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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당선작 - 선물

김근혜

 

"넌 무슨 선물 받고 싶어?"

 

"응? 나?"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날 보던 도연이가 손가락으로 주은이 팔을 쿡쿡 찔러요. 주은이는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렸는지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어요. 기분은 나빴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에요. 괜히 거짓말을 할 뻔 했거든요. 친구들은 내가 작년까지 무료 급식을 받는 아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올해부터 모든 학생이 무료 급식을 받는데도 그 꼬리표는 여전해요. 그래서 나 같은 아이는 선물도 못 받을 거라고 생각하나 봐요.

 

"방학 잘 보내."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면서 방학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해요. 대부분의 친구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를 등지고 걸었어요. 평소에는 방과 후 공부방으로 갔지만 오늘은 거기도 쉬어요. 내 옆을 지나가는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선물, 여행, 스키장 이야기를 하느라 잔뜩 신이 나 있어요.

 

매서운 바람에 끌려 집에 도착했을 땐 대문이 덜컹거리며 춤을 췄어요. 난 문을 붙잡고 집안을 살폈어요. 밖에서 쓸려 들어온 낙엽이 부엌을 더 지저분하게 해 놓았어요. 하여튼 아빤 못 말려요. 문도 제대로 닫지 않고 나가다니. 그래도 며칠 동안 집에서 술만 드셨는데 오늘은 일거리가 생겼나 봐요.

 

가방을 내려놓고 밥상을 덮은 신문지를 들췄어요. 말라빠진 김치가 다에요. 기운이 더 쭉 빠져요. 그냥 이불 안으로 들어가 몸을 녹였어요.

 

"소정아!"

 

옆집에 사는 민지 목소리예요.

 

"나랑 복지관 갈래? 오늘 맛있는 것도 주고 게임도 하고 선물도 준다는데."

 

'선물?'

 

그곳은 평소에도 가난한 아이들과 노인들을 위해 밥을 줄 때가 많아요. 오늘처럼 특별한 날은 선물까지 줘요. 하지만 난 한 번도 복지관에 간 적이 없어요. 눈칫밥은 학교만으로도 충분해요. 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불쌍하게 보는 눈빛도 싫고요.

 

"혼자 가."

 

혼자 가라는 말에 민지 입이 뾰족 나왔어요. 민지가 복지관에 왜 가려고 하는지 알아요. 네 살짜리 동생이 있는 민지는 급식으로 나온 젤리나 샌드위치도 먹지 않고 갖다 주는 언니예요. 지난 번 유라 생일 때는 동생 준다고 남은 통닭까지 싸 갔어요.

 

"가자~아."

 

발을 동동 구르며 애처롭게 날 바라보는 민지 눈빛에 내 마음이 흔들려요. 아무래도 눈 딱 감고 가줘야 할 것 같아요.

 

바람은 더 차가워졌어요.

 

"선물이 뭘까? 혹시 지난번처럼 색연필이나 노트일까?"

 

"……."

 

"통장아줌마가 그러는데 엄청나게 돈 많은 부자가 복지관에 돈을 기부했대. 그럼 선물도 어마 어마할거야. 그치!"

 

"응!"

 

시큰둥하게 대답했지만 나도 어떤 선물을 줄지 살짝 기대 돼요.

 

복지관 입구에는 어른 키보다 훨씬 큰 트리가 있어요. 벽에는 색색의 꼬마전구들이 앞 다투어 반짝였어요. 추워서 빨개졌던 볼이 이상하게 화끈거렸어요.

 

복지관 안은 갓 태어난 병아리들처럼 시끄러워요. 우린 자원봉사자들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았어요. 내 건너편에 앉은 남자 아이는 탁자 위에 있는 과자를 몰래 주머니에 넣고 있어요.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어요.

 

게임을 하고 마술쇼도 봤어요.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그러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깜깜해져가요.

 

아빠가 집에 일찍 온다면 큰일이에요. 아빠와 나만 아는 장소에 있어야 할 열쇠가 지금 내 주머니에 있거든요. 마음이 급해졌어요. 그런데 선물 추첨은 계속 미루기만 해요. 우리를 위해 춤을 보여 준다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늦게 오는 바람에 더 시간이 길어졌어요.

 

"민지야, 나 먼저 갈게."

 

"왜? 선물 받고 가야지."

 

"아빠가 왔을지도 몰라."

