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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편지

임주아 우석대 신문 편집장

 

잠이 오지 않는 밤, 그의 영정사진을 본다. TV에서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모인 수많은 인파와 불꽃놀이와 환호성을 실시간 생중계를 하고 있다. 지겨울 정도로 똑같은 연말풍경에도 사람들의 표정은 밝다. 똑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옷차림과 비슷비슷한 각오로 새해를 맞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왠지 '달려라 하니'를 외쳐야할 것만 같다. 마치 일 년에 해가 한번 뜨는 것처럼 우르르 몰려가 해돋이를 보는 것도 조금 식상해졌다. 몇 시간동안 축포와 새해영상을 볼 마음이 없어 채널을 돌린다. 알록달록한 보험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쇼호스트가 힘차게 말한다. "사망보험은 미리미리 가입하세요!" 삑-. TV를 끄고 이불에 얼굴을 묻는다.

 

"현수야, 현수야. 내 여 붙들 리가 왔다. 동네사람들아, 내 좀 살리도고!" 강병원 10인실은 밤마다 시끄러웠다. 간호사 언니는 치매환자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며칠 째 같은 이름만 부르고 있었다. 자다가 가끔 '이장님' '아줌마'를 찾기도 했지만 줄곧 아들만 불렀다. 가끔 비상구 밖을 뛰쳐나가다 넘어져 절뚝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침대 이름표에 적힌 입원날짜를 보니 중환자실의 모두가 적게는 일 년에서 많게는 칠팔년까지 병원 밖을 나가지 못했다. 나이도 서른부터 여든까지 각자의 사연을 들고 이곳에 왔다. 어느 아주머니는 간호도우미 할머니께 짬뽕이 먹고 싶다고 했다가 핀잔을 들었다. "영감오시면 사달라 그래요." 아주머니는 할아버지 올 시간이 되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호스로 가래를 빼고, 하루에 두 번씩 기저귀를 가는 일은 이곳에선 지극히 태연하고 정상적인 일이었다. 아픈 사람이나 간호하는 사람이나 모두 동네사람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이 낯선 광경에 아버지와 내가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중환자실 병동에서 아버지가 가장 위독한 환자라는 것도 엉뚱한 말 같았다. 그는 괴로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 그가 좋아하던 노래를 틀어 서로의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내리삐-. 내리삐-." 차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비틀즈의 음악을 듣던 아버지였다. 따라할 수 있는 건 '내리삐' 뿐이었지만 아버지가 얼마나 비틀즈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제목이 '내버려 둬'라는 뜻이란 걸 한참 후에야 알았지만, 아버지가 더 이상 그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는다는 것도 언젠가 깨달았지만.

 

실눈을 뜨고 있던 아버지는 형광들 불에 눈이 시려 자꾸 눈물을 흘렸다. 이대로 가면 안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이젠 힘들다고, 세계 끝 가장 낯선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문득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사라질 것 같은 사람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올랐다. 한 번도 그를 무서워한 적이 없다는 것이 미안했다. 과거를 생각하는 사람은 조금씩 죽는다는 누군가의 말도 떠올랐다. 머릿속에 수십 개의 문장이 피어났다 꺼졌다. 끝내 과거가 되어버린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새해를 맞지 못했다. 누군가처럼 이름 한번 크게 불러보지 못하고 저 음악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젊은 아버지와 어린 나는 영원한 비틀즈가 되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음악을 듣는다. (우석대 문예창작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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