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호섭(전북산악연맹회장)
오랜 시간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시내도로로 들어서면 운전적응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환경의 변화와 속도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기 때문이다.
산 사람들의 귀갓길도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 산길을 걷다가 다시
아스팔트를 밟다보면 우선 걸음걸이부터가 달라진다. 산을 벗어났다는 아쉬움과 다시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것이다.
흔히 등산을 인생에 비유할 때 오르막과 내리막을 그 예로 든다.
정복의 기쁨과 하산의 아쉬움을 인생유감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산사람들이 등산의 참맛을 정상에서만 즐기는 것은 아니다. 산과 만나는 설렘, 산과 나누는 대화, 산과 헤어지는 아쉬움까지도 모두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한 산사람이다.
산사람들에게 있어 완주를 가능케 하는 것은 호흡조절이다. 코스의 난이도와 거리에 맞춰 체력을 분배하는 능력이 등산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의 속도 조절 역시 중요하다.
그래서 자칫 욕심 때문에 힘에 겹도록 멀리 내딛은 발걸음이라면 서둘러 제 페이스를 찾아야 한다. 등산에서 길을 잃으면 새로운 출구를 찾지 말고 오던 길로 돌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후회할 일도 많고, 반상할 일도 많다. 스스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삶이 얼마나 있을까? 사람들은 대부분
성공을 향해 하염없이 달려가다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정상지점을 통과한다.
그러다보니 내리막길인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오르막 걸음으로 땀을 흘리는 경우가 있다.
인생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은 내리막이 있기 때문이다. 알프스에 가면 해질 무렵 관광객의 발길이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한 편은 붉게 물든
석양을 구경하러 가는 쪽이고, 한 편은 잠자기 위해 호텔로 가는 쪽이란다. 호텔로 가는 관광객은 다음날 해맞이를 보러 가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든 사람들로 대부분 한국인이란다.
우리에겐 지는 해보다 떠오르는 태양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다.
떨어지는 해를 보면 그저 애달프고, 내리막이라면 왠지 서글퍼진다.
인생에 있어 종착점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슬픈 일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겐 낮 문화 보다는 밤 문화가 부족했고, 황혼문화가 특히 열악했다.
등산에 있어 의미 있는 하산은 산행의 참맛을 더해준다.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으면 정상정복의 기쁨도 퇴색되기 마련이다. 노년이 아름다워야 잘 산 인생이란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인생여정에는 수많은 굴곡이 있다. 비포장 길도 있고 진흙탕 길도 있다.
인생의 방황은 이 거친 길을 통과하는 해답을 찾는데서 시작된다.
이 해답 속에는 스스로 잘 산 인생이 있고, 남이 잘 산 인생이라고
평가해 주는 인생이 있다.
물론 성공한 인생과 잘 산 인생은 다르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삶이 반드시 성공한 인생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상처와 실패 앞에 솔직해 질 수 있는 삶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잘 산 인생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이 성공하기만 하면 무엇 하랴 성공의 결과를 어려운 이웃과 소외된 사람들을 비춰주는 촛불이 될 때 잘 산 인생이 아닐까?
/엄호섭(전북산악연맹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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