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가 열린 지난 25일, 일본 대사관을 찾은 김복동 할머니의 목소리는 떨리면서도 결연했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끌려가 스물한 살 때까지 일본군 위안부로 지내야 했던 할머니는 일본의 위안부 강제 동원 역사를 알리고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적극적인 증언 활동을 해온 위안부 피해의 산증인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열어온 ‘수요집회’ 22년, 1132차 집회 현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그에 앞선 20일, 일본 정부가 ‘고노담화’ 검증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한·일간 역사 갈등이 더 깊어졌기 때문이다.
왜 아베정권은 ‘고노담화’를 유지한다고 하면서도 검증에 나섰을까. 1993년 8월, 당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은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일본군과 군의 강제성을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일본군 당국의 요청으로 위안소가 설치되었으며 관리와 위안부 이송에 일본군이 관여했다는 내용을 담은 ‘고노담화’다.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적인 위안부 징집과 위안소 관리 운영이 모두 일본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인정한 이 담화로 한일간 역사 갈등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됐다. 고노 장관은 일본군 위안부들에게 사과하며 반성한다는 마음을 담화에 덧붙였다.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하려하지 않는 아베 정권으로서는 ‘고노담화’의 존재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터다. 더구나 이미 다양한 통로로 역사적 실체가 규명되면서 일본의 위안부 정책 그 자체를 문제 삼기도 어렵게 되었으니 ‘고노담화’의 의미와 가치를 깎아내리는 일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외교적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검증을 강행한 결과를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다. ‘한일 양국의 협의가 있었다’는 담화 작성과정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정치적 타협의 결과물로 규정하려한 것이 전부다. 그래서 다시 주목하게 되는 것이 있다. 치졸하게만 보이는 검증 목표가 ‘부정’이 아닌 ‘훼손’에 있다는 점이다. ‘고노담화’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으니 자칫 기본 의미는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훼손’의 정체가 문제다. ‘훼손’의 과정을 통해 결국은 ‘부정’으로 이르는 일본의 역사왜곡 과정을 되돌아보면 특히 그렇다. ‘고노담화’의 ‘훼손’과 ‘부정’ 사이에 놓인 교활한 음모, 그 뒤에 아베정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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