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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이 보듬은 사람들, 우리가 보듬어야 할 사람들

■ 주제 다가서기

 

교황의 마지막 방한의 마지막 일정인 명동성당 미사 이름은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였다. 이 자리엔 교황이 우리나라를 떠나기 직전까지 손을 내민 사람들이 앞자리에 앉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밀양주민, 강정마을 주민, 용산참사 피해자,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다.

 

미처 우리가 보듬지 못해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교황이 보듬은 것이다. 이것이 교황 방한 동안에 깨우쳐준 가장 큰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듬어야 할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본다.

 

■ 생각 키우기

 

1. 배경지식 익히기

 

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가톨릭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1182년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어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전쟁터에 뛰어들기도 했지만, 23세 때인 1205년 종교에 귀의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전쟁의 참화와 종교계의 허영을 직접 목격하고 깊은 성찰과 수도 끝에 청빈과 검약, 절제의 계율과 평화와 화해의 사상을 정립하고 실천했다.

 

그는 ‘모든 사람은 형제’라고 주장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죄수는 물론 비기독교도도 형제라며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비린내 나는 십자군 전쟁의 광풍에 대해 이슬람 교도들을 정복하지 말고 사랑으로 포용해야 한다며, 이들을 찾아가 직접 설교했다. 자신은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농사를 지으며 소박한 삶을 실천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이름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따왔다. 그만큼 아시시의 성인을 존경한다는 의미다. 그동안 보여준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과 행동도 13세기 성 프란치스코를 닮았다. 2014-08-11 헤럴드 경제 22

 

나. 프란치스코 교황

 

최초의 남미출신 교황이자 첫 예수회 출신 교황이다. 청빈하고 겸손한 인품으로 교황에 오르기 전부터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교회를 늘 강조했다.

 

1936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출신 철도노동자 가정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화학기술자가 되려 했다가 22살 때 예수회에 입문해 수도사의 길로 들어섰다. 산미겔 산호세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신학생들에게 철학과 문학을 가르쳤다.

 

1969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30대에 수도사로서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받아 1970년대 후반까지 아르헨티나 지방을 돌며 사목활동을 했다. 1980년에는 36살의 나이에 산미겔 예수회 수도원 원장으로 발탁됐다. 칠레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그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후학양성에 힘썼다. 독일어와 스페인어, 이탈리아어에도 능통하다.

 

그는 대주교가 된 뒤에도 운전기사도 두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주교 관저에 살지 않고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교황 즉위 뒤에도 파격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110년 관행을 깨고 호화로운 교황 관저가 아니라 게스트하우스 ‘성녀 마르타의 집’에 머문다. 첫 강론에서도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를 선언했다.

 

취임 후 처음 맞은 ‘성 목요일’을 맞아 남자 신도 12명의 발을 씻겨주던 기존 세족식 관행을 깨고 로마의 한 소년원을 찾아 소녀와 무슬림, 그리스정교회 신도 등 소년원생의 발을 씻기고 입을 맞췄다. 자신의 생일에는 노숙자 3명을 불러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2014-08-14 전북일보 14

 

2. 생각키우기

 

1) 다음 내용은 교황을 음성 꽃동네로 이끈 ‘5인의 영웅’이라는 제목의 기사(2014-07-09)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잘 읽고 생각키우기 활동을 해보세요.

 

꽃동네의 상징인 고 최귀동 할아버지는 무극천 다리 밑에서 동냥으로 연명하면서도 같은 움막에 살던 10여명의 걸인들을 먹여살렸고 누가 죽으면 장례도 해줬다고 한다. 1976년 9월 무극성당에 부임한 오웅진 신부가 이 광경을 보고 감동해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라며 작은 벽돌집을 지어 걸인 18명을 돌보기 시작했다. 이것이 꽃동네의 모태다.

 

맹인 걸인 홍승옥 할아버지는 15년간 구걸해 모은 100만원을 자기보다 더 불쌍한 사람을 돌보는데 써 달라며 꽃동네에 맡겼다. 이 성금은 노숙인 생활관인 ‘요한의 집’설립의 씨앗이 됐다.

