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인가, 밀월인가. 전북도립국악원 단원 충원을 위해 지난해부터 팽팽한 힘겨루기를 해왔던 전북도와 국악원이 합의점을 찾는 중이다. 도가 지난달 주최한 국악원 활성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거쳤으나 서로 다른 입장만 확인했고, 이달말 전문가들을 초청해 공개적인 세미나를 갖기로 했다.
국악원은 7년 째 미뤄둔 인력 보강을, 도는 인력 선순환이 전제되지 않은 단원 보충은 어림없다며 한 치 양보 없이 부딪쳤다. 하지만 도와 도의회, 국악원이 삼자대면을 하면서 '화해 모드'로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서로 동상이몽(同床異夢) 같지만, 국악원이 안고 있는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단원 보강은 필요하다는 게 문화계 시각이다.
'도립국악원 사태'로 촉발됐으나, 다른 관립 문화예술단체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단체들은 예산·인력 부족난에 놓여 있는 반면 행정은 우선 순위 사업에서 이들의 요구를 밀쳐둔다. 잘 만든 공연·미술관 하나가 지역을 먹여 살릴 수도 있다는 의욕적인 구호만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 예산 확보·인력 보강 놓고 대립각 = 전북의 대표적인 관립 문화단체로 전북도립국악원·전북도립미술관·전주시립예술단 등을 꼽을 수 있다. 자치단체에서 민간에 위탁하는 시설들도 지방비 지원을 받고 있어 넓은 의미에서 관립 문화단체에 포함시킬 수 있지만 관에서 직접 운영하는 경우와 사정이 많이 달라 여기서는 제외한다.
도내 대표적 관립 단체들의 요구는 크게 두 가지. 예산 확보와 인력 보강이다. 전북도립국악원·전북도립미술관·전주시립예술단은 예산 중 인건비에 비해 공연·전시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7년 째 새로운 단원을 전혀 뽑지 않은 전북도립국악원을 비롯해 학예사가 4명에 그치는 전북도립미술관, 단별로 최대 50%(28명·전주시립합창단) 가까이 모자라는 전주시립예술단까지 구인(求人)이 시급한 상황.
지자체는 이같은 요구를 묵살하는 표면적 이유로 예산 부족을 꼽고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지자체의 관심사에서 밀리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정부의 지원이나 기업 후원에 따라 예산에 편차가 있을 수 있지만, 이는 단원의 처우·프로그램 기획 등에 영향을 미친다. 더욱이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관립 문화단체가 초대권을 남발하는 무료 공연(도립국악원 해당)을 하는 경우 공들여 티켓 판매와 후원 모집으로 예산 확보를 해야 하는 민간단체와 경쟁하는 것 자체가 '불공정 거래'라는 역설을 안고 있다.
△ 지자체, '전문가' 대신 공무원 인사로 독립성 침해 = 지자체가 관립 문화예술단체의 예산 확보를 게을리 해도 되는 구조적 요인이 있다. 각 단체의 대표 혹은 핵심인력이 민간 전문가가 아닌 행정직인 데다 문화전문가라 하더라도 직책상 명백한 '갑을 관계'에서 벗어나기 힘든 구조에 놓여 있다. 도가 국악원 원장에 문화예술 분야의 전문가 보다 행정직을 선호한다든가 도립미술관 관장 직급을 5급 상당 계약직 공무원과 같게 놔둔 것과 같은 맥락. 전주시립예술단 담당자도 순환직 공무원이다 보니 예술단 중장기 발전안을 모색하고 정책으로 반영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
일각에서 "지자체 단체장이 예산 지원을 빌미로 관립 문화예술단체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단체장이 문화단체를 내세워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가 표를 얻기 위한 번듯한 수단으로만 여길 뿐 단체들의 수준을 높이는 방향의 지원·고민은 없다는 진단이다.
△ 수준급 공연·전시 부족, 경쟁 기피 공기업 행태 지적도 = 각 단체들은 눈에 띄는 공연·전시가 부족하다는 불만도 산다. 공무원 수준의 호봉제·연금 등을 보장받는 전북도립국악원은 종종 전북을 대표하는 브랜드 공연 하나도 내놓지 못했다는 질타를 받곤 한다. 특히 국악원은 1회성 초대권 공연으로 공연계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비난까지 받는다.
도립미술관도 자체 기획력으로 승부하는 전시를 요구받고 있다. 미술관이 지난해 시도한 세계미술거장전의 다른 버전을 올해 재추진한다고 했을 때 지역 미술계가 블록버스터급 전시에 지나치게 기대서는 안 된다고 반발 기류가 형성되기도 했다.
전주시립예술단은 최근 '찾아가는 음악회' 같은 사회 공헌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예술단 합동 공연을 시도하며 티켓 수익을 올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으나 전국적으로 차별화된 경쟁력을 자랑하는 공연에 대한 고민은 아직 걸음마 단계.
그러나 오디션을 통한 개혁도 쉽지 않다. 도가 인력 선순환을 위해 오디션 제도 강화를 요구했으나 '실질적' 오디션은 불가능한 게 음악계 현실. 전주시립예술단의 경우 조례에 실력이 떨어지는 단원들의 해임 여부를 결정할 기준마저 모호하게 돼 있어 '형식적' 오디션을 부채질하고 있다.
△ 대안은 법인화? = 일각에서는 "단체가 회생하는 길은 법인화 뿐"이라고 강조한다. 법인화는 지난 2005년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모델을 따르는 것으로 악단 행정 전문화와 재원 다각화·경쟁 체제 도입이 장점으로 꼽혔다. 법인화를 통해 전문 경영인이든 공연계 풍부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든 앉히고 지휘자에게 책임을 지우게 되면 실력 있는 단원을 가려 뽑게 되고 단원들도 살아남기 위해 죽기 살기로 연습할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공연단체가 공연의 유료화마저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최근 경제 침체로 정부의 지자체 예산이 대폭 삭감되는 추세에서 관립단체의 법인화는 시기를 앞당기느냐, 늦추느냐 일 뿐 당연한 수순. 결국 민간에서 후원을 이끌어내고 공공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수익을 올리는 사업을 하는 등의 다양한 방안 강구는 앞으로 단체들이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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