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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시인이 본 웬델베리의 '삶은 기적이다' - 좋은 독서가 낳은 좋은 글

기적은 시정신에 있다…에드워드 윌슨 '통섭' 비평

 

어느 필자가 말하기를 '좋은 책이란 다른 좋은 책을 읽게 하는 책'이라고 했다. 굳이 어느 필자를 인용할 것도 없이 책권이나 읽은 이라면 경험칙으로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사실 그렇다.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의 올곧은 성과만을 담은 것이 아니라, 필자가 겪었을 수많은 독서경험이 축적된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사고에 영향을 주었을 더 많은 다른 책에 독서욕구가 발동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좋은 책이다.

 

필자는 여기에 '좋은 책이란 다른 좋은 책을 읽게 할뿐만 아니라, 더 좋은 글을 쓰게 하는 책'이라고 덧붙여 말하고 싶다. 글쓰기의 달콤한 절망에 한번이라도 빠져본 독자-필자라면 굳이 부연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또 다른 좋은 사람'에게 인연이 닿는 인생살이-교우처럼, 혹은 '절경'을 구경하고 '또 다른 절경'에 나그네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여행처럼, 좋은 책은 좋은 글을 낳게 하는 수원지이자 유혹자인 셈이다.

 

독서태도-습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필자는 책을 읽을 때마다 삼우(三友)를 준비해 두는 버릇이 있다. 밑줄 그을 형광펜과 순간의 생각을 메모할 연필과 다시 보고 싶은 구절을 표시하는 포스트잇이 그것이다. 어느 시인은 '가을비는 연필과 자를 가지고 내린다'고 노래했는데, 필자의 독서비는 형광펜과 연필과 포스트잇을 가지고 내린다.

 

성글게 내려도 가을 산천을 을씨년스럽게 흠뻑 적시는 '가을비'를 어쩌면 그렇게도 따뜻한 예리함으로 그려냈을까? 시정신의 촉수가 내 감성의 현을 건드리는 맛이 예사롭지 않다. 독서비도 그렇다. 읽은 책에 군더더기 메모가 많은 책일수록, 굵은 느낌표나 참고 표시, 깨알 메모가 어지러울수록, 덕지덕지 포스트잇이 많이 붙어 있을수록 그 책은 필자의 독서산천을 가을비로 흠씬 적셔준 책인 셈이다.

 

『삶은 기적이다』는 책이 그랬다. 이 책은 앞에서 말한 글읽기와 글쓰기의 맥락이 어떻게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책이어서 의미가 깊다. 필자의 서가에는 이미 Edward Wilson의 『Consilience』라는 책이 최재천 교수가 번역한 『통섭-統攝』이라는 이름을 달고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여느 때처럼 동네 서점에 독서사냥을 나가서 눈에 들어온 책이다. 녹색평론사의 출판정신처럼 재생용지에 문고판 규모의 자그마한 서책이었다. 선 채로 서문과 목차를 보자니 '에드워드 윌슨의 《통합》에 대하여'라는 장이 있는데 책에서 차지하는 분량이 적지 않았다. 미답의 고봉(高峰)을 어떻게 정복할까 주저하고 있는 참에 편안한 지름길을 귀띔하는 등산안내서를 만난 셈이었다.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이 책 『삶은 기적이다』는 저자 W.베리가 E.윌슨이 쓴『Consilience』에 대한 서평인 셈이다. 그런데 베리는 이 책의 집필 단서를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의 한 구절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자, 말을 해보세요."에서 빌려오고 있다. 이 책이 탄생하게 된 내력을 보면 이렇다. 리어왕(셰익스피어 희곡, 베리의 독서)→Consilience(윌슨의 저서, 베리의 독서)→삶은 기적이다(베리의 저작)를 낳은 것이다. 좋은 독서가 좋은 글을 쓰게 하는 수원지이자 유혹자로서 기능하고 있다.

 

'consilience'란 말은 서로 다른 것들이 보다 높은 자리로 비약하고 도약해서 부합되고 일치하는 것을 뜻한다. 즉 상향일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윌슨은 자신의 저서에서 실제로는 하향일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윌슨은 물질보다 높고 큰 존재인 생명, 그보다 더 높고 큰 존재인 정신과 영성을 보다 낮은 물질의 차원으로 환원(주의)시켜 물리적(과학) 법칙으로 해명하려 한다고 W.베리는 비판한다.

 

생명에는 물질에 없는 존재의 차원이 있고, 정신과 영성에는 생물에 없는 존재의 차원이 있다. 존재의 차원이 없는 물질로 생명을 설명할 수 없으며, 존재의 차원이 없는 과학으로 정신과 영성을 어떻게 통합할 수 있느냐고 질타한다. 설령 설명하거나 통합할 수 있다고 본다면 그 자체가 바로 지적 오만이라는 것이다.

 

정신과 영성의 소산인 인문학과 예술, 종교가 동경하는 세계는 원래 살아서 통합되어 있던 전체로서의 생명이다. 기계적(물질적) 환원주의로는 '살아 있음'에 다가갈 수 없다. 이 세계는 윌슨이 말하는 계몽주의적 이성에 의해 포획되는 '알 수 있음'의 세계가 아니라, '알 수 없음'의 세계다. 예술-시정신은 바로 알 수 없음의 세계, 신비의 세계에 대한 경험을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세계다.

 

어중간한 도반은 적만도 못하다고 했다.(성철스님) 같은 인문학적 길에 서 있는 도반일지라도 기적 같은 생명의 존재성을 과학적 환원주의와 함께 현실적 권위나 물신적 힘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기는 부류에게서 적과 다름없는 차별성을 느낀다.

 

며칠 계속되는 가을비 속에서도 '모든 이론은 회색빛이되 저 생명의 나무는 영원히 푸르다'(괴테 《파우스트》에서)는 단풍잎과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본다/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윌리암 블레이크의 《complete writings》에서)는 시구가 낙엽비처럼 내린다. 삶의 기적은 존재의 저 너머를 응시하는 시정신에 있음을 말하듯이 내린다.

 

 

※이동희 시인은 1985년 시 전문지 '심상'신인상으로 등단. 전북문인협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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