한 기사에 댓글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다. ‘웃음을 만드는 것과, 웃음거리로 만드는 건 다르다.’ 무엇이 지역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는가. 결국은 태도와 공감이 결여된 콘텐츠가 차이를 만든 게 아닐까 싶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태도는 지역을 보이는 것만 보고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깊이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다. 사람도 겉모습만 보고 다 알 수 없듯 지역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진짜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이 없다면 콘텐츠의 깊이도 부족하고 콘텐츠를 소비하는 이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게 콘텐츠를 만나는 이들에게 공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 대상이 되는 지역 주민들의 공감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역은 한 사람처럼 하나의 대상이 아니다. 그곳에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내가 만든 콘텐츠가 누군가에겐 불편함과 상처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지역 콘텐츠라고 해서 마냥 좋은 메시지만 전하자는 게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앞서 말한 깊이가 정말 중요할 것이다. 지역소멸의 시대에 로컬콘텐츠는 이제 우리에게 익숙하고 흔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소비하다간 이번 피식대학 사건처럼 지역이 상처받는 일이 또 생기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지역을 지키며 잘 알리기 위해서는 지역에서부터 이런 고민을 해두어야겠다. /류영관 둥근숲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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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2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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