 

양손을 쓰지 못하는 김인자 할머니는 두 발로 밥을 먹고 발가락으로 십자수를 놓으면서도 같은 방에서 생활하는 전신마비 환자 고 배영희 할머니를 5년 동안 돌봤다. 이 김할머니의 신념은 ‘꽃동네 장애인학교’로 실현됐다.

 

반공포로 출신인 강국남 할아버지는 중풍으로 반신불수였지만 먹을 것을 주는 주민이 있으면 그 집 앞 청소를 하는 등 이웃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꽃동네 모임의 원류가 됐다.

 

1-1) 음성 꽃동네에 대해 알아보세요.

 

1-2)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세요.

 

1-3) 영웅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세요.

 

1-4) 이웃을 돕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하세요.

 

1-5) 교황이 음성 꽃동네를 방문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2) 교황은 세월호 참사가 남긴 상처를 두루 어루만졌고 귀국 비행기에서도 노란 리본을 달고 있었으며 “세월호 유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고 했어요. 교황이 세월호 유족을 보듬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3) 다음 사진을 잘 살펴보세요.

3-1) 명동성당 대성전 가장 앞줄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휠체어에 앉아있어요. 피해자 할머니들이 맨 앞줄에 앉은 이유를 설명하세요.

 

3-2)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중 김복동 할머니가 교황에게 금빛 나비배지를 건네자 교황은 즉석에서 배지를 달았어요. 금빛 나비배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모든 여성들이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해방돼 자유롭게 날갯짓하기를 염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

 

4) 미사에 초청된 약자들은 또 어떤 사람들일까요?

 

밀양주민, 강정마을 주민, 용산참사 피해자, 쌍용차 해고 노동자 등

 

5)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마지막 일정의 주인공은 ‘끝나지 않은 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이었어요. 이 싸움의 내용을 조사하세요.

 

5-1) 초청된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보는 교황의 주장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6) 미사에 초청된 약자들 외에 우리가 보듬어야 할 사람들을 조사하여 선정하고 선정한 이유를 발표하세요.

 

7) 다음 만평의 의도를 설명하세요.

▲ 경향신문 2014년 8월 15일자

3. 읽고 생각하기

 

▷ 다음 칼럼을 읽고 세월호 앞에서 공정할 수 없었고 치우칠 수밖에 없었노라는 교황의 고백을 중립한 대통령과 비교하여 설명하세요.

 

박근혜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세월호’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우회적이고 간접적으로 거론했을 뿐이다. “올해 들어 잇따라 발생한 사건 사고들은 오랫동안 쌓여온 비정상적 관행과 적폐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는 문장 속에 세월호는 엄정한 가치 중립으로 녹아있다. 대통령에게 세월호는 그저 숱한 사건사고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세월호를 중립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정부의 책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만다.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라고 했던 새누리당 의원의 인식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귀국 비행기안에서 “세월호 유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고 했다.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중립’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공정하게 처신함’이라고 나온다. 세월호 앞에서 공정할 수 없었고 치우칠 수밖에 없었노라는 교황의 고백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하략〉2014-08-20 한겨레신문 31

 

4. 나의 주장 말하기

 

▷ 생각키우기 5번에서 언급한 각각의 피해자들을 우리가 보듬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어떤 도움을 어떻게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펼치세요.

 

■ 토론하기

 

▷ 다음 칼럼의 일부를 읽고 ‘세월호 피로감’을 주제로 자유토론하세요.

 

자성의 끝에 궁금증이 일었다. 세월호 유족에게 받은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단 교황에게 “중립을 지켜야 하니 리본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청했다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의 생각이든 세간의 우려를 전한 것이든, 정작 정치의 힘이 절실한 이때에, 추모의 뜻마저 나쁜 의미의 ‘정치적 행동’으로 비칠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답답하다. 이제 겨우 127일이 지났을 뿐인데, 아직 10명은 가족의 품에 안기지도 못했는데, 안전한 나라로의 항해는커녕 참사의 진상을 제대로 캐고 밝힐 첫걸음조차 떼지 못했는데, 실체도 불분명한 ‘세월호 피로감’이란 말이 유령처럼 우리 주변을 맴도는 현실이 무참하다.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혼돈이 극심하다. 개인적으로는 특별법 제정의 궁극적인 목적이 철저한 진상규명에 있고 , 그러려면 한계가 뚜렷한 특검보다는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을 부여해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4-08-21 한국일보 30

 

■ 논술

 

▷ 생각키우기 5)번에서 제시한 피해자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다시는 그런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위한 정부차원의 대책에 대해 논술하세요.(600자)

 

■ 관련상식

 

1. 다음 사진과 사진의 설명문에 딱 들어맞는 사자성어를 쓰세요. 또 두 글자의 한자어로도 바꿔보세요.

