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포 심수관은 일본에서 도예가로서 명망이 높다. 그가 남원에서 개최하는 제78회 춘향제에 참석한다고 한다.그의 삶의 궤적(軌跡)속에는 우리 역사 비극이 숨어있다.그리고 일본문화의 원류(原流)는 백제이다.
백제 근그수왕때 일본왕의 요청에 따라 박사 왕인(王仁)을 보내 논어(論語) 10권과 천자문 1권을 전달했다. 이런 내용들은 일본의 역사책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 일본인들도 백제로 부터의 수혜를 인정하고 있다.그후에도 옷을 깁는 직공(織工),기와 굽는 와공(瓦工),목수등이 백제로부터 건너갔다.
도예가 심수관은 그의 선조가 정유재란때 왜병에게 남원성이 함락되어 도공(陶工)들이 붙잡혀갈 때 그중 한사람이었다. 이때 조선을 침략했던 왜장(倭將)들은 도공을 비롯해서 목수,석수,금공, 염공, 자수공, 인쇄공, 심지어 꿀벌을 잘다루는 기술자들까지 끌어갔다.
특히 도공에 더 눈독을 들인 이유는 그당시 일본에서 다도(茶道)가 귀족, 사무라이,영주들 사이에 엄청난 붐을 일으키자, 다도에 쓰일 찻그릇이 당연히 각광을 받게 된것이다. 그중에서도 조선의 도자기가 가장 인기가 있어 부르는것이 값이었다고 한다.또 한편으로는 도자기가 용감한 사무라이에게 무공(武功)의 대가로도 하사 되었다고 하는데 도자기를 일상 생활도구로 사용되는 조선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래서 일본 역사가 중에는 농담으로 임진왜란은 도자기가 탐나서 일으킨 전쟁이라고 까지 말한다. 조선의 도공들에게 더욱 혈안이 된 일본인은 지금의 가고시마 일대의 영주였던 시마즈요시히로 였다. 시마즈는 남원성이 함락되자 도공 70명을 이끌고 일본으로 갔다.
그들은 일본 정부로터 우대를 받았으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 도공들은 평민에서 사족(士族,사무라이 계급)으로 편입까지 되었다. 그들에 대한 보호정책으로 일본식 이름을 못쓰게 했으며 조선말을 사용게 했고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쓰며 한복을 입게했다. 심수관의 본명은 심혜길인데 그의 최초의 선조는 심당길,2대는 심당수,3대는 심도길,이렇게 해서 그는 14대째 이다.그러나 도자기 원조인 우리에게는 도예가(陶藝家)의 맥(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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