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장안의 지가를 올렸던 김병종 교수(서울대 미대)가 ‘화첩기행’에 올린 글 중 일부다. 화려하면서도 정감이 뚝뚝 묻어나는 문체다.
하지만 하나 틀린게 있다.‘찾는 이 하나 없다’는 대목이다. 기녀(妓女) 매창은 처음에 공동묘지에 쓸쓸히 묻혔다. 그러나 400년이 지난 지금, 그 자리는 매창공원이 들어서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573년 부안에서 아전인 이탕종(또는 양종)의 서녀로 태어난 매창은 조선조 최고의 여류시인이었다. 흔히 북의 황진이, 남의 매창이라 했듯 그녀는 시조와 한시, 거문고에 능했다. 그녀와 10년 동안 교분을 나눴던 허균의 ‘조관기행(漕官紀行)’에 따르면 그녀는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뛰어났다. 그래서 첫 만남에서 ‘하루 종일 술을 나눠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세출의 문장가 허균은 매창이 죽자‘한 바탕 운 다음’ 2편의 시를 지어 그녀를 추도했다.
또한 매창은 같은 천민 출신으로 시재(詩材)에 출중한 유희경과는 시와 사랑을 함께 나누었다. 그녀가 남긴 유명한 시조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는 그를 생각하며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창의 작품은 500여 편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손이 없어 사라질 뻔한 것을 사후 58년 뒤, 부안 아전들이 구전으로 전하는 것을 모아 개암사에서 ‘매창집’으로 간행했다. 여기에 그녀의 한시 57편이 전해진다. 그녀는 죽어 부안읍 봉두뫼 공동묘지에 묻혔고 이곳이 소위 ‘매창뜸’이다. 부안군은 1997년에 다른 분묘들을 이장하고 이 일대 5000여 평에 매창공원을 조성했다.
최근 부안에 석정문학관이 개관했다. 한국 서정시의 굵은 끈을 이어 온 석정은 1958년 매창집을 대역(對譯)한 바 있다. 두 시인 사이에는 300년 이상의 차이가 나지만 변산반도의 정서가 흐르는 듯하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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