 

민지가 눈을 흘겨요. 쌓여 있는 선물상자들이 마음을 붙잡았지만 아빠 때문에 어쩌지 못해요. 민지도 더는 말리지 않아요. 덜덜 떨며 날 기다릴 아빠 생각에 집으로 한달음에 뛰어갔어요.

 

굳게 잠겨 있어야 할 현관문이 열려 있어요. 다행히 아빠한테도 열쇠가 있었나 봐요. 턱까지 차오른 숨을 억지로 가라앉히고 태연한척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어요. 술 냄새와 발 냄새가 코를 찔러요.

 

"아휴."

 

나도 모르게 한 숨이 나왔어요.

 

"아빠, 아빠. 일어나봐."

 

"어, 어. 우리 딸. 내� ─�."

 

아빠는 잠꼬대를 하며 팔을 쭉 뻗더니 다시 굼벵이처럼 몸을 웅크려요. 발냄새라도 해결해야 될 것 같아 양말을 벗겼어요. 그런데 오른발 엄지발톱이 퉁퉁 부은 채로 피딱지가 말라붙어 있어요. 어딘가에 부딪혀 멍까지 든 발톱은 보라색 매니큐어를 바른 것 같아요. 없는 소독약 대신 끓인 물을 수건에 묻혀 발을 닦았어요. 차갑던 아빠 발이 조금 따뜻해졌어요. 발가락에 굳은 피딱지도 말끔해졌어요. 그 자리에 친구한테 받은 알록달록한 반창고를 붙였어요.

 

"아빠, 좀 조심해. 나 없으면 어떻게 살 거야?"

 

꼭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와요. 베개를 베어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지만 금방 걷어차고 말아요. 밥도 못 먹었는지 배가 홀쭉해요.

 

나도 불을 끄고 누웠어요. 쉽게 잠이 오지 않아요. 아빠 코고는 소리 때문인지 선물도 못 받고 뛰어 온 것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민지는 어떤 선물을 받았을까?'

 

민지가 원했던 선물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민지네도 우리 집과 사는 건 다를 게 없거든요. 하지만 민지에겐 엄마가 있어요. 누군가 나에게 선물을 준다면 타임머신이면 좋겠어요. 엄마가 돌아가시던 그 날로 돌아가서 일 나가는 엄마 치맛자락을 끝까지 놓지 않을 거예요.

 

뺑소니 교통사고로 엄마가 세상을 떠난 날부터 아빠는 술을 많이 마셔요. 그 후로 아빠도 엄마처럼 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해요. 그 걱정에 아빠가 너무 늦을 땐 한밤중에 골목 입구까지 나가곤 했어요.

 

몸을 뒤척이는 아빠 때문에 자꾸 잠이 달아나요. 다시 아빠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주고 이불을 목까지 덮어 주었어요. 창밖으로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나타냈어요. 달은 가로등처럼 방을 밝혀요. 그 빛에 아빠 얼굴에 미소가 보여요. 나도 따라 웃어봤어요. 기분이 한결 나아졌어요. 아빠 곁으로 몸을 바짝 붙였어요. 조금 전보다 훨씬 따듯해졌어요.

 

큼큼!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나요. 또각또각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도 들려요. 부엌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것이 보여요.

 

엄마! 벌떡 일어나려는데 자꾸만 눈이 감겨요.

 

얼마나 잤을까요? 밝아진 쪽창이 아침이 온 걸 알렸어요. 둥글게 말고 잤던 내 몸이 쭉 펴졌고 그 위로 얇은 이불이 엄마 품 속처럼 포근하게 날 덮어 줬어요. 바닥에 온기도 가득해요.

 

아빠가 누웠던 자리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어요. 아빠 대신 둥근 밥상이 놓여 있어요. 흰 종이로 덮인 밥상에서는 구수한 된장국 냄새와 밥 냄새가 솔솔 풍겨요. 꿈속에서 맡은 냄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맛있는 냄새 때문인지 뱃속이 요란스러워요. 이불을 걷어 내고 밥상 앞에 앉았어요. 상 위에 곱게 접은 쪽지가 놓여 있어요.

 

'밥 맛있게 먹고 있어. 일하고 금방 올게! 아빠가'

 

쪽지를 다시 곱게 접어 가슴에 품었어요. 아빠가 빨리 오면 좋겠어요. 오늘은 진짜 선물을 받은 메리 크리스마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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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 kimwy@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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