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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현의 명창이야기] ⑩서민의 표상 이날치

민중적 감성에 접근한 '소리인생'…남녀노소 모두 사랑받아…예술가로서 험난한 구도의 길 걸어

국장 이날치 기념비 (desk@jjan.kr)

이날치는 후기 8명창 중에서도 서편제 소리를 대표하는 소리꾼이다. 서편제 소리는 박유전의 소리 계통을 이어받은 소리를 일컫는다. 박유전은 박창섭 이날치 정창업 정재근 등의 제자를 두었는데, 박창섭은 별다른 제자를 두지 못해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고, 정창업은 나주 함평 등지에 소리를 전승시켰으며, 정재근은 전남 보성에 머물면서 자기 집안을 중심으로 소리를 전승시켰는데, 나중에 김세종판 <춘향가> 를 받아 들여 독특한 소리를 형성하여 이른바 보성소리로 발전하였다.

 

이날치의 소리는, 화순 출신으로 광주 속골에서 살았던 김채만에 의해 담양 광주 화순 등지에 퍼져, 이른바 광주소리가 되었다. 이 광주소리는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6·25때 박동실 공기남 등 중심 인물들이 월북한 뒤 그 세력이 급격히 약해져 버렸다. 그러나 아기자기한 기교와 정교한 창법을 대표하는 이날치계의 소리는, 현존 판소리에 끼친 심대한 영향으로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날치는 1820년에 태어나 1892년 전남 장성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명은 경숙이고 날치는 예명인데, 본명보다는 예명으로 더 알려져 있다. 예명을 '날치'라고 부르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몸이 날쌔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성깔이 날카로웠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날치는 전남 담양군 창평면 해곡리 1구 얼그실마을의 유씨 집안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유씨 집안의 한 사람이 후에 수북면 대방리로 이사를 가게 되어, 그 때 이날치도 따라서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날치 기념비는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 병풍산 아래 청소년 야영장 입구에 서 있는데, 이 부근에는 이날치가 판소리 창자로 대성하기 이전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는 집이 있는 등, 이날치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

 

이날치는 종살이를 하다가 광대들과 어울려 다니게 되면서 줄타기의 명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만족할 수 없었던 이날치는, 소리꾼이 되기 위해 당시 최고의 동편제 소리꾼인 정읍 고부 출신 박만순의 수행고수가 된다. 이날치가 박만순의 수행고수가 된 것은 박만순의 판소리를 배우기 위함이었다. 박만순은 당대 최고의 소리꾼이었던만큼 자부심과 오만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이날치는 박만순의 고수였지만, 실제 나이는 박만순보다 10여 년 연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박만순이 이날치에게 발 씻을 물을 떠오라고 하였다. 대야에 물을 떠온 이날치는 자신에 대한 박만순의 경멸을 견디지 못하고, 그 물을 박만순에게 끼얹고는 그 길로 박만순 곁을 떠나,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 들어가 각고 끝에 마침내 득음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날치는 수리성(거칠고 탁한 소리)의 큰 성량과 슬프고 한 서린 목소리를 장기로 하여, 나중에는 박만순 김세종 등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조선창극사」에는 박만순과 이날치를 비교하여 '박만순의 소리는 식자에 한하여 칭예를 받지만, 이날치의 소리는 남녀 노소 시인 묵객 초동 목수(나무꾼) 할 것 없이 찬미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라고 써있다. 이는 이날치의 서편소리가 보다 서민적·민중적 감성에 접근하는 것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종살이부터 시작한 이날치의 성장 배경이 그의 예술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지금도 광주소리는 가장 서민적 감성에 가까운 소리로 평가받고 있다.

 

이날치는 전라남도 장성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그 흔적은 전혀 찾을 길이 없다. 한 때 이날치가 살았던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에 우뚝 서 있는 '국창 이날치 기념비'는 높은 단 위에 북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소리는 흔적도 없고, 한 때 온갖 모멸을 감수하면서 메고다녔을 소리북의 형상이, 종살이로부터 시작하여 줄광대, 고수를 거쳐 마침내 대명창이 된 이날치의 예술가로서의 험난했던 구도의 길을 어렴풋이 얘기해주고 있다.

 

/최동현(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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