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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니엔의 '레지던시'

독일의 서베를린에는 세계의 예술가들이 주목하는 창작공간이 있다. 세계 최초의 예술가 스튜디오로 알려진 퀸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Kuenstlerhaus Bethanien)이다. 공간의 전신은 병원. 오래된 역사와 독일분단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오래된 건축물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때인 1850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 공간은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그대로 지닌 고성의 아름다움으로도 눈길을 끈다. 그 규모로 보아서는 당시 상당히 유수한 의료시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훼손되어 폐허가 된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1968년, 독일정부는 이 건물을 허물고 새 병원을 짓기로 했다. 그러자 100여명의 젊은 예술가들이 나섰다. 젊은 예술가들의 불법점거(Squat)를 막기 위해 경찰이 나섰지만 이들의 치열한 예술적 도발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젊은 예술가들의 희생과 고난의 과정을 거쳐 본격적인 창작 지원 공간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75년부터다. 그 후 40년. 퀸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은 지금 세계 각국의 작가들이 상주하면서 실험정신과 창조적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세계적인 창작실이 됐다.

 

베타니엔의 명성을 높인 것은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젊은 외국 작가들을 선정하여 1년 동안 창작공간과 전시공간, 활동비를 지원해주는 국제예술교류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다. 베타니엔은 이 프로그램을 위해 세계 25개국 예술단체와 협약을 맺고 해마다 추천을 받아 입주 작가를 선정한다. 이곳에 입주한 작가들은 1년 동안 오로지 작업에만 전념한다. 발표 활동에 마음을 쓰지 않고 창작에만 열중하는 덕분에 작가들은 다분히 실험적이고 전위적이며 창의적인 작업을 마음 놓고 펼칠 수 있다.

 

그 지원 대상이 모두 외국인들이라는 점도 베타니엔만의 특징이다. 베타니엔은 작가들의 국제적인 교류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는다. 작가들을 생각하고 꿈꾸게 하며 그들의 실험을 돕는 일종의 실험실이다. 예술시장은 빠른 변화를 원하지만 베타니엔은 느리게 진전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곳의 운영자들은 생산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을 중시한다. 창조적 관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몇 년 사이, 우리나라에서도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과 단체가 늘고 있지만 아쉽게도 그 취지를 제대로 살려내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베타니엔의 철학과 지혜로운 선택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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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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