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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광복군(光復軍) - 장세균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지난 7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그는 살아있는 마지막 광복군 출신이었기에 그의 죽음은 더욱 많은 감회를 일으키게 한다. 백범 김구선생의 비서였으며 사상계라는 계몽적 잡지를 창간했던 광복군 출신 장준하씨의 죽음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일제 지배를 배격하고 조국독립을 위해 어려운 시절에 광복군이 존재했었다는것 자체가 꺼지지 않는 민족혼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 드골의 지휘 아래 '자유 프랑스' 군대가 상젤리 개선문을 통해 파리에 입성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의 광복군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광복군은 해방후 미군정(美軍政)의 요구에 따라 무장 해제한 채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1년후에는 그나마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 광복군의 일부가 국방 경비대에 흡수되어 대한민국 건군(建軍)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에 중국 중경(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조직체로 출발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군은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敵)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내용의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광복군 총사령관은 이청천(李靑天), 참모장은 이범석(李範奭) 등 수명의 간부들이 임명되었다. 광복군의 존재는 단순한 상징적 의미 이상이었다.그 당시 중국 각지에는 약 60만명에 달하는 교포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며 그 가운데 20만명은 소집이 가능했다는 것이고 만주에 거주한 200만의 교포와 국내 동포까지 합치면 30만명의 광복군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 당시 임시정부의 판단이었다.

 

무력에 의한 독립론의 근거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1941년 하와이 진주만이 일본으로부터 폭격을 당하자 관망적이었던 미국이 2차 대전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대일 선전포고와 더불어 임시정부도 1941년 12월 10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였던 것이다. 광복군 출신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의 서거는 다시한번 광복군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대한민국 건국과 더불어 광복군의 존재 의의도 같이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 장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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