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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소 소장은

    수없이 겹친 삶과 죽음의 갈림길 신앙으로 헤쳐나와

김진소 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신부)은 ‘파란만장한’ 역정을 걸어왔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 마다 믿음과 신앙은 그의 손을 잡아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1973년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2개월간 치료를 받고, 1980년에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수개월을 병상에 머무는 사무친 병고를 겪어야 했다. 1999년에 대상 포진을 앓고, 2000년부터 딱 2년간 뇌경색을, 2005년에는 심장수술을, 그리고 2006년에는 결장암 수술을 받았다. 수많은 병마 등과 싸워온 인고의 세월을 마음으로 읽어가다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자”며 눈물과 담배연기로 잠시 헝클어진 심정을 추스렸다.

 

충남 서천에서 첫 세상을 본 그는 1947년 열 살의 나이에 부모를 따라 가톨릭에 들어왔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아픔 속 우리 사회는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1965년 다니던 한양대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학창시절 키워낸 사회에 대한 ‘희망’과 ‘봉사’의 신념을 품고 광주 대건신학대학(광주가톨릭대학교 전신)에 편입하게 된다. 한국문화와 역사에 눈과 가슴이 모여지는 시간들이 계속됐다. 7년반 동안 수련을 거쳐 1972년7월 사제서품을 받고 중앙 주교좌 성당 보좌 신부로 성무에 뛰어들었다. 이듬해 8월 모교대학에 교수로 자리를 옮긴다. 교회의 과거에서 미래의 희망을 보게 된다. 교회사를 밝히기로 작심하고 몸을 던진 게 이 즈음이다.

 

1975년1월 나바위 본당 주임으로 새 터를 잡았지만 1년만에 전주교구장은 김 신부를 ‘교회사 사료 수집 정리반’ 책임자로 앉혔다. 1978년에는 참사위원 겸 재정관리위원으로서 활동 폭을 넓혀갔다. 1982년9월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위원회 전문위원과 시복시성 추진부 위원으로 발탁되고, 전주교구 가톨릭 교수회 지도신부로 자리를 바꿨다. 교회사 연구는 전담이 되었다. 1983년5월 ‘호남교회사연구소’ 간판을 내걸었다. 1988년 천호피정의 집 및 천호성지 책임자로 발령됐지만 교회사 연구에 보직은 한계였다. 그래서 1992년1월 호남교회사연구소 전담신부로 천호산에 들어가 본격적인 활동을 벌였다. 1993년11월엔 치명자산 유항검 가족 7인묘 시굴을 주관했다.

 

1995년5월 봄날에 ‘전동 성당 100년사’를 책으로 내놓았다. 교구사 연구 20년의 결실인 ‘전주교구사’를 순교자 축일인 1998년9월20일에 맞춰 그들 무덤과 제대에 제물로 바쳤다. 2006년에 또 다른 걸음을 내쳤다. 고려대 조광 교수와 전주대 변주승 교수 등과 교감하며 사단법인 한국고전문화연구원을 연구소 옆에 냈다.

 

큰 시련을 겪으면 사람은 달라진다고들 하지만 턱도 없는 일이다. 김 신부를 두고 하는 얘기다. 범상치 않은 일을 결심했고, 이를 현재도 치러내고 있다. 사료에 기반을 둔 그의 연구는 박해시대 신자들의 믿음과 숨결이 함께 녹아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신앙 선조들의 믿음을 밝히는 한 사제의 힘이 한국교회사 연구의 물길과 틀을 확실하게 괴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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