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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명소 '타클레스'

1961년 동독정부가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축조한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것은 1989년 11월이었다. 세계는 장벽의 붕괴로 운명이 바뀌게 된 도시 베를린을 주목했다. 예술인들에게도 통일된 독일의 전통 도시 베를린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듬해인 1990년 2월, 실험예술을 지향하는 젊은 예술가 그룹이 동베를린 지역에 방치되어 있던 한 건물을 발견했다. 과거 유태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이었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이 건물의 전신은 쇼핑센터. 그러나 1907년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쇼핑센터가 파산하자 물건을 사고파는 다양한 기능의 공간으로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활용되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건물의 일부를 나치가 프랑스 전쟁포로를 감금하는 것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전쟁기간 연합군 공습으로 많은 부분이 부서져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었지만, 젊은 예술가들의 스콰트(squat, 불법점거)으로는 더없이 좋은 대상이었다. 집단으로 혹은 개인으로 몰려든 예술인들은 누더기가 된 건물을 점거해 실험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이 건물의 주인인 연방정부는 당초 이 지역에 재개발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예술가들의 집단창작촌이 되어버린 건물을 회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입주한 예술가들은 상상력 넘치는 실험 작업으로 주목을 끌었는데 그중에서도 그래피티(graffiti) 작업은 건물을 새롭게 변화시켰다. 건물 입구부터 계단과 난간, 복도와 벽, 천정까지 모든 공간이 그래피티로 채워진 건물의 디자인적 요소는 주변일대에 영향을 미쳤다. 건물마다 그래피티 작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벽화의 거리가 조성됐다. 예술가들은 퍼포먼스와 연극 등 다양한 이벤트를 벌이면서 공간의 정체성을 살려나갔다. 정부는 이 공간을 국제적인 아트센터로 공식 인정하고 지원을 시작했다. 실험적 예술운동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은 베를린의 '타클레스'(Tacheles)가 만들어진 과정이다.

 

지금 '타클레스'는 단순한 집단창작촌이 아니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 임대료가 워낙 싼데다 창조성과 실험성이 존중되는 공간의 특성 때문에 세계의 젊은 예술가들이 몰려드는 창작촌 역할이 우선이지만, 갤러리와 샵, 카페와 극장, 댄스 교습장까지 갖춘 이 공간은 베를린을 찾는 관광객들이라면 놓치기 아쉬운 관광지가 됐다. 도시를 바꾼 예술가들의 힘을 눈여겨보게 하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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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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