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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룡 前 총재는

대학 총장·향토사학가·애향운동가…왕성한 활동의 증표

김삼룡 전 전북애향운동본부 총재는 따라붙는 애칭이 많다. 대학 총장, 향토사학가, 애향운동가 등 수식어가 유난하다. "무엇으로 불리우고 싶냐"는 물음에 "그때그때 상황에 맡게 불러주면 된다"고 말한다. 그만큼 어느 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최선과 열정을 쏟아온 인생역정의 배려였다.

 

1925년 정읍시 북면 화해리에서 3남3녀 중 3남으로 태어나 할머니의 선업(善業)으로 오늘의 위치에 이르게 됐다.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대종사(박중빈. 1891~1943)와 후계 종법사 정산종사(송규. 1900~1962)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 할머니 당대의 집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 인연으로 14세에 익산 중앙총부로 출가했으며, 그 5년만에 대종사가 열반에 드는 슬픔과 허탈에 빠졌다. 인생의 본질에 눈 뜨는 시기였다.

 

해방 다음해 설립된 유일학림(원광대학교 전신)의 전문부 1기생으로 3년 교육과정을 마치고 군산교당 교무를 거쳐 원광대에 근무하게 된다. 그러나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그 학교에 전임강사로 돌아온 것은 35세 되던 1959년이었다. 세상일은 수레바퀴처럼 처음은 힘들어도 일단 구르면 탄력이 붙는 걸까. 학생처장 등을 맡으면서 대학면모를 다졌고 1971년 종합대학 승격 후에는 교무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73년은 또 하나의 운명적 선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초대소장을 맡게 된 것이다. 고고학은 전공이나 강의와 관련이 없었던 비교적 생소한 분야였다. 하지만 지역에는 마한 혹은 백제와 관련된 유적과 이를 뒷받침할 기록, 그리고 다양한 구비설이 남아 관심을 끌었다. 특히 익산이 백제의 수도인가, 미륵사는 이와 관련해 창건되었는지 등은 연구 과제로 내려왔다. 그 과정에 황수영 이병도 전영래 이병기 등 학자들이 뜻을 모았다.

 

무던하게 쫓아다닌 결과 1984년 59세로 일본 쯔꾸바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게 됐다. 그러던 중 박길진 초대학장의 열반으로 1986년 총장직에 올랐다. 하나의 인연이 다음으로 이어지면서 널리 뻗어가는 모양새였다. 그 다음해는 전북애향운동본부 총재를 맡게 된다. 진기풍·이존익·이치백 부총재와 방영선 사무총장이 오랫동안 함께 일을 꾸렸다. 1990년대에 만든 '애향장학금'의 수혜대상 1호는 서울대 재학생 유성엽(현 국회의원)에게 돌아갔다.

 

고희가 된 1994년 8년간의 총장직을 마감하고, 2003년에 전북애향운동본부 총재직을, 2006년에는 33년간 몸담아 온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직을 차례로 그만두었다. 국민훈장 동백장과 무궁화장, 전북대상(학술부문), 전라북도 문화상, 전라북도 어른상 등은 이런 일련의 활동 평가다. 파고들었던 일들은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자서전에 담아 내년에 발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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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성 dschoi@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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