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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농촌'

군산시 미성동. 도시개발로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로가 새롭게 나면서 온전한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10여년 전만해도 이 일대는 도시근교에서는 좀체 만나기 어려운 넓은 평야가 펼쳐졌다. ‘불이농촌’. 행정구역상 미성동이란 이름이 있지만 일제 강점기에 붙여진 이 들판의 이름이다.

 

옥구저수지를 끼고 앞뒤로 뻗어있던 들판은 넓이만도 3000ha. 일본의 식민정책이 절정에 이르렀던 1920년대, 토지 침탈을 위해 벌였던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땅이다. 간척은 일본이 조선 토지침탈의 한 방법으로 추진했던 사업이다. 1920년대부터 왕성하게 추진한 일본의 간척사업은 30년대 중반에 이르러 ‘7만 정보에 이르는 땅’을 얻었다. 불이농촌과 김제 광활이 그 대표적 성과다. 특히 불이농촌은 일본에게 매우 상징적인 땅이었다. 당시 식량문제와 빈농구제 등 심각한 사회문제를 안고 있었던 일본이 해결방법으로 추진한 것이 이주정책. 식민지였던 조선은 일본인들을 이주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대상이었으며 불이농촌은 일본인 이주정책의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불이농촌’을 간척한 불이흥업주식회사는 1920년 군산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는 이 일대의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바닷물이 닿는 갯벌이었지만 지형적 요소나 자연적 여건이 간척지로 개발하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고 있었다. 당시 소요된 사업비는 224만 3000원. 사업을 시작한 3년 뒤인 1923년 마무리됐다. 이듬해부터 일본인 이주자들이 찾아들었다. 대부분이 일본의 하층민들이었다. 불이흥업주식회사는 직접모집의 형식으로 이민자들을 끌어들였지만 내무성을 거쳐 일본안의 각 부와 현에 의뢰하는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실제로는 일본 이민정책의 통로가 됐다.

 

이곳에 이주해온 일본인은 340여호. 1924년부터 26년까지 세 차례의 대단위 이주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주해온 일본인들은 출신지별로 마을을 이루어 불이농촌 안에 히로시마촌, 미나미사가촌, 나라촌, 나가사끼촌 등 일본 각 지역의 이름을 붙인 마을이 생겨났다. 소설가 조정래의 ‘아리랑’ 간척농지 이야기가 바로 이곳 ‘불이농촌’의 이야기다.

 

돌아보면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침략 역사는 오래 되지 않은 과거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경험했던 세대가 같은 시대 안에서 호흡하고 있으니 ‘동시대’ 역사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도 일제강점기 역사의 기록은 미미하고 흔적은 지워져 간다.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일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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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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