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경 시인이 본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지난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찜통 더위와 기차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지만 어쨌든 나는 더위를 피할 방법을 찾지 못해 기차를 탔고 그 기차 안에서 김연수의 일곱 번째 장편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자음과 모음)을 읽기 시작했다.
기차 안으로 파도가 서서히 밀려 왔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2011년 여름부터 2012년 여름까지 한 계간지와 중국 격월간 '소설계'에 '희재'라는 제목으로 동시 연재되었던 작품이라고 했다. 그 여자, '희재'가 한 여름, 내가 타고 있는 기차 안으로 뚜벅 뚜벅 걸어 들어왔다. 나는 흔들렸다. 기차 때문이 아니라 그녀 때문에.
입양아의 잃어버린 조각 맞추기
이 소설은 '희재' 이면서 '카밀라 포트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생후 6개월 때 미국 백인 가정으로 입양된 카밀라. 그녀는 성장해서 작가가 되었고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 뉴욕의 한 출판사와 자신의 뿌리를 찾는 논픽션을 차기작으로 계약을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친부모를 찾기 위해 모국인 한국의 진남을 찾는다. 카밀라가 가지고 있는 단서는 입양 당시의 기록과, 낡은 사진, 그리고 한국에서 온 편지 한 장. 이 단서들로 잃어버린 과거 조각을 맞추어 간다. 어쩐 일일까. 어머니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친절한듯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냉정함을 내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 감추어진 것들을 하나, 둘 발견해 나간다. 그리고 어머니가 자신에게 지어주려고 한 이름이 '희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희재'.
카밀라이자 희재인 그녀가 덧칠한 유화처럼 켜켜이 입혀진 언어의 색을 벗겨내기 시작하자 소문과 거짓에 뒤섞여 있던 친모, 지은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러나 진실이라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진실은 때론 거짓보다 날카롭게 사람을 상처 입힌다. '나'의 진실은 언제나 '타인'의 진실과 얽혀 있기 때문이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진실이다'라고도 말할 수는 없는 풍문과 증언 속에 진실을 찾기 위해 작가는 여러 시점을 오간다.
하나하나 드러나는 진실의 조각들
카밀라가 화자인 1인칭과 지은이 딸인 희재(카밀라)를 '너'라고 부르는 2인칭, 3인칭 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까지 자유롭게 넘나든다. 소설 속의 희재(카밀라)의 독백처럼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 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하게 된다. 점의 우연으로 존재하던 친모 지은의 인생이, 선의 이야기로 이어져 희재에게 가 닿는다.
이 소설에는 등장인물 각자가 기억과 기록으로 지켜낸 각자의 진실들이 점으로 공존한다. 운동화 갑피를 만드는 공장에서 미국 유학 간 아들의 등에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 하루 12시간씩 미싱을 돌리다가 부당해고 투쟁 끝에 병사한 늙은 어머니의 이야기, 그런 어머니를 떠올리는 서 교수의 기억,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타워 크레인에 올라갔다가 끝내 투신자살한 아버지의 이야기와 그를 향해 보낸 'HOPE' 모스 부호에 대한 정지은의 기억 등 각각의 개별적인 이야기는 서로 맞물려 한 시대의 진실로 접근해 간다. 작품 속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공간인 진남 이야기 박물관 '바람의 말 아카이브'가 그러하듯, 에밀리 디킨슨의 시 '희망은 날개 달린 것'의 의미가 그러하듯 작가는 진남 사람들 각자가 진실이라고 품고 있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과거의 파편을 주워 담아 하나의 '아카이브'를 만들어 간다.
우린 자주 흔들린다 진실때문에
다시 펼쳐든 책에는 검게 밑줄이 그어져 있다. '그런데 왜 인생은 이다지도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건 모두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기 때문이겠지. 처음부터 제대로 산다면 인생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 어쩌면 각자가 가진 진실들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 될 때 인생은 한 번으로도 충분해질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진실이 언어를 통해서 타인에게 가닿게 될 때, 혹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도 개인의 한 점 진실이 다른 점과 이어져 선을 이루게 될 때 한 번을 살아도 제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우리는 너무 자주 흔들린다. 때론 진실이라고 말하는 소문 때문에. 혹은 거짓이라고 덮어둔 진실로 인해.
※ 김정경 시인은 2013년 본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현재 전주MBC 작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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