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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3.1운동 이후 - 장세균

지난 10일, 임실군 오수면 일대의 초등학교 학생 일부가 91년전의 3.1만세 운동을 상기시키는 3.1운동 재현 행사를 벌렸다고 한다. 3.1운동은 단순한 만세 운동만은 아니었음을 아는것이 중요하다. 3.1만세 운동을 기점으로 다양한 독립투쟁이 전개되어 갔던 것이다.

 

첫째는 임시정부 수립이요 두 번째는 만주 지방의 무장독립 투쟁이다.세째는 의열투쟁이다. 3.1 운동 이후 노령(露領)의 대한민국 의회정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서울의 한성 임시정부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노력이 기초가 되어 1919년 9월에 상해를 본부로 하는 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정부의 정통성은 한성 정부를 계승하고 의회 전통은 노령(露領)의 대한민국 국민의회를 잇는 것으로 절충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내의 지방색 갈등으로 임시정부의 구심력이 많이 떨어졌으나 1931년 일제의 만주사변 이후에야 활기를 돠찾고 김구 선생의 지도아래 한인 애국단이 조직되었다.

 

중국 홍구 공원에서의 한인 애국단원인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중국 장개석이 중국군 30만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 청년 한사람이 해냈다고 극찬을 했을 정도였다. 중국 정부는 이때부터 상해 임시정부에 주목을 하기 시작했다.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의 특색은 무장 독립전쟁으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이범윤이 이끄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기도 했다. 김좌진, 이범석등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서일,홍범도 ,김좌진, 김규식, 이청천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단의 활동도 컸다. 1923년 1월에 종로서에 일경(日警)들과 총격전을 전개했던 김상옥은 의열단 소속이었다. 김시현, 황옥, 김재진, 권동산등이 상해에서 폭탄을 가지고 안동, 신의주를 거쳐 국내에 잠입하려다 사전에 발각된 '황옥경부(黃鈺警部)사건'은 의열단의 국내 잠입 사건이었다. 나석주 의사의 식산은행, 동척투탄 사건등도 의열단원의 의거(義擧)였다.

 

3,1만세 운동을 단순히 태극기 들고 만세만을 외쳤던 사건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3.1만세 운동은 평화적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끼게 하여 다양한 독립투쟁 방식을 낳게했던 것이다.

 

/장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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