▲ 2014-08-14 무등일보 19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의 시복미사를 집전하는동안 세종대로와 태평로가 신도와 시민들로 가득 차 있다.

 

2. 시복식

 

시복(諡福)은 가톨릭교회가 거룩한 삶을 살았거나 순교한 이를 복자로 선포하는 교황의 선언을 말한다. 이 행사를 천주교식의 용어로는 시복식이라고 부른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聖人)이 된다.

 

2014-08-14 무등일보 19

 

■ 학생글

 

- 제주도 해군기지와 강정마을

제주 해군기지(濟州海軍基地)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강정마을에 대한민국 국방부가 주도하는 신항만이다. 2007년 대한민국 해군과 정부는 2014년까지 1조300억 원을 투입해 전투함 20여 척과 15만 톤급 크루즈선 2척이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45만 제곱미터의 건설 계획을 내놓은 바가 있다. 항만의 상주 인원은 장병과 가족을 포함해 7천5백여 명 정도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제주도에는 탐라로 불릴 때부터 해군기지로 쓰던 곳이 존재하지만 그 기지들이 현재 실종 및 민간항구로 전락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해군기지의 필요가 시급했다. 결국 제주 해군기지를 설립하자는 의견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제주 해군기지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거주자들과의 분쟁이 일었다. 해군기지가 시공되는 장소인 강정마을은 해군기지의 설립 장소 확장을 위해 구럼비를 폭파를 함에 따라 제주도민에 대한 모욕이라 주장을 하고 또는 자연환경의 파괴와 시민들의 식수원을 위협하는 행위라는 이유에서 해군기지 설립을 반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해군기지 설립에 찬성한다. 국가를 지키기위한 최선의 선택이며, 이어도를 우리 땅으로 확인하고 지키는데 유리하고, 또한 종종 중국으로 부터의 밀수 또는 밀항을 막을 수 있을 것 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강정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의 삶터를 빼앗기고 아름다운 환경을 잃으며 어려운 환경에서 새출발 해야하기에 반대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부에서 주민들을 위해 충분한 지원을 하고 합리적으로 설득하고 같은 국민으로서 따뜻하게 대해준다면 오히려 찬성하는 입장을 취할 것 이라고 생각을 한다.

 

우리나라가 타국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쉬운 곳에 위치해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국방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김현철 (인상고등학교 3년)

 

-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면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할 후손의 입장에서 소극적인 대처를 일삼는 정부나 외면하거나 나아가 호도까지 하는 일본의 태도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첫째, 위안부 문제에 관한 공식적인 홍보물을 만들거나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 위안부 문제는 한국, 중국, 필리핀 등 피해를 당한 나라들에게만 알려져야 할 것이 아니라 범세계적으로 알려져야 하루 빨리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루게릭병에 걸린 환자들을 위한 모금 캠페인으로 아이스버킷첼린지가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우리도 이런 캠페인을 만들거나 공식적인 홍보물을 만들어 위안부 문제를 널리 퍼트린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둘째, 위안부 피해를 입은 나라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일본에 대한 강한 항의를 해야 한다. 한 사람보다는 여러 사람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듯이 위안부 피해를 입은 나라들도 서로 협력하여 더 큰 힘을 발휘해야 한다. 지난 6월 2일 위안부 피해를 입은 각국의 피해자 할머니들이 도쿄에서 함께 모여 수요집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피해자 할머니들 뿐만 아니라 각국의 정부들도 협력하여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는데 일조하였으면 좋겠다.

 

셋째, 국민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위안부 문제를 과거에 묻힌 역사로만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국민들이 위안부 문제가 과거에 묻힌 역사가 아닌 지금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진행형 문제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국가와 국민 그리고 범 국가적으로 일본의 야만성과 후안무치함을 질타하여 위안부 할머니들이 당한 아픔에 일본의 사죄가 이뤄지길 바란다. 장성희(인상고등학